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16)
116화. 모욕의 대가 (4)
“날이 좋군.”
창가에서 스며드는 햇살이 놀랍도록 맑았다.
이제는 완연한 가을이라고 봐도 좋았다. 바람은 선선했고, 하늘은 쾌청했다. 아직 낙엽이 지기까지는 시간이 남았기에 더욱 소중한 날씨였다.
“자네도 차 한잔하게.”
“예? 아, 예!”
이건이 콧잔등 위에 올려져 있던 물건을 내려놓곤 감사하다는 듯 찻잔을 받았다.
모용우가 신기한 눈으로 그 물체를 바라보았다.
“그게 그 애체(靉靆)라는 물건인가?”
“예? 아, 이거요. 그렇습니다. 생각해 보니 아직 지부장님께 보여 드린 적은 없군요.”
모용우가 미소를 지었다.
“미안하네. 근래 너무 바빠서 자네에게 제대로 신경을 못 썼네.”
“하하, 그런 말씀 마십시오.”
이건이 애체를 집어 들었다.
“무역상을 통해 얻었습니다. 서역에서 넘어온 물건인데, 신기하게도 글씨가 크고 선명하게 보이더군요.”
“그런가?”
“한번 써 보시겠습니까?”
“괜찮네. 남의 물건을 쉬이 쓰는 건 예의가 아니지.”
이건이 멋쩍은 듯 웃었다.
모용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데 자네에게 애체가 필요한가? 자네 내공이라면 쌀알에 새겨진 글씨도 읽을 수준일 텐데?”
“아시다시피 제 내공은 만능이 아니라서요.”
모용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은 본디 모용세가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모용우와 우연히 연을 맺은 사람으로, 모용우의 은혜를 입은 이건이 자발적으로 그의 수하를 자처했다.
‘굉장했지, 그때는.’
모용우가 보는 이건은 강자였다.
그것도 보통 강자가 아니라, 자신을 훌쩍 뛰어넘는 수준의 강자였다. 만일 그때 이건이 크게 다치지 않았다면, 언감생심 십초도 채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다만 이건의 내공은, 아니 무공은 엄청난 위력을 자아내는 만큼 단점도 명확했다.
평소에는 내공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것도 그런 연유에서였다.
“어쨌든, 이 애체란 놈을 구한 이후부터는 작업에 속도가 붙었습니다. 저희 쪽에서도 한번 생산해 볼까 싶습니다.”
“나름의 정교한 기술이 필요할 걸세. 재료가 있다 해도 쉽진 않을 거야.”
“하하, 그렇겠지요.”
모용우가 의자에 등을 묻었다.
이건이 미소를 지었다.
“편해 보이십니다.”
모용우가 쓴웃음을 지었다.
“몸은 편하네. 산더미 같은 업무에서 해방되니 뭘 해야 할지 모르겠을 정도야.”
“하면 마음은 불편하시단 말입니까?”
모용우는 그저 웃어 보였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에게는 이건이 모르는 크나큰 고민이 있었다.
그리고 그 고민은 어떤 방식으로든 해결이 될 것이다. 문제는 어떤 식으로 해결되더라도 이후 더 큰 고민이 그를 맞이할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고민이라.’
모용우의 얼굴에 고뇌의 빛이 감돌았다.
그는 연호정이 보낸 서신의 내용을 떠올렸다.
‘모용연화가 가면 당신은 선택을 내려야 해. 저들을 버릴 것인가, 아니면 안고 갈 것인가. 당신의 판단에 저들 모두의 목숨이 걸려 있다는 것이다.’
모용우가 눈을 감았다.
‘타인의 목숨이 내 선택에 달렸다…….’
부담스러운 일이다.
수년 동안 수하들을 책임지며 살아왔다. 하지만 이번에는 책임의 깊이가 달랐다.
‘무림과 연관이 없는 자들. 와중에는 매해 선행을 베푸는 자들도 많다. 그런 이들이 내 선택 한 번에 길바닥에 나앉을 수도 있다는 것.’
모용우가 한숨을 쉬었다.
이건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러시는지요?”
“음? 아, 아닐세. 나른해서.”
“하하하! 나중에 또 언제 바빠질지 모릅니다. 쉴 수 있을 때 확실히 쉬어 두는 것도 좋지요.”
“맞는 말일세.”
웃으며 대화를 주고받는 두 사람.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
창가에서 부는 바람이 조금은 서늘해진 것 같았다.
모용우가 담담하게 말했다.
“이건.”
“예, 지부장님.”
“데려오게.”
이건이 표정을 굳혔다.
“조심하십시오.”
“걱정하지 말게.”
서류를 들고 일어난 이건이 집무실을 나섰다.
잠시 후.
“지부장님. 모용본가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모셔라.”
덜컹.
문이 열리고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눈이 번쩍 뜨일 만큼 대단한 미모는 아니지만, 왠지 모르게 사람의 시선을 끄는 미인이었다. 고급스러운 비단옷이 무척 잘 어울렸다.
