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153)
1153화. 백음귀(百淫鬼) (3)
“…….”
깨달음과 수면의 경계에 의식을 두고 있던 묵비가 깨어난 것은 자정이 다 된 밤이었다.
자연스레 눈을 뜬 묵비는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아직 속이 꽤 아팠지만, 불과 몇 시진 전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상태가 양호했다.
의술로는 설명할 수 없는 엄청난 회복력. 하지만 그녀는 놀라지 않았다. 이 변화가 어디에서 기인한 것인지 알기 때문이었다.
묵비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저 멀리서 와! 하는 탄성과 웃음소리가 들렸다.
‘병사들.’
취기 어린 목소리 속에 기쁨과 뿌듯함, 애써 슬픔을 잊으려는 몸부림이 느껴졌다. 전쟁에 참여했던 병사들이 술판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당연히 어전 인근에서 벌어진 술판은 아니었다. 어전에서 한참 멀리 떨어진 연회장에서 승리의 축배가 오고 가는 중이었다.
가만히 창밖을 바라보던 묵비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상 회복 수준이 놀라울 정도였지만, 아직 체력은 좋지 못했다.
방에서 나온 묵비가 외부 창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왔어?”
그곳에는 연호정이 있었다. 계단에 앉아 저 멀리 남쪽 하늘을 바라보는 그의 얼굴은 달빛을 받아 파르스름하게 빛나고 있었다.
묵비가 웃으며 말했다.
“날 불렀죠?”
“그럴 리가.”
“그래요? 그런데 왜…….”
느닷없이 정신을 차린 것도, 밖으로 나온 것도 연호정의 존재감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네 안에 넣어 둔 황룡기가 반응한 것이겠지.”
이미 그녀가 알고 있다고 생각해 말한 것이다. 실제로 그러기도 했다.
묵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언제 옮겼어요?”
“글쎄다, 언제였더라.”
“…….”
“몰라. 아무렴 어때? 뭐가 됐든 무극의 진기가 네 홍천기보다는 낫지 않겠냐? 빨리 써먹으려고 떼어 준 거니까 감동 가득한 눈으로 볼 필요 없다.”
묵비의 입가에 미소가 드리워졌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그녀는 알고 있었다. 연호정이 왜 황룡기를 자신의 몸에 숨겨 두었는지.
분명 빨리 낫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면 작정하고 황룡기로 치료를 해 주었을 것이다.
연호정이 황룡기의 씨앗을 건넨 것은 묵비의 무공이 더 빨리 성장할 수 있길 바라서였다.
기(氣)란 밀도의 영향을 받는다. 더 밀도 높고 순수한 진기가 몸에 들어오면, 기존의 진기는 그 순수한 진기를 따라 자연스레 밀도를 올리려 한다.
한 조각에 불과하다 한들 무제(武帝)라 불리는 사람의 기운이었다. 오히려 그 이상 떼어 주면 그녀의 내공이 홍천기에서 어정쩡한 황룡기로 변질되었으리라.
황룡기의 씨앗을 궁구하며 내공을 더 고차원적으로 변모케 하고, 그 상태에서 스스로 치료하라는 뜻이다. 그래야 변한 내공에 더 빨리 적응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배포가 넘치면서도 무척이나 섬세한 배려였다.
‘고마워요.’
묵비는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연호정에게는 너무나도 많은 도움을 받았다. 이런 걸로 일일이 고맙다고 말하면 입술이 다 부르틀 것이다.
“나도 한 잔 줘요.”
“속 쓰리다니까.”
“그래도요.”
연호정은 잔을 채워 그녀에게 건넸다.
시원하게 잔을 비운 묵비가 인상을 있는 대로 찌푸렸다. 연호정 말대로 속이 엄청나게 쓰렸다.
“내 말이 맞지?”
“쓰린 수준이 아닌데요. 독을 먹은 것 같은데.”
“술도 독이야. 이 정도로 독한 놈이면 더더욱.”
“후우.”
가벼운 심호흡으로 평온을 되찾은 묵비가 저 멀리 남쪽을 바라보았다. 연회장 방향이었다.
“술판 한번 시원하게 벌어지고 있네요.”
연호정의 눈이 살짝 커졌다.
“그게 느껴져?”
“네? 아, 네.”
“몸뚱이는 그 모양이라도 감각은 죽지 않았군. 이거 기대되는데?”
연호정은 묵비가 뭔가 깨달음을 얻었음을 직감했다.
가만히 연호정을 보던 묵비가 툭 던지듯 물었다.
“떠나나요?”
“이번 기회에 자리 펴지 그러냐.”
“언제 가요?”
“내일 갈 생각이다.”
연호정이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
“그래서 말인데…….”
“먼저 가요.”
“엉?”
“왜요? 안 갈 거예요?”
