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114)
1114화. 불의 마왕(魔王) (3)
“…….”
연호정의 말을 들은 기천웅은, 뜻밖에도 무척이나 담담한 기색이었다.
양천이 조심스레 물었다.
“괜찮으시겠소?”
“안 괜찮을 것은 또 뭔가.”
기천웅이 고개를 저었다.
“연 성주의 생각은 실로 타당해. 비록 쫓겨난 수장이라고는 하나, 신화교에 대해서 나만큼 잘 아는 사람이 이곳에 있던가? 돌발 상황의 대처 능력이 비슷하다면, 그나마 적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 가는 게 좋겠지.”
기천웅의 입에서 ‘적’이라는 말이 나왔다.
‘재미있군.’
걱정스러운 기색이었지만, 양천은 무척이나 냉정한 상태였다.
‘의도했는지 모르겠지만, 저 적이라는 한 글자로 인해 기 교주는 이곳에 모인 사람들의 불안감을 상당 부분 없애 버렸다.’
어전에는 태공과 고위직 신하들, 나아가 권신과 검선까지 있었다.
말하자면 연위를 제외한 황궁의 중추들이 다 모인 셈이었다. 그런 자리에서 기천웅의 저 발언은 충분한 신뢰를 줄 수 있었다.
기천웅이 연호정을 향해 물었다.
“내가 거느릴 병력 수는 얼마나 되나?”
“많아서 좋을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발이 날래고 임기응변에 능한 고수들 삼십 정도로 보고 있는데, 괜찮겠습니까?”
“딱 좋군.”
절대 좋지 않다. 이번만큼은 양천도 진심으로 놀랐다.
“아무리 별동대라도 삼십의 숫자는 너무 적지 않겠소?”
“만에 하나 교전이 발생할 경우, 싸움은 나 혼자서 진행하는 편이 더 나을 것이야. 이쪽 병력이 함께 싸우게 되면 되레 적의 사기만 올려 주게 될 듯하네.”
신화교는 전대 교주가 되어 버린 기천웅이 배신한 것으로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무림 병력 혹은 황궁 병력과 함께 공격하게 된다면, 그 배신감이 하늘을 찌를 것이다.
기천웅의 존재는 적의 당황을 유도하는 것, 그리고 적의 군세를 살피는 것에 주력해야 했다. 쓸데없이 적을 하나로 묶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물론 나 혼자 싸우더라도, 우수한 지휘관이라면 병력을 다독이며 그 공포와 배신감을 사기로 이끌 수 있겠지. 하지만 그건 싸움이 종료된 이후의 문제일 뿐이야. 싸우는 와중에 괜스레 사기가 올라가 버리면 더 골치가 아파질 걸세. 거기서 끝장을 볼 수는 없으니까.”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 교주의 말씀이 옳습니다.”
“하면…….”
연호정은 양천이 하고 싶은 말을 알 수 있었다.
“싸움에 참여할 필요도 없는데 굳이 발이 날랜 이들을 딸려 보내는 이유는, 적의 규모를 여러 사람의 눈으로 본 이후에 따로 보고를 받고 싶기 때문입니다.”
“으음.”
맞는 말이었다.
본디 이런 전쟁에서는 대규모 전투가 벌어지기 전이 더더욱 위험한 법이다. 기천웅과 함께 나아갈 병력은 목숨을 걸고 임무를 완수해야 했다.
“한 가지 건의할 게 있네.”
“말씀하십시오.”
기천웅은 여전히 담담한 얼굴로 무시무시한 내용을 말했다.
“황궁에는 나와 함께 온 신화교 병력이 존재하네.”
“…….”
“특수 부대의 부대원은 거기서 추리고 싶군.”
함 태공은 내심 깜짝 놀랐다.
‘위험하다.’
신화교 병력은 이 넓은 황궁 곳곳에 거처를 마련하여 지내고 있었다.
물론 그간 어떤 사고도 치지 않았다. 그들은 해가 뜨기 전 신을 위해 기도했으며, 교주의 명령에 따라 황궁 수비대의 훈련을 돕기도 했고 잡무도 도왔다.
황궁 사람들 대다수가 그들과 친분을 다졌을 정도였다. 교주의 명령이었다고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성격들이 좋았다.
문제는 그들이 황궁에 대해 너무 잘 안다는 것이다.
만에 하나 기천웅이 배신해도 위험할 수 있는데, 황궁 사정을 잘 아는 이들이 우르르 몰려가 정보를 제공하면 그것이야말로 치명적인 한 수가 될 수 있다.
“…….”
대전의 분위기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이유를 잘 알고 있음에도, 기천웅은 모르는 척 물었다.
