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149)
1149화. 전선 교체(戰線交替) (9)
황제와의 대담을 끝내고 나온 연위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놈아. 애비 심장병 생기겠다.”
“예?”
“아무리 폐하께서 담백하게 대해 주신다 해도 그렇지, 너무 격의가 없는 것 아니더냐.”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폐하께서도 그런 악동 같은 상대를 원하시는 것 아니었습니까?”
“녀석, 참.”
“좀 피곤하긴 했지만, 확실히 대단한 분입니다. 초조함에 잠시 엉뚱한 생각은 하셨어도, 더 나은 미래를 끊임없이 그려 보지 않았다면 그런 생각도 들지 않았을 겁니다.”
불경하기 짝이 없는 언사였지만 연위는 포기했다. 아닌 말로 아들의 말이 맞기도 했다. 황제는 연호정의 언행을 도리어 친근감 있다고 좋아하는 것 같았다.
“오랜 세월 눈앞에서 황궁이 오염되어 가는 걸 지켜보신 분이다. 그 한이 얼마나 깊으시겠느냐. 필경 우리가 상상도 못 할 좌절을 안고 계실 것이다.”
“그렇겠지요.”
“한데 그 말, 진심이냐?”
“예?”
“무극수를 따로 놀리면 백도 무림이 칼을 뽑을 수도 있다는 말, 진심이냐고 물었다.”
아무래도 마음에 걸리는 발언이었던 모양이다.
연호정은 솔직하게 말했다.
“그렇습니다.”
“어째서 그리 생각하느냐?”
연호정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흑도가 비겁하고 잔인하고 도덕에 민감하지 않아서 얻은 이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모르겠다.”
“유연함입니다.”
“……!”
“물론 마냥 좋은 의미는 아닙니다. 그들의 유연함은 대개 비겁으로 드러나니까요. 하지만 장점도 있습니다. 그들은 새로운 체계나 법도를 받아들이는 데에 큰 거부감을 표하지 않습니다.”
힘의 논리가 유독 강하게 적용된 세계라 그렇다. 연위가 고개를 끄덕였다.
“또 다른 변화에 쉽게 흔들리고야 마는 한계도 있겠지.”
“정확하게 보셨습니다. 그래서 흑도의 변화에 있어 가장 중요한 점은, 변화 자체가 아니라 그들의 인식을 어떻게 고정하느냐입니다.”
“그래. 이해가 가는구나.”
“그렇다면 백도 무림은 어떻습니까? 오랫동안 전통과 자신들만의 문화로 이 세상과 맞서 싸워 온 그들의 장점은 무엇일까요?”
그제야 연위는 연호정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깨달았다.
“흑도와 정반대겠지. 백도는 한번 자리를 잡으면 쉬이 흔들리지 않는다.”
“맞습니다. 그것을 반대로 말하면, 변화 자체가 쉽지 않습니다. 오히려 변화에 질색하고, 심할 경우 그것이 합리적인 개혁이라 해도 악(惡)으로 단정 짓고 멀리할 수 있습니다.”
연위는 아들의 말을 부정할 수 없었다.
실제로 그 역시 그런 면모가 없지 않았다. 선대로부터 예법과 정통에 관한 교육을 철저히 받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러한 면모가 있다는 것뿐, 연위를 고지식한 옛사람이라고 보는 것은 지나치다.
당장 그는 천자가 천자답지 못하면 직접 목을 베겠다는 말을 당대 황제 앞에서 한 사람이었다. 예법에만 목을 매단 사람이라면 감히 목숨을 걸고 그런 말을 할 수는 없다.
나아가 무림맹이 창설된 후 내부 정치판에서 보여 준 연위의 언행은, 그 연배를 생각하면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자유롭고 창의적인 면이 있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그러할까?
“사람은 집단을 형성하며 강해졌습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집단이 원하는 것이 곧 자신도 원하는 거라고 착각하며 살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것이 그리 나쁘다고만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큰 재해나 악업에 직면했을 때, 집단의 합리적인 움직임은 더 많은 사람을 살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말하자면.”
연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집단을 이끄는 사람의 지혜와 통찰력, 그리고 성격적 유연함이 담보되지 않는다면 그 집단은 패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
“당장은 아니더라도 점점 도태되고 무너지겠지요.”
“그래, 네 말이 맞다.”
