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160)
1160화. 백음귀(百淫鬼) (10)
과거, 연호정이 흑도 무리를 이끌고 양천과 일대 승부를 벌이기 전.
귀주성 비처에서 힘을 숨기고 있었다던 귀혼문(鬼魂門)이라는 문파가 연호정을 찾아온 적이 있었다.
그들은 스스로를 흑도 사파로 지칭했고, 흑도 무림의 떠오르는 태양인 연호정 밑으로 들어가 혹독한 밀림이 아닌 중원 땅에서 당당히 살아가고 싶다고 천명했다.
하지만 막상 끌고 온 병력은 하나같이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들 대부분이 무공을 익히지 않은 범부들이었는데, 전설상의 강시처럼 이지를 상실한 괴물이 되어 명령만을 받드는 꼭두각시의 삶을 살았다.
죽지도 살지도 못한 채 이승을 거니는 그들은 바로 고(蠱)라는 벌레에 중독된 상태로, 귀혼문주의 명령이라면 불 속에라도 뛰어들었다.
그날, 연호정은 흑도 정예를 이끌고 귀혼문의 뿌리를 뽑았다. 당연히 귀혼문주는 그 자리에서 목을 날렸다.
무림인을 대상으로 실험을 했대도 용서하기 힘든 일이었다. 한데 그들은 비처 인근 민초들을 중독시켜 세력을 모으고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놈들은 양천에게도 손을 내민 적이 있었다. 양천은 즉각 부대를 파견해 귀혼문을 공격하라 명했고, 그때 살아남은 이들이 또다시 귀주성에 자리를 잡아 세력을 형성한 것이었다.
그렇게 귀혼문은 세상에서 사라졌다.
연호정이 흑제성주가 된 후, 고를 채취해 해독술과 방지법을 알아내라고 의원들에게 명령했지만, 그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애초에 구전(口傳)으로 내려오는 술법이 없는 한, 고를 쓰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그렇게 고에 대해서는 유야무야 잊고 있다가 전쟁이 터졌다.
‘불가능한 일이라고 했다.’
전신 혈도가 타통되고 진기가 융통무애하게 흐르는 고수에게는 어떻게 해도 고가 통하지 않는다고 했다. 당시 귀혼문주가 직접 한 말이었다.
‘삼단전이 일깨워진 고수를 상대로는 어지간한 극독도 쉽게 통하지 않아. 아무리 작은 벌레라도 침투하는 즉시 내공으로 불살라 버릴 수 있으니, 그놈의 말은 타당했다.’
고를 범부에게만 쓰는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구전되는 술법을 이용하면 몸이 강철처럼 단단해지고 근력이 강화되어 움직이는 방패가 된다.
만약 고가 무림인에게도 통했다면, 귀혼문은 진즉에 천하를 제패했을 것이다.
‘한데 어떻게?’
얼굴 좌측 전체에 검붉은 핏줄이 불거져 나온 이 현상은 분명 고독(蠱毒) 때문이었다.
“아아아아!!”
연호정의 철저한 포박에 몸부림을 치던 하은교가 소리를 질렀다.
코앞에서 터진 사자후였다. 엄청난 충격파에 연호정이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물러나는 와중에도 연호정의 눈은 끝까지 하은교를 향해 있었다.
‘고독은 여러 종류라고 했다. 하지만 대개 심장에 파고들어 기생하며, 독술사의 몸에 든 암고독이 죽거나 명령을 내리면 혈관을 타고 올라가 뇌로 파고든다고 하였다.’
콰쾅! 퍼어어엉!
이어지는 하은교의 거센 공세에도 연호정은 침착했다. 철저하게 현무공을 펼치며 막거나 튕겨 내는데, 황룡신왕공을 기반으로 올라온 북천십이벽(北天十二壁)은 가히 성벽과도 같은 위용을 자랑했다.
‘중독자의 목숨을 앗아 가지 않고 고독을 제거하는 방법은 두 가지. 하나는 침투한 고독을 유혹할 만한 향을 뿌려 코로 빼내는 방법이고…….’
콰르르르릉!!
이제는 음제라는 말이 무색했다. 조금 전까지는 탄현천녀수의 기공술을 멋들어지게 구사했지만, 지금은 말 그대로 힘으로 밀어붙이고 있었다.
놀라운 것은, 그냥 힘으로 밀고 들어오는데도 막기가 벅차다는 것이었다. 뒤를 생각하지 않고 혼신의 힘을 다해 경파를 뿜어낸다. 장기전으로 돌입하면 필패할 수밖에 없는 전술을 쓰고 있는 것이다.
황룡기가 더더욱 거세게 불타올랐다.
‘다른 하나는 어떤 장기에도 손상을 가하지 않은 채, 극도로 섬세한 기공술로 고독만을 제거하는 것.’
둘 다 쉽지 않은 방법이었다.
