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161)
1161화. 이중간계(二重奸計) (1)
“…….”
나른한 얼굴로 대전 안을 밝힌 불꽃을 보던 남자의 눈이 순간 반짝였다.
“대극과 사괴술사(邪怪術士)를 들라 하라.”
그 넓은 대전에는 오직 사내 하나만 있었지만, 그의 목소리는 대전 너머로 흘러 흘러 신(神)의 뜻을 전달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쿠르릉.
거대한 대전의 문이 열리며 두 사람이 걸어 들어왔다.
그중 한 사람, 야율대극의 기도는 예전보다 한층 깊어져 있었다. 사신(邪神)의 거처이기에 더더욱 조심스레 기운을 갈무리했지만, 인간의 영역을 벗어난 반선(半仙)의 눈에는 야율대극의 몸에 도사리고 있는 막강한 힘의 실체가 보였다.
길고 푹신한 융단 위를 걸어온 두 사람이 태사의로 이어지는 계단 아래에 부복했다.
“사신(邪神)을 뵈옵니다.”
야율대극의 말투는 한층 간결해졌으되 신을 향한 애정과 신뢰는 더더욱 깊어졌다.
“여, 영음산의 지존이자 고금의 섭리를 주무르시는 분을 뵙습니다.”
반면 그 옆에 부복한 앙상한 노인의 목소리는 짙은 공포와 긴장으로 떨리고 있었다. 