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118)
1118화. 불의 마왕(魔王) (7)
그날 밤.
이천 병력의 단주와 대주들을 모아 놓고 모든 작전을 설명한 연위가 어전으로 들어왔다.
어전에는 연호정 혼자 지도를 보고 있었다. 골똘히 지도를 들여다보며 수십 개의 작은 목각 인형들을 움직여 보는 그의 손짓과 눈빛은 구도자의 그것과 같았다.
연위는 아들을 방해해도 되는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
다행히 아들이 그의 고민을 풀어 주었다.
“오셨습니까.”
목각 인형 하나를 황궁 서쪽에 배치한 연호정이 연위를 바라보았다.
연위의 얼굴에 안쓰러운 기색이 흘렀다.
닷새 동안 자고 일어난 아들의 신색은 꽤 괜찮아 보였었다. 하지만 하루가 지나지 않아 벌써 피로가 가득해졌다.
“몸은 어떠냐?”
“저야 지도 보고 머리 쓰는 일밖에 하지 않는데요. 괜찮습니다.”
“이 녀석아. 너는 황궁 대군사로서 작게는 황궁 병력을, 크게는 하북 전체 병력을 다스리는 자다. 결코 무리해서는 안 돼.”
“머리 쓰는 게 무리하는 건 아닙니다. 오히려 아버지와 병사들이 더 걱정이지요. 저는 눈알 걱정으로 끝나지만, 다른 사람들은 목숨 걱정을 해야 합니다.”
연위는 아들이 기특했다.
‘정말 멋지게 성장하였구나.’
아들이 처음 변화했던 때를 떠올려 보았다.
흑도대종사로서의 삶을 살다가 돌아왔다는 아들은, 이전과 달리 거침이 없고 날카로웠으며, 무시무시한 재능으로 무공을 섭렵해 나갔다.
이후 구주명가를 무너트렸고, 무림맹에 뛰어들어 온갖 정쟁을 벌이면서도 악랄한 흑도를 해치웠으며, 삼교의 세작들을 격파해 나갔다.
그때까지만 해도 연위는 아들의 변화를 긍정하면서도 크게 걱정하였다. 말로는 괜찮다 하지만, 삼교의 교도들만 보면 귀신처럼 돌변하여 피를 보는 아들의 성정은 과하다는 표현으로도 부족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떠한가.
그간 수많은 대화와 경험을 토대로, 아들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과거 흑도대종사의 위치로 돌아왔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런 건 사실 크게 중요한 것도 아니었다.
흑도보다도 더 흑도처럼 과격했던, 그래서 통쾌할 때도 많았지만 지나치게 패도적이라 많은 사람의 공분을 살 수 있었던 아들이 지금은 당당히 황궁의 대군사가 되어 있었다.
흑제성이라는 걸출한 조직의 주인이 되었으며, 그의 명령이라면 섶을 지고 불에 뛰어드는 부하들도 많았다.
그런데도 아들은 절대 수하들의 목숨을 함부로 하지 않았다. 오히려 수하가 위험하면 자신이 직접 나서서 위협을 물리칠 때도 많았다.
과거 회귀하기 전에도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연호정은 망나니처럼 날뛰었던 과거와 달리 무림 최고수로서의 위엄과 한 조직의 수장으로서의 품격을 동시에 보여 주고 있다.
연위는 아들이 자랑스러웠다.
무공으로 자신을 앞서 나갈 때도 아들이 걱정스러웠다. 하지만 흑제성주가 되고 천하를 위해 이 자리에 선 아들을 보며, 비로소 연위는 제 장남이 불세출의 절대자가 되었음을 깨달았다.
도덕과 신념, 위엄과 애민, 힘과 자비, 냉정함과 단호함을 지닌 절대자.
‘여한이 없도다.’
적어도 가족에 관해서는 이제 아무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달리 말하자면, 이번 전쟁이 끝난 후엔 진정 자신만을 위한 인생을 살아도 좋을 것 같았다.
“대군사의 눈알이 빠져서는 안 되지. 너의 판단으로 수백의 병사가 살고, 수천의 병사가 죽을 수 있다. 무극에 이른 신체를 과신하지 말고 몸 관리 잘해야 한다.”
“명심하겠습니다.”
연위가 지도 앞에 앉았다.
“단주, 대주들에게 명령을 하달하고 왔다.”
“어떻습니까, 그들은?”
“음? 무엇이 말이냐?”
“아버지를 향한 신뢰 말입니다. 아닌 말로 연가의 가주를 존경하는 마음과 달리 함께 싸워 본 적은 없으니, 불안함이 전혀 없지는 않을 겁니다.”
연위가 미소를 지었다.
