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148)
1148화. 전선 교체(戰線交替) (8)
연호정의 대답은 즉각적이었다.
“참신한 생각일 수는 있지만, 많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한가.”
“이 세상 어떤 천재도 미래를 예측하진 못합니다. 고로 누가 만든 정책이든, 누가 그린 정국이든 밝은 미래를 보장하지는 못합니다.”
연호정이 고개를 숙였다.
“물론 폐하께서 그리 생각하신다면야, 세상을 위해 남은 생을 불태울 무극수들은 많을 겁니다. 하지만 거기엔 큰 문제가 있습니다.”
“가감 없이 말해 보라.”
“무림의 자존심입니다.”
민감하기 그지없는 말이었다. 적어도 황제 앞에서 할 말은 아니었다.
연위는 아들에게 말조심하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이내 참았다. 그가 아는 아들은 누구보다 총명하고 지혜로웠다.
황제의 눈이 반짝였다.
“무림의 자존심이라?”
“일전에 폐하께서는 무림을 없애고 하나 된 제국을 만들고자 하신다고 소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랬지. 그리고 그대 역시 그 일이 세상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하여 도울 수 있을 만큼 돕겠다고 하였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은 결코 성급해서는 아니 됩니다.”
“…….”
“흑도 무림은 한 명의 절대자가 주도하면 어떻게든 통제할 수 있습니다. 물론 흑도 내적으로도 고쳐야 할 문제는 많습니다만, 당장에 그들을 이끌 사람만 있다면 큰 불만은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단순한 문제는 아니다. 그것은 연호정도, 황제도, 나아가 연위도 알고 있었다.
황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문제는 백도 정파입니다.”
연호정의 눈이 찬란하게 빛났다.
“그들 중엔 대놓고 타락한 자도 많고, 앞에선 협객 행세를 하며 뒤로는 온갖 범죄를 저지르는 자도 많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이들이 세상을 위해 그 무(武)를 써 왔습니다.”
“인정한다.”
“그들을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은 협(俠)입니다. 누가 시켜서 그리한 것이 아니지요. 그렇기에 그들은 당당할 수 있었고, 앞으로도 당당할 수 있습니다.”
“…….”
“그리고 그 말은, 흑도보다 백도가 더 통제하기 힘들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연호정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무림이 흑백으로 나뉘었다고는 하나, 지금의 흑도는 아직 제대로 되살아나지 못했습니다. 고로 중원 무림이라 칭할 때는 대개 백도 무림을 뜻합니다. 그들이 세운 무림맹(武林盟)이라는 단체 이름만 봐도 백도의 자존심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자존심은 타당한 것이었다.
흑도 무림을 전면에 내세우면, 언제고 무림은 명분을 잃는다. 단순히 백도 무림만의 문제가 아니라 강호 무림이라는, 실재와 허상 그 어딘가에 있는 세상 자체가 위협받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무림은 정정당당해야 하고 올바름을 안고 있어야 한다. 그것이 곧 그들이 생존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했다.
“그리고 무극수들은, 바로 그 백도 정파의 자존심입니다.”
황제의 눈이 번뜩였다.
“충분한 협의와 토론 과정을 거치지 않고 무극수들 개인에게 한 지역의 왕이 되어 달라 말한다면, 그것은 백도 무림의 불만을 폭발시키는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한가.”
“흑도도 그렇지만 특히 백도 무림에 있어 무극수는 무(武)의 끝이요, 살아서 신(神)이 된 이들입니다. 협의에 인생을 건 그들은 세상의 이상향을 보고 있으며, 그것은 무(武)도 예외가 아닙니다.”
“…….”
“만에 하나 무극수들이 백도 정파와 충분한 대화를 나누지 않고 개개인의 의지로 폐하의 정책과 함께한다면, 백도 무림은 배신감에 치를 떨 것이 분명합니다.”
“……그럴 수도 있겠군.”
“최악의 경우, 백도 무림은 아직 기반을 갖추지 못한 제국을 상대로 칼을 겨눌 수도 있습니다.”
연위가 재빨리 끼어들었다.
“폐하. 흑제성주의 말은 다소 극단적인 면이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미래의 가능성을 논한다면야 어떤 일이든 벌어질 수 있는 것이옵니다.”
“짐도 알고 있다. 연가주의 마음을 헤아리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
연위는 내심 한숨을 쉬었다.
