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144)
1144화. 전선 교체(戰線交替) (4)
찰극평은 헛웃음이 나오는 걸 느꼈다.
“내가 설마 그 제안을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하느냐?”
“군대도 물렸고, 듣는 사람도 없는 판국이니 우리 솔직하게 얘기해 보도록 하자고.”
연호정의 목소리는 점점 담담해졌다.
“너는 아까 자신이 있느냐고 물었다. 나도 다시 물으마. 너는 진심으로 이번 초전을 승리로 이끌 수 있다고 자신했느냐?”
“물론이다.”
“요녕에 군대를 비치해 황궁과 무림의 시선을 잡아 두고 전력을 그쪽으로 쏠리게 하려 했지?”
“…….”
“하지만 너희는 곧장 달려들지 않았다. 그 시기를 가늠해 보자면, 우리가 요녕으로 군대를 보내기도 전이라는 걸 쉽사리 예측할 수 있다.”
“…….”
“요녕에서 치고 들어온 병력과 함께 기습하면 좋고, 아니라도 상관없었다는 뜻이다. 중요한 건 이쪽의 전력을 분산하는 것이었어. 황궁은 넓기 때문에 어느 한 부위에 전력을 집중하면, 다른 곳을 뚫기가 무척이나 수월해지기 때문이다.”
“…….”
“즉, 너희는 기습전을 준비하면서 이미 감숙과 섬서의 전력까지도 염두에 두었다는 결론이 나온다.”
표정 변화는 없었지만, 찰극평은 가슴 한편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역시 다 알고 있었군.’
하긴, 그걸 예측하지 못했다면 서부 전투를 승리로 이끌지도 못했을 것이다.
“한 가지 의아한 것은 감숙과 섬서, 두 지역의 전투가 삼교의 승리로 끝났을 경우다. 만약 그랬다면 광혈과 사음의 병력이 곧장 내부로 치고 들어가거나 지역을 점령하기 위해 동분서주했을 터. 그랬다면 너희와 힘을 합쳐 황궁을 노린다는 계책은 아무 의미가 없어지게 된다.”
“……!”
“네놈이 그걸 몰랐을 리가 없다. 그렇다고 그놈의 ‘자신’만 갖고 이만 오천의 군대로 황궁을 넘보려 한다? 말도 안 되는 일이지.”
“…….”
“그렇다고 황궁이 아닌 다른 지역을 노리기도 애매하다. 이것은 행군에 관한 얘기가 아니야. 비록 무공을 익혔다고는 하나, 이만 오천이나 되는 대군의 목적지를 즉각 바꾸어서 어딘가를 공략한다는 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그 말은 무엇을 뜻하는가?
연호정은 확신을 담아 얘기했다.
“감숙과 섬서의 전투가 너희 쪽의 승리로 끝난다 한들, 너희의 공격 목표는 달라지지 않는다. 이만 오천의 군대는 설령 도와주는 군대가 없더라도 단독으로 황궁을 노렸을 것이다.”
“…….”
“그 과정에서 병력이 몽땅 산화한다 한들, 너희는 그랬을 것이다. 아니, 정확히는 오 화왕인지 뭔지 하는 놈은 그러지 않을지 몰라도 너는 그랬을 거란 말이다.”
“…….”
“왜일까? 황궁에 어떤 전력이 모였을지 모르니, 일단 부딪치고 보자는 뜻일까? 아무 생각도 없이?”
“…….”
“그 중요하다는 초전에?”
찰극평은 묵묵히 연호정의 말을 들었다.
여전히 표정엔 변화가 없다. 하지만 연호정은 알 수 있었다. 찰극평의 눈이, 기도가 미세하게나마 흔들리고 있다는 걸.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정말 놀라웠다. 상황에 따라 영물에 가까운 전서응을 운용하거나 소형 화포로 그때그때 명령을 전환한다는 건 가능한 경우의 수를 사전에 전부 대비했다는 뜻이다. 대비야 다 할 수 있는 거지만, 그런 복잡한 명령 체계를 순간순간 대응하여 움직였다는 것만으로도 지휘부와 군대가 싸움에 능숙하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래서.”
찰극평의 목소리는 한결 더 차가워졌다.
“무슨 말이 하고 싶어서 그리 말이 많은 것이냐.”
“교주의 명령이었지?”
“…….”
“도와주는 군대가 없어도 장렬히 부딪쳐 산화하라. 그게 교주의 명령 아니었나?”
“……!”
“역시 내 예상이 맞았군.”
