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112)
. 불의 마왕(魔王) (1)
“저깁니다!”
“그렇군.”
황궁 북성에는 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다.
황궁 수비대는 혹시 몰라 동방과 서방, 남방에 병력을 집중했고, 무림맹 병력은 북성 뒤에 도열하여 다가올 전투를 준비했다.
북쪽 성루에서 저 멀리 산맥을 바라보는 양천의 눈은 그 어느 때보다도 서늘했다.
“느껴지는군. 강렬한 군기가. 그리고 그 군기를 형성한 화기(火氣)도.”
연위가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숨길 생각도 없어 보이는군요.”
“이쪽에서 병력 준비를 하지 않았다고 생각했을 테니까. 하지만 그걸 감안해도 너무 자신만만한 게 아닌가 싶군.”
산맥에 가려져 보이지 않지만, 적의 숫자는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 같았다.
그 정도 병력이라면 애초에 군기를 숨길 수도 없다. 저쪽에 바보만 있는 게 아니라면 황궁에도 무극의 고수가 있으리란 걸 상정했을 테고, 만에 하나를 위해 일정 거리 안에 들어오는 순간 파죽지세로 돌진해야만 했다.
결정적으로 배신한 그들은, 신화교주가 중원 측에 붙었다는 것도 알고 있을 것이다. 신화교주의 상단전에 문제가 있다는 것 또한 알고 있을지라도, 일시에 황궁을 공격하는 것이 그들로서는 최선이라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역시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으니 남은 것은 싸움뿐이로군요.”
“그도 그렇군.”
“다만, 적이 상식적으로 최선의 선택을 내리지 않았다는 게 마음에 걸립니다. 그 이유를 안다면 대비도 달라질 것이고, 승패를 떠나 아군 병력의 쓸데없는 희생을 막을 수도 있겠지요.”
“가주의 말씀이 옳소.”
어떤 전투라도, 설령 승리를 확신하더라도 긴장하고 또 긴장해야만 했다.
그래도 양천은 자신을 가졌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당장 황궁에는 여섯 이상의 무극수가 존재했다.
동북방 전투가 끝나면 빙궁주까지 돌아올 테니 무려 일곱이다. 무극수 하나가 무림의 거대 문파 하나의 전력과 비교될 만하다는 게 정설이었고, 그렇다면 단순히 수치만 보더라도 대문파 일곱이 모인 셈이었다.
물론 권신과 검선은 최악의 경우가 아니라면 전투에 참여하지 않을 것이다. 그 두 사람은 황제의 호위를 맡아야만 하니까.
그래도 무극수만 다섯이다. 그들 모두 각자의 역할이 분명하니 권신과 검선처럼 어지간해선 전선에 투입되지 않을 테지만, 그들의 존재만으로도 황궁의 사기는 떨어지려야 떨어질 수가 없었다.
“호정은 지금 어디 있소?”
“무림맹 병력 편제를 둘러보고 있습니다.”
양천의 얼굴이 흐려졌다.
“아직 피곤할 터인데.”
그간의 피로가 얼마나 극심했으면 무려 닷새를 쥐 죽은 듯 잤겠는가. 하물며 어디 다친 곳도 없는 녀석이었다.
닷새를 자고 일어났으니 피로가 풀렸을 것이다? 물론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양천은 닷새 이후를 보는 것이 아닌, 닷새나 의식 없이 기절해 버린 연호정의 피로 그 자체에 집중했다.
연호정은 당금 무림 병력의 중추였다. 그런 그가 쓸데없는 일로 피로를 느끼게 된다면 그 또한 문제였다.
“놔두셔도 됩니다.”
“으음.”
“녀석의 성격을 생각하면 오히려 그냥 쉬라고 하는 것이 더 문제일 겁니다.”
“가주 말씀이 옳소.”
산맥을 노려보던 양천이 고개를 돌렸다.
“일단은 당장 공격하지는 않을 것 같소. 저들이 일시에 기습하지 않는 이유부터 논의해 볼 터이니, 가주께서는 이곳에서 적의 동태를 살펴 주시오.”
연위가 미소를 지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번 황궁 북부전의 무림장으로서 제 자리를 잘 지키겠습니다.”
빙긋 웃은 양천은 이내 성루에서 내려갔다.
홀로 남은 연위는 다시 산맥 쪽을 바라보았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병력이라는 건 알겠다. 하지만 정확한 숫자를 알기는 힘들어.’
이럴 때면 오히려 심검(心劍)의 능력이 저주스러웠다.
