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140)
1140화. 삼마대혈전(三魔大血戰) (15)
혼란으로 가득한 전장 속.
일 군장 부곡은 허탈함을 느꼈다.
‘이럴 수가 있는가.’
실수였다.
그는 마병장 갈요만큼 대국을 보는 눈이 뛰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현장 지휘관으로서 넘치도록 충분한 기량을 보유한 남자였다.
황궁의 기병을 압박했을 때, 그 역시 갈요처럼 함정이 있음을 예측했다. 서로 대화를 나누진 않았지만, 기병의 벽을 뚫고 들어가다가 다시 후방을 노려 돌격시킨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그런데도 함정에 빠졌다.
‘저자 때문이다.’
화아아악!
거리가 제법 떨어졌는데도 인간 같지 않은 기도를 느낄 수 있었다.
가히 파멸적인 살기를 흩뿌리며 돌격하는 서부 전장 최강의 무사였다. 주인 잃은 흑혈신마를 어떻게 다스렸는지, 사음교에서도 손에 꼽힌다는 희대의 마물을 타고 돌진하는 모습이 전설상에 나오는 악신(惡神) 그 자체였다.
‘저자 때문이야.’
부곡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나아가 은호마병이 저 남자의 살기와 압박감에 완전히 홀려 버렸다는 것을.
‘다른 생각을 할 수 없게 만드는 존재감이었다. 결국 우리는 저자가 이끄는 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었어.’
진실을 깨달았는데도 현실은 나아지지 않았다.
아니, 그들이 맞이한 현실은 최악 중의 최악이었다.
‘괴물이 따로 없구나. 듣기로 벽산의 패왕이라는 자가 젊은 나이에 천사지경에 도달했다 했는데, 단순히 사왕급의 강자가 아니라 중원 최강을 논하는 전력이었단 말인가.’
기세면 기세, 무공이면 무공.
어느 하나 부족함이 없는 괴수였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대단한 것은 저 존재감이었다.
전장의 흐름을 스스로 이끌어, 적에게서 다른 생각을 할 여유조차 빼앗아 버리는 압도적인 존재감.
부곡의 머리에 ‘패배’라는 글자와 ‘몰살’이라는 글자가 앞을 다투며 떠올라 사고를 어지럽혔다.
‘벗어날 수 있을까?’
마음속에서 바로 튀어나오는 대답.
‘불가능하다.’
놔줄지도 의문이지만, 은호마병의 성격상 여기서 퇴각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
‘회군해 봤자 죽을 것이다.’
본디 은호마병은 정예로 개편될 수 없는 이들이었다.
물론 훈련은 오랫동안 받았다. 새외를 넘어 서역까지 돌격해 작은 나라 몇 개와 수많은 이민족의 부족들을 섬멸하며 목숨을 건 실전을 벌였다.
하지만 그들은 문제아였다. 수장부터 조장들까지, 사음교 본단 출신이 한 명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한 명 있긴 하지만.’
부곡은 이 군장 묘사하를 바라보았다.
묘사하는 마병들을 독려하고 있었다. 중독되어 피눈물을 철철 쏟는 마병들에게 명령을 내려 전열을 가다듬는 그의 능력은 발군이었다.
‘자네 인생도 참 쉽지 않군.’
은호마병은 오랫동안 훈련만 했지, 정식 조직으로 개편되지 않았다.
놀랍게도 그들이 하나의 정예 조직으로 발탁된 건 대륙 때문이었다.
본래 삼교의 계략대로 황궁이 신화의 손에 들어오고 무림이 피폐해졌으며, 그중 사천 땅까지 광혈의 손에 넘어왔다면 일만의 은호마병은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거기서 부곡은 재미있는 점을 발견했다.
‘이자들이야말로 우리를 탄생케 한 이들인데.’
어느 시점부터 대륙 무림은 삼교의 간자들을 박살 내고 파견한 고수들을 죽였다. 고작 몇 년 새에 수십 년 동안 꾸민 계략 대부분이 망가진 것이다.
결국 사음교는 은호마병을 정식 조직으로 만들 수밖에 없었다. 본디 그들에게 들어갈 자금과 술법, 마물들은 후대를 위해 아껴 두고 있었는데 적의 반격이 예상보다 훨씬 매서웠다.
즉, 대륙이 되살아났기 때문에 은호마병도 정식 부대가 되어 진군할 수 있었다. 은호마병은 대륙의 패망에 앞장서야 할 집단이지만, 그들에게 고마움을 느끼지 않을 수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 상황은 어떤가.
‘뒤는 없다. 어차피 사신(邪神)께서는 우리를 살려 주지 않으실 것이야.’
