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120)
1120화. 불의 마왕(魔王) (9)
‘이것들이.’
냉정해지려고 해도 도무지 화를 참을 수가 없다.
비록 화신을 부정했다고는 하나, 철흠기는 여전히 기천웅을 존중했다. 아니, 존경했다. 오랜 시간 신화교의 수장으로서 궁극의 무공을 연마했고 유화적인 정책을 펼친 기천웅을 뉘라서 존경하지 않겠는가.
애초에 대륙 놈들에 대한 혐오가 상당하기도 했지만, 이번 기천웅과의 만남 이후로 철흠기는 더더욱 적들을 증오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평생 화신의 대리자로서 살아왔던 기천웅이 강호 무림에 감탄한 것도 모자라 그들에게 감복한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래선 안 될 사람이었다. 기우환의 책략으로 교주직에서 박탈당한 후 내쳐졌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책략에 당했기 때문이지 기천웅에게 자격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기천웅에게 실망했을 뿐 여전히 그를 존경하는 철흠기에게 있어 대륙인들은 하나같이 쳐 죽여 마땅할 악귀들에 불과했다.
“웃기지도 않는구나.”
철흠기가 코웃음을 쳤다.
“조금만 기다리면 황궁을 중심으로 모조리 쓸어 버릴 터인데, 기어이 참지 못하고 여기까지 기어 나왔구나.”
연위의 눈이 반짝였다.
‘역시.’
도발 같지도 않은 도발에 철흠기는 손쉽게 걸려들었다.
게다가 저 발언.
조금만 기다리면 황궁을 중심으로 모두 쓸어 버리겠다? 이 말인즉슨 이번 신화교의 기습 대군에 황궁만이 아닌 하북, 나아가 중원의 북동부 전체를 장악하려는 의도가 있음을 알려 주고 있었다.
“우리는 그리 신경이 굵지 않다. 귓가에서 왱왱대는 벌레 한 마리를 무시하고 자는 사람도 있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아.”
상대를 사람이 아닌 벌레로 격하시켰다.
연위답지 않은 신랄한 비유였다. 철흠기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가 더 짙어졌다.
“기회를 주지.”
한 마디, 한 마디에 강한 분노를 담아 말하는 철흠기의 모습은 숫제 악귀와 같았다.
“돌아가서 우리의 공격을 기다리도록 해라. 어차피 죽을 목숨, 아주 약간이라도 세상 공기를 더 마시는 게 좋지 않겠느냐.”
연위의 눈이 가늘어졌다.
‘역시, 호정의 말이 맞았는가.’
철흠기의 분노 가득한 발언에서, 연위는 그들이 충분한 준비가 되었음을 느꼈다.
그럼에도 진군하지 않았다. 전투 준비를 다 마쳤음에도 산맥 뒤에서 대기하고 있다는 것은 곧, 연호정의 짐작이 사실일 수도 있음을 방증하고 있었다.
“네 부탁을 못 들어줄 건 아니다만.”
그 발언으로 인해 철흠기의 강압적인 권고는 부탁이 되어 버렸다.
“부탁을 할 때는 자세를 낮추고 목소리에도 공경을 담아야지 않겠느냐.”
살벌한 욕설이나 소름 돋는 살기가 없어도 사람의 속을 뒤집어 놓을 수 있다. 연위의 말에는 품격과 위엄이 가득하여, 철흠기가 뭣도 없이 날뛰는 무뢰배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철흠기도, 그를 따라온 수백의 고수도 똑같이 느꼈다.
“이 미친놈이!”
화아아악!
기어이 철흠기의 몸에서 살기와 어우러진 강렬한 화기가 뿜어져 나왔다.
‘방심할 수 없군.’
철흠기가 뿜는 화기는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실제로 무극에 발을 들이긴 했다. 화기에 담긴 살기, 그리고 살기에 담긴 영력은 철흠기의 깨달음이 인간의 경지를 벗어났음을 의미했다.
그러나.
난적을 바라보는 연위의 눈동자는 여전히 흔들림이 없었다.
‘방심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못 이길 것 같지도 않다.’
이것은 오만함이 아닌 철저한 전력 분석이었다.
연위는 상대를 과대평가하는 것이 과소평가하는 것만큼이나 위험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었다.
‘다만 마음대로 가지고 놀 수는 없을 듯한데.’
조금만 더 접근했다면 굳이 이런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놈들이 나타난 순간은 절묘했다.
연위는 한 번 더 상대를 도발하기로 했다.
“봐주는 것은 이번 한 번만이다. 회군하라.”
“닥쳐라!”
철흠기의 외침은 엄청난 내공을 담고 있었다.