첫 번째 방법이 그나마 이상적이라 할 만하지만, 현재 하은고의 몸에 숨은 고독이 어떤 습성을 지녔는지 알 수 없다. 설령 어떤 종인지 알고, 유혹할 만한 향을 피운다고 한들 혈관을 헤집으며 올라오기 때문에 심각한 후유증이 생길 수 있다.
무극수의 내공에도 죽지 않는 고독이다. 만약 고가 동맥을 찢기라도 하면 그대로 사망할 위험이 있다.
그렇다면.
‘가능할까.’
가능해야만 한다.
‘뒤를 생각할 때가 아니다.’
연호정이 백음귀들을 흘낏 바라보았다.
전투태세를 취하고 있지만, 놈들의 눈빛은 고요하기만 했다. 이대로 죽어도 좋고 살아도 좋다는 기색이었다.
그가 강량, 진양, 허백, 호종대주 모두에게 전음을 보냈다.
[음제를 데리고 잠시 자리를 벗어나겠다. 절대 놈들을 죽이지 말되, 쫓아온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라. 특히 수장으로 보이는 놈은 절대 죽여선 안 된다.]죽이라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려운 명령이지만, 그들의 눈빛은 변함이 없었다.
훅!
마구잡이로 뿜어내는 하은교의 장력을 모조리 분쇄한 연호정이 순간 틈 속으로 파고들었다.
퍼어어억!
복부에 강력한 일격을 맞은 하은교가 피를 뿜으며 날아갔다.
번쩍!
혈익휘천으로 따라잡은 연호정이 그대로 그녀의 양팔을 잡았다.
투둑! 우두둑!
“으아아아악!”
음화제무신공의 힘은 실로 막강하나, 기공력만으로 돌리는 와중이라 튼튼하지는 못했다.
마혈 두 곳을 짚고 동시에 양어깨를 탈구시킨 연호정이 하은교의 아혈까지 짚었다.
“크윽!”
아혈을 짚었는데도 소리가 나온다.
평소 연주만큼이나 노랫소리도 청아했던 그녀였다. 익힌 무공이 음공인 만큼, 아혈 자체가 남들보다 훨씬 더 탄탄했다.
‘죄송!’
우우우우웅!!
황룡기가 아니라 신왕기다.
상단신기로 허공섭물의 비기까지 동원해서 아혈을 봉쇄하니 하은교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잠시나마 호흡이 막혀 버린 것이다.
양어깨가 빠지고 순간적으로 호흡이 되지 않으며, 입 벌려 소리를 낼 수도 없다. 두 다리 역시 연호정의 벼락같은 점혈에 꿈틀거리기만 할 뿐, 발버둥 칠 수 없는 상태였다.
스륵.
널찍한 숲의 공터 한가운데로 내려선 연호정은 조심스레 그녀를 바닥에 눕혔다.
부르르르르.
하은교의 몸이 미친 듯이 떨려 왔다.
연호정은 다급해진 마음을 애써 차분하게 가라앉혔다. 어차피 하은교가 몸부림치면 내공 침투도 불가능했다. 상대를 하은교가 아닌 일면식도 없는 사람처럼 대해야만 했다.
‘괜찮을 것이다.’
하은교의 호흡은 깊다. 내공 역시 충만하여 잠시 호흡 좀 막힌다고 죽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고독이 어디에 숨어 있느냐다.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연호정은 차분히 그녀를 내려다보며 기다렸다.
하얗던 하은교의 얼굴이 점점 파랗게 질려 가기 시작했다. 그녀의 호흡 깊이를 생각하면 지나치게 빨리 의식을 잃는 셈이었다.
그때였다.
신왕기를 극한까지 끌어올린 연호정의 눈에 이질적인 무언가가 포착되었다.
‘역시 심장이었군.’
숙주가 죽음의 위기에 봉착하자 숨어 있던 고독이 활동을 시작했다.
툭!
아혈의 십 분지 일을 열자 하은교가 미친 듯이 숨을 몰아쉬었다. 섬세함이 극에 달한 점혈법이었다.
‘심장에 있다는 건 알았다. 이제부터가 문제야.’
내공으로 고독을 없애 버리는 것은 난생처음이었다. 하물며 상대가 하은교인 만큼 연호정으로서도 긴장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괜찮아. 할 수 있다.’
연호정은 황룡신왕공을 믿었다.
황룡신왕공은 진정한 중도를 상징하는 신공으로, 그것은 비단 적을 파괴하는 무공만이 아닌 활생(活生)의 기운 역시 아우른다.
그리고 황룡신왕공보다 자신의 실력과 깨달음을 믿었다.
지금껏 무수히 많은 적을 없애 왔다. 일일이 숫자를 세기가 어려울 정도의 살인이다. 훗날 죽는다면 무조건 지옥행일 것이다.
하지만 그로 인해 인체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활생의 지식도 얻을 수 있었다.
살법(殺法)과 활법(活法)은 종이 한 장 차이인 법.
비정한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살법만을 썼던 그가, 한 사람을 살리기 위해 최초로 활법을 꺼내 들었다.
