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145)
1145화. 전선 교체(戰線交替) (5)
연호정이 찰극평과 대화를 나눌 때, 물러나는 금천기마단을 보며 연위 역시 군대를 물렸다. 당연히 신호를 받은 오 화왕 철흠기 또한 군대와 함께 물러났다.
“무슨 일이지?”
무허대사의 물음에 연위가 고개를 저었다.
“뭔가 협상이라도 하는 듯합니다.”
“협상이라.”
무허대사가 고개를 저었다.
“굳이 이런 와중에 협상이 필요하겠는가?”
“그게 아니라면 굳이 둘이 싸우지도 않고 대화를 나눌 필요는 없겠지요.”
팽무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적측에서 먼저 전투 중단을 선언했을 겁니다.”
연위가 그 말을 받았다.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하오. 더하여, 호정은 그것을 거부했을 것이오.”
“어찌 그리 생각하시오?”
“호정은 이 싸움을 완벽한 승리로 이끌고자 노력하고 있소. 다시는 이곳을 넘볼 생각도 못 하도록.”
“음…… 성주의 강단이 대단하다는 거야 알고 있지만, 그렇다면 굳이 저리 긴 대화가 필요하겠소이까?”
“적장의 제안이 호정에게 뭔가 영감을 준 모양이외다.”
“영감?”
연위가 고개를 끄덕였다.
“완벽한 승리란 꼭 적을 다 죽여 없애야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오.”
고개를 갸웃거리던 팽무강이 순간 눈을 크게 떴다.
“설마 적장만을 죽이기 위해?”
“빈틈을 노려 없애기 위해 저러는 것일 수도 있고…….”
팽무강은 내심 혀를 내둘렀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아비인 연위가 그리 생각할 정도면, 그동안 연호정이 적을 상대로 얼마나 무자비했는지 알 수 있었다.
“그게 아니면 교란일 수도 있겠지. 뭐가 되었든 잠시 숨은 돌릴 수 있겠소이다.”
무허대사가 철흠기 쪽을 힐끔거리며 말했다.
“한 가지 의아한 것이 있네.”
“말씀하십시오, 대사님.”
“싸우던 도중 들었던 생각인데…… 북성을 노리는 저들의 군대가 다소 애매하게 보이더군.”
“애매하다는 말씀은?”
“저들의 마음이나 기세가 아니라, 전국(全局)을 봤을 때 그러하다는 것이네. 만약 섬서와 감숙의 잔존 병력이 돕지 않았다면, 저들의 황궁 공략은 지금보다 훨씬 더 힘들고 위험하지 않았겠나?”
연위의 눈이 번뜩였다.
“그렇군요. 그걸 생각하지 못했군요.”
무허대사가 고개를 저었다.
“뭔가 수가 있기야 했겠지. 중요한 건 우리가 아직도 저들에 관해서 잘 모르고 있다는 것일세. 내 비록 병법을 배운 적은 없지만, 저들의 존재 자체가 다소 불분명하다고 느껴지는군.”
그때였다.
금천기마단 중 일부가 빠르게 말을 몰아 황궁으로 향했다.
“저건 또 무슨……?”
연위는 말없이 연호정을 바라보았다.
거리가 너무 멀리 떨어져서 형상만 보일 뿐,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무극의 내공을 끌어올려 안력을 틔워 봐도 그러했다.
하지만 아들의 기세가 차분하다는 건 알 수 있었다.
뭔가 일이 잘 풀리는 듯했다.
“일단 쉬시지요. 긴장은 풀지 말고요.”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더는 참지 못한 철흠기가 군대를 이끌고 찰극평 쪽으로 나아갔다.
물론 그 움직임은 조심스러웠다. 신호가 온 이상 싸움을 벌일 수는 없고, 혹시라도 적이 공격받는다는 기분을 느껴서도 안 되기 때문이었다.
자연스레 연위가 이끄는 군대도 연호정을 향해 나아갔다.
철흠기도, 연위도 바짝 다가가지는 못했다.
하지만 편안히 전음을 날릴 정도까지는 갈 수 있었다. 물론 연위라면 천리전음도 쓸 수 있었지만, 괜히 서로의 신경을 분산할 필요는 없었다.
[호정. 무슨 일이냐?] [군대를 뒤로 물려 주십시오. 자세한 사정은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리하마.]연위는 무림맹 병력과 황궁 북부군, 그리고 하북 무림의 군대까지 모두 금천기마단 뒤로 보냈다.
다시 또 시간이 흘렀다.