“그럴 리가. 당연히 가긴 갈 건데…….”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안 간다고 할 줄은 알았지만, 그렇게 시원하게 보내 줄 줄은 몰랐는데?”
후웅.
바람이 시원했다.
그 바람을 맞으며, 묵비가 말했다.
“강해지고 싶은 거야 모든 무인의 꿈이죠. 하지만 주제 파악 못 하면 강해지기도 전에 칼 맞고 죽겠죠.”
지금 자신의 상태로는 짐밖에 되지 않는다는 걸 아는 것이다.
물론 이런 말이 나올 거라고는 연호정도 예상했다. 하지만 한숨 푹푹 내쉬며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할 줄 알았는데.
연호정이 검지와 엄지로 묵비의 눈을 크게 만들었다.
묵비가 눈에 쌍심지를 켰다.
“뭐 하는 거예요?”
귀 안도 보고, 턱을 잡고 입을 벌려 그 안까지 신중하게 살핀 연호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우리 묵 신장님 맞는데? 가만있어 봐.”
콧구멍으로 손을 가져다 대자 묵비가 연호정의 등짝을 후려쳤다.
“적당히 하시죠.”
“다 나았네, 다 나았어.”
왼손으로 등을 벅벅 문지르며, 연호정이 말했다.
“그래도 다행이다. 못 간다고 속병 앓을 줄 알았는데.”
“내가 그렇게 애송이였나요?”
“애송이라고 다 그러는 건 아니지. 네가 워낙 착하니까.”
“적이라도 사람을 무더기로 죽인 사람한테 할 말은 아니네요.”
“적은 우리 아버지도 많이 죽였어.”
연위를 언급하니 할 말이 없었다.
연호정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집착을 좀 내려놓으니 볼만하다. 그래, 당장 안 되는 일에 그렇게 괴로워할 필요 없어. 앞으로가 중요한 거니까.”
묵비가 피식 웃었다.
“위로가 안 되는데요.”
“위로받으려고 했어?”
“한 마디도 안 지는 걸 보니 이젠 정말 안 미안한가 보네요.”
“말이야 바른말이지, 내가 왜 미안해야 하냐? 다친 건 너잖아.”
“수하가 다쳤는데 수장이 안 미안하면 어떻게 해요?”
“어, 그건 할 말 없는데.”
묵비가 깔깔깔 웃음을 터트렸다.
함께 웃던 연호정의 얼굴이 어느 순간 진지해졌다.
“일단 최대한 빨리 치료하도록 해. 네 활이 필요한 곳이 많아.”
“알아요.”
“그건 그렇고.”
연호정이 턱을 괴었다.
“너, 빙궁주 밑에서 좀 배워 볼 생각 있냐?”
묵비는 깜짝 놀랐다.
“모자선 궁주님이요?”
“아까 날 찾아왔다. 무림맹에 머무는 빙궁 사람들을 만나러 슬슬 가 봐야 할 것 같다고.”
“…….”
“하지만 가기 전에 널 좀 가르쳐 보고 싶다고 하더라.”
“왜, 왜요?”
묵비는 당황했다. 그럴 만도 했다. 모자선과는 별다른 접점이 없었기 때문이다.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이번 전투에서 널 보고 제법 감명을 받은 모양이다. 배우고 익힌 무공이 달라도 깨달음은 통하는 법이라 하니, 무공 좀 봐줘도 되겠냐고 묻더라.”
묵비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모자선이 자신에게 호감을 품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자신 역시 모자선에게 여인으로서, 무인으로서 존경심을 느꼈으니까.
하지만 설마하니 동문(同門)이 아닌데도 가르쳐 보겠다며 나설 줄은 몰랐다.
“전에 한번 기천웅 교주와 기 싸움을 한 적이 있잖아. 그때 량이를 가르치면서 너에게도 신경이 쓰인 모양이다. 뭐, 이런저런 걸 떠나서 그만큼 네가 마음에 들었다는 거 아니겠냐.”
묵비는 자신에게 일생일대의 기회가 또 한 번 찾아왔음을 깨달았다.
“모자선 궁주님 같은 분께 가르침을 받는다면 저야 당연히 좋죠. 하지만…….”
“우리 걱정은 하지 마라. 네가 있다면 더 좋겠지만, 너 없다고 바보처럼 처맞고 돌아다닐 만큼 약하지도 않잖아.”
묵비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거야 당연히 그렇지만요.”
“기회는 올 때 잡는 거야. 진양처럼.”
“네?”
그러고 보니 진양이 보이지 않았다. 워낙 여기저기서 전투가 벌어졌고, 그만큼 바빴으며, 결정적으로 그녀는 의식까지 잃었다.
