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122)
1122화. 서전(緖戰), 그리고 서전(西戰) (2)
“그런가.”
어두운 방 안.
몇 개의 대황촉 위로 타오르는 불꽃이 황제의 얼굴에 짙은 음영을 드리웠다.
하지만 황제 앞에서 꼿꼿이 허리를 펴고 앉은 탁무자는, 그림자 진 천자의 얼굴에서 아무런 음기(陰氣)도 느낄 수 없었다.
‘맑고도 밝도다.’
탁무자의 얼굴에 미소가 드리워졌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져도, 이제 저 얼굴에 그림자가 질 일은 없을 것이다.’
그는 무당파 최고 배분의 어른으로서, 혹은 반선의 경지를 이룬 무신으로서가 아닌 그저 한 명의 사람으로서 황제를 보았다.
‘정체와 변화, 평화와 대란이 반복되던 두 번째 세상에서 이처럼 용(龍)과 같은 천자가 또 있었는가.’
탁무자는 스승에게 들었던, 이제는 기억하고 공부하는 이조차 없는 고사(古事)를 떠올렸다.
과거, 모든 법도가 무너지고 지상에 괴력난신이 들끓던 시대.
무명의 장수가 고향을 잃음에 한탄하여 칩거하다가, 노장이 되어 돌아와 수십만 군병을 이끌고 괴력난신들을 없애 버렸다고 하였다.
이후 세상은 다시 발전하여 수백 개의 나라가 세워졌고 다시 불도와 선도가 일어나 무맥(武脈)을 발전시켰다.
까마득한 과거의 역사는 사라지지 않은 채 세상에 퍼졌고 수백의 나라는 이내 하나로 통합되어 또 한 번 제국이 되었다.
제국과 함께 강호 무림도 번영하였으며 시간은 흐르고 또 흘렀다.
무수히 많은 사람이 태어나고 그만큼 많은 사람이 죽기를 반복한 시대.
그러고도 세상은 크게 발전하지 않았다. 천 년, 이천 년이 지나도 하늘은 세상을 굽어보았고 땅은 모두를 받아 주었다.
마치 시간이 고정되어 버린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 고정된 것만 같았던 시간은 기어이 흐름이라는 것을 만들었으며, 평화로웠던 제국과 무감하기 그지없던 강호 무림은 변화의 시기를 맞이하였다.
제국은 무너졌다가 부활하길 반복했다. 이름만 달라졌을 뿐, 제국은 여전히 존재했다.
강호 무림은 무너지지 않았기에 부활할 필요도 없었지만, 그 안에서 숱한 싸움과 죽음이 반복되며 지닌바 무공과 술법을 발전시켰다.
모두가 살고, 또 살다가 죽어갔으니 이렇다 할 사건도 별로 없었던 수천 년의 시간은 사람들의 기억에 잔향을 남기지 않았다.
하지만 시대는 수백 년 전부터 향을 남기기 시작했으며, 또 한 번 무너졌다가 다른 이름으로 태어난 제국은 극과 극의 황제들을 배출해 냈다.
그렇게 이번 제국도 서서히 몰락하려던 중, 고정된 역사에서 찾아보기 힘든 용 한 마리가 태어났다.
그것이 지금의 황제였다.
‘이제야 보이는구나.’
무당의 봉우리에서 상단전을 고치며 세상을 굽어보던 긴 세월보다, 땡중과 함께 땅을 밟고 질주한 지난 몇 달의 세월이 훨씬 더 많은 것을 알려 주었다.
탁무자가 보기에, 이번 황제는 명군의 자질을 타고난 이였다.
태평성대에 태어났다면 제국의 힘을 유례가 없는 수준으로 끌어올렸을 것이고, 난세에 태어났다면 세상을 하나로 만들어 법도를 바로잡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 신룡과 같은 황제가 태어난 시기는 너무나도 어정쩡했다.
그 어정쩡한 세상을 더 낫게 만들기 위해 황제는 민심을 살폈고, 어떤 학자보다도 많은 것을 머리에 담았으며, 신중하고 과감하게 정책을 펼쳤다.
하지만 광신삼교가 암암리 득세하여 황궁을 장악한 이후, 황제의 노력은 물거품이 되었다.
다행히도 황제는 자신의 목표와 꿈을 잊지 않았으며, 자신이 하려는 일이 후대로선 불가능하다는 것도 깨우쳤다.
결국 수십 년간 바보로 살던 황제는, 삼교를 몰아내려는 강호 무림의 의지 덕분에 다시 그 날개를 활짝 펴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
그 자신을 위해서가 아닌 전후의 세상을 위해서.
잃어버린 수십 년의 시간을 오롯이 백성을 위해 쓸 작정으로 화정을 연마하는 황제의 얼굴에, 그늘은 사라졌고 어둠은 불타올랐다.