“결국 어느 세대건, 그리고 어느 시대건 중요한 것은 개개인의 지혜와 판단력입니다. 그것을 위험하다고, 특이하다고 말하는 이들도 많지만, 현실의 한계를 깨닫고 조절하는 자들보다 현실의 한계에서 눈 돌리는 자들이 한번 변화해 본 적도 없으면서 그런 말을 내뱉곤 하지요.”
연호정이 한숨을 내쉬었다.
“어려운 문제입니다. 당장 무림맹을 욕하는 사람이 많아도, 제 자식이 무림맹에 들어가면 좋다고 주위에 자랑하는 것이 사람 마음 아닙니까?”
“…….”
“나 자신부터 변화하지 않으면 세상은 변화를 용인하지 않습니다. 당장 나부터 변해야 이 세상은 잠시 귀를 기울여 주는 척이라도 하지요.”
연위의 얼굴이 씁쓸해졌다.
연호정의 말은 곧 백도 무림의 위정자들이 뛰어나야 하는 것은 물론, 그 구성원들 역시도 지혜로워야 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지나치게 이상적이구나.”
“그렇습니다.”
“지나치게 이상적이지만…….”
연위가 한숨을 쉬었다.
“이상을 안고 살아가지 않으면 결국 발전도 없는 법이지.”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혈육이기 전에, 제가 아버지를 존경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
“아버지는 타고난 배경과 환경에 휩쓸리지 않는 분입니다. 그래서 신중하고, 그래서 지혜로우십니다.”
연위가 헛기침을 했다. 설령 그게 사실이라도 면전에 대고 자식 놈이 그런 얘길 하니 민망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면에서 아버지는 폐하와 참 닮으셨습니다.”
“이놈아, 불경한 소리 좀 그만해라. 내가 다 떨린다.”
와중에 연위는 그다움을 잃지도 않았다.
나다움을 간직한 채 자유롭게 세상을 보고, 올바름 앞에 고집을 부리지 않는 것은 정말 대단한 일이다.
연호정이 보기엔 연위야말로 진정한 백도인의 표상이었다.
“그나저나 피곤할 텐데 조금 더 쉬거라.”
“아버지는요?”
“나는 충분히 쉬었다.”
그럴 리가 없었다. 연위 역시 적과 싸우며 상당한 부상을 입었다. 그의 무공이 무극에 이르렀다 한들, 하룻밤 만에 나을 만한 상처는 아니었다.
“아버지도 좀 더 휴식을 취하십시오. 전쟁은 이제 시작입니다.”
“걱정하지 말거라.”
“한데…….”
연호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버지의 상단전이 예전과는 조금 달라진 것 같습니다.”
연위는 깜짝 놀랐다.
“그것이 보이느냐?”
“예. 정확히는 모르겠습니다만…… 마치 단(丹)을 형성한 것처럼 밀도가 높군요.”
연위가 놀라는 이유가 있었다.
무극에 이른 고수는 상대의 기도와 눈빛을 읽고 그 무공과 기질을 알 수 있다.
거기서 더 나아가면 상단전의 크기나 내공의 방대함까지도 알아낼 수 있다. 기(氣)가 부여하는 통찰력이 생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낮은 곳에서는 높은 곳에 있는 사람의 표정을 읽을 수 없는 법이다. 대략적인 예측까지는 가능해도, 수준이 낮은 자가 더 높은 자를 완벽하게 읽어 내기란 절대로 불가능하다.
상단전에 한해서는 능히 천하제일이라 할 수 있는 연위였다. 그런 연위의 상단전 변화를 곧장 알아챘다는 것은, 연호정의 상단신기가 연위 못지않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연위는 크게 감탄했다.
“너의 황룡신왕공이 불세출의 신공이라는 말은 들었다만, 단순히 무공 하나 깨우쳤다고 상단의 힘이 늘어나진 않았을 것이다. 너의 깨달음이 정녕 대단하구나.”
연호정이 쓰게 웃었다.
“운이 좋았지요. 그리고 신왕기의 힘이 신묘해서 알아볼 수 있었던 것뿐, 아버지의 신기(神氣)에 비하면 저는 조족지혈입니다.”
“그렇지 않다.”
연위의 눈이 은은한 연녹빛으로 물들었다.
“내, 이리 보기에 너의 상단전은 광활한 바다를 보는 듯하구나. 그 안에 얼마나 대단한 괴수를 숨겨 놓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다.”