“왜? 달리 문제라도 있는가?”
“없습니다.”
연호정의 대답은 단호하기까지 했다.
“아무 문제가 없지요. 만약 이것을 문제 삼으려면 기 교주님부터 의심했어야 합니다.”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
기천웅은 모른 척 잡아뗐지만, 내심 연호정의 칼 같은 판단과 신뢰에 고마움을 느꼈다.
나아가 연호정의 말에는 만에 하나를 생각하는 많은 사람의 불안함을 단숨에 짓누르는 힘이 있었다.
“사람의 마음은 간사하여, 측간에 들어갈 때와 나올 때가 다르다고 하죠. 하지만 저는 교주님이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네가 날 잘못 봤을지도 모르지.”
“기 교주님을 잘못 본 저라는 사람을 황궁의 대군사로 삼을 만큼, 여기 계신 분들이 무능력하지는 않습니다.”
방점을 찍어 버리는 한마디였다.
웃으며 기천웅을 보던 연호정이 일순 표정을 굳혔다.
“그렇다면 삼십이 아니라 몽땅 데리고 가시지요.”
“……?!”
이 무지막지한 말에는 기천웅조차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다 데리고 가라고?”
“별동대는 본대와 따로 움직이는 부대입니다. 사전적인 의미를 떠나 정찰 및 첩보, 대규모 전투 앞의 일차 교전, 위협 등등 온갖 역할을 수행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따로 특수 부대라 불리기도 합니다.”
연호정이 눈을 빛냈다.
“적의 정찰이 주 임무지만, 신화교의 병력을 데리고 간다면 단순 정찰로 끝내기에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적의 반응을 보는 것에 무게를 더 둔다면, 차라리 적을 더 당황케 할 수 있도록 일천 병력을 다 데리고 가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
잠시 말이 없던 기천웅이 한층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성주는 나를 믿나?”
“조금 전의 대화를 두 번씩이나 할 필요는 없는 줄 압니다.”
그때, 함 태공이 조심스레 말했다.
“대군사의 판단을 곡해하거나 불신하는 것은 아니라네. 기 교주에 대한 신뢰를 엎는 것도 아니야. 하지만 조금 더 조심할 필요는 있지 않겠나.”
함 태공 역시 자신의 발언이 기천웅의 기분을 상하게 할 수도, 신뢰로 얽힌 이 관계에 금이 가게 할 수도 있다는 걸 안다.
그래도 그의 입장에서는 할 수밖에 없는 말이었다. 연호정도, 기천웅도 그를 이해했다.
“저를 믿으십시오. 그리고 저에게 보내 주시는 신뢰를 그대로 기 교주에게 보내셔도 됩니다. 저는 그리 확신합니다.”
“으음.”
“만에 하나 기 교주께서 배신한다면, 이번 전쟁을 어떻게든 승리로 이끈 후 잘못된 작전 허가로 아군 피해를 키운 죄목을 인정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겠습니다.”
대군사라는 사람이 이렇게 나오면 감히 그 누구도 입을 열 수가 없게 된다.
연호정이 웃으며 기천웅에게 말했다.
“교주님의 행동에 제 목숨을 걸어 버렸습니다.”
“자네 목숨이 참 가볍구먼.”
“제 목숨은 가벼울지라도 제가 보낸 신뢰는 무겁습니다. 무겁게 보낸 신뢰, 제 손으로 부수는 일은 절대 없습니다.”
기어이 기천웅도 피식 웃어 버렸다.
“하여간 자네는 사람 다룰 줄 알아.”
“지금 당장 준비하십시오. 만에 하나를 대비하여 연위 무림장에게도 즉각 전투를 벌일 수 있게 준비하라 하겠습니다.”
반 시진 후.
만반의 준비를 한 기천웅이 일천 병력을 이끌고 북부 성문을 나섰다.
성루에서 그들을 내려다보던 연위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판단이라고 본다.”
“이것이 진정 좋은 판단이 되려면 기 교주와 휘하 병력이 나름의 공을 세우고 돌아와야 합니다.”
“물론 그렇긴 하다만.”
“그리고…….”
연호정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아버지께 따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말해 봐라.”
“본디 이런 내용은 지휘를 맡은 장군을 심란하게 할 수도, 과감한 작전을 치르지 못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감안하고 들어 주시길 바랍니다.”
“걱정하지 마라. 이 애비는 언제나 너를 믿지 않느냐.”
“그럼, 제가 생각하는 북부 기습 부대의 전진 이유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연위는 깜짝 놀랐다.
“이유를 알아냈느냐?”
“추측입니다. 그래서 말씀드릴지 고민했던 것입니다.”
연호정은 자신이 생각했던 바를 연위에게 가감 없이 전했다.
