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143)
1143화. 전선 교체(戰線交替) (3)
콰르르릉!
종진으로 치고 들어가는 공격을 유지한 채, 어느 순간 좌우로 미친 듯이 횡격을 가해 적진을 갈아 버리는 한 명의 기병이 있었다.
거대한 도끼, 그리고 그 도끼의 창대처럼 시커먼 몸체를 지닌 거마(巨馬)를 타고 적진을 휩쓸어 버리는 연호정의 존재는 평야 전투에 있어서 압도적인 위력을 발했다.
경지 이전에 같은 피를 공유하는데도, 연호정의 무공은 연위의 무공과 너무나도 달랐다.
연위가 그 신에 이른 어검술로 적을 공격할 때 최고의 환경은 평야가 아니라 산야, 혹은 시가지(市街地)였다. 어디서 날아올 줄 모르는 어검의 비술은 적에게 있어 공포 그 자체다.
하지만 궁극의 파괴력으로 적을 쓸어 버리는 연호정의 무공은 산야나 시가지보다 이런 평야가 어울린다.
그리고 그것은 신화교의 고수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달라.’
저도 모르게 연위를 피해 연호정이 이끄는 군대와 마주친 찰극평은, 새 시대의 무신(武神)이 구사하는 무공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저놈의 무공은 기공 위주가 아니다. 어떤 의미로는…….’
찰극평의 시선이 저 먼 우측의 전장을 향했다.
오 화왕 철흠기가 이끄는 부대를 쫓아가는 신검(神劍)과 권신(拳神).
‘저 둘을 합쳐 놓은 것 같다.’
상단전이 발달한 찰극평의 눈에는 보였다. 연호정의 무공이 강력한 내공과 파괴적인 병기술의 조화 이전에, 인간 의지의 한계를 넘어선 상단전의 힘으로 구현되고 있다는 것이.
‘보이기만 저리 보일 뿐, 상중하가 완벽하게 일체화되어 있다. 천화에 오르며 불균형해진 삼단(三丹)을 굳이 바로잡지 않고 그 자체로 완전을 꿈꾸는 우리와는 달라.’
퍼어어엉!
생각을 거듭하면서도 찰극평은 열화신장, 염왕팔권을 연달아 쳐 냈다.
연호정은 그의 공격을 놓치지 않았다. 적의 첨병을 마구 격파하면서도 귀신처럼 흑백쌍룡부를 날려 보내 찰극평의 공격을 무위로 돌렸다.
그러고도 흔들림이 없다.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정말 무(武)의 신(神)이 깃들기라도 한 듯 모든 것을 보고 모든 것에 대처한다.
‘…….’
찰극평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안 된다.’
더 강한 전력으로 단숨에 몰아붙여 적을 물리치는 것.
그것이 바로 기본적인 승리의 공식이었다. 그 공식을 벗어나서 적을 없애기 위해서는 기가 막힌 책략이 필요하다.
하지만 지금 그들에게는 그러한 책략도 없었고, 변수를 바라기도 힘든 상황이었다.
‘이대로는 안 돼. 또 한 번 병력을 나눌 수도 없는 노릇이다.’
서부 전투의 패배를 직감하는 순간 병력을 나눠 마지막으로 황궁을 공략하려 했다.
‘이번 전투는 실패다.’
황궁에 남아 있는 전력이 많다 한들, 성벽을 뚫고 침투하면 그 전력 대부분을 밀어 낼 자신이 있었다. 평야에서 싸우는 것도 아니며, 황궁 내부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으니까.
하지만 뚫지 못한 채 이런 식으로 소모전을 치르게 되면, 결국 잘해야 양패구상이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으려 했건만.’
초전을 승리로 이끌고 싶었다.
그 마음은 모두가 똑같을 테지만, 그중 신화교는 반드시 초전을 승리로 이끌어야만 했다. 이 전쟁이 시작된 이유 자체가 신화교에 있기 때문이었다.
‘지금 상황에선 적의 수를 하나라도 더 줄이는 것보다 아군 병력을 유지하는 게 낫다.’
답은 나왔다.
하지만 자꾸만 주저하게 된다. 그만큼 이번 전투는 중요했다.
‘역시, 시간을 더 지체할 수는 없다.’
찰극평이 품에서 작은 연통 하나를 꺼내 하늘로 겨누었다.
퍼엉!
연기가 화려하지도, 소리가 크지도 않은 화통. 철흠기에게 보내는 후퇴 명령이었다.
파아아아악!
아군 틈에 섞여 연호정을 공격하던 찰극평이 단숨에 첨병 부근까지 날아와 외쳤다.
“그만!”
모든 내공을 쏟아부어 외친 일갈이었다.
