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124)
1124화. 서전(緖戰), 그리고 서전(西戰) (4)
“대단하군.”
찰극평의 눈이 형형한 광채를 발했다.
“굉장히 잘 짜인 조직력이다. 각기 다른 훈련을 받았을 게 분명한데도 마치 오랜 시간 합을 맞춘 병사들처럼 철저하게 위치를 사수하는구나.”
각자가 전투 경험이 많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저런 움직임은 전투 경험만으로 해석할 수 없다.
‘지휘관이다. 지휘관의 능력이 뛰어난 것이야.’
전략 전술을 논하는 게 아니었다.
전군을 학살하듯 먹어 치워 버린 저 전술 능력도 대단하긴 했지만, 특히나 대단한 것은 적장의 존재감이었다.
‘우리처럼 강하고 패도적인 기세는 아니야. 하지만…….’
이 먼 거리에서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겠다.
적장, 연위의 존재감은 부드럽고 빈틈이 없었다. 그것은 그가 지닌 위명과 별개로 특유의 선비다운 기질 덕분일 것이다.
유연하고 고아한, 그러나 지극히 뛰어난 무공을 연마하며 자연스레 얻은 위엄이 출중한 매력이 되어 휘하 장수와 군병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이다.
‘고도의 상단전 수련자다.’
찰극평의 눈이 깊어졌다.
그 역시 누구 못지않게 상단전을 연마한 사람이었다. 그가 다른 화왕을 제치고 일왕에 등극한 것은, 세월 덕분이기도 하지만 극도로 신경 쓴 상단전 덕분이었다.
하지만 그가 보기에도 연위의 상단전은 지나칠 정도로 넓고 웅혼해 보였다.
‘나보다…… 아니, 어쩌면 과거 어르신보다도.’
반정으로 쫓겨난 기천웅이 폐관에 들기 전보다 더 웅대한 신기(神氣)를 머금은 자다.
오히려 상단전이 너무 대단해서 상중하의 균형이 위태로울 지경이었다. 저렇게까지 극단적으로 발달한 상단전의 소유자는 찰극평으로서도 처음 보았다.
‘아니, 한 사람 있긴 했지.’
그의 머리에 떠오른 사람은 아직 어리디어린 소녀였다.
어린 나이임에도 여신과도 같은 외모를 자랑하던, 그 외모가 조금 더 사내답게 각이 지고 선이 굵었다면 기천웅의 어린 시절과 소름 끼치도록 닮은 존재.
‘성녀.’
중원으로 간 기천웅의 딸이자 이름뿐인 성녀 기우희의 상단전이 저 무사의 상단전과 비견될 만했다.
말하자면, 백 년에 한 번 날까 말까 한 타고난 신기의 소유자를 떠올리게 할 만큼 적장의 상단전 크기가 압도적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전쟁은 상단전 하나만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니지.’
찰극평의 입이 열렸다.
“백화령(白火令)의 령주는 청홍(靑紅)의 화령을 이끌고 적을 무너트리도록.”
“일왕의 명을 받듭니다!”
백화령주 곤향이 소리쳤다.
“청홍은 양각(兩角)으로! 백화는 토염(吐炎)으로 진군한다!”
쿠르르르릉!
내공으로 몸을 가볍게 하여 돌진하면 그것이 바로 신법이다.
백화령은 물론 청화령과 홍화령 모두 신화교가 자랑하는 정예 부대였다. 당연히 그들의 무공 역시 뛰어났으니, 진을 형성했다 한들 달려 나갈 때의 발소리가 거의 없어야만 했다.
하지만 그 숫자가 일만에 달한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청화령 사천, 홍화령 사천에 백화령이 이천이다. 일왕 찰극평과 함께 움직이는 중군의 핵심, 은화령(銀火令) 오천 병력을 제외해도 그 수가 일만이니 대지가 진동했다.
연위의 눈이 번뜩였다.
‘기이하군.’
적의 숫자와 엄청난 군기를 제외하고도 돌진하는 형태가 무척 독특했다.
붉고 푸른 옷을 입은 각 사천 병력이 날카로운 일각진을 형성했다. 그 후미에는 새하얀 의복을 입은 고수들이 간간이 하늘로 화염을 뿜어대며 돌진했다.
그 모습이 마치 붉고 푸른 두 개의 뿔을 지닌 백룡(白龍)이 전진하는 것 같았다. 위압감도 엄청나서, 단숨에 본진이 휩쓸릴 듯한 위기감을 주었다.
연위의 얼굴에 비로소 긴장이 떠올랐다.
‘엄청난 위용이다. 이토록 탁 트인 개활지에서 저만한 부대와 부딪치는 건 자살 행위야.’