여인, 모용연화가 고개를 숙였다.
“연화가 숙부님께 인사드려요. 오랜만에 뵙지요?”
모용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오랜만이구나.”
모용연화.
기실, 둘 사이의 나이 차는 그리 크지 않았다. 모용우가 본격적으로 검을 수련하던 어린 시절, 모용연화가 태어났기 때문이다.
열한 살 차이의 숙질(叔姪) 사이라면 충분히 친근한 분위기가 형성될 수 있다.
그러나 모용우와 모용연화 사이에는 묘한 벽이 있었다. 그것은 두 사람이 서로를 위해 세워 둔 보이지 않는 벽이었다.
모용연화가 빙긋 웃었다.
“일 년 만인가요?”
“그렇구나.”
“안 뵌 새에 숙부님께서는 더 잘생겨지신 것 같아요. 저잣거리에 나가시면 여인네들이 줄을 서겠는데요?”
모용우가 쓰게 웃었다.
“서른이 다 되도록 혼사를 치르지 못했다. 앞으로도 혼자이지 싶다.”
“호호호, 그러시면 안 돼요. 세상 어떤 여자가 숙부님을 마다하겠어요.”
친한 숙질지간이라도 쉽게 꺼낼 얘기가 아니었다. 모용연화는 모용우를 숙부가 아닌 나이 많은 이방인처럼 여기고 있었다.
“나는 됐으니 너부터 좋은 사람과 혼인했으면 싶구나.”
“저는 아직 멀었어요. 가문에 일이 오죽 많아야죠.”
“그러냐?”
“네. 너무 많아서 정신이 하나도 없네요. 아버지께서 어찌나 일을 많이 시키시던지요.”
“무척 힘들겠구나.”
“힘들어도 어쩌겠어요. 아버지께서 그렇게 절 믿으시는걸요.”
모용우는 내심 의아했다.
‘이 아이가 이런 말도 할 줄 알았던가?’
고작 몇 마디를 나눴을 뿐이지만, 모용우는 모용연화의 변화를 느꼈다.
그 변화가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한 가지는 알 수 있었다. 예전과는 달리 모용연화를 둘러싼 단단한 벽에 선명한 금이 가 있음을.
바쁘다고 투덜거리지만 은근하게 자랑하고 있다. 지금껏 한 번도 보여 준 적 없는 모습이었다.
‘근래 마음이 흔들린 일이라도 있었는가.’
하긴, 지금은 모용연화를 걱정할 때가 아니었다.
“너무 오래 세워 두었구나. 예 앉거라.”
“네! 아, 차를 드시고 계셨군요.”
“나쁘지 않더구나.”
“저도 한 잔만 타 주시겠어요?”
모용우가 움찔했다.
차를 타 달라?
제아무리 가문의 눈 밖에 났다 해도 질녀가 되어서 숙부에게 할 말은 아니었다. 법도에 어긋나도 많이 어긋나는 처사였다.
모용우가 모용연화를 바라보았다.
모용연화는 빙긋 웃었다.
“제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요?”
달라.
얘기하면 할수록, 보면 볼수록 모용연화의 변화를 체감한다.
‘억지로 웃고 있군.’
평소 쓰고 있던 가면과는 완전히 다른 가면이었다. 모용우가 보는 모용연화는 분명히 무리하고 있었다.
물끄러미 질녀를 보던 모용우가 툭 던지듯 물었다.
“나더러 차를 타 달라는 것이냐?”
“네.”
모용연화가 웃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요? 혹시 그러지 못할 이유라도 있으신지요?”
“…….”
“기분 나쁘신 것 아니죠?”
모용우는 전혀 기분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이런 반응을 보이니, 긴장이 풀어지고 여유가 생길 정도였다.
너무 의외라서 혹여 이게 함정이 아닌가, 하는 의심도 잠깐 들었다. 물론 모용우의 본능은 질녀의 이런 반응이 결코 함정이 아니라는 걸 즉각 알아챌 수 있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웃는 얼굴 너머로 불안정하게 유지되는 자아를 느낀다.
‘다행이다 싶구나.’
모용우는 모용연화가 무서웠다.
질녀의 존재 자체가 무서운 게 아니라, 그녀가 어디까지 엇나갈까 걱정되어 무서웠다. 그는 질녀마저 형처럼 냉혹한 삶을 살길 원치 않았다.
모용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최고로 좋은 놈으로 타 주마.”
“감사해요. 역시 숙부밖에 없어요.”
“말이라도 고맙구나.”
모용우가 창가 밑 화로에 불을 붙였다. 그러고는 물을 부어 은근하게 달였다.
모용연화가 집무실을 둘러보며 말했다.
“예전보다 책이 늘었네요?”
“쉬는 시간에는 책을 많이 읽는다.”