“그냥 그렇게 보이시는 겁니다. 별로 수준 안 높아요, 저.”
연호정이 크게 기지개를 켰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거처로 돌아가 잠시 쉬겠습니다. 아버지도 쉬십시오.”
“허허, 알았다.”
“그럼.”
인사 후 거처로 휘적휘적 걸어가는 아들의 뒷모습을 보며, 연위는 생각했다.
‘물어보지 않는구나.’
자신의 상단전에 자리 잡은 단(丹)을 보았다면, 그 단의 정체도 알아볼 수 있었을 것이다.
한데도 아들은 캐묻지 않았다. 평소 아들의 성격을 생각하면 일부러라도 말을 걸어 부족한 애비를 띄워 주려 했을 것이다.
‘많이 지친 게지.’
연위의 얼굴에 안타까움이 일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만은 알 수 있었다. 아들이 이번 전쟁에서 얼마나 큰 피로를 느꼈는지.
황제도, 양천도, 기천웅도, 심지어 무허대사와 탁무자조차도 연호정의 비범함에 많은 기대를 한다.
그리고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연호정은 그간 말만이 아니라 행동으로 자신의 필요성을 입증했다.
하지만 연위는 연호정의 아버지였다.
내 자식의 필요성이나 비범함보다는 피로와 한계에 더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누군가가 아들의 위대함을 칭송하며 흑백무제니 뭐니 하며 감탄할 때, 연위는 그들과 함께 기뻐할 수만은 없었다.
연호정의 명성이 올라갈수록, 연호정의 업적이 많아질수록 세상은 아들을 더 원하고 바랄 것이다.
그리고 아들은, 적어도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현 상황에서 그들 모두의 바람을 배신하지 않을 것이다.
연위는 진심으로 바랐다. 아들이 무너지지 않기를.
이미 천하인의 정점에 선 아들이기에 더 해 줄 것이 없어 안타까운 아비는, 궁극의 능력을 손에 넣었음에도 기도밖에 할 수 없다는 사실에 좌절을 느꼈다.
‘잠시나마 푹 쉬거라.’
***
안타깝게도 연호정은 쉴 팔자가 되지 못했다.
“총군사님!”
절뚝거리면서도 용케 달려오는 이광의 모습에는 다급함이 가득했다.
“저는 이제 총군사가 아닙니다. 말씀 편히 하십시오.”
“아, 죄송합니다.”
아무리 그래도 이광은 말을 편히 놓을 수가 없었다. 설령 총군사 직책에서 내려왔다 한들, 상대는 무림의 양대 거두 중 하나인 흑제성의 주인이었다.
“섬서 무림에서 서신이 날아왔습니다. 지급을 요하는 것으로, 성주님 앞으로 직접 왔습니다.”
연호정의 눈이 번뜩였다.
이광이 전한 서신을 받아 든 연호정은 곧장 그것을 펼쳤다.
‘형님.’
서신은 모용우가 쓴 것이었다.
연호정이 빠르게 내용을 읽었다.
현재 섬서 무림 최북단에서 지닌바 무력이 추측 불가한 고수가 남하하고 있소. 아직 정체도, 목적도 알 수 없소만 고수의 무력이 무극에 도달했을 것으로 추정되오. 일백에서 일백오십 정도 되는 부대를 이끌고 내려오는 중이며, 부대의 무력 수준은 파악 불가요. 남궁 무상께서는 부상을 입으셨고 백병신군께선 사흘 전 황궁으로 넘어가신 상황이라 다소 급하오. 성주의 판단하에 움직이도록 하겠으니 곧장 연락을 주시오.
연호정의 눈이 깊어졌다.
‘모종의 고수라고?’
무극으로 추정되는 모종의 고수.
섬서 무림은 한바탕 큰 전투를 치르고 한창 회복 중에 있다. 이런 상황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고수와 일백 이상의 숫자로 편성된 부대가 남하하고 있다는 사실은 엄청난 긴장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연호정이 빠르게 말했다.
“어전으로 갈 테니 사부님을 불러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조금은 쉬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지만, 그래도 괜찮다. 대자연의 기운이 몸을 보하고 있으니까.
‘쉴 거 다 쉬고 치르는 전쟁은 없는 법이지.’
그래서 전쟁은 힘들다.
연호정은 곧장 옷을 갈아입고 광룡부에 흑백쌍룡부까지 다 챙긴 후 어전으로 날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