그걸 알고 있는데도 여기까지 왔다.
나아가, 그렇기 때문에 산을 뭉개고 전장을 만들어 낸 것이다.
아무런 변수 없이 부딪친다면 필패다. 황궁에 남아 있는 무극수들이 다 튀어나와도 아군 병력을 지킬 수 있을까 의문이었다.
전쟁은 문파 간의 싸움과 전혀 다르다. 무극수를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전국을 바꿀 수도 있겠지만, 달리 말하면 절대적인 무공을 지닌 그 무극수도 잘 고민해서 써야만 판을 뒤엎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전쟁은 숫자 싸움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연위가 거느린 병력은 숫자 싸움에서도 압도를 당하고 있었다.
‘시간은 충분히 끌었다. 남은 것은 저놈들을 받아 내는 것뿐.’
연위가 외쳤다.
“포수진 양익으로!”
맹곽의 눈이 흔들렸다.
무림맹 병력을 좌우로 나눈 채로 포수진을 형성하면 중앙이 빈다.
결국 그 중앙으로 몰려올 적군을 황궁 수비대가 맞아야 하는데, 어떻게 봐도 황궁 수비대의 실력으로는 저 압도적인 공세를 막아 내기 힘들 것 같았다.
하지만 명령은 떨어졌고, 맹곽의 고민은 빠르게 사라졌다.
“포수진 양익 개진!”
조금 전보다는 훨씬 좁게, 그러면서도 두껍게 좌우에 배치된 포수양익진은 철저하게 수비하기 위한 진법이었다.
그 방어력은 무림맹 진법 중에서도 단연 최상위권이다. 애초에 이 진법의 기초가 제갈세가에서 나왔고, 군사인 제갈문호가 직접 무림맹식으로 개량하여 완성했다.
절대 호락호락 당해 주지 않을 것이다.
백화령주 곤향이 외쳤다.
“다 쓸어 버려라!”
“아아아아아!”
또 한 번 성가를 부르며 전진하는 그들.
전군의 성가와 같았지만, 숫자와 무력에서 월등한 그들의 노랫소리는 또 하나의 무공이나 다름없었다.
스륵.
연위는 포수양익진 중앙에서 이십 장 앞까지 걸어 나갔다.
적장의 무공이 아무리 대단해도 일선 지휘관이 이렇게까지 홀로 나서는 경우는 거의 없다. 지휘관이 죽으면 그 병력은 허수아비가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림맹 병력도, 황궁 수비대도 연위가 절대 죽지 않을 거라고 믿었다.
그의 실력을 알기 때문이 아니었다. 연위가 뿜어내는 존재감이, 그의 눈빛과 목소리가 판관검이라는 무인을 절대 무적의 방벽으로 바꾼 것이다.
그렇게 청홍의 두 뿔이 연위의 좌우로 들이닥칠 때였다.
장군검이 섬광을 발했다.
콰콰쾅!
한 줄기 벼락이 되어 좌우를 휩쓰는 장군검.
검에서 솟구친 벼락인지, 하늘에서 쏟아진 벼락인지 분간이 가질 않는다. 홍화령 이십, 청화령 삼십의 교도들이 그 열기 가득한 검기에 휩쓸려 가루로 변해 버렸다.
“……!!”
멀리서 그 광경을 보던 찰극평은 가마에서 벌떡 일어났다.
‘뭐지?!’
벼락과도 같은, 그러나 벼락과는 너무나도 다른.
마치 세상 모든 열기를 품에 안은 태양과 같이.
상상을 아득히 초월하는 두 번의 검격으로 인해 청홍의 두 뿔이 끝에서 싹둑 잘려 나갔다.
스으윽.
찰극평의 머리카락이 제멋대로 꿈틀거렸다.
염제신화공(炎帝神化功)이 저도 모르게 폭발하며 일대를 날려 버릴 뻔했다. 그 정도로 충격적인 무공이었다.
‘벼락도, 화염도 아니다. 저것은…….’
한참이나 멀리 떨어진 연위의 검안(劍眼)과 찰극평의 화안(火眼)이 정면으로 부딪쳤다.
‘빛이다. 빛으로 이루어진 검이야.’
문득 찰극평은 십수 년 동안 잊고 지낸 호승심이라는 괴물이 저 뱃속에서부터 으르렁대고 있음을 깨달았다.
‘빛을 검에 담는다? 대체 어떤 무공이기에?!’
빛은 고정되지 않는다. 그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고정되지 않기 때문에 힘의 집약도 불가능하며, 힘이 집약되지 않으면 천하제일고수가 휘둘러도 아무 위력이 나오지 않는다.
한데 적장은 대체 어떤 수를 써서 빛을 검에 담아 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진정하자. 놀라운 무공이지만, 지휘권자인 내가 움직일 필요는…….’