“……!”
연위의 얼굴이 그 어느 때보다도 확연하게 굳어졌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느냐?”
“들어온 정보를 토대로 지도를 펼쳐 확인해 보았습니다. 가능성이 크진 않지만, 저들의 전진 이유를 설명하기에 그보다 더 타당한 일은 없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큰일이 아니더냐?”
“하여, 저도 저 나름대로 준비하려 합니다.”
연호정이 힘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져도 아버지는 절대 흔들리셔선 안 됩니다. 아버지의 뒤는 제가 받치고 있습니다.”
연위의 굳은 얼굴이 서서히 펴졌다.
“그래, 절대 흔들리지 않으마.”
“전투가 터지면, 저희가 짠 커다란 전략 외에 돌발적인 변수는 일선 지휘관의 판단에 일임하겠습니다. 저희 역시 아버지가 어떤 판단을 내리든 믿고 반응할 것입니다.”
“알겠다.”
그렇게 모든 일을 염두에 둔 두 사람.
기천웅과 그가 이끄는 일천 병력을 보는 연호정의 얼굴에 신중함이 가득했다.
“……이번 전투가 끝나면 개방의 정예 정보단을 북부로 몰아넣어야겠군.”
* * *
“교주님.”
“그래.”
아직 완전한 어둠이 찾아오지 않았지만, 평야와 산맥을 사이에 두었기에 그들이 체감하는 어둠은 상당했다.
야하륵을 제외한 친(親) 기천웅파 제일의 고수 구마하(毆摩夏)가 조심스레 말했다.
“옥체는 괜찮으신지요.”
기천웅은 저도 모르게 껄껄껄 웃어 버렸다.
“옥체라니, 참으로 오랜만에 듣는 표현이로다.”
“송구하옵니다. 저희에게 교주님은 오직 한 분뿐입니다.”
“그렇게 생각해 줘서 고맙지만, 이 전쟁이 끝난 후 새로이 변화할 신화교의 교주는 다른 사람이 될 것이다.”
“교, 교주님?!”
“물론 그때까지 내가 살아 있다면 태상의 직위로 새 교주를 도울 것이다.”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교주님께서는…….”
“나도 사람이지. 말이 신의 대리자일 뿐.”
“교주님…….”
기천웅이 유쾌한 어조로 말했다.
“적어도 이번 전쟁이 끝날 때까지는 그리 생각하자고.”
“그럴 수 없습니다! 저희는……!”
“그리고 내 몸은 멀쩡하니, 그렇게 열 내지 말게나. 지금 우리는 막중한 임무를 안고 있어. 해야 할 일에 집중해야지.”
그 말에 겨우 진정한 구마하가 이내 고개를 숙였다.
“그저 교주님을 따를 뿐입니다.”
“허허.”
미소 짓던 기천웅은 이내 표정을 굳혔다.
‘보이는구나.’
평야를 절반 정도 가로질렀을까.
비록 무공 구현 정도에 따라 다시 사라질 힘이지만, 대부분 복구된 상단전은 기천웅에게 과거 힘을 잃기 전 시절에 크게 모자람이 없는 신안(神眼)을 안겨 주었다.
‘이제야 제대로 보인다. 거대한 화기(火氣)야. 이렇게까지 커다란 불은 정말 오랜만에 보는군.’
그의 눈에 산맥은 보이지 않았다.
산맥 뒤, 고요하게 가라앉은 거대한 불이 보일 뿐이었다.
‘저 정도 불을 일으키려면 어중간한 병력으로는 절대 불가능해. 정예 부대 절반 이상을 다 끌고 온 데다가, 전투가 가능한 병력을 최소 이만 정도는 데리고 왔을 것이다.’
연호정의 판단과 기천웅의 확인은 거의 일치했다.
‘재미있군. 저 정도 병력이라면 거리를 좁힐 만하다. 하지만 그래도 이 정도까지는…….’
그때였다.
화륵!
기천웅과 구마하의 눈에 산맥 정상에서 피어오르는 작은 불꽃이 보였다.
거리가 거리다 보니 작아 보일 뿐이었다. 실제로는 집채만 한 크기의 불일 것이다.
한데 그 불의 색깔이 묘했다. 황색에 가까운 환한 주홍빛이 아닌, 은은한 청록빛을 내는 기괴한 불꽃이었다.
“화화술?!”
“아니다.”
구마하의 말에 기천웅이 고개를 저었다.
“저것은 교 내 수뇌부들을 모을 때 쓰는 집화령(集火令)의 불꽃이다.”
“그, 그럼?!”
기천웅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나의 존재를 눈치챘구나. 어느 화왕(火王)이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