설령 사신께서 관용을 베풀어 주신다 한들, 휘하 사왕과 원로들은 패잔병이 된 은호마병을 멸시하며 잡졸로 취급할 것이다.
죽었으면 죽었지, 그런 꼴을 볼 수는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은호의 전과가 결코 작지 않았음을 알려 줄 사람이 필요해.’
은호마병의 전신(前身)이 된 부대는 사음교 최강의 부대였다. 그리고 그 부대의 대장은 묘사하의 배다른 형제였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 최강의 부대를 이끄는 자라면, 남은 마병들을 귀속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군장!”
“말씀하시오!”
정신없이 마병들을 독려하는 그를 향해, 부곡이 웃으며 외쳤다.
“자네는 이 군을 데리고 회군하게!”
묘사하의 눈이 부릅떠졌다.
“그 무슨 개소리요! 은호마병은 후퇴하지 않소이다!”
그때, 사 군장 망초가 말을 이끌고 다가왔다.
“적들은 우리가 상대할 테니 이 군장은 가시오.”
“사 군장!”
“대장부터 마병장까지 다 죽었소. 남은 병력도 이천이 채 되지 않아.”
“그러니까 더더욱……!”
“우리는 패배했소.”
망초의 입에서 기어이 패배라는 단어가 나왔다.
쉽게 할 말이 아닌데도 쉽게 나왔다. 현실을 받아들인 것이다.
“패배한 싸움이라 하나,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지. 이곳은 우리의 묘지요.”
“그러니까 나도……!”
“은호의 정신은 사음의 정신과 또 다르오.”
“……!!”
“굴욕적이더라도 살아남으시오. 살아남아서, 끝까지 이들을 책임져 주시오.”
“말도 안 돼! 그게 굳이 나여야 할 필요는 없어!”
“아니, 묘 군장이어야만 하오. 묘 군장이 마병들을 데리고 가야 우리가 잡졸 취급을 받지 않소이다.”
묘사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망초가 히죽 웃었다.
“우리가 얼마나 큰 전공을 세웠는지, 어떻게 산화했는지 말해 줄 사람이 필요하오. 기억해 줄 사람이 필요해.”
“사 군장!”
그때, 부곡이 외쳤다.
“선임 군장으로서의 명령이다! 이 군장 묘사하는 남은 이 군을 데리고 전장에서 이탈하라!”
이 군의 마병들이 묘사하를 돌아보았다.
짧은 순간, 묘사하의 표정이 몇 번이나 바뀌었다.
부곡이 다시 외쳤다.
“항명할 셈이냐!!”
결국 묘사하는 판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이 군 전원은 나를 따르라!”
말머리를 돌려 삼 군과 사 군, 오 군을 지나치는 묘사하의 두 눈에 피눈물이 흘렀다.
언제 죽어도 괜찮다는 마음으로 살아온 목숨이었다. 그는 그 목숨을 은호를 위해 바치겠다고 다짐했다.
죽는 것보다도 고통스러운 삶일 것이다. 묘사하는 군장들의 진심을 받아들였다.
콰콰쾅!
이 군이 빠지자마자 폭음과 함께 수십 기의 마병들이 육편이 되어 산화했다.
첨병을 부수며 전진하는 도끼를 든 괴물, 연호정이었다.
“더 못 데려간 게 아쉽긴 해도 말입니다.”
저 멀리 학살극을 벌이는 연호정을 보는 망초의 얼굴에 투지가 샘솟았다.
“저만한 상대라면, 우리의 마지막 상대로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부곡이 피식 웃었다.
“그래, 충분하지.”
충분하다 못해 과할 지경이었다. 뭐가 되었든, 적어도 어중이떠중이 손에 걸려 죽는 것보다는 나은 죽음이 될 것이다.
부곡이 마기를 한껏 끌어올려 외쳤다.
“우리의 마지막 싸움이다! 한 놈이라도 더 저승길 길동무로 삼아라!”
“카아아아악!!”
괴이한 함성과 함께, 이천도 채 남지 않은 마병들이 연호정과 방패기병을 향해 질주했다.
개인의 죽음이 아닌 은호마병이라는 집단의 죽음을 감수하고 돌진하는 마병들.
하나같이 중독되어 온몸으로 피를 뿜는데도 거침없이 돌격하는 그들의 모습은, 마(魔)에 인생을 바친 자들답지 않게 숭고해 보였다.
이각 후.
금천기마단의 방패기병 일천을 희생양으로 삼은 은호마병이 전멸했다.
* * *
퍼어억!
마지막 군병 하나의 머리를 날려 버린 연호정이 호흡을 가다듬었다.
“허억! 허억!”
나 혼자 다 죽이겠다는 각오로 싸웠다. 상당한 내상은 물론 극단적인 내공 소모로 인해 온몸에 피로가 가득했다.
