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156)
1156화. 백음귀(百淫鬼) (6)
과거, 음제 하은교를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
그녀의 존재감은 실로 대단했다. 성천의 삼제 중 일인으로 꼽히는 사람이니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심지어 당시의 연호정은 하은교보다 분명 하수였다.
하은교의 기도는 독특했다.
그때는 그저 신비롭다고 생각하며 넘겼지만, 왕성한 신기를 드리운 지금의 상단전을 기반으로 떠올려 보니 확실히 남다른 바가 있었다.
‘지극히 투명했다.’
지금껏 만나 온 수많은 무극수에게는 저마다의 특색이 있었다.
투왕 양천은 짐승 같은 기도를 숨기고 있었다. 마치 태산처럼 거대한 야수를 보는 것 같다고 할까. 그 자신이 익힌 흑사자기(黑獅子氣)처럼, 그는 산처럼 큰 사자와도 같은 패기를 갈무리한 사람이었다.
남궁의 검제는 어떠했나.
한 자루 검으로 무적의 칭호를 손에 넣었던 검제의 기도는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연상케 했다. 한없이 푸르러서 다가가면 점점 어두워지는, 태양과 달 사이 어딘가를 거니는 하늘과 같았다.
탁무자는 구름 같았고, 마선 혁련휘는 시뻘건 불꽃과도 같은 인상을 주었다. 도제 종리백은 마치 하늘을 떠받치는 우람한 기둥을 연상케 했다.
그처럼, 연호정이 보는 무극수들은 제각기 분명한 특징을 갖고 있었다. 기세 변화에 능숙한 만큼 전혀 다른 기질의 힘을 뿜기도 했지만, 딱 보면 이렇구나 하는 인상을 주었단 말이다.
하지만 하은교는 달랐다.
신비롭고 아름다웠지만, 이제 와 생각해 보면 그건 그녀의 타고난 기질에 가까웠다.
하은교에게선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투명하고도 투명해서, 마치 길을 지나치다가 부딪쳐도 누구와 부딪쳤는지 모를 만큼 모호한 구석이 있었다.
‘어떤 기공으로도 당해 낼 수 없을 것 같았다.’
형태 없는 초자(硝子)와 같은 사람. 그래서 어떻게 공격해야 하는지조차 막막한 그런 무인이었다.
다른 무극수들의 존재감은 착각할 수 있어도 하은교만큼은 절대 착각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그리고 지금, 연호정은 저 언덕 너머에 하은교가 있음을 확신했다.
“음제다.”
“진짜요?”
“그래.”
연호정의 눈이 깊어졌다.
“몰라볼 수가 없지.”
“빌어먹을.”
진양의 얼굴이 사정없이 찌푸려졌다.
음공은 여러 무공 중에서도 가장 까다로운 계열이었다.
실제로 흑도 고수 중 음공을 쓰는 자와 대결해 본 적이 있던 그였다. 당시의 자신보다 하수였는데도, 작게 개량한 탄금(彈琴)에서 뿜어져 나오는 경파는 회피만을 종용케 할 정도로 곤란한 위력을 자아냈다.
이름도 잘 알려지지 않은 고수의 음공이 그 정도다. 무림에서 가장 강하다는 음제의 음공이라면 접근은커녕 시야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죽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한데 이상해.”
“뭐가 말이오?”
“하 선배도 하 선배지만…….”
혈음사기.
‘분명 혈음사기는 사음교주의 혈통이 아닌 자가 익히면 주화입마에 걸리거나 죽을 만큼 괴이한 무공이라고 했는데.’
그건 교주의 사생아인 소방을 통해서 재확인했다.
‘저놈들이 다 교주 놈의 피를 이었다고?’
말이 아예 안 되는 건 아니다.
애초에 사음교주도 사람의 자식이다. 그에게 형제가 없었을 리도 없고, 방계까지 찾아보면 같은 피가 섞인 이들이 수두룩할 것이다.
문제는 사음교주가 그들을 살려 두었는가다.
물론 교단 내의 분위기나 생활상에 대해서는 연호정도 아는 바가 없었다. 하지만 합리적으로 유추해 볼 수는 있다.
신화도, 광혈도 최고가 되기 위해 골육상쟁의 비극을 겪는다고 했다. 사악함으로는 삼교 중 으뜸이라는 사음이라고 그러지 않을 리가 없다.
‘물론 불가능한 건 아니겠지만…….’
사음교주는 내공을 궁극의 영역까지 연마한 자다. 심지어 혈교삼공가 시절 사음교는 혈신의 피를 세상에 퍼트리는 다산(多産)의 업을 이어받았다.