자칫 부친을 우습게 여기는 것으로 들릴 수도 있는 발언이지만, 사태를 냉정하게 보고 있는 아들에게 그는 또 한 번 감탄했고 감동했다.
“아직 어색한 부분은 있다. 전체적으로 훈련이 잘되어 있음에 감사할 뿐이다.”
“아버지는 지휘관이자 전략 병기이기도 합니다. 그런 사람의 명령을 즉각적으로 따르지 않으면, 안 당해도 될 피해를 당할 수도 있습니다.”
“알고 있다. 나 또한 노력해 보겠다.”
“문제는 출정 시간이 반나절밖에 남지 않았다는 건데…… 제가 이따가 그들을 만나 보겠습니다.”
“그래.”
고개를 끄덕이던 연위가 잠시 헛기침을 했다.
“한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게 있다.”
“무허대사 말씀이시군요.”
“역시 귀신 같구나.”
연위의 얼굴에 의아함이 일었다.
“너의 군략과 용인술이 누구보다 대단한 줄은 내 익히 알고 있다만, 무허대사님은 어인 이유로 끌어들였느냐?”
무허대사의 무공을 걱정하는 게 아니었다. 애초에 무공만 보면 당금 무림 최강자에 가장 가까운 사람이 그였다.
문제는 무허대사의 손속이었다. 그는 오래도록 중원행을 하면서도 죽인 악인의 숫자가 열을 넘지 않았다. 정말 악의 끝을 본 자들에게도 기회를 주었고, 그래도 안 되면 목숨을 거두었을 뿐이었다.
그런 사람을 참전시키다니? 연위로서는 쉽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탁무자 노선배도 그러시더군요. 무허대사의 전투 능력을 믿지 말라고.”
“그런 말씀을 하셨더냐?”
“예. 누구보다 가깝게 지내던 친구조차도 그런 말을 했다는 것은, 무허대사가 정녕 대단한 사람이라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연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토록 대단한 무공을 연성하시고도 깊은 자비심을 지닌다는 건 정말 위대한 일이다.”
“음? 아, 제가 말씀을 잘못 드렸군요.”
“……?”
“무허대사가 대단한 것은 자비심 때문이 아닙니다.”
“뭐?”
“가장 친한 사람조차도 그 진면목을 모르고 있었으니, 본성을 제대로 숨긴 무허대사의 능력이 대단하다는 뜻이었습니다.”
연위가 눈을 부릅떴다.
“무허대사께서…… 본성을 숨기고 있다?”
“저도 따로 뵙기 전까지는 몰랐습니다.”
“……허! 무허대사께서 정녕 피를 볼 각오가 되었다는 뜻이냐?”
“아무래도 그런 부분에서는 아버지의 심검보다 저의 황룡안(黃龍眼)이 더 날카로운 모양입니다.”
연호정의 눈이 샛별처럼 반짝였다.
“무허대사는 한다면 합니다. 오히려 누구보다도 과격하고 무서워질 수 있는 사람입니다.”
* * *
끼이익.
뇌옥의 문이 열렸다.
사락. 사락.
축축한 바닥에 옷자락 스치는 소리가 묘하게 섬뜩했다.
번쩍.
철창 안에 갇혀 있던 괴인이 눈을 떴다.
단전이 파괴되고 모든 무공을 상실했음에도 불구하고 괴인의 눈은 새파랗게 빛나고 있었다. 그 눈빛은 마치 마귀를 연상케 하는지라, 심장 약한 사람이 마주했다면 그 길로 졸도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철창을 사이에 두고 괴인과 마주한 사람은 지독하리만치 담담했다.
“……이게 누구야.”
탁하게 갈라지는 괴인의 목소리는 도무지 인간의 그것처럼 들리지 않았다.
“내가 꿈을 꾸는 건가? 하긴, 그럴 수도 있겠군. 너무 오랫동안 이곳에 갇혀 있었으니까.”
“…….”
“그래, 꿈은 아닌 것 같구만. 내공은 다 날아갔어도 평생 연마한 내 혼(魂)은 여전히 날 미치지 않게 만들어 주거든.”
“오랜만이구나.”
“설마 이런 곳에서 보게 될 줄이야.”
괴인이 킥킥 웃었다.
“왜? 내 비참한 꼬락서니를 보고 싶어서 굳이 이 더러운 곳까지 기어들어 왔나, 무허?”
무허대사가 쓴웃음을 지었다.
“너는 예전과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구나. 오히려 그때보다 더 과격해진 것 같다.”
“내 별호가 혈옥의 마군이야. 설마 내가 깨달음을 얻어 극락정토에 가기라도 했을 줄 알았나?”
괴인, 혈옥마군 곽준의 얼굴이 기괴하게 일그러졌다.