황궁 수비대 병사들의 얼굴이 하나같이 일그러졌다. 연위가 전면에서 거대한 내공 방패를 둘러치고 있었기에 망정이지, 그러지 않았다면 이 음공 같은 외침에 최소 몇십 명은 극심한 이명으로 어지럼증을 호소했을 것이다.
“감히 우리에게 그따위 말을 한단 말인가! 감히!”
“회군하지 않을 거면, 슬슬 시작해 보도록 하지.”
연위가 장군검을 뽑아 들고 앞으로 겨누었다.
홍운이 외쳤다.
“진군하라!”
이천 병력이 곧바로 전진하였다.
철흠기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저것들을 그냥!’
그는 진심으로 저들을 이 자리에서 묻어 버리고 싶었다.
그들에게는 그만한 능력이 충분했다. 아닌 말로 산맥 뒤 병력 중 일 할만 데려와 공격해도 저들을 다 쓸어 버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빌어먹을.’
철흠기는 자신이 장수로 왔음을 잊지 않았다.
이런 대규모 전투의 수장으로 온 것은 처음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실수를 해서는 안 된다.
“어디 해보거라. 원한다면 언제든 산맥을 넘어도 좋다.”
그 말에 연위가 다시 한번 장군검을 쳐들었다.
황궁 수비대가 전진을 멈추었다. 산맥까지는 정확히 백이십 장 거리였다.
철흠기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머리 쓰느라 속이 좀 아플 거다.’
그야말로 오산이었다.
신화교의 다섯 번째 화왕은 사흡화귀공이라는 놀라운 비술을 완성했으며 그 외에 수없이 많은 열병기와 각종 독, 술법을 탄생시킨 희대의 기린아였다.
문제는 그가 이런 식의 경험이 없다는 것이었다. 굳이 이런 경험이 없어도 충분히 강했지만, 대규모 전투에서 필요한 것은 개인의 무용이 전부가 아니었다.
연위는 일부러 머뭇거리는 모습을 보여 주었으며, 철흠기는 그러한 적장의 모습에 안정을 되찾았다.
그는 모를 것이다. 연위에게는 기천웅에게도 없는 능력이 있다는 걸.
만약 즉시 싸움이 벌어졌다면, 그래서 연위가 심검(心劍)인 조정연검(造淨燕劍)을 구사했다면.
그랬다면 철흠기는 그 자리에서 내공을 봉쇄당하고 사지의 자유를 빼앗겼을 것이다.
당연히 연위는 그 즉시 공격을 가했을 것이며, 함께 온 수많은 고수도 연위의 공격에서 철흠기를 지켜 주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연위는 어째서 그 절대적인 능력을 발휘하지 않고 있는 걸까?
‘서른여섯…… 아니, 여덟이다.’
그렇지 않다.
연위는 지금 조정연검을 펼치고 있었다. 다만 그 대상이 ‘사람’이 아닐 뿐이었다.
그의 심검과 심안은 이 산맥 전체를 둘러보고 있었다. 산맥 너머 적의 병력을 보는 것이 아니라, 산맥 그 자체를 보고 있단 말이다.
연위는 이 싸움이 단순히 적장 하나를 죽인다고 끝나지 않는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철흠기를 죽이는 것은 지나치게 근시안적인 행동이었다. 만약 그를 죽여 뒤의 병력을 끌어낸다면 그 또한 나쁜 일은 아니겠으나, 그리될 경우 무림맹 병력은 적과 쓸데없이 교전해야 하고 그 과정에서 수없이 많은 병사가 목숨을 잃을 것이다.
싸워야 할 때는 용맹하게 싸운다. 그러나 싸울 필요가 없는데도 싸우는 것은 쓸데없는 개죽음일 뿐이다.
결정적으로, 철흠기 하나 죽이는 것은 문제가 아니지만, 그로 인해 조정연검을 쓴다면 그다음에 덤벼들 일왕이란 작자와는 순수한 실력으로 붙어야만 한다.
연위는 집단전으로 붙을 각오는 했지만, 일대일 겨룸에서 일왕을 넘어설 수 있을 거라고 자신하지 못했다. 말했듯 싸워야 할 순간에는 목숨을 걸고 싸우겠지만, 그런 식으로 목숨을 날려 봤자 아군에게 피해만 끼칠 뿐이다.
그 모든 것을 상정한 연위의 조정연검은 사람이 아닌 지형을 향할 수밖에 없었고, 기어이 나름의 성과를 얻었다.
철흠기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거기 그놈들은 포병인가? 재미있군. 어디 한번 넘어와 보거라. 일개 화포 정도로 화신의 교도들을 막을 수 있는지, 적장인 네놈이 직접 확인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놀랍게도 철흠기는, 그 말을 끝으로 정말 등을 돌려 산맥 너머로 돌아갔다. 당연히 그를 따라온 고수들 역시 돌아갔다.
그러지 않으려고 했지만, 연위는 적의 순진함에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이로써, 모든 준비가 끝났다.