건강한 여인들을 납치하여 자식을 보는 데에 열중했다면 얼마나 많은 자식을 두었겠는가.
하지만 연호정은 거기서 한 가지 의문점을 떠올렸다.
‘능력이 안 되는 자식들은 다 폐기 처분 한다고 들었는데.’
피가 옅은 자, 교주의 권위를 더럽힐 뿐이다.
능력 없고 재능 없는 이들을 제거하는 것은 사음교주에게 있어 당연한 일이었다. 그것이 얼마나 부도덕하냐를 따지기 전에, 광신도를 거느린 사교에선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이상하군. 그렇다면 하 선배와 함께 온 저 백 명의 고수들은 절대 교주의 자식이라 볼 수가 없는데.’
광룡부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어떻게 혈음사기를 저렇게까지 익힌 거지?’
한 명, 한 명의 경지가 절정고수라 불릴 만하다.
그 숫자가 무려 백 명이다. 연호정이 사는 세상에 워낙 고수가 많아서 그렇지, 절정고수 백 명으로 이뤄진 집단이라면 어딜 가도 최고 정예 소리를 들을 만한 전력이었다.
‘직접 부딪쳐 봐야 알겠군.’
그리고 그 전에, 확인해야 할 일이 있었다.
“진양.”
“왜 그러시오?”
“절정고수 백 명, 막을 수 있겠냐?”
“질문이 잘못되었소.”
“음?”
“이길 수 있냐고 물어봐야지.”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각개 격파라면 아주 불가능한 건 아니겠지. 하지만 놈들은 하나 된 부대다. 진을 짜서 철저하게 몰아붙이면 너라도 어려워.”
“붙어 보기 전에는 모르는 거요.”
자만이 아니었다. 이것은 자신감이었다.
연호정은 진양의 그 자신감이 새롭게 깨친 신법 덕분이라고 생각했다. 아마 그 신법을 전투에 써 보고 싶어서 몸이 근질근질하기도 할 것이다.
“일단 쉬자.”
“응? 지금 안 치고 들어가오?”
“뭘 들은 거냐. 이제부터 진짜 흑제성주다. 강량을 기다려야지.”
진양이 고개를 휘휘 저었다.
“그전에는 성주 아니었나? 거참.”
말은 그렇게 했지만, 털썩 주저앉아 가부좌를 튼 그는 곧장 운공에 들어갔다.
웃으며 그를 내려다보던 연호정 역시 말에서 내렸다. 흑혈신마가 투레질을 하며 무릎을 꿇었다.
‘하긴, 이 녀석 말도 맞지.’
그는 언제나 흑제성주였다.
그리고 흑암제였다.
연호정이 다시 언덕을 바라보았다.
‘얼굴 맞대기 전까지 그쪽도 잘 쉬고 계십시오.’
하은교가 어찌하여 사음교의 병력을 대동하고 섬서로 들어왔는지는 알 수 없다.
중요한 건, 그녀 역시 연호정의 기도를 느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병력과 함께 언덕을 넘지 않았다는 건, 철저하게 그 자리에서 연호정을 대면하겠다는 뜻이었다.
즉, 연호정이 이곳에 온 것만으로도 그들은 섣불리 움직이지 않는다. 연호정의 존재 자체가 무의미한 희생을 막을 수 있는 억제력을 지닌 것이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간의 사정 좀 들어 봅시다.’
***
다음 날 아침.
“성주님을 뵙습니다!”
우렁차기 그지없는 목소리에서 넘쳐흐르는 충성심과 강력한 내력이 느껴진다.
강량과 함께 온 이들은 암무단주와 성주의 암중 호위 부대인 일백의 호종대(護宗隊)였다.
호종대 전원이 암무단주에 육박하는 은신술을 익힌 고수들이었다. 호종대주 한중명의 은신술도 그러했으며, 방어 위주의 무공을 익힌 대원들과 달리 그는 공수 양면의 완성형 무공을 지닌 고수였다.
“먼 길 오느라 수고했다. 앞으로 잘 부탁한다.”
“충(忠)!”
충성을 바치겠다는 한마디와 함께 호종대 전원이 모두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빤히 보고 있는데도 귀신처럼 사라지는 은신술. 양천이 흑도 무림을 일통하며 긁어모은 정상급 사술이학(邪術異學)을 익혔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암무단주 허백은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앞으로 정보 부대의 장으로서, 성주와 함께 다니며 중원 전역의 정보를 즉각 보고할 사람이 그였다.
‘이것 봐라?’
진양은 허백의 무공에 내심 놀랐다.
양천이 작정하고 키운 고수 중 하나라고 듣긴 했지만, 설마하니 무종을 넘은 고수일 줄은 상상도 못 했던 것이다.