연호정은 입을 다문 채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우우우웅!!
피와 죽음, 독과 승패의 공기가 한데 섞여 들어왔다.
들어온 공기는 탁한 자연지기를 온몸에 풀어놓았다. 그중 질이 안 좋은 기운은 황룡의 씨앗이 모조리 불태워 버렸고, 남은 순수한 기운은 황금빛 진기로 변환시켰다.
“후우, 후우.”
순식간에 호흡이 안정되었다.
푸르르륵.
흑혈신마가 투레질을 했다. 호흡 조절 과정에서 중간중간 신왕기의 운용을 멈췄기에 혼란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연호정이 이광을 바라보았다.
이광 역시 성벽을 타고 오르려는 지마신령을 모조리 물리치고 돌아왔다.
짙은 피로로 얼룩진 이광의 얼굴, 하지만 그의 두 눈은 별빛처럼 찬란했다.
연호정이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광이 소리쳤다.
“적을 몰살했다! 우리의 승리다!”
“우와아아아!”
여기저기서 ‘황제 폐하 만세!’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신앙은 삼교만의 특징이 아니다. 이들 역시 하늘의 자식이라는 황제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다.
함성으로 가득한 서쪽 성벽 일대의 땅이 지진과도 같은 진동을 일으켰다.
하지만 흥분도 잠시였다.
“수고했소, 단주.”
“정말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사령관님.”
“대략 삼백 기 정도 되는 적이 도주했소. 아마 다시 오지는 않겠지만, 추격조를 편성하여 쫓도록 하시오.”
이광의 눈이 반짝였다.
“명을 받듭니다.”
“그리고 남은 전력은 반 각의 휴식 후, 북부 전선으로 향할 것이오.”
이미 사전에 다 얘기가 되어 있던 사항이었다. 이광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연호정은 재차 숨을 고르며 북쪽을 바라보았다.
싸움에 집중하느라 그쪽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신경 쓰지 못했다. 빠르게 내공을 회복하며 기감을 넓히니, 군기는 그득해도 살기는 없었다.
‘역시 후퇴하여 이곳으로 시선을 돌리게 할 요량이었군.’
만약 연위가 병력을 이끌고 이곳으로 왔다면, 물러났던 신화의 병력은 최속으로 북부 성벽을 향해 돌진했을 것이다.
‘아버지. 약속을 지키셨군요.’
만약 이 마음이 전해졌다면, 연위 역시 화답했을 것이다.
‘너 역시 약속을 지켰구나.’
서쪽 전장을 정리했으니, 남은 것은 북부 기습 부대 하나뿐이다. 비록 그 수가 많았지만, 이제는 전면전으로 부딪칠 만했다.
반 각 후.
“전원 북부 전장으로 간다! 남은 적을 북부군과 함께 모조리 쓸어 버린다!”
* * *
찰극평의 눈이 흔들렸다.
‘이상해.’
삼십 리 바깥까지 물러나니, 저 멀리 황궁의 서쪽 성벽이 흐릿하게 보였다.
‘왜?’
지금쯤 사음과 광혈의 군대가 성벽을 허물고 내부로 침투했어야 했다.
설령 황궁의 반격이 만만치 않더라도 바람을 타고 전해지는 군기라도 있어야 했다. 한데 그런 것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어째서?!’
그때, 오 화왕 철흠기가 말했다.
“설마 실패한 것일까요?”
“말도 안 되는 소리.”
은호마병은 ‘어떤 부대’를 전신으로 한 군대였다. ‘그 부대’가 전신이라면 그 무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안 봐도 알 수 있다.
하물며 거기에 마후(魔后)의 호칭을 받은 마녀도 끼어 있다.
절대 실패할 수 없는 싸움이었다. 저항이 만만찮았다 한들, 마후라면 금세 성문을 박살 내고 내부로 침투하여 황궁 일대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놔야만 했다.
‘설마, 정말로?’
우리가 모르는 일이 터진 것일까?
정말 철흠기 말대로 그 작전이 실패로 돌아간 것일까?
“음?”
순간 철흠기의 눈이 깊어졌다.
“저건……?”
상념에서 빠져나온 찰극평이 철흠기가 보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기마대?”
“은호마병입니까?”
찰극평은 화정의 기운까지 끌어다가 안력을 틔웠다.
잠시 후.
“군을 양익으로 나눈다! 곧장 진군할 것이다!”
찰극평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화정의 신안에 포착된 기마대는 은호마병이 아니었다. 그 기마대는 금빛 찬란한 중갑을 걸치고 있었다.
그리고 금빛 기마대의 선두에는 거대한 흑색 도끼를 든 어느 무장(武將)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