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135)
1135화. 삼마대혈전(三魔大血戰) (9)
쿠르르릉!
널찍하게 퍼져 나가는 흙먼지는 동심원을 그리며 그 안에 어떤 존재의 출입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연호정의 눈이 번뜩였다.
‘광혈.’
같은 마공은 아니지만 공유하는 무언가가 있다. 과거 사천에서 싸웠던 사제장, 그리고 청해에서 싸웠던 귀신과 본질적으로 유사한 마기를 드리우는 강자였다.
지마후가 외쳤다.
“지마신령은 성벽을 공략해라!”
훅.
일천이 넘는 마인들이 두 사람을 빙 둘러 성벽을 향해 돌진했다.
은호마병과 금천기마단의 싸움조차도 무시하고 달려 나간다. 경력의 반경 범위를 한참이나 넘어서서 돌진하는 그들의 속도는 어떤 기마 못지않았다.
후우우웅.
마인들의 질주로 어지럽게 춤을 추던 바람이 사뿐하게 가라앉았다.
지마후가 음험한 목소리로 말했다.
“쫓아가지 않는군.”
“네년을 죽인 연후에 가야지.”
“과연 네 실력으로 그게 될까?”
연호정의 반응은 담백했다.
“그런 너절한 얘기는 집어치우고 제대로 붙어 볼까.”
담담하게 흘러나오는 목소리엔 초연함마저 묻어난다.
그 눈빛과 목소리, 태도를 보면 삼교를 향해 무한한 증오를 불태웠던 이전의 연호정과 천지 차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마후의 눈이 깊어졌다.
‘듣던 것과 달라.’
이번 전쟁이 벌어지기 전, 그녀는 대륙에 관한 정보를 있는 대로 수집해 머리에 담았다.
그중 가장 인상적인 고수라 하면 역시나 연호정이었다.
강호 육대세가 중 정통 검학으로 이름 높은 연가의 장남으로, 어린 시절엔 사고뭉치라는 평가를 받다가 어느 순간 두각을 드러내 일대 고수로 성장한 사내.
나이가 어리다고 폄하할 만한 무력이 아니다. 오히려 그 연배에 강호 정상급 고수가 되었으니 더더욱 눈여겨봐야 할 존재였다.
‘분명 삼교를 향한 광적인 증오심을 지니고 있다 했는데.’
삼교 소속 교도들과 만나면 거의 학살에 가까운 일을 자행한다 들었다.
연호정에게 당한 고수는 시신도 멀쩡하지 않다고 했다. 도대체 어디에서 기인한 증오인지 알 수 없으나, 점점 삼교 사이에서도 연호정과 싸우는 것을 기피하는 자들이 늘어나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이렇게 마주한 연호정에게서는 딱히 이렇다 할 증오심이 보이지 않았다.
기도는 고요했고, 눈빛에도 흔들림이 없었다.
피범벅이 된 거대한 도끼는 보는 것만으로도 기가 질릴 정도였지만, 그것뿐이었다. 멀리서 봤으면 이놈이 싸우러 온 건 맞는지 의아할 정도로 침착했다.
‘그래도 강하다.’
참마도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강해. 감숙에서 봤던 당가주보다도 더.’
경지의 차이를 떠난 문제다.
지마후는 연호정에게서 알 수 없는 압박감을 느꼈다. 달리 살기도 없고 불처럼 거센 증오나 분노도 없는데, 쉽게 칼을 휘두르기가 힘들었다.
뭐라 형용할 수 없는 존재감. 지마후는 그러한 존재감이 강자의 전유물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넌 못 이겨.’
지마후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대장전(大將戰)이라면 오히려 내가 원하던 바다.’
스륵.
천천히 자세를 낮추는 그녀의 몸에서 은은한 흑회색 안개가 피어올랐다.
기감이나 촉감을 떠나, 그 빛깔만으로도 불길함을 자아내는 마기였다. 세상 어떤 고수라도, 설령 그녀보다 강한 성천이라도 그 마기에 께름칙함을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연호정의 얼굴은 여전히 무심했다. 그간 숨겨 두었던 힘을 본격적으로 끄집어내는 지마후를 마주하고도 아무 영향을 받지 않는 듯했다.
우우우우웅.
황룡기가 잔뜩 집약된 광룡부가 은은한 진동을 발했다.
지마후의 눈이 가늘어졌다.
‘저 힘…… 왠지 거슬려.’
거슬린다면 시원하게 격파하면 그뿐.
그녀가 힘차게 일 보를 밟았다.
일대를 뒤흔들 정도로 엄청난 진각이 나올 줄 알았는데, 땅을 밟은 발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훅.
소리 없는 강한 탄력.
어느새 지마후가 연호정의 코앞까지 도달했다.
보고도 믿기지 않는 속도였다. 마치 연호정이 황룡을 깨우치기 전, 주작공의 혈익휘천을 보는 듯했다.
쩌어어엉!
내리치는 참마도에 만근의 무게가 실렸다.