세상이 조금씩 조금씩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해가 서녘으로 떨어지고, 흩어진 구름끼리 비명을 지르며 서로를 불렀다.
반쪽도 안 되는 달은 빈약했지만, 그 주변을 수놓은 별들이 그 어느 때보다도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어둠의 장막을 수놓은 달과 별은 양군을 쏘아보며 무수히 많은 신호를 내비쳤다. 어떤 별은 진군은 속삭였고, 어떤 별은 후퇴를, 어떤 별은 수면욕과 식욕을 속삭였다.
그 별만큼이나 많은 병사들의 얼굴에 차츰 피로가 드리워지는 순간.
쿠구궁.
저 멀리서 성문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황량한 평야를 가로지르는 웅장한 소리는 느닷없이 터진 화포 소리처럼 강렬했다.
두두두두.
성으로 들어갔던 기마들이 다시 달려 나왔다.
그리고 그 기마들보다 세 배는 더 빠른 화염 한 줄기가 차디찬 평야를 가로질렀다.
훅!!
차가운 밤공기를 한순간 뜨겁게 달구는 존재가 나타났다.
저벅저벅.
황제의 군대를 가로질러 걸어오는 발밑으로 붉고 푸른 불꽃이 넘실거리다가 사라졌다. 걸음걸음마다 불꽃의 영(靈)을 불러내는 듯했다.
그리고 마침내, 기천웅이 연호정 앞에 섰다.
연호정은 말없이 흑혈신마를 뒤로 몰았다.
기천웅의 몸 주변을 떠돌았던 화기가 사라졌다.
하지만.
화르르르륵.
일만 이천 병력 전체가 화기를 뿜었다.
그 화기에, 군기나 살기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들이 뿜는 화기에는 놀라움과 떨림만이 가득했다.
기천웅은 담담한 표정으로 병력을 둘러보았다.
극적인 감정은 없었다. 그저 평온하고 담백하다.
오히려 그의 그런 모습이 신화의 군대를 더 동요케 했다.
신화의 힘을 한계까지 끌어모았던 전대 교주의 등장.
그 모으고 또 모은 힘을 분출하지 않고 억누른 애증의 존재가 비로소 그들 앞에 나타난 것이다.
그리고 그의 바로 앞에 찰극평이 있었다.
기천웅의 입이 열렸다.
“한이 풀릴 만큼 싸웠는가.”
“…….”
찰극평은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지금까지도 그의 마음은 혼란스러웠다. 본래의 그 강단 넘치는 성격을 생각하면 의외였지만, 그만큼 연호정의 말이 그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기천웅이 씁쓸하게 웃었다.
“그래, 한이 풀리지는 않았겠지. 자네들이 원한 것은…….”
“좋소?”
“……?”
“일천 교도를 이끌고 중원으로 오니, 그 삶이 좋았소이까?”
기천웅은 흥분하지 않았다. 흥분할 만한 상황도, 그럴 만한 말도 아니었다.
“나쁘지 않더군.”
찰극평의 눈이 흔들렸다.
표정과 달리 그의 말은 독했다.
“물론 나쁘지 않았겠지. 차라리 죽는 게 나았을 목숨이라는 걸 알고도 자신의 운명을 외면한 채 적측에 몸을 의탁했으니, 그 삶이 어찌 나빴겠소?”
“자네는 나의 운명이 무엇인지 아는가?”
“알지. 당신만이 아니라 역대 교주 모두의 운명은 같았소.”
찰극평은 저도 모르게 침을 삼킨 후 말했다.
“화신의 대리자로서, 한 덩이 불꽃과 같이 그 삶을 살다가 가는 것.”
“그래, 그것은 옳은 말이지.”
“당신은 결과적으로 소교주에게 당했소. 그 형태가 폐위든 이양이든, 교주직을 박탈당했으니 불꽃의 삶을 관두고 하늘로 날아올라야만 했소.”
“자네는 교주의 운명을 논하면서 교주의 정통성은 외면하는군.”
“……!”
“역대 어떤 교주도 이전 교주의 정당한 이양 없이 교권을 손에 넣은 적은 없었네.”
찰극평이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기천웅이 고개를 저었다.
“동시에, 나처럼 아들에게 배신당해 축출된 교주도 없었지.”
“…….”
“고로, 신화가 이 지경이 된 것은 모두 나의 탓일세.”
“당신은 그리 대단한 존재가 아니오. 한때는 그랬지만, 지금은 아니오.”
“맞네. 지금은 아니지. 그런 식으로 당해 버렸기 때문에 대단치 못하게 되었으며, 기실 교주였을 때도 난 그리 대단한 사람은 못 되었어.”