그의 심검은 논리로 설명하기 어려운 초능(超能)에 가까웠다. 직감이라고도 볼 수 있고, 이해 불가의 통찰력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그 능력이 언제, 어떤 식으로 펼쳐질지 연위조차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 능력을 손에 넣은 것은 연위 자신이니 일신의 위험이 가까워질 때 ‘불안감’이라는 형태로 드러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때로는 위급한 상황에서도 그 불안감이 발동하지 않았다.
제멋대로 튀어나오는 직감이니 차라리 그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며 사는 편이 좋을 것이다. 특히나 이처럼 거대한 전투에서는 철저하게 무시하는 게 낫다.
그걸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연위는 언제 튀어나올지 모르는 심검의 능력을 도저히 무시할 수가 없었다.
직감 역시 연위의 능력을 이루는 한 부분이었다. 그런 것은 무시한다고 무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뭐가 되었든 내 검에 피를 묻혀야 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나는 그것에만 집중하면 돼. 직감보다는 이성에 집중하자.’
적이 모인 산맥 너머를 주시하며, 연위는 오랫동안 준비해 왔던 전략 전술을 복기했다.
* * *
“이상하군.”
기천웅이 눈살을 찌푸렸다.
“본교의 일반 교도들이야 그런 걸 배우지는 않지만, 무공을 익힌 교도들은 기본적인 전략과 전술을 함께 배운다네. 그중에는 무공보다 군략의 재능을 타고난 자들도 많아서, 그런 이들은 군사부에 편제하여 수많은 군략을 세우게 하지.”
“으음.”
양천은 습관적으로 턱수염을 매만졌다.
기천웅이 고개를 휘휘 저었다.
“하지만 지금 상황은 나도 이해하기 어렵구먼. 황궁 북부 기습은, 그렇게까지 뛰어난 군략이 필요치 않은 일이야. 일선에서 병력을 지휘하는 지휘관들의 전술적 능력이 절대적으로 우선되네.”
“내 생각도 같소.”
“물론 자신감이 있다면 저럴 수 있겠지. 어쩌면 황궁에 천화지경의 고수가 있다는 사실을 모를 수도 있어. 하지만 제아무리 자신감이 대단해도 군략가는 언제나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고 움직여야 하지 않나.”
“그렇소. 그래서 이해가 가지 않았고, 하여 호정보다 교주를 먼저 찾아온 것이오.”
기천웅이 한숨을 내쉬었다.
“솔직히 말함세. 나 역시 전략과 전술을 공부하긴 했으나, 교주에게 필요한 능력은 비할 데 없는 무공과 신심, 그리고 뛰어난 인재를 관리하는 것일세. 내게는 뛰어난 군략가의 눈이 없네.”
양천이 쓴웃음을 지었다.
“나는 교주께 대단한 군략적 재능을 기대하고 온 것이 아니오. 뭐가 되었든 교주는 오랫동안 신화교를 다스린 사람이니, 저들이 저런 행태를 보이는 이유를 짐작할까 싶어 온 것일 뿐이오.”
“알고 있네. 내가 해 줄 수 있는 대답이 더 없다는 사실에 유감을 표하네.”
“……역시 호정을 만나 봐야겠군.”
“같이 가도록 하세.”
그렇게 두 사람은 연호정을 찾았다.
연호정은 이제 전략부가 되어 버린 어전에 있었다. 무림맹 병력 편제를 둘러보던 그는 어전으로 돌아와 거대한 지도를 노려보고 있었다.
“성주.”
“오셨습니까.”
“몸은 좀 어떤가?”
“몸은 괜찮지만 머리에서는 불이 나는군요.”
그 역시 신화교 병력이 당장 기습을 가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들은 것이다.
양천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어떻게 생각하는가.”
“모르겠습니다.”
당당하다는 느낌마저 들 정도로 딱 잘라 말한다. 양천은 머쓱함을 느꼈다.
“아무것도 읽을 수 없는가.”
“그렇습니다.”
연호정이 황궁 북부 너머로 길게 늘어선 산맥을 가리켰다.
“황궁 북성에서 이곳 산맥까지 직선거리로 삼십 리가 조금 넘습니다. 본디 이 사이에는 군부 훈련장 등이 존재했었지만 지금은 없어졌지요. 고로 황궁 북성과 산맥 사이에는 광활한 평야만이 존재합니다.”