돌격하려던 첨병이 주춤했고, 금천기마단과 함께 미친 듯한 공세를 펼치던 연호정 역시 흑혈신마를 다독였다.
화아악!
찰극평의 몸에서는 여전히 막강한 화기가 넘실거리고 있었다.
연위와의 싸움에서 큰 손해를 입었다지만, 그의 실력은 중원 최강자들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을 만큼 뛰어나다. 몇 번의 호흡으로 내공을 회복하는 것은 연호정이나 성천들만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네놈이 필시 연호정이란 놈이렷다.”
찰극평의 목소리는 유독 담담했다. 모든 것을 다 내려놓은 듯했다.
얼굴에 묻은 피를 닦아 내며, 연호정이 대답했다.
“그렇다.”
“나는 신화교의 찰극평이라 한다.”
“지금 와서 통성명이나 하자고?”
여유롭기 그지없는 목소리였다.
내상에 극심한 내공 소모로 정상이 아닌데, 불이 붙은 기세로 인해 찰극평보다도 더 멀쩡하게 보인다.
찰극평의 눈이 깊어졌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다. 우리는 이만 빠지겠다.”
연호정의 눈이 반짝였다.
“패배를 인정하는가.”
모두가 보고 있는 앞이었다. 제아무리 담백한 성정을 지닌 사람이라도 그걸 인정할 수는 없었다.
“그럴 리가. 싸움이 지속되면 결국 너희도 다 죽을 거라는 걸 알고 있을 텐데?”
“고로 우리의 승리를 장담할 수 있지. 알고 있잖아? 황궁에 예비 전력이 득실거리고 있다는 거.”
“피 흘리는 호랑이라도 고양이 떼에 당하진 않지.”
“그러니까 그 호랑이부터 족치면 되지 않겠나?”
너만은 반드시 죽이겠다는 뜻이었으며, 실제로 지금까지의 전투는 찰극평이 나설 수밖에 없도록 연호정이 주도한 것이었다.
찰극평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신 있나?”
순간 연호정의 두 눈에 살기가 어렸다.
“그러는 너희는 이 개자식들아, 자신이 있어서 병력 끌고 여기 쳐들어왔어? 그래 놓고 목표지 점령도 못 한 주제에 얌전히 후퇴하는 것도 다 자신 있어서 하는 일이냐?”
“…….”
“어디서 씨알도 안 먹힐 개소리를 하고 있어. 후퇴? 너희는 여기서 다 죽어.”
번쩍!
연호정의 몸에서 솟구친 황금빛 기운이 어느새 거대한 용형(龍形)을 만들어 냈다.
황금빛 가루를 연기처럼 자욱하게 퍼트리며 올라온 거대한 용의 대가리는 천신(天神)처럼 신화교의 병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분노로 치솟은 의지와 살기가 신왕기를 움직여 황룡 그 자체를 형상화한다. 일부러 내보이고자 내공을 쥐어짜 만든 것이 아닌, 내공 스스로가 영성을 지녀 모습을 드러내는 현현환상(顯現幻像)이었다.
지옥공을 뿌리로 둔 황룡신왕공의 힘이요, 실체였다. 예전보다 더 커지고 위엄 있게 변한 황룡의 모습은 지금의 연호정 그 자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놀랍군.’
찰극평의 눈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기세에 편승해 하는 말이 아니다.’
자신보다 많이 다쳤고, 내공 소모도 극심하다.
찰극평은 연호정을 이길 자신이 있었다. 저 모습을 보기 전까지는 그러했다.
하지만 지금은?
‘진짜로 자신이 있었군.’
동귀어진도 아니다. 놈은 진심으로 자신을 죽이고 신화의 대군을 몰살할 생각이다.
그것이 무의미한 자만의 발로가 아니라는 게 놀라웠다. 저 정도 되는 고수라면 딱 봐도 상대와의 차이가 느껴질 텐데도 나름의 확신을 갖고 있었다.
찰극평은 상대의 확신이, 상대가 연성한 불가해한 무공 덕분이라는 걸 알았다.
동시에 자신 때문이라는 것도.
‘내 기세가 꺾였다.’
이 전투를, 이 대군을 나 자신처럼 여겼다.
하지만 철흠기가 이끄는 오천의 기병(奇兵)들과 자신이 이끄는 화령들을 합쳐도 채 일만 이천도 남지 않았다. 끌고 온 이만 오천의 병력 중 일만 삼천이나 희생되어 버린 것이다.
와중에 전군(前軍) 오천을 제외하면 신화교 내에서도 나름대로 정예라 평가받는 이들이 다수 사망했다.
이것은 치명적이다. 차후 대륙과의 전쟁에서 승리한다 한들, 신화교는 교세 확장에 힘을 써도 당분간 사음과 광혈의 눈치를 봐야 할 것이다.