그라고 연호정을 모르고 황제를 모르겠는가. 하지만 이렇게 중간에서 완충 작용을 해 주지 않으면, 대화는 점점 더 극단으로 치닫게 될 것이다.
아무리 지혜로운 사람이라도 시커먼 얘기를 자주 듣다 보면 자연스레 마음에 어둠이 깃드는 법이다. 연위는 그것을 원치 않았다.
연호정이 고개를 조아렸다.
“연가주의 말이 실로 옳습니다. 저는 최악의 상황을 가정한 것일 뿐, 백도 무림이 그런 판단을 내리긴 힘들 겁니다.”
“짐도 그리 생각한다. 하지만 말 그대로 최악의 상황을 염두에 두는 것도 좋겠지.”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이것입니다.”
다시 고개를 든 연호정이 허리를 폈다.
“결코 급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
“나아가 무력보다는 대화를, 권위보다는 상생을 택하시옵소서. 그것이야말로 제국과 무림 모두를 살리는 길이옵니다.”
삼교를 상대로 하늘이 두려워할 만큼의 증오를 품은 그였지만, 그렇기 때문에 서로를 쳐 죽이는 행위가 얼마나 위험하고 끔찍한 일인지를 안다.
적을 향해 칼을 뽑는다면야 큰 문제가 없지만, 함께 잘 살자고 하는 이들끼리 고성이 오가다가 칼을 뽑게 되면, 그것은 서로의 살을 깎아 먹는 행위가 된다.
진짜 문제는, 그러한 갈등으로 인해 피해를 보는 사람은 누가 될 것인가다.
‘백성.’
힘을 지닌 이들이 칼을 뽑으면 정작 피해를 입는 이는 힘없는 백성들이다.
하지만 백성이 피해를 입는 것을 알아도, 이미 칼을 뽑은 이상 멈출 수도 없을 것이다. 정치란 기세다. 백성이든 이상이든, 무언가를 위해 칼을 회수하게 되면 그때부터는 끝도 없이 물러나야만 한다.
제국이 칼을 회수하면 최소 법치가 무너질 것이요, 무림이 칼을 회수하면 당장의 치안이 무너질 것이다. 더 나은 세상을 위한다면 애초에 극단으로 치달아선 안 될 관계가 제국과 무림이다.
황제가 한숨을 쉬었다.
“짐의 생각이 짧았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겠다.”
“…….”
“짐은 이곳에서 향후 반백 년의 통치가 가능한 몸을 만들었다. 하지만 초조함을 금할 수가 없었다. 전쟁이 벌어진 판국임에도 국가의 미래를 그려야 하는데, 당장 의견을 나눌 만한 현자(賢者)도 없었다.”
“…….”
“결국 다 변명이다. 짐은 초조했던 것이다.”
연호정이 본 황제의 가장 큰 장점은 똑똑함도, 안목도, 직감도 아니었다.
황제는 자신의 실수를 곧장 인정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일국의 주인이요, 만백성의 어버이라는 황제가 그런 성품을 갖기는 참으로 쉽지 않다.
나아가 자신의 실수를 깨닫는 걸 넘어, 스스로의 상태가 어떤지도 끊임없이 돌아본다.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세상은 혼자 살 수 없습니다. 다소 무엄한 발언이나, 그것은 폐하께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대의 말은 실로 옳다.”
“당장 사람이 없어 저를 귀히 여기시는 것을 압니다. 하나 세상에는 무수히 많은 현자가 있습니다. 저처럼 피 묻은 칼을 쥐고 휘두르며 정치까지 논하는 이는, 당장은 괜찮아도 훗날 큰 문제를 만들 수 있습니다.”
“…….”
“향후 인재를 등용하실 때, 그 사람의 출신과 배경은 최대한 배제하고 능력과 성품을 보시길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연호정이 황제를 좋게 평가했다면, 황제 역시 연호정을 좋게 평가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익은 벼는 고개를 숙이는 법이다. 황제가 보기에 연호정은 제대로 익은 벼였다.
그래서 그를 얻고 싶었지만, 이 황금빛 찬란한 광채를 내는 벼는 그 자신의 상태를 누구보다도 명확히 알고 있었다.
‘성주의 말이 옳다.’
연호정은 뛰어난 자다. 하지만 그의 언행은 극단적인 면이 있어, 언제고 여러 갈등을 만들 소지가 있다.