수백 년 동안 지형이 바뀔 정도로 많은 일이 일어난 곳이다. 실제로 이제는 군부대가 훈련을 하거나 동서로 뻗어 나가는 요충지 역할도 하지만, 적이 쳐들어올 때 대회전(大會戰)을 벌일 수 있는 지역이기도 했다.
물론 어지간해선 이곳에서 싸움이 벌어질 일은 없다. 적이 이곳까지 왔다는 것은 황궁이 적의 존재를 아예 몰랐거나, 적이 엄청난 기동전으로 단숨에 산맥을 뛰어넘어 왔다는 것을 뜻한다. 보통은 북부 회전이 벌어지기도 전에 부대를 파견하여 적을 섬멸한다.
당연한 일이었다. 아무리 요충지라도 황제가 거하는 황궁 앞에서 싸움을 벌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왕이면 산맥 너머에서 싸우는 게 최고긴 합니다만, 솔직히 말해 황궁 북성은 무림 최정예 부대라도 뚫기 힘들 만큼 압도적인 수성 능력을 자랑합니다. 이 정도 수성 능력을 보유한 집단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최악의 경우, 적을 유인해 버티기로 들어가도 괜찮을 거란 말입니다.”
“최악의 경우라면 그래야지.”
“그렇습니다.”
연호정이 턱을 쓰다듬었다.
“황궁을 기습할 생각이었다면 동북에서 접근하는 오천 병력을 염두에 두었을 것입니다. 물론 오천 병력이 산화할 수 있다는 것도 생각해 두었겠지요. 다만, 아무리 강력한 병력이라도 또 다른 아군 병력과 합세해 공격하는 것을 선호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즉, 놈들은 요녕성에 들어온 신화교 오천 병력을 기다리고 있다는 뜻이지.”
“그렇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너무 가까이 들어왔다는 것이지요.”
연호정이 산맥 뒤를 가리켰다.
“적어도 황궁에서 백 리는 더 떨어진 곳에서 주둔했어야 합니다. 특히 이곳, 강을 끼고 있는 야산 근처는 침략자들에게 있어 최고의 주둔지라 할 수 있습니다. 신화교는 한때 황궁을 점거했으니, 전략적으로 치고 들어올 곳과 주둔지 등을 모두 공부해 두었을 것입니다.”
“음.”
“한데 놈들이 북성 바로 앞, 삼십 리 너머의 산맥 바로 뒤까지 접근했다는 건 좀처럼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놈들에게도 머리가 있다면 절대로 선택하지 않을 방법이지요.”
연호정의 눈이 번뜩였다.
“놈들을 바보라고 여기는 것은 속 편한 방법입니다만, 절대 그리 생각해선 안 되겠지요. 이것이 정상적인 선택이 아니라면, 상식적으로 정상이 아닌 선택이 놈들에게는 최고의 선택일 수밖에 없는 상황을 유추해 봐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도 알고 있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모르겠군.”
연호정이 한쪽에 쌓아 둔 서신들을 집었다.
“닷새 동안 오간 첩보대의 서신을 모두 읽어 보았습니다. 당장 어제까지는 적이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는데, 놈들이 삼십 리까지 접근하여 주둔한 덕에 우리는 적의 존재를 눈치채고 준비할 수 있었습니다.”
“…….”
“상식적으로, 놈들은 그 전까지 백 리 밖에서 주둔해 있었을 겁니다. 그렇다면 어제오늘 사이, 거리를 좁혀야 이득일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맞았다는 것입니다.”
양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화기(火器) 같은 열병기를 가져왔을지도 모르지. 기 교주, 신화교는 화력 병기에도 일가견이 있지 않소?”
기천웅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 내가 나오기 전까지만 해도 소형, 중형, 대형의 화포들을 줄줄이 만들어 내고 있었다네. 이번 전쟁에도 분명 가지고 왔을 걸세.”
“그렇다면 화기를 믿고…….”
그때,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그것이 아닙니다.”
“음?”
“어제오늘 사이에 특기할 만한 움직임을 보였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사이에 화기를 지원받았다고 칠십 리나 되는 거리를 좁혔다고요? 놈들의 열병기가 삼십 리에 달하는 사정거리를 가진 게 아니라면 화기의 존재 유무가 놈들의 접근을 설명해 주지는 못합니다.”
“그, 그렇군.”
생각지도 못했던 부분이었다. 머쓱해진 양천이 헛기침을 했다.
지도를 보는 연호정의 눈이 깊어졌다.
“분명 뭔가가 있습니다. 놈들이 움직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