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151)
1151화. 백음귀(百淫鬼) (1)
“소맹주님.”
“고맙네.”
무사가 건넨 깨끗한 붕대를 받아 든 모용우가 왼팔에 묶인 기존 붕대를 풀었다.
순간 그의 눈썹이 꿈틀했다. 응고된 피가 뜯기며 피부를 잡아당기는데, 그 고통이 상당했다.
다소 긴장이 풀린 탓에 감각이 더 예민해진 것 같았다. 모용우는 고통을 참고 금창약을 뿌렸다.
부글부글.
상처에 뿌려진 허연 가루가 거품을 일으켰다.
‘신기하군.’
모용우는 상처를 면밀히 살폈다.
‘분명 회복이 힘든 상태였는데.’
적장을 죽이며, 한순간의 깨달음을 대가로 왼팔을 포기했다.
실제로 적이 좌수 수도로 내친 공격은 지금 그의 육신으로 받아 내기 불가능할 만큼 강했다. 솔직히 왼팔이 통째로 날아가도 이상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다행히 팔은 날아가지 않았지만, 근육이 찢기고 뼈가 부서져 난장판이 되었다. 아무리 그가 뛰어난 고수라도 이 정도 상처라면 기존처럼 왼팔을 놀리긴 힘들 게 분명했다.
한데 이 절망적인 상처가 빠르게 회복되고 있었다.
찢어진 근육은 어느새 거의 다 붙었고 상한 뼈도, 혈관과 신경도 점차 되살아나고 있었다.
‘그 기운이다.’
모용우는 화산 정점의 신공이 담긴 내력의 씨앗을 건네고 등선한 화검자를 떠올렸다.
‘그분께서 주신 기운은 상생의 극이요, 파마(破魔)의 능(能)을 지닌 도가 신공의 극치였다. 아마도 그 기운이 내 팔을 되살리고 있는 게 아닌지…….’
한없이 기에 민감한 그조차도 화검자가 남기고 간 기운의 흐름을 읽을 수가 없었다. 이제 와서는 화검자가 진정 자신에게 내공을 전해 줬는지조차 의문이었다.
하지만 뇌정공이나 건곤팔극심법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치유력이었다. 화검자의 내공 덕이 분명했다.
‘어르신께서 주시고 가신 기운으로 포기했던 팔을 되찾았습니다. 앞으로 한 점 부끄러움 없는 인생을 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모용우는 금창약이 다 스며든 상처 위로 새로운 붕대를 감았다.
고통은 더 심해졌지만, 그만큼 시원한 느낌도 들었다. 당장 쓰지는 못하더라도 낫는 속도를 볼 때 얼추 열흘이면 섬세한 움직임이 가능할 것 같았다.
“소맹주님.”
“음?”
“죽이 다 되었습니다. 어서 드시지요.”
“아, 고맙소.”
육포를 물에 불려 잘게 뜯은 후 끓여 낸 죽이었다.
이동 중인 이상 말린 쌀보다는 육포가 훨씬 더 효율적이었다. 그나마 인근 마을에서 쌀과 계란 등을 더 구해 온 덕에 한 번씩 이렇게 요리를 할 수 있었다.
물론 마을이나 도시에 들러 편히 쉬지는 못했지만, 한창 전투를 치르던 때를 생각하면 그야말로 천국이 따로 없었다.
죽 그릇을 깔끔하게 비운 모용우는 문득 익숙함에 대해 생각했다.
‘죽 한 그릇도 이렇게 감사한데.’
태어나길 강호 정점의 무가에서 태어난 그였다.
물론 어릴 적부터 가문의 분위기는 차갑고 악랄했다. 그 속에서 그는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을 쳤고, 기어이 절강지부까지 건너갔다.
나름대로 고생이란 고생은 다 해 봤다고 할 수 있었다. 실전도 많이 뛰었고, 그만큼 죽을 고비도 많이 겪었다.
하지만 먹는 것 자체에 여느 양민들만큼 고민해 본 적은 없었다.
피치 못하게 몇 끼를 굶었을 때도 먹을 것을 걱정하진 않았다. 배는 고팠지만, 마음만 먹으면 밥 한 끼 정도는 수월하게 해결할 수 있었으니까. 그것이 그의 삶이었다.
그러나 전쟁이 터지고 초전을 치른 후, 다시 섬서 북단으로 향하는 이번 길에서는 새삼 먹을 것의 귀함을 자각하게 되었다.
‘몇 끼 제대로 못 먹어도 싸우는 데 아무 지장이 없는 게 무림인이라지만.’