“기천웅 교주가 붙잡고 가르쳤잖아. 그 깨달음을 다 소화하느라고 황궁 비처에서 노력 중이다. 덕분에 이번 전투에 참전하진 못했지만.”
“많이 섭섭해하겠는데요.”
“그럴 리가. 어찌나 몰입했는지 밖에서 무슨 일이 생겼는지도 잘 모르던데.”
연호정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필요했다면 내가 먼저 불렀어. 그건 지금의 너도 마찬가지다. 인생에는 언제나 전환점이 오게 마련이야. 그 전환점에서 어떤 생각으로, 어떤 마음가짐으로 앞날을 대비하느냐에 따라 내 인생은 하늘을 날 수도, 땅에 처박힐 수도 있는 거지.”
“…….”
“이번 기회에 잘 배워 봐.”
“꼭 그럴게요.”
“아, 말이 나온 김에 하나 묻자.”
연호정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 관일곡이라는 곳 말이야.”
묵비가 궁술을 배운 일종의 종교 단체를 말함이었다.
“어지간하면 강호사에 등장하지 않는다고 했던가?”
“그렇죠. 듣기로 큰일을 겪을 때마다 거처도 은밀하게 바꾼다고 했어요.”
“그렇군.”
“왜요?”
“너만 한 고수를 키워 낸 조직이잖냐. 그때 죽었던 그 사람도 꽤 대단했고. 다 떠나서 궁술 자체가 초일류야. 신경이 쓰일 수밖에.”
갑자기 과거 얘기가 나왔지만 묵비는 태연했다. 이미 그 부분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마음의 정리가 되었기 때문이다.
“영입은 아마 불가능할 거예요. 워낙 폐쇄적인 집단이니까요. 지금까지 강호에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것만 봐도…….”
“아니, 그들의 힘을 쓰겠다는 뜻이 아니야.”
“네?”
연호정의 눈이 깊어졌다.
“만에 하나 관일곡의 존재를 삼교가 안다면, 반대로 그 활시위가 우리를 겨눌 수도 있지 않을까 해서.”
“……!”
“혹시 몰라서 암무단주에게 조사해 보라고 했었다. 그 지시를 내린 게 성주 취임한 날인데 아직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군. 정말 대단한 조직이야.”
흑도의 정보력은 개방 이상이다. 그런데도 여태 꼬리가 잡히지 않은 것이다.
연호정이 진지하게 물었다.
“만약 그들이 적과 손을 잡는다면, 너는 그들과 싸울 수 있겠냐?”
묵비가 미소를 지었다.
“당연하죠.”
싱거울 정도로 쉽게 나온 대답이었다. 하지만 연호정은 안다. 저 대답이 쉽게 나온다는 건, 그만큼 그녀가 관일곡에 대해 고민이 많았다는 뜻이란 걸.
“좋아.”
편하게 뒤로 누운 연호정이 눈을 감았다.
“바람 좋네. 좀 쌀쌀하긴 해도.”
“술 남은 거 내가 마셔도 돼요?”
“언제부터 그런 걸 물어봤다고.”
묵비는 병째로 술을 들이켰다. 식도가 타는 듯했지만 금세 익숙해졌다.
그렇게 두 사람은 한참 동안 밤하늘을 보며 시간을 보냈다. 평온한 시간이었다.
***
다음 날 새벽.
푸르륵.
흑혈신마가 투레질을 하며 마구간에서 나왔다.
그 압도적인 체구와 강렬한 기세는 여전했지만, 새빨간 두 눈은 왠지 모르게 깊어 보였다.
연호정이 쥔 고삐를 따라 고분고분 걸어 나오는 흑혈신마의 위세에 연위는 나직이 감탄했다.
“다시 봐도 대단하구나.”
“저도 볼 때마다 놀랍니다.”
연호정이 고개를 숙였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어딜 가든 몸조심하고.”
“명심하겠습니다.”
그때, 저 멀리서 진양이 다가왔다.
연위에게 깍듯하게 인사한 그가 흑혈신마를 보며 휘파람을 불었다.
“이놈이 그놈이오? 워, 괴물이 따로 없네.”
“너도 말…….”
“아니오. 난 뛰어가겠소.”
“그래도 되겠냐?”
“안 지칠 테니 걱정하지 마시오.”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불에 대한 기천웅의 무론(武論)을 거의 완벽하게 체득했다는 뜻이리라.
“하긴, 신법도 수련이지.”
힘차게 흑혈신마에 오른 연호정이 연위를 내려다보았다.
“신화교 병력을 부탁드립니다.”
“오냐.”
히히히히힝!
앞발을 들며 토해 내는 흑혈신마의 울음소리가 천지를 진동케 했다.
크게 숨을 들이쉰 연호정의 눈에 강렬한 빛이 떠올랐다.
“가 볼까.”
목적지는 섬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