찰극평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그게 뭐 어쨌다는 것이냐? 신화교의 주인은 교주다. 교주의 명령에 목숨을 거는 것은 신도들의…….”
“그런데도 너는 그 명령을 따르지 않는군.”
“뭐?”
“적당히 싸웠으니까 이만 돌아가겠다고? 교주의 명령은 그게 아니었잖느냐?”
“……!!”
“이미 짐작했지만 애써 모른 척하고 있는 것 같군.”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네놈들의 교주는 너희를 희생양으로 삼았다.”
“……닥쳐라.”
“닥쳐야 할 것은 현실을 외면하는 네놈의 가식이요, 열어야 할 것은 너의 두 귀다.”
“…….”
“신화교는 스스로 전쟁을 일으켰다. 설령 이번 초전에서 승리하고 북부를 점령했다 한들, 먼저 전쟁을 일으킨 것에 대한 비난은 신화교를 향할 것이다. 나아가 중원 침공에 있어서 삼교 중 가장 큰 피해를 본 곳이 어디냐고 하면, 단연 신화교를 들 수 있다.”
“이놈……!”
“신화교는 삼교 중 가장 큰 피해를 입었고, 그 피해를 복구하기 위해서는 많은 세월이 필요하다. 그런 와중에 전쟁까지 일으켰으니 보통 무리를 한 것이 아니지.”
찰극평의 턱이 툭 불거졌다.
연호정의 목소리는 점점 무색투명해졌다.
“신화교주는 약간의 면죄부라도 얻기 위해 이만 오천의 대군을 희생양으로 삼은 것이다.”
“닥치라고 했다!”
“삼교의 힘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내가 가장 잘 안다. 지금껏 그들이 힘을 합쳐 전쟁을 일으키지 않은 것은 최소한의 피해를 원하기 때문이야. 그래서 수십 년을 획책하여 중원의 힘을 바닥까지 끌어내리려 했다.”
“…….”
“하지만 그런 게 없어도, 더 큰 피해를 감수하더라도 삼교는 이길 거라는 자신감이 있었다.”
연호정의 눈이 깊어졌다.
“사음교, 그리고 광혈교. 두 곳은 단독으로 무림과 전쟁을 일으킬 만한 전력을 구비하고 있다. 그리고 전쟁은 벌어졌어. 이제는 사음과 광혈 역시 뜨뜻미지근하게 계략 따위를 벌이진 못한다. 교도들의 눈을 절대 무시할 수 없을 테니까.”
“…….”
“전쟁은 시작되었다. 결과를 떠나 사음과 광혈도 많은 피를 흘릴 것이다.”
“…….”
“그런 상황이라면, 오히려 신화교는 힘을 비축해야만 한다. 사음과 광혈이 분노를 참지 못하고 신화부터 칠 수 있기 때문이야. 하지만 드러난 사실만 보면 오히려 신화교주는 전쟁을 일으켰다는 사실 자체로 만족했으며, 이만 오천이나 되는 병력을 없애 버릴 생각까지 하고 있다.”
“…….”
“답은 하나다.”
광룡부를 쥔 연호정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지금의 신화교주는 신화교를 포기했다.”
“닥치지 못할까!!”
쿠르르릉!
솟구치는 염제신화공이 무시무시한 기파를 쏟아 냈다. 그 기세가 얼마나 강렬했는지, 흑혈신마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치려 했다.
신왕기로 흑혈신마를 진정시킨 연호정이 말을 이었다.
“정확히는, 너희가 바라는 신화교를 포기한 것이다. 당대 교주가 어떤 인간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놈의 목표는 살육과 파괴에 그칠 뿐 더 나은 집단에 대한 욕망이 없다.”
쿠르릉. 쿠르릉.
찰극평의 두 손에 시뻘건 화염이 넘실거렸다.
그 화염 주위로는 은은한 전광마저 번뜩이고 있었다. 힘을 한계까지 끌어올린 것이 분명했다.
연호정은 당황하지 않았다.
당황하지 않았기에, 그는 치명적인 한마디를 던질 수 있었다.
“너와 저 오 화왕을, 교주가 신뢰하는가?”
“……!!”
“대답해 봐라. 왜 교주는 너희 둘을 초전의 장수로 삼았느냐?”
“…….”
“너희 둘을 그렇게까지 신뢰했기 때문일까?”
찰극평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두 손에서 뿜어져 나오는 화염은 점점 그 기세를 잃어 갔다.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무사는 무공으로 자신의 진심을 말한다고 했다. 내가 나타난 순간부터 넌 이미 패배를 예감했어.”
“…….”