그래도 먹는 것은 중요하다. 체력적인 문제야 신경 쓸 게 없지만, 지금처럼 부상을 당했을 때 먹는 것을 소홀히 하면 회복도 늦어진다.
‘전쟁에서 패배하게 되면 얼마나 많은 사람이 굶어 죽게 될지.’
단순히 전화에 휩쓸려 죽는 것도 문제지만, 삶이 피폐해져 끼니를 때우기도 어려울 것이다.
모용우는 새삼 이번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야만 하는 이유들을 하나하나 떠올릴 수 있었다.
“잠시 쉽시다. 체력이 있어야 정찰도 가능하니까.”
“알겠습니다.”
은호마병과의 전투에서 그나마 다치지 않은 무사들을 십여 명 골라서 함께 왔다. 이들 모두 신법에 타고난 재능이 있는 이들이었다.
나무에 편히 기대 하늘을 올려다보는 모용우의 얼굴에 은근한 피로가 떠올랐다.
‘정말 지치게 하는구나.’
내공도 충만했고 체력 역시 나쁘지 않았다.
그런 그를 지치게 하는 것은 정신적인 피로였다. 어쩔 수 없다지만 수많은 적을 죽였고, 적이 이길 수도 있다는 압박감에 심력 소모를 있는 대로 했다.
실제로 크게 다치지 않은 무사들도 대부분이 하루 꼬박, 길면 사흘 동안 잠을 자다가 깨어났다. 그만큼 정신적으로 힘들었던 것이다.
‘한 번의 전투로도 이 정도 피로를 느끼는데 두 번, 세 번을 치르면 어떻게 될까.’
전투에 익숙해질까? 아니면 극단적인 피로로 정신이 이상해질까?
아마 둘 다일 것이다. 전장에 나가 적을 죽인 병사들이 일상에 적응하지 못해 폭력을 행사하거나 술만 퍼마시다가 골병이 들어 죽는 경우는 수도 없이 많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전후에 진짜 재앙이 될 수 있는 고수들의 경우 상단전과 중단전의 훈련이 어느 정도 되어 있다는 것이다.
‘어쩌면 단전의 연마도와는 별 상관이 없을 수도 있겠지.’
상단전이 탄탄하고 중단전이 옹골차도 사소한 일에 크게 기뻐하는 것이 사람이다.
그런 면에서 봤을 때, 고수라도 전쟁이 끝난 후 광증에 시달리지 않으리란 법은 없을 것이다.
‘전쟁이라…….’
모용우가 씁쓸하게 웃었다.
‘막연히 힘들고 고된 것이라 생각했는데, 정말 상상을 초월하는구나.’
예전, 종남 전쟁을 치르고 돌아온 연호정은 이런 말을 했었다.
‘전쟁은 가장 폭력적인 정치 수단입니다. 인간은 전쟁조차도 정치의 수단으로 삼을 만큼 고도로 진화되었지요. 하지만 전쟁의 진짜 무서운 점은, 그것이 끝난 이후에도 승패만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
‘이겼든 졌든, 전후의 생존자들은 멀쩡히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내 목숨은 물론 내 터전, 내 고향이 박살 날 수도 있었다는 공포와 사람을 푸줏간 고기처럼 썰어 버렸다는 충격은 인간의 무의식에 광기(狂氣)라는 이름으로 남게 됩니다.’
‘광기…….’
‘평화의 시대가 도래해도 스며든 광기가 선명해지면, 그들은 현실을 버티지 못하고 무너져 버리지요.’
‘…….’
‘어떤 형태로든 말입니다.’
그때는 그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소름이 돋을 정도로 무섭다는 생각은 했다.
그리고 지금, 초전을 치른 이후의 그는 연호정의 말이 무슨 뜻인지 어느 정도 체감할 수 있었다.
‘연제.’
왜인지 연호정이 보고 싶었다.
피를 나눈 형제와 남보다도 못하게 지낼 때, 정작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기린아가 찾아와 자신의 가능성을 논하고 함께하자며 손을 내밀었다.
제대로 티를 내지 않았을 뿐, 모용우는 연호정을 친형제처럼 생각했다. 어느 정도냐면, 이제는 마음을 돌린 모용군보다도 훨씬 더 가깝게 느낄 정도였다.
자주 만나지 못해 더 깊은 우애를 쌓지 못하는 것이 아쉬웠다.
이번 전쟁만 끝나면, 그래서 정말 평화의 시대가 찾아오면.
그땐 아무리 바빠도 연호정과는 꼭 자주 만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까지 내가 살아남는다면 말이지.’
가벼운 식사 후 두 시진 동안 잠을 청하고 체력을 회복한 일행은 빠르게 북부로 이동했다.