그리고…… 지금 황궁 측과 동귀어진을 하면 그 시간이 훨씬 더 늘어나게 될 것이다.
찰극평이 쓴웃음을 흘렸다.
“불쏘시개로 건드렸더니 바위를 던지는군.”
“뭔 소린지 모르겠고, 알고 싶지도 않다. 죽을 준비는 됐냐?”
“그렇다면 이건 어떠냐.”
“뭐.”
“이만 전투를 끝내면 우리는 향후 삼 년 동안 대륙을 건드리지 않겠다.”
연호정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언제부터 네놈이 교주가 되었냐?”
“당연히 난 교주가 아니다.”
“교주도 아닌데 그런 개소리를 해?”
“솔직하게 말하지. 내가 이런 말을 한다 한들, 교주님께서 그렇게 하자고 허락하시진 않을 것이다.”
“당연하지. 나라도 안 해.”
“하지만 나와 내가 이끄는 부대는 대륙을 공격하지 않겠다. 삼 년 동안은.”
연호정이 눈살을 찌푸렸다.
찰극평이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어떤가? 꽤 매혹적인 제안 아닌가?”
찰극평 개인과 그가 이끄는 부대는 중원을 공격하지 않을 것이다?
얼핏 듣기에도 말이 안 되는 교언이었다. 찰극평 개인이야 그렇다 쳐도, 그가 이끄는 부대가 어떤 부대인지 연호정은 알지 못한다.
설령 대군을 이끈다 한들, 그중 일부만이 내 부대였다며 거짓말을 해도 이쪽에서는 알 방법이 없다.
즉, 찰극평이 건넨 제안은 약속이 될 수가 없다. 그것이 상식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찰극평 개인으로 한정한다면 얘기가 조금 달라진다.
사실상 대군을 끌고 침공하니 마니 하는 얘기는 없는 셈 쳐도 된다. 연호정이 주시한 건 찰극평이라는 존재 그 자체였다.
찰극평은 고수였다. 어느 정도의 고수냐 하면, 삼군과 사왕은 물론 삼제라도 압도적인 승리를 장담하기 힘든 고수였다.
그만한 고수의 존재는 전장의 판세에 영향을 끼친다. 비록 오십 기의 훈련된 기마병들도 대동했지만, 창왕 소현립이 등장하지 않았다면 섬서 전투가 어떻게 되었을지는 장담할 수 없다.
문제는 그 말도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걸 교주가 허락하겠나?”
“허락하실 수밖에 없다.”
“이유는?”
“화신(火神)의 이름을 걸고 맹세할 테니까.”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화신의 이름을 걸든 네 부모의 목숨을 걸든, 내가 그걸 믿을 것 같으냐?”
“전장에서 뱉는 말이다. 만 명의 목숨을 담보할 수 있는 약속이지.”
“뭘 어떻게 말해도 난 안 믿어. 너라면 믿겠냐?”
찰극평은 솔직하게 말했다.
“그래. 나도 안다. 나라도 믿지 않았겠지.”
가만히 찰극평을 노려보던 연호정이 이광에게 말했다.
“금천기마단을 백 장 밖으로 물리게.”
“존명.”
연호정이 턱으로 찰극평의 뒤를 가리켰다.
찰극평의 입이 열렸다.
“모두 백 장 밖으로 물러나라.”
“존명!”
잠시 후, 두 사람이 물린 군대가 백 장 밖에 도착해 주둔했다.
찰극평이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말이 하고 싶어서 군대까지 물리는가.”
“마음에 드냐?”
“뭐?”
“지금의 신화교가 마음에 드냐고.”
“……그걸 네놈에게 대답할 이유가 없다.”
“내 비록 불덩이 보고 신이라고 싹싹 빌며 기도한 적은 없지만, 적어도 기천웅 교주가 신화교의 주인이었을 때가 지금보다는 훨씬 나았으리란 것 정도는 확신할 수 있다.”
“…….”
“대답을 듣고 싶군. 정말 그랬나?”
찰극평이 눈이 차가워졌다.
“나를 배신자라 욕하고 싶은 것이냐?”
“맞아, 아니야?”
“그에 대해 네놈에게 할 말은 없다.”
“맞군.”
“…….”
철컹.
광룡부를 어깨에 걸친 연호정, 어느새 그의 등 뒤에서 일어난 황룡은 사라져 있었다.
“삼 년 동안 전장에 나서지 않겠다고?”
“그렇다.”
“내가 그 말을 못 믿는다는 건 이해한댔지?”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것이냐.”
“내가 믿을 수 있게 해 봐.”
“뭐?”
연호정이 턱으로 황궁을 가리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