그때였다.
적장의 장군검에 또다시 휘황찬란한 빛이 어렸다.
쾅! 콰쾅! 쾅!
빛살처럼 휘둘러진 두 번의 검격에, 청화령과 홍화령의 고수들이 또 뭉텅이로 스러졌다.
그야말로 기가 막힌 광경이었다. 청화령과 홍화령은 비록 신화교 최강은 아니라지만, 정예라 불리기에 손색이 없는 부대였다.
그런 부대의 교도들이 몇 번의 검격으로 또 백수십 명이 죽어 나갔다.
찰극평의 눈이 번뜩였다.
적장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그의 민감한 감각은, 이토록 정신 사나운 전장에서도 상대의 호흡이 살짝 흐트러졌음을 알아챌 수 있었다.
“은화령주는 명이 떨어지는 즉시 백화령의 후미로 붙어 적들을 휩쓸도록.”
훅!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찰극평의 신형이 백화령의 머리 위를 날았다.
연위의 눈이 반짝였다.
‘온다!’
적장은 물론, 청홍의 뿔 두 개 역시 순식간에 일각진을 만들어서 돌진했다.
연위라는 괴물이 있음에도, 그로 인해 이백에 달하는 아군이 죽어 나갔음에도 그들은 끝까지 대형을 유지하며 전진했다.
전군(前軍)이 가지지 못한 강력한 정신력이 거기에 있었다. 연위의 무력에 경악하고 질려 버리기까지 했으나, 그것이 전선을 이탈하는 이유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연위 역시 더 이상 두 뿔을 공격할 수 없었다. 적장이 직접 나선 이상, 최대한 힘을 아껴야만 했다.
청홍의 쌍각이 포수양익진과 부딪쳤다.
콰콰쾅!
폭음이 터지며 또 한 번 피와 살점의 안개가 일었다.
동시에, 백화령의 선두를 지나친 찰극평이 연위를 향해 손을 뻗었다.
연위가 장군검을 휘두르려던 찰나.
훅!
갑작스레 공력을 회수한 찰극평이 휘어지듯 날아오르며 연위를 지나쳤다.
깜짝 놀란 연위는 그 즉시 찰극평의 노림수를 읽었다.
“홍 장군!”
“산개해라!”
찰극평의 쌍장이 불을 뿜었다.
콰르릉!
양손에서 뿜어진 두 개의 불기둥이 황궁 수비대 후미를 향해 날아갔다.
열화신장이었다. 기천웅보다는 아래지만, 그 역시 보는 이가 넋을 놓을 만큼 위대한 무공을 구사하는 절대고수였던 것이다.
“피해라!”
콰쾅! 콰앙!
쌍장 일격에 궁병과 포병 팔십여 명이 불에 탔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충격을 받은 화포 삼십 문이 바닥에 나뒹굴었고, 화약을 갖고 있던 포병들의 주머니가 섬광을 뿜었다.
콰콰쾅!!
연쇄 폭발이 이어지며 무려 이백여 명의 포병이 전사했다. 단 한 번의 기습으로 이뤄 낸 엄청난 전과였다.
이것이 바로 무극의 고수가,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에 제때 나서서 이룰 수 있는 전과였다.
그리고 그것은 연위도 마찬가지였다. 연위는 홀로 나서서 전군과 중군 두 뿔의 기세를 꺾었다. 연위 정도의 고수가 아니라면 절대 불가능했을 일이었다.
두 적장이 서로가 해낼 수 있는 가장 큰 일을 해내는 순간.
번쩍!
섬광이 되어 날아간 한 자루 장군검이 찰극평의 등판을 노렸다.
찰극평은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상대가 공격해 올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허공에 뜬 상대에게 어검술(馭劍術)이라는 지고의 검도(劍道)를 날릴 줄은 몰랐다. 어검술을 쓸 줄 안다는 거야 이룬 경지가 있으니 놀랄 일도 아니지만, 이렇게나 빠르고 파괴력 넘치는 어검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파아아앙!
엄청난 발경으로 허공에서 방향을 튼 찰극평이 황궁군의 좌측에서 나타났다.
연위가 따라붙지 않는다면 측면에서 몰아칠 것이요, 쫓아온다면 적장을 붙드는 사이 청홍과 백화가 적을 무너트릴 것이다.
그것이 찰극평의 생각이었다.
그리고 연위는, 그런 찰극평을 향해 날아갈 수밖에 없었다.
차아아아앙!
어디론가 날아가 버린 장군검은 내버려 둔 채, 천라제국검을 뽑아 든 연위가 질풍처럼 돌진했다.
찰극평이 씨익 웃었다.
“오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