일개 정보 부대의 수장이 자신과 비교해도 큰 모자람이 없다니, 괜히 자존심이 상했다.
강량은 진양의 생각을 곧장 읽을 수 있었다. 하긴, 자신 역시 처음 허백을 봤을 때 똑같은 생각을 했으니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었다.
평소라면 진양을 놀렸겠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라는 게 아쉬울 뿐이었다.
“혹시나 해서 말씀드리는 건데, 저희 안 쉬어도 됩니다.”
강량의 말에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넘어가자.”
히히힝!
연호정이 흑혈신마에 오르자, 강량과 허백 역시 말에 올랐다.
진양이 툴툴거렸다.
“빌어먹을, 이러면 내가 무슨 시동 같잖아.”
“시동치고는 덩치가 너무 크잖소, 형님은.”
“뒈진다, 너.”
강량은 웃음을 참으며 고개를 돌렸다.
연호정이 광룡부를 진양에게 넘겼다.
“들고 따라와라.”
“대형까지 왜 이러는 거요!”
“병기는 무인의 생명이라 했다. 나는 지금 너에게 내 생명을 맡긴 것이다.”
“…….”
“호종대주에게도 광룡부는 안 맡겨.”
그 말에 진양의 표정이 확 풀어졌다.
“커험! 나도 알지, 그거야. 자, 그럼 가 봅시다.”
호종대주는 은신을 해야 하니 당연히 무기를 맡길 수 없다.
진양 역시 그걸 모르지 않았지만, 속이 빤히 들여다보이는 말 한마디에도 감동하는 게 사람 아니겠는가.
강량이 연호정에게 전음을 보냈다.
[가끔 진 형님을 보면 세상 참 쉽게 산다는 생각이 들어요.]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강량은 모를 것이다. 진양처럼 세상을 단순하게 사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고단한 일인지. 그만한 가치가 없으면 저렇게도 못 산다.
“그럼.”
연호정의 눈빛이 바뀌었다.
훅!
허허로웠던 그의 존재감이 일순 만근의 중압감으로 사위를 짓누르기 시작했다.
흑백무제도, 연가의 장남도 아니다.
흑도 무림 연합의 수장, 흑제성주 연호정의 기도였다.
“가자.”
시원한 울음과 함께 선두로 치고 나간 흑혈신마가 언덕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리 높지도 낮지도 않은 언덕은 단숨에 흑혈신마의 발아래 정복되었다.
언덕 꼭대기에 올라선 연호정이 저 멀리 떨어진 백여 명의 가면인들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그중, 유독 동떨어진 바위에 앉아 남쪽을 바라보는 한 명의 여인이 눈에 띄었다.
번쩍!
기수의 마음을 알았을까.
유장하게 흐르던 황룡기가 강하게 조여지니, 흑혈신마의 안광이 새파란 번갯불을 토해 냈다.
히히히히힝!!
지금껏 터트렸던 어떤 울음소리보다도 강렬하다. 수백 장 밖에서도 들릴 법한 마물의 사자후였다.
사아악!
한참 멀리 떨어져 있는데도 불그스름한 살기가 전해져 왔다. 백 명의 기괴한 복장을 한 가면인들이 뿜는 사기(邪氣)였다.
“어…….”
진양이 눈살을 찌푸렸다.
“저 새끼들, 상당한데?”
그때, 연호정이 말했다.
“강 신장, 허 단주.”
“말씀하십시오.”
“음제와 긴히 할 얘기가 있다.”
흑혈신마가 다시 앞으로 걸어 나갔다.
“다른 사람은 초대하지 않을 것이니 자리부터 만들어라.”
거역할 수 없는 강렬한 목소리.
훅!
말 위에서 뛰어오른 강량과 허백이 엄청난 속도로 언덕을 내려갔다.
순식간에 언덕 아래에 다다른 그들은 곧장 백 명의 가면인들을 향해 질주했다.
“카아아앗!”
가면인 중 하나가 기괴한 소리를 내자, 백 명의 고수 전원이 넓게 포진하여 하은교의 앞을 막았다.
연호정의 눈에 기광이 떠올랐다.
이름은 모르지만 익숙한 진법이었다. 과거 숱한 전투를 치르며 봐 온 사음교의 독문진법이었다.
그리고 그 뒤, 바위에 앉은 하은교는 여전히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진양.”
“말하시오.”
“저 둘이 일각 안에 절반을 눕히지 못하면 너도 끼어라.”
진양이 씨익 웃었다.
“그거 좋지.”
그렇게 두 사람이 언덕을 반쯤 내려왔을 때.
콰르릉!
강량과 허백, 그리고 백음귀들의 전투가 벌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