“홍 장군.”
“예.”
홍운이 말없이 오백 포병을 전면에 내세웠다.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하여 연위 역시 포병과 같이 움직였으며, 남은 수비대 인원 천오백 명 역시 포병들 좌우에서 방패를 세웠다.
“중포 배치.”
구십 장 안쪽까지 접근한 오백 포병들이 일제히 거치대를 놓고 열 관이 넘는 중포를 그 위에 장착했다.
홍운이 연위에게 물었다.
“몇 발이 필요합니까?”
“천 발이면 충분하오. 다만, 내가 지정하는 곳에 정확히 발사해야 하기 때문에 열 문씩 한 곳을 쏜 이후 대기했으면 하오.”
“이해했습니다.”
“지정된 곳에 모두 명중하면, 남은 포로 사격 지점 윗부분에 무차별 포격을 날리면 될 것이오.”
홍운은 연위가 무엇을 노리는지 알 수 없었지만, 곧장 고개를 숙였다.
“명심하겠습니다.”
잠시 후.
열 명씩 조를 나눈 오백 포병들이 화탄을 장착했다.
“일 조 사격 준비.”
연위가 산맥 좌측 하단부의 한 지점을 향해 장군검을 겨누었다.
우웅.
검극사기가 피어오르며 두터운 장군검의 검첨을 푸르게 물들였다.
연위의 눈에 신광이 어렸다.
번쩍!
검첨에서 쏘아진 푸른 기운이 빠르게 날아가 산맥의 한 지점에 도달했다.
퍼석!
검으로 겨눈 부분에 작은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위력은 약하지만, 사격 지점이 어디인지 알려 주기엔 충분했다.
홍운이 외쳤다.
“발포하라!”
콰콰콰쾅!!
제영사의 소형 화포와는 소리부터가 달랐다.
엄청난 기세로 날아간 열 발의 화탄이, 연위가 발산한 검경에 맞은 위치에 정확하게 떨어졌다.
콰쾅! 쿠르르릉!
대지가 진동하고 하늘이 신음했다.
연위는 신속하게 산맥의 하단, 중단 부분을 가리키며 검경을 발사했다. 그러자 이 조, 삼 조, 사 조 순으로 열 발씩 화포를 발사했다.
콰르르르르릉!
산맥 전체가 신음을 토해 냈다.
잇따라 이십여 군데를 화탄으로 박살 내니 철흠기와 고수들이 재차 산맥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느닷없는 포격으로 뭘 하려는 건지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연위는 그들의 존재를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나머지 지점을 침착하게 알려 주었다.
콰콰쾅! 콰콰쾅!
천지가 뒤바뀌며 마구 뒤섞이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서른한 번째 지점까지 적중했을 때.
쿠구구구궁!!
산맥이 비명을 질렀다.
그것은 비유였지만, 도무지 비유라고 생각되지 않을 만큼 엄청난 굉음이 울려 퍼졌다.
그제야 철흠기는 연위가 무엇을 의도했는지 깨달았다.
그래서 경악했고, 동시에 주춤했다. 설령 그의 생각이 맞다 한들, 이것은 산맥의 맥점을 미리 둘러보지 않고서는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철흠기가 주춤하는 사이.
마지막 서른여덟 번째 조가 화탄을 쏘아 냈다.
콰아아앙!
마지막 열 발의 화탄은 유독 화려한 굉음을 토해 냈다.
그리고.
쿠구구구궁! 쿠구궁! 콰릉!
산맥이 진동하며 조금씩, 하지만 눈에 띄게 비틀어졌다.
산맥 전체의 결을 조정연검으로 파악한 연위의 얼굴은 다소 창백했다. 그러나 그의 표정은 여전히 담담하기만 했다.
홍운이 외쳤다.
“전탄 명중! 전탄 명중!”
치이이익!
“남은 조는 사격 지점 윗부분에 포격을 가하라! 이후 전원 추가 발포하라!”
콰콰쾅! 콰콰콰쾅!
엄청난 굉음과 함께 육백이십 발의 화탄이 산맥을 횡으로 뒤흔들었다.
잠시 후.
산맥이 앞뒤로 요동치며 거대한 산사태를 일으켰다.
중천포는 대단한 위력을 지녔지만, 천 발을 쐈다 한들 산 하나를 통째로 무너트릴 만큼의 위력을 지니진 못했다.
연위의 심검이 산맥의 가장 약한 부분, 결을 노려 사상누각으로 만들어 버렸기 때문에 이와 같은 일이 가능했던 것이다.
“전원 오백 장 밖으로 물러나라! 산이 무너진다!”
화신(火神)의 추종자들을 상대로 화포를 동원해 산을 통째로 치워 전장을 형성하는 불의 마왕(魔王).
산이 낮아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