그저 정면으로 돌진하고, 또 그저 위에서 아래로 내리쳤다.
단순하기 그지없는 움직임의 연속인데도 연호정은 그녀의 무공을 피하지 못했다.
빠르고 현묘했다. 직선적인 동작 속에 한평생 쌓아 올린 온갖 무리(武理)를 담아내고 있었다.
서너 걸음 뒤로 물러나는 연호정, 지마후는 곧장 그를 따라잡아 참마도를 휘둘렀다.
쩌저정! 쩌어엉! 쩌어어엉!
쇠망치로 철구를 후려치는 듯하다.
비할 데 없는 진동음에 땅 곳곳이 갈라졌다. 지마후는 순식간에 이십사도(二十四刀)를 휘둘렀다.
쩌저저정! 쾅! 콰쾅!!
굉장한 돌진력, 놀라운 파괴력이었다.
연호정은 지마후의 깨달음에 무척 놀랐다.
광룡부만큼은 아니지만, 상대가 든 참마도 역시 둘째가라면 서러운 중병(重兵)이었다. 그런 중병을 이처럼 빠르고 유연하게 휘두른다는 건, 무기술에 대한 상대의 깨달음이 지고하다는 걸 뜻한다.
단순히 힘이 좋고 내공이 풍부하다고 이런 일이 가능하진 않다.
손가락의 미세한 움직임, 그로 인한 부드러운 방향 전환과 병기의 움직임을 따라 흐르는 내공력이 다음, 그리고 또 그다음의 공격을 유연하게 이어지도록 만들어 주고 있었다.
쩌저저저저저정!!
중병과 중병이 부딪치니 사방으로 시퍼런 불똥이 튄다.
팔십 근이 넘는 광룡부와 오십 근이 넘는 참마도의 신들린 격돌이었다. 지마후의 공격은 빠르고 정확했으며, 연호정의 방어는 탄탄하고 완전했다.
퍼석! 퍼퍼펑!
도끼와 칼에 실린 경력이 폭발하며 팔방으로 충격파를 생산했다. 부서진 경력을 타고 흐른 충격파는 땅 이곳저곳을 폭발시키고 허공에 무자비한 압력을 만들었다.
하지만 그처럼 놀라운 승부를 이어 가는 두 사람의 얼굴은 신중하기만 했다.
초절정고수라도 세 합을 버티기 힘든 초고수들 간의 격전이지만 아직 제힘을 다 끌어내지 않았다. 그것은 연호정도, 지마후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강하게 압박하여 상대의 빈틈을 끌어내려 했던 지마후는, 자신의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빈틈이 없다. 아니, 안 생긴다.’
쩡! 쩌정!
참마도가 긋고 지나간 허공에 두껍고도 서늘한 도끼날의 잔영이 일었다.
지마후의 눈이 흔들렸다.
‘이런 놈이 있나.’
광혈교의 마공은 능히 천하제일을 논할 만하다.
특히 내공 생성에 유리하여, 어느 정도만 익혀도 비슷한 경지의 다른 무사들을 한참이나 초월하는 내공량을 지닌다.
그래서일까? 광혈교의 고수들 대부분은 넘치는 내공을 이용해 압도적인 힘과 지구력으로 적을 박살 내는 데에 능했다.
지마후는 달랐다. 그녀는 마공의 힘만 믿고 설치다가는 최고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진즉부터 깨닫고 있었다.
하여 오랜 세월에 걸쳐 병기술 등 모든 분야에 손을 대었고, 덕분에 광혈교에서 손에 꼽히는 깨달음의 소유자가 되었다.
그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던 그녀는 자신 못지않은, 아니 자신 이상의 깨달음을 지닌 상대를 마주하며 조금씩 초조함을 느꼈다.
‘강하다. 깨달음의 깊이가 엄청나. 내 칼을 받아 내고도 흔들리지 않을 만큼 강인하고, 저 커다란 도끼를 휘두르면서도 빈틈을 드러내지 않을 만큼 탄탄하다.’
상대도 거병(巨兵)을 휘두르는 자인 만큼 힘에 대한 자신이 과하여, 단점을 무시하고 장점을 극대화한 무공을 구사할 줄 알았다.
틀렸다.
황룡을 깨닫기 전에도 공격과 방어, 회피와 반격에 지극히 뛰어난 사신의 무(武)를 익힌 그였다. 파괴력에 치중되어 있다곤 하나, 하려면 공방 일체의 무공을 손쉽게 구사하는 사람이 연호정이었다.
그런 연호정의 무는 황룡을 깨닫고 개화하여, 극도로 발달한 상단전의 초능(超能)으로 사신무(四神武)의 깨달음을 동작 하나에 녹일 만큼 상승했다.
지마후의 깨달음으로는 연호정을 어찌할 수 없다. 황룡을 깨닫기 전이라 해도, 병기술에 관한 깨달음으로는 이기기 힘들었을 것이다.
콰앙!