무허대사가 고개를 저었다.
“깨달음은 모두에게 열려 있다 하지 않았더냐. 네 비록 씻을 수 없는 죄를 짓기는 하였으나, 뒤늦게나마 참회하고 마음을 열었다면…….”
“그따위 개소리를 하려고 날 찾아온 거라면 이만 꺼지시게. 난 부처인 척하는 귀신의 낯짝을 보고 싶지 않거든.”
“…….”
“그나저나 댁 얼굴도 많이 상했어. 세월은 권신(拳神)조차도 피해 갈 수 없다는 건가? 살도 꽤 빠진 것 같은데?”
오랫동안 지옥기를 담고 있던 몸이었다. 회복했다고는 하나, 예전과 같은 몸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몸은커녕 수명도 얼마 남지 않았다. 그리고 무허대사는 그런 자신의 상태에 아무런 유감도 느끼지 않았다.
“어쨌든 이렇게나마 한번 보니 반갑긴 하군. 그리고 아쉬워.”
“무엇이 그리 아쉽더냐.”
곽준의 입매가 비틀어졌다.
“이런 곳에서 썩기 전에 네놈 낯짝을 덮고 있는 살점을 좀 뜯어 놨어야 했다. 그랬다면 땡중 노릇을 하는 귀신 낯짝을 만천하에 보여 줄 수 있지 않았겠나.”
“그래, 그랬겠지.”
무허대사의 눈이 깊어졌다.
“그런 나이기 때문에, 너는 내게 집착할 수밖에 없었지.”
곽준의 얼굴이 더욱 일그러졌다.
“나는 당신을 혐오한다.”
“…….”
“이 세상에서 가장 천하고 더러운 놈보다 더더욱 당신을 혐오한다.”
“알고 있다.”
“도대체 자신의 본성을 왜 그리 숨기는 거지? 고작 그 같잖은 종교적 가르침 때문에? 죽고 나서 열반에 든다고? 그런 게 진정 가능하리라 보는가?!”
“…….”
“당신은 누구보다도 위대해질 수 있었다! 세상은 혁련휘라는 작자를 마선이라 부르며 치켜세우지만, 그자는 마도(魔道)에 발조차 딛지 못했어! 당신이야말로 누구보다 마도에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당신이 당신의 본성을 외면하지 않았다면, 어쩌면 고금 제일의 마(魔)로서 천하를 군림할 수 있었을 것이다!”
“…….”
“난 당신을 혐오한다! 당신은 스스로의 천품을 잊고 머리 깎은 땡중이 되어 실체 없는 깨달음에 목을 맸다! 그토록 존귀한 보옥(寶玉)에 먹칠을 하고 돌산을 쌓아 가치를 상실케 하다니, 도대체가 뭐 하는 짓인지 모르겠다!”
“너는 그것을 보옥으로 보았지만, 나는 그것을 죄악으로 이끄는 마귀의 유혹으로 본다.”
“헛소리 집어치워! 이 세상에 죄악 따위는 없다! 도덕과 법도라는 듣기 좋은 말로 사람을 한계 짓게 하는 작금의 세상은 잘못되어도 단단히 잘못되었다!”
“모든 사람이 네 말대로 살아간다면, 이 세상은 미친 살인마들이 판을 치는 지옥으로 변할 것이다.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사람이 신음하고 고통스러워하겠지.”
“그것이 바로 섭리다! 그것이 곧 우리가 세상에 난 이유야! 고로 마(魔)야말로 진리에 도달하는 유일무이한 절대 법칙이다!”
“네 녀석이 생각하는 그 유일무이한 절대 법칙이 실상은 허상이요, 욕망조차 다스리지 못한 짐승들의 울부짖음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에, 나는 내 악랄한 천품을 부처의 가르침으로 씻어 낸 것이다.”
곽준이 죽일 듯이 무허대사를 노려보았다.
“너는 마의 배신자다. 그 연호정이란 놈은 적어도 그 자신이 비할 데 없는 살귀(殺鬼)라는 것을 잊지는 않았어.”
“나도 잊지 않았다.”
“……뭐?”
“나도 내가, 고금의 어떤 마귀보다도 마(魔)에 가까워질 수 있는 짐승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다.”
무허대사가 깊은 눈으로 곽준을 바라보았다.
“지금 이 자리에서, 나는 그 사실을 또 한 번 자각할 수 있게 되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무허대사가 몸을 돌렸다.
“고맙다. 너를 만나, 토끼 거죽을 뒤집어쓴 날개 달린 늑대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
“아주 잠시지만.”
그렇게 무허대사는 뇌옥을 떠났다.
곽준은 무허대사가 나가고도 한참 동안 문을 노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