워낙 경공에 특화된 이들이라 모용우도 굳이 힘을 분배할 필요가 없었다. 그들의 속도는 새가 나는 것처럼 빨랐고, 순식간에 섬서의 허리를 넘어 가슴께까지 올라올 수 있었다.
“잠시 정지.”
신법을 멈춘 모용우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파라라라락!
수십 마리의 새가 북쪽에서부터 여기저기로 날아가고 있었다.
대부분이 전서구였고, 그중 일부는 전서응이었다. 뭐가 되었든 정보 단체들 역시 섬서에서 내려오는 모종의 고수와 작은 부대 하나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잠시 대기한다.”
이각 후.
삐익.
기묘한 새소리가 들렸다.
일행은 곧장 새소리가 들린 쪽으로 달려 나갔다. 북동쪽이었다.
곧 작은 공터가 나왔고, 그곳에 수풀로 위장한 사내 하나가 공손한 자세로 서 있었다.
“소맹주님을 뵙습니다. 개방의 섬서분타 소속 일궁개라고 합니다.”
“반갑소. 모용우요.”
통성명은 그걸로 충분했다.
일궁개는 빠르게 작은 서신 몇 장을 건넸다.
“현재 섬서 연안(延安) 북서부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곳과의 거리는 대략 십 리가 조금 안 됩니다.”
서신을 훑어보는 모용우의 눈빛이 유독 날카로웠다.
“인원은?”
“기존의 보고대로입니다. 무극으로 추측되는 고수 하나, 그리고 그녀의 뒤를 따르는 백 명의 고수들이 존재합니다.”
“그녀?”
“그렇습니다. 가면으로 얼굴을 가렸지만, 드러난 몸매로 봤을 때 여인이 분명합니다.”
“그렇군.”
“나이는 결코 많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만, 그 경지가 무극에 이르렀다면 실제 나이가 얼마나 되는지는 짐작할 수 없습니다.”
모용우가 서신 중 하나를 흔들었다.
“복식이 이상하다?”
“아, 그렇습니다.”
일궁개가 헛기침을 했다.
“차림새가 좀…… 선정적이라고 해야 할지, 독특하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새외의 여러 부족을 살펴본 결과, 제사복(祭祀服)의 일종이 아닌가 하는 추측이 있습니다.”
“제사복이라…….”
“그뿐만이 아닙니다. 그녀를 따르는 일백 명의 고수 역시 비슷한 종류의 제사복을 입고 있습니다. 당연히 가면도 썼습니다. 다만 여인의 가면은 눈 쪽에만 길쭉한 구멍이 있는 백색의 가면이었고, 일백 고수의 가면들엔 하나같이 기괴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모용우의 눈이 깊어졌다.
“마지막으로 묻겠소. 처음 이 정보를 받았을 때부터 궁금했던 건데, 그 여인이 무극의 고수라고 추측한 이유가 무엇이오?”
“손짓 한 번에 거목 한 그루를 반으로 분질러 버렸다고 합니다.”
“그것은…….”
“허공섭물로요.”
“……!!”
그게 사실이라면 두말할 것 없는 무극수였다.
그것도 무극에 막 오른 정도가 아니라 신선제왕급에 도달한 고수다. 어쩌면 삼제 이상, 이선에 육박하는 초고수일지도 모른다.
“고생하셨소.”
“소맹주님. 진짜로 정찰을 하러 가시렵니까?”
“그들의 남하 속도가 이토록 더디다면, 섬서 무림의 책임자 중 한 명이 보다 면밀히 관찰할 기회가 생긴 셈이오. 손속을 나눌 수는 없어도 관찰만으로도 큰 힘이 될 것이오.”
일궁개가 고개를 숙였다.
“부디 조심하십시오. 저희 개방은 물론 여러 정보 단체 소속 삼십여 명이 그들의 눈에 걸려 죽었습니다.”
“……그렇군.”
“무운을 빌겠습니다.”
“고맙소.”
모용우가 무사들에게 손짓했다. 출발하자는 의미였다.
그때였다.
“아, 죄송합니다. 한 가지 빠트린 정보가 있습니다. 조금 전에 들어온 정보입니다.”
“말씀하시오.”
“그 무극수로 추정되는 여인의 허리춤에 피리로 보이는 작은 악기가 꽂혀 있었다고 합니다.”
“피리?”
“그렇습니다. 꽤 화려하게 치장된 피리라서 유독 눈에 잘 띄었다고 합니다. 물론 어떻게 활용되는지는 아직 파악된 바가 없습니다.”
“고맙소.”
파아악!
모용우와 무사들이 북서쪽으로 달려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