“헤에, 그래요? 요즘에는 무슨 책을…….”
“차를 다 마시면 가문으로 돌아가거라.”
모용연화의 눈이 굳어졌다.
자연스럽게 이어 가던 대화가 툭 끊어지는 기분이었다.
그녀가 모용우를 바라보았다.
등을 돌린 채 물을 달이는 그의 뒷모습은 마치 학자처럼 보였다.
“죄송해요. 제가 잘못 들었나 봐요. 뭐라고 하셨죠?”
“차를 다 마시면 돌아가라 하였다.”
“숙부님.”
“얼굴을 봤으니 되었다. 더는 너와 할 얘기가 없을 듯하다.”
꽤 냉정한 말이었다.
모용연화는 내심 당황을 금치 못했다. 그리고 당황한 만큼이나 은근히 화가 났다.
“저와 할 얘기가 없다고요?”
“그래.”
“글쎄요? 그럴 리가 없을 텐데요?”
“네가 무슨 얘기를 하든 내 뜻은 명백하다. 그러니 우리 사이에 더 이상의 대화는 필요치 않은 듯싶다.”
모용우가 몸을 돌렸다.
모용연화는 움찔했다. 숙부가 자신을 보며 씁쓸하게 웃고 있었다.
“너는 내 개인사에 대해 별 관심이 없잖느냐?”
“저는…….”
“그래.”
모용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말을 끊었다.
“네가 이곳에 온 것은 가주 형님의 명령 때문이지. 이곳의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고 절강 무역 연합을 집어삼키겠다고 통보할 생각이 아니더냐.”
“…….”
“그 통보를 들어줄 생각이 없으니, 차 한잔 마시고 돌아가라는 것이다.”
모용연화의 표정이 굳어졌다.
“통보를 들어줄 생각이 없다……. 의외네요. 숙부님께서 이리 무례하게 나오실 줄은 몰랐어요.”
“나 역시 놀랐다. 네가 그리 망가졌을 줄은 몰랐거든.”
“……!!”
“형님께서도 네 상태를 아시는지 모르겠다만, 마음의 상처는 쉬이 치료하기 어려운 것이다. 네 자신부터 추스르도록 하거라.”
“……재미있네요.”
모용연화의 눈에 솔직한 분노의 감정이 어렸다.
“저는 본가를 대표해서 온 사람이에요. 아무리 숙부님이라도 제게 마땅한 예를 취하셔야 할 텐데요?”
“가문을 대표해서 온 사람이라도 질녀는 질녀다. 천하의 법도가 땅에 떨어졌다고는 하나, 네 말버릇은 그냥 들어 주기엔 지나치게 버릇이 없구나.”
“……!!”
“가문으로 돌아가서 몇 달 푹 쉬도록 해라. 네게 필요한 것은 과중한 업무가 아닌 스스로를 돌아볼 시간이다.”
순간 모용연화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과중한 업무? 스스로를 돌아봐?
‘이……!’
저도 모르게 욕설이 튀어나올 뻔했다. 위태롭게 유지되던 자존감이 산산이 부서질 뻔했다.
연호정이고 상인 연합의 자제들이고 자신을 무시하더니, 이제는 가문에서 쫓겨난 숙부까지 자신을 무시한다.
쾅!
모용연화가 의자를 뒤로 젖히며 일어났다.
“모용 지부장.”
모용우의 눈이 깊어졌다.
모용연화가 차갑게 말을 이었다.
“무역상 관련 일지, 전부 가져와.”
서슴없는 명령조였다.
모용우가 고개를 저었다.
“그런 일지는 없다. 그리고 있다 한들, 네게 보여 줄 생각은 없다.”
“지부장! 다시 말한다! 당장 문서를 가져와!”
“숙부로서 다시 말하겠다. 차를 마시지 않겠다면, 이만 돌아가거라.”
“이……!”
부들부들 떨던 모용연화가 창밖을 향해 소리쳤다.
“적풍대주! 당장 집무실로 들어와!”
모용우가 고개를 저었다.
“그러지 말거라.”
“닥쳐!”
모용연화가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그간 숙부의 예로서 대해 주었더니, 이자가 위아래의 구분도 없어진 모양이군. 아버지께서 숙청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인 줄 알아야지!”
모용우는 묵묵부답이었다.
쾅!
집무실 문이 열리며 천인상이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소공녀님.”
모용연화가 모용우를 가리켰다.
“당장 이자를 제압하라! 본가로 호송할 것이다!”
“…….”
“뭣 하고 있는 거야! 당장…….”
순간 모용연화의 눈이 보름달처럼 커졌다.
쿵!
천인상이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졌다.
쓰러진 천인상 뒤에는 이건이 서 있었다.
“연화야.”
깜짝 놀란 모용연화가 모용우를 보았다.
모용우의 두 눈이 새파랗게 빛났다.
“이만 본가로 돌아가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