‘고독을 태우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하 선배의 상단전이야.’
상단전은 곧 두뇌다. 만에 하나 죽은 고독이 치명적인 독액을 흩뿌리면, 그리고 그 독액이 두뇌로 올라오면 대라신선이 와도 살려 낼 수 없다.
나아가, 이 고독 역시 주술(呪術)과 함께 발휘되는 독술이라면 고독이 죽자마자 상단전에 충격을 받을 수 있다.
그야말로 모든 면에서 만전을 기해야만 했다. 사람을 치료하는 것은 이렇게나 어려운 일인 것이다.
‘제발.’
후우우웅.
하은교의 이마에 올려진 연호정의 손으로 기분 좋은 우윳빛 바람이 모여들었다. 유형이 될 만큼 끌어 올린 신왕기였다.
연호정은 순간 정신이 나갈 뻔한 것을 겨우 참았다. 하은교의 상단전을 보호하기 위해 팔 할에 이르는 신왕기를 쏟아부은 탓에 눈앞이 아찔했다.
‘절대 뚫려선 안 돼.’
목 아래부터 백회까지 신왕기로 가득 채웠다. 그녀의 상단전을 넘어 얼굴 전체를 신기로 에워싼 것이다.
연호정의 왼손이 하은교의 가슴에 닿았다. 심장 바로 위였다.
‘느껴진다.’
얼마 남지 않은 신왕기로 고독의 위치를 파악한다.
‘몰랐을 땐 몰라도, 알아 버린 이상 넌 절대 벗어나지 못한다.’
연호정이 이 치료에 자신이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사신기(四神氣) 때문이었다.
사신기 중 주작기(朱雀氣)는 심장에 거하는 화기(火氣)로, 넘치는 생명력을 상징하는 남천(南天)의 영기(靈氣)다.
무극에 이른 사신무장이라면 각 장기에 숨어든 벌레나 탁기를 일순간 뽑아낼 수 있다. 하물며 화기라면 그 자리에서 불태워 버리는 것이 가능하다.
중요한 건 힘의 분배였다.
‘주작기였다면 시간이 걸렸을 터. 황룡기를 기반으로 한 화기라서 더 쉬울 것이다.’
화르륵.
연호정의 좌수 위로 은은한 금빛 화기가 피어올랐다.
강렬하지 않은, 마치 수기(水氣)처럼 자연스럽고 부드러운 화기가 하은교의 피부를 통과해 곧장 심장으로 쏟아졌다.
움찔!
하은교의 상체가 크게 튕겨 올라왔다.
연호정은 눈을 감았다.
‘와라.’
다시 심장 안으로 숨어들었던 고독이 황룡의 화기를 느끼자 빠르게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황룡화기(黃龍火氣)는 위협적이긴커녕 오히려 상생의 기운을 뿜어내며 고독을 유혹했다. 고독에게 있어서 이토록 부드러운 화기는, 보금자리가 될 심장을 튼튼하게 해 줄 멋진 먹잇감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제아무리 신묘한 고독이라도 벌레에 불과할 뿐.
연호정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훅!
금빛 열기가 송곳처럼 파고들어 고독의 몸을 통과했다.
푸스스.
단 일격으로 고독이 증발했다. 예상대로 고독 자체를 없애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츠츠츠.
고독이 남긴 독기가 심장을 점점 시커멓게 물들였다.
우우우우우웅!!
연호정은 있는 대로 황룡기를 퍼부어 독의 진행을 막았다. 동시에 서서히 독기를 태워, 심장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대비했다.
‘부족하다. 환자의 호흡이 중요해. 자연스레 들어오는 자연기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스르륵.
신왕기 한 줄기가 내려와 아혈을 절반 정도 열었다.
하은교의 호흡이 더욱 풍성해졌다. 그러자 혈행이 빨라지고, 빨라진 혈행만큼 황룡화기에도 기세가 붙어 무서운 속도로 독을 태웠다.
연호정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황룡기와 신왕기를 동시에, 그것도 극한까지 끌어올리면서도 지극히 섬세하게 운용 중이다. 그야말로 생사혈전을 치르는 것에 가까운 심력 소모였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울컥!
하은교의 입 밖으로 시커먼 핏물이 튀어나왔다.
동시에 제멋대로 꿈틀대던 음화제무진기가 벼락처럼 아혈로 향했다.
툭!
아혈과 함께 말도, 호흡도 전부 트였다.
“허어어어억!”
호흡이 커지고 이지(理智)가 밝아지는 그 순간.
하은교의 좌측 얼굴을 뒤덮었던 검붉은 혈관이 사그라들고, 피처럼 붉었던 눈도 조금씩 조금씩 정상으로 돌아왔다.
흐릿했던 그녀의 시야가 비로소 맑게 개었다.
“여긴…….”
“정신이 드십니까?”
몇 번이나 눈을 끔뻑이던 하은교의 얼굴에 놀라움이 어렸다.
“호정?”
“후우.”
안도의 숨을 몰아쉰 연호정이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