기천웅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들이 그토록 극진히 모시던 태양은 여기 없었다.
“내가 바라는 것은 오직 하나야. 신화를 신화답게 만드는 것.”
“지금의 신화도 신화요.”
“신화의 존재 이유는 정화에 있다네.”
“……!”
“그리고 그 정화는 무릇 누군가를 쳐 죽인다는 뜻이 아니야. 본교가 혈교삼공가(血敎三公家)이던 시절에는 그러했지만, 지금은 아니란 말일세.”
찰극평은 물론 철흠기의 얼굴에도 혼란이 깃들었다.
혈교삼공가.
신화교가 하나의 종교로서 자립하기 전, 혈교라는 절대종교를 모시는 귀족 가문 중 하나였던 시절을 뜻한다.
최고가 아닌 최고를 떠받들던 시절. 당연히 신화를 최고라 여기는 이들의 귀에, 그 말은 불편하게 들릴 수밖에 없었다.
기천웅이 담담하게 말했다.
“신화의 존재 이유는 정화이며, 그 정화는 삿된 번뇌와 괴로움을 불태우는 것을 뜻하네.”
“…….”
“마치 이곳 대륙의 불교와도 상통하는 바가 있어. 하기야, 종교란 것이 대개 비슷한 부분이 있겠지만.”
“…….”
“나는 나의 번뇌를 없애지 못해 따르는 교도들의 번뇌 또한 제대로 보지 못한 암군(暗君)일세. 아들에게 배신당해서 못난 것이 아니라, 애초에 못난 사람이었단 말일세.”
밤이라서 그런 걸까? 아니면 연호정과의 대화로 마음이 크게 흔들렸기 때문일까?
그도 아니면 심검의 능력이 녹아든 연위의 아수라팔검에 당해서일까?
찰극평은 흔들리는 자신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그와 별개로, 이런 식으로 또 한 번 기천웅을 만나게 되어 좋았다.
연호정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는 기천웅을 교주로서, 사람으로서 좋아하고 믿었다.
하지만 지금 그에게는 신화교의 일왕이란 정체성만이 가득했다. 지금껏 그렇게 믿고 움직였다.
“내가 교주위에서 쫓겨났기 때문에 알고 있네. 지금의 신화교는 길을 잃었어.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길을 바로잡아 주지 못했기 때문에 잘 알고 있네.”
“…….”
“그렇다면 내 자식 놈은 어떤가? 비록 내 자식이지만, 나는 그 녀석이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생각했네. 하지만 녀석은 그보다 훨씬 고약했어. 폐관에서 나온 후, 녀석은 눈과 이성을 가리는 사악한 욕망에 몸을 던졌네.”
“…….”
“나는 부모를, 교주를, 화신을 배신한 그 녀석을 용서할 수 없어.”
“그래서.”
찰극평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그래서 당신도 이번 전쟁에 참여한 것 아니오. 우리를 상대하기 위해서.”
“내 상대는 언제나 내 자식이었어. 내가 중원에 몸을 의탁한 이유는 오직 하나, 복수와 함께 신화교를 바로잡기 위함이었네.”
“말 같지도 않은 소리! 초전이 벌어지기 전 당신은…….”
“그리고 그 과정에서 형식적으로나마 배신한 새 교주를 따른 이들을 죽여야만 한다면.”
기천웅의 눈이 슬픔으로 젖었다.
“나는 마땅히 죽일 생각이었네.”
“…….”
“자네들이 교주를 끌어내리고 신화를 신화답게 만들지 않을 거란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네.”
“…….”
“하지만 자네들이 마음을 고쳐먹는다면…… 아니, 나와 함께 올바른 신화를 만들고자 한다면, 나에게 그보다 더 감사한 일은 없을 것이네.”
“닥치시오!”
찰극평이 울부짖었다.
“요사한 언사로 우리를 홀릴 생각 하지 마시오! 세상에 어떤 수장이 배신한 수하를 다시 거둔단 말인가! 우리가 다시 당신과 함께한다 한들 당신은 절대로…….”
“자네들은 배신자가 아니야.”
기천웅이 쓴웃음을 지었다.
“자네도, 자네가 데려온 군대도 모두 신화교도일세.”
“……!!”
“내 목표를 위해 교도들을 죽일 수 있다 했지만, 교도들을 죽이지 않고도 신화를 정화할 수 있다면 나는 응당 그 길을 택할 것이야. 그러니…….”
기천웅이 고개를 숙였다.
“부디 나와 함께해 주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