“흑제성주가 그리 말했단 말이지.”
“그렇습니다.”
황제가 미소를 지었다.
“참으로 대단한 자야. 그대가 보기에도 그러한가?”
탁무자가 고개를 숙였다.
“흑제성주이자 연가의 장남인 연호정은, 이 별 볼 일 없는 늙은 도사가 지금껏 보아 온 어떤 사람보다도 뛰어난 인재입니다. 한때는 그 과격함과 짙은 혈향에 우려를 표하기도 하였으나, 이제는 세상을 위한 선봉장으로서 무한한 신뢰를 보내도 될 듯합니다.”
“나는 그리 생각지 않네.”
“예?”
황제가 고개를 저었다.
“과격하다는 평가 말일세. 난 그 부분만큼은 다르게 생각한다네.”
“황공하옵니다.”
“내가 본 흑제성주는 이 세상 누구보다도 선한 자야.”
탁무자의 눈이 커졌다.
“그렇습니까.”
“나 역시 진물 가득한 눈에 다시 빛을 담기 시작한 직후에는 흑제성주의 그릇이 제 아비인 연가주보다 아래라 생각했지.”
“…….”
“하나 지금은 그 생각을 철회하네. 그렇다고 흑제성주의 그릇이 연가주보다 크다고는 보지 않으나, 못하다고도 생각하지 않아.”
“허허.”
“흑제성주는 지금껏 단 한 번도 과격해 본 적이 없었어. 그저 슬퍼했을 뿐이지.”
이건 또 의외의 말이었다. 탁무자가 자신도 모르게 반문했다.
“슬퍼했단 말씀입니까?”
“그렇다네. 흑제성주는 이 세상이 피에 젖지 않기를 바라고 있어. 인간사 분란과 전쟁, 희생과 탐욕이 사라지지 않는 것은 어쩔 수 없지. 그이도 그것을 알아. 하지만 그런 세상에 저항하며 평화를 이루려 하는 건 결국 사람이라는 것 또한 알고 있지.”
“……!”
“흑제성주는 내 사람, 나아가 내 세상을 위해 몸부림치고 있다네. 그것은 단순히 내 고향을 지키는 것과는 다른 문제야. 말은 내 사람을 위해서라고 하지만, 결국 흑제성주가 바라는 것은 전쟁이 아니라 평화라네.”
황제의 눈이 은은한 빛을 발했다.
“그래서 그는 과격해 본 적이 없네. 그저 미친 듯이 슬퍼했을 뿐이야.”
“…….”
“이제 내 눈에는 그것이 보인다네.”
뭐가 되었든 연호정의 행동은 과격했다. 과격하다는 뜻 자체가 그러했다.
하지만 황제는 그렇게 보지 않는 모양이었다. 놀랍게도 탁무자는 황제의 눈에 어떤 것이 비치는지 알 수 없었지만, 왠지 그의 말을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밝음 뒤에는 어둠이 있다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어둠의 뒤편에는 언제나 빛이 따르고 있을 테지요. 흑제성주는 그 빛과 어둠을 전부 끌어안고 있는 사람이라 생각합니다.”
황제가 빙긋 웃었다.
“누가 지었는지 별호 한번 잘 지었지.”
“허허.”
그가 나직이 손을 흔들었다.
화르륵!
용이 손을 휘두르자 꺼져 있던 수십 개의 초에 불이 붙었다.
탁무자의 눈에 놀라움이 어렸다.
“폐하. 벌써 경풍(勁風)을 다루는 경지에 오르셨습니까?”
“그대 눈에는 그리 보이나? 나는 그저 빈구석에 화기를 나누었을 뿐이라네.”
황제가 엷은 미소를 지었다.
“불은 연료만 있다면 무한히 나누어질 수 있지 않은가.”
“……!”
탁무자의 눈이 흔들렸다.
왜일까? 황제의 저 단순한 말이 이상하게 가슴을 뒤흔들었다.
마치 깨달음의 실체를 확인하기 전과 비슷했다. 심장이 두근거렸으며, 묘하게 답답하고도 강한 기대감이 머리를 뒤흔들었다.
“여하간, 이번 전투가 끝나면 움직여야 한다는 뜻이로군.”
“그렇습니다. 흑제성주가 이미 폐하께 말씀을 드린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말은 했지. 다만, 그 시간이 예상보다 빨랐을 뿐이야.”
“…….”
“이왕지사 그렇다고 하니 짐 역시 준비를 해야겠네. 다만 돌아가는 상황 정도는 알아야 할 듯한데, 현재 전황은 어떠한가?”
탁무자가 눈을 빛냈다.
“소강 상태입니다만, 곧 전투가 벌어질 듯합니다.”