그것까지 고쳐 가며 제국을 위해 힘을 써 준다면 좋겠지만, 이미 이 젊은 무신은 중원을 몇 번이나 구해 낸 영웅이다.
이런 영웅에게 더 무거운 짐을 지게 할 수는 없다. 영웅은 위기에서 사람을 구해 더 나은 미래를 제시해 주는 자일 뿐, 정치가가 아니다.
현실적인 정치가의 극치를 이뤄야 할 사람은 바로 황제인 자신이다.
그는 새삼 그 사실을 깨달았다.
“나를 위해 새 시대의 국정 운영자가 되어 줄 수도 있겠지만, 그대는 그것을 포기하고 백성을 위해 몰려들 현자들이 밟고 올 교각이 되어 주려 하는구나.”
“…….”
“그대들 부자(父子)가 있어 진실로 다행이다.”
연위와 연호정이 말없이 고개를 조아렸다.
쓴웃음을 짓던 황제는 이내 한층 밝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하던 얘기나 마무리해 보도록 하지. 개인적으로 불안하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한 부분인데, 무극수들이 불현듯 세상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난리를 칠 가능성은 정녕 없는 것인가?”
“불완전한 정신에 한정해서 말한다면, 그것은 알 수 없는 노릇입니다. 그러나 천만다행히도 지금 세상에는 전쟁을, 세상을 위해 살아가는 많은 무극수가 있습니다.”
연호정이 눈을 빛냈다.
“폐하가 그리는 정국에 암운을 드리울 무극수가 나타나면, 그를 잡기 위해 더 많은 무극수가 몰려들 것입니다. 흑제성과 무림맹은 마땅히 그리할 것입니다.”
“그래, 그것만으로도 다행이다.”
지혜로운 자라도 타인의 입에서 확신 어린 말을 들어야 안심이 될 때가 있다. 지금의 황제가 그러했다.
“그렇다면 마무리를 해야겠군.”
초조함과 부담으로 가득했던 황제의 두 눈이 본래의 총기를 되찾았다.
“언제 기지개를 켜면 되겠는가?”
“그것은 저보다 연가주가 더 확실히 대답할 수 있을 듯합니다.”
“그런가?”
연위는 당황했다.
[이놈아, 갑자기 왜 그러느냐?] [아버지께서 말씀해 주세요.] [왜 네가 계속하지 않고?] [폐하가 절 보는 눈빛이 절세미녀를 보는 한창때 청년을 방불케 하잖습니까. 부담 좀 나눠 주십시오.]연호정의 심드렁한 눈빛을 본 연위는 속으로 혀를 찼다.
전음은 번개처럼 오갔고, 다행히 황제는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연위가 또 한 번 고개를 조아렸다.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이번 전투로 삼교가 황궁을 재침공할 가능성은 무척 작아졌습니다.”
“짐도 그리 생각한다.”
“하나 전국은 어떻게든 변할 수 있는 법이 아니겠습니까. 폐하께서 마음을 정하셨다면, 하루라도 빨리 태양 아래 모습을 드러내심이 마땅할 줄 아옵니다.”
황제가 미소를 지었다.
“단순히 모습을 드러내는 걸로 끝나선 안 된다는 뜻으로 들린다.”
“……그렇습니다.”
순간 당황했지만, 연위는 자신의 생각을 있는 그대로 밝혔다.
“이번 전쟁은 물론 과거 세작 침투로 인해 황궁은 위험해질 대로 위험해졌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굳이 북경의 황궁을 고집하는 것은, 소인의 부족한 생각으로는 다소 위험한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음.”
“현재 모용세가의 가주이자 강서 상무 연합의 실질적인 좌장인 모용군이란 자가 강소성 남경(南京)에 새로운 황궁을 건설 중이옵니다.”
“물론 알고 있다. 짐의 재가가 필요했지. 실제로 금전적인 지원을 많이 했다.”
“예. 아마 지금쯤 오 할 이상 완성되었을 것입니다. 가시는 길을 생각한다면, 지금까지의 속도로 볼 때 칠 할 이상의 완성도를 보일 것으로 예측합니다.”
연호정과 황제, 그리고 무림맹과 모용군이 합심하여 아무도 모르게 추진한 계획.
그것은 새로운 황궁 건설이었다.
연위가 눈을 빛냈다.
“구(舊) 황궁의 명이 다하였으니, 더는 이곳에 미련을 두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남경의 황궁으로 행하시어 새 시대의 포문을 열어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