유독 강하게 내친 일도(一刀)에 연호정의 몸이 삼 장이나 뒤로 밀려 나갔다.
지마후의 볼이 살짝 떨렸다.
상대에게 충격을 줬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특유의 손맛이 없었다.
“너…….”
연호정의 표정은 여전히 담담했다.
자세와 기도 양면에 흐트러짐이 없었다. 마지막 일격을 받아 내고 물러난 것 역시 충격을 상쇄하기 위함일 뿐, 딱히 대단한 위협을 느낀 것은 아니었다.
지마후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졌다.
“똑바로 하지 못하냐?!”
연호정은 대답 없이 그녀를 주시했다.
오히려 그가 이렇게 나오니, 지마후로서는 열이 안 받을 수가 없었다.
지금껏 그녀와 싸웠던 이들은 하나같이 어떠한 감정이란 걸 보여 줬다. 그것이 분노가 되었든 공포가 되었든, 그녀는 상대의 감정을 읽고 빈틈을 만들어 공격하는 데에 능했다.
하지만 연호정에겐 그런 게 없었다.
차분했고 무심했다.
지마후로서는 지금껏 겪어 보지 못한 상대였다. 평범한 비무였다면 별문제가 되지 않았겠지만, 문제는 이곳이 전장이라는 사실이었다.
아군이 공격받는 상황이라면 누구라도 마음이 급해질 수밖에 없을 터. 한데 상대는 왜 이리 침착한가?
“그렇군.”
일그러졌던 지마후의 얼굴에 잔혹한 미소가 떠올랐다.
“자칫 내 꾀에 내가 넘어갈 뻔했어. 네가 아무리 무심을 가장한다 한들, 이 나를 상대로 무덤덤하긴 힘들 것이다.”
“…….”
“제대로 붙지 않는다면, 어디 제대로 붙을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 줄까?”
훅!
지마후의 몸이 허공을 날았다.
찰나지간 방향을 틀어 성벽 쪽으로 달려가는 그녀의 의지는 명백했다. 적장이 아니라 적의 병사를 공격해 혼란을 유도하겠다는 것이었다.
파악!
연호정이 그녀의 뒤를 쫓았다.
엄청난 속도였다. 연호정의 천종운행비는 혈익휘천에 버금가는 속도를 내고 있었다.
어느새 뒤에 바짝 붙은 연호정의 존재를 느끼며, 지마후의 눈이 번뜩였다.
‘여기!’
화아아악!
광혈교의 천지일마공(天地一魔功)이 개방됨과 동시에 지마비신(地魔飛神)의 신법이 펼쳐졌다.
천근추를 쓴 듯 엄청난 속도로 하강한 그녀가 하늘을 향해 일도를 휘둘렀다.
지마후의 절기, 용마십도(龍魔十刀)의 용행참(龍行斬)이 펼쳐졌다.
아니, 펼쳐지려 했다.
‘……?!’
찰나의 순간.
지마후의 민감한 감각은 허공에 뜬 연호정의 모습이 조금 흐릿하다는 걸, 그의 존재감 역시 묘하게 약하다는 걸 깨달았다.
번쩍!
본능적으로 몸을 틀어 전방으로 칼을 휘두른다.
참마도의 참격을 따라 솟구친 시커먼 용형(龍形)의 도기가 벼락처럼 돌진했다.
콰앙!
폭음과 함께 자욱한 먼지가 솟구쳤다.
동시에 먼지구름을 뚫은 손 하나가 지마후의 얼굴을 향해 날아왔다.
기겁한 지마후가 지마비신의 비기를 한 번 더 펼쳤다.
번쩍!
벼락과 같은 속도로 물러났지만, 구름을 뚫고 나타난 손의 소매 안에서 쇠사슬이 불길한 소리를 내며, 그녀의 신법보다도 빠르게 쏘아졌다.
피할 수가 없다. 지마후는 이를 악물며 참마도를 치켜들었다.
치리리리리링!!
교룡쇄가 참마도의 도신을 칭칭 감았다.
어느새 가라앉은 먼지 사이로, 연호정의 금빛 안광이 드러났다.
‘이게 뭐야?!’
자신의 뒤를 따라오는 줄 알았는데, 그것이 허상이었단 말인가?
그리고 이 쇠사슬은 뭔가? 어떤 기물이기에 이렇게까지 길게 늘어나는가?
생각은 짧았다. 지마후는 상대의 빈틈을 우도하려다가 자신이 빈틈을 드러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으아압!!”
힘차게 참마도를 내리쳐 쇠사슬을 끊으려던 지마후는, 이내 자신의 두 발이 허공으로 떠오르고 있음을 발견했다.
‘미친!’
치리링! 치리링!
허공 높이 떠오른 와중에도 늘어난 교룡쇄가 그녀의 칼과 손목, 나아가 팔뚝까지 휘감았다.
연호정이 힘차게 상반신을 틀었다.
콰아앙!
반원을 그린 지마후가 대지에 틀어박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