* * *
산 하나를 무너트린 후, 연위는 총 사천의 병력을 오 리(五里) 뒤까지 후퇴시켜 널찍한 방진을 만들었다.
방진은 두 겹이었고 전방에는 여전히 오백 포병이 포를 안착시켰다.
“지금 봐도 믿을 수가 없군요.”
홍운은 혀를 내둘렀다.
“중천포를 아무리 쏴 대도 산이 무너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도대체 무림장께선 어떤 조화를 부리신 겁니까?”
연위가 쓴웃음을 지었다.
“조화라고 할 것까지도 없소. 이 세상 모든 것에는 결이라는 것이 존재하는바, 나는 산의 결을 들여다보고 그것을 이용했을 뿐이오.”
홍운으로서는 이해하기 쉽지 않은 발언이었다.
하지만 그는 바보가 아니었기에 모르는 것을 이해하려 하는 대신 현 상황을 분석해 보기로 했다.
“저 산이 무너지며 적의 병력이 많이 줄었을까요?”
“그렇지 않소.”
“……?!”
“무너진 토사에 깔려 죽은 자도 있긴 있소만, 그 수는 지극히 적소. 많아야 이백 정도일까.”
이백 명이 그 자리에서 죽었다면 그야말로 학살이라는 말이 어울리지만, 이만이 넘는 병력 중에 이백이라는 숫자는 한 줌도 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전열을 정비한 후 공격하겠군요.”
“그렇겠지.”
홍운은 다시 긴장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연위는 믿을 수 없는 위업을 달성했지만, 적의 숫자는 거의 줄지 않았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전면전인데, 어떻게 생각해도 이만 대 사천은 불리한 싸움이었다.
그렇다고 연위의 용인술이 엄청나게 뛰어날 것 같지도 않았다. 연위를 향한 무인으로서의 존경심 외적으로, 무림인의 집단전 수행 능력이 황궁의 군대보다 좋기는 힘들다는 게 홍운의 판단이었다.
‘하지만.’
이 부대의 책임자는 연위였으며 홍운은 그의 명령을 따를 뿐이었다.
싸워 이길 자신이 있으니 먼저 적을 도발했을 것이다. 홍운은 그렇게 믿기로 했다.
스스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산이 무너진 후 무려 한 시진의 시간이 지났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 그러나 전투를 치르는 병사들 입장에서는 그 시간이 결코 길지 않았다.
연위는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무너진 산을 주시했으며, 그 상태로 홍운과 여러 얘기를 나누었다.
그 동안에 홍운은 연위에게 또 한 번 감탄했다. 군(軍)에 관한 지식으로는 자신이 위였는데, 문답을 통해 지식을 빨아들이는 연위의 재능은 그야말로 엄청난 것이었다.
처음 전술에 관한 얘기를 나눌 때와 지금 연위는 천지 차이였다. 그 잠깐 사이에 군과 진법, 대형에 관한 지식을 수도 없이 빨아들였다.
‘하지만 배워 이해하는 것과 그것을 실전에서 풀어 내는 것은 완전히 다른 영역이다.’
홍운은 손에 쥔 창을 만지작거렸다.
‘과연 어떻게 될는지.’
그때였다.
연위의 시선이 처음으로 하늘로 올라갔다.
저 멀리 좌측에서부터 시커먼 점 몇 개가 적 방향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한데 그 속도가 놀랍도록 빨랐다. 거리가 떨어져 있는 만큼 속도감을 느끼기가 힘들 텐데, 저 기묘한 날짐승들의 비행 속도는 상상을 초월했다.
그리고 그 몇 개의 점이 무너져 내린 산 뒤로 사라지는 순간, 연위는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홍 장군. 곧 적들이 돌격을 시작할 것이오.”
“예?!”
“전투를 준비하시오.”
스르릉.
장군검을 꺼내 든 연위의 몸에서 서릿발 같은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홍운이 병사들을 격려하자 사천 병력이 강렬한 군기를 형성해 냈다.
그렇게 다시 일각.
콰콰콰쾅!
무너진 산의 잔해들이 곳곳에서 폭발하며, 붉은 깃발을 든 기수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신화교 이만 오천 병력의 공세.
연위가 소리쳤다.
“화탄 장전! 무림맹 병력은 포수진(捕手陣)을 준비해라!”
화아아악!
검극사기가 불타올랐다.
시퍼런 기운이 불꽃처럼 타오르다가 어느새 연위의 미간으로 흘러 들어가 찬연한 광채를 발했다. 그러자 연위의 두 눈이 태양처럼 불타올랐다.
와아아아아!
함성을 지르는 북부군, 그리고 화신을 향한 성가를 부르는 신화군이 각기 다른 군기를 발산하며 전투를 준비했다.
황궁 전투, 삼마대혈전(三魔大血戰)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