“내가 널 이길 수 있다고 자신한 이유가 거기에 있다. 너는 이 부대를 죽이고 싶지 않아. 없애고 싶지 않다. 후일을 도모키 위함이든 뭐든, 너와 네가 끌고 온 군대의 기세는 군기(軍氣)와 거리가 멀어.”
“…….”
“교주의 신뢰를 받고 무조건 이기기 위해 왔다면, 너의 기(氣)는 더 찬란하게 불타올랐어야 했다.”
후우우웅.
염제순화공의 힘이 절반 이하로 줄어들었다.
이제 찰극평은 눈까지 감고 있었다. 대화 중이라도 적장을 앞에 두고 눈을 감는다는 건, 그만큼 그가 받은 충격이 크다는 뜻이었다.
연호정은 기습하여 그를 공격할 생각이 없었다.
“너와 오 화왕은 교주에게 신뢰를 잃은 이들이 아니더냐?”
“…….”
“혹은 필요성을 잃었다고도 볼 수 있겠지. 뭐가 되었든 교주는 너희 둘이 죽어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의 이 추측은…….”
“…….”
“너의 반응으로 인해 사실이 되었다.”
찰극평이 눈을 떴다.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그 눈에 소용돌이쳤다.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그런 자를 위해 목숨을 바치지 마라, 찰극평.”
“네놈이 무언데 내 충성의 가치를 논하는가.”
“네 적이다.”
“…….”
“적이기 때문에 이러는 것이다. 이대로 죽어 버리는 것도 좋지만, 너의 마음을 바꿀 수 있다면 그 또한 우리에게 득이 되기 때문이야.”
연호정은 지나칠 정도로 솔직하게 말했다.
“숱한 노력 끝에 중원은 하나가 되었다. 고수진만 보면 아직도 삼교가 우위에 있지만, 너희는 침공하는 입장이고 우리는 방어하는 입장이야. 만만치 않은 싸움이 될 것이다. 그런 와중에 너만 한 고수가 전선을 완전히 이탈하거나 우리와 손을 잡는다면, 이보다 더 좋은 일은 없을 것이다.”
“…….”
“너의 꿈과 목표가 무엇인지 나는 모른다. 하지만 이것 하나만큼은 확신할 수 있다.”
연호정의 눈이 가늘어졌다.
“너는 지금의 교주보다, 일천 교도들을 이끌고 중원에 온 기천웅 전대 교주를 더 믿고 좋아한다.”
찰극평이 저도 모르게 소리쳤다.
“닥쳐라!”
“아닌가?”
“설령 그렇다 한들, 또 한 번 배신하라는 말이더냐! 나는 그 정도로……!”
“이건 배신이 아니라 눈을 뜬 것이지.”
“……?!”
“배신은 중복될 수 없다. 넌 이미 한 번 배신했어. 너에게 남은 건 눈을 뜨는 것뿐이다.”
찰극평의 주먹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너라는 존재를 배신자로 끝장내고 싶은가, 아니면 한때 큰 실수를 했으나 스스로 그것을 바로잡은 신화교의 일왕으로 남고 싶은가?”
“…….”
“배신자로서 죽겠다면, 우리로서는 그것도 나쁠 게 없다. 하지만 신화교의 일왕으로 남고 싶다면 기천웅 전대 교주를 만나 보아라.”
찰극평의 입술이 씰룩였다.
“그와 나 사이에 남은 것은 생사뿐이다.”
“그리고 용서와 충성도 있지.”
“……!”
“충성의 대가가 죽음일지언정 기꺼이 그 결과를 감당하겠다면 죽어도 좋다. 하지만 넌 ‘지금’의 신화교주에게 충성하지 않았다. 그저 나아가고 싶었을 뿐이야.”
“네놈이 그것을 어찌 안다고……!”
“신화교주가 바보가 아니라면 네놈의 충성이 진심인지 아닌지쯤은 알겠지.”
“……?!”
“그리고 결과가 이렇게 나왔군. 놈은 너의 충성을 받지 않았다. 네가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연호정이 손으로 황궁을 가리켰다.
“저기 저곳에, 오직 단 한 사람에게 배신당한 남자가 있다. 자기 자식에게 배신당한 자다. 그 외에는 어떤 자도 자신을 배신한 적 없다고 믿는 순진한 인간이다.”
“…….”
“너는 배신했지만, 기천웅 전대 교주는 너희를 배신자라고 보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면, 너희는 배신하고 싶어도 그럴 수조차 없었다.”
찰극평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너흰 제대로 배신조차 하지 못한 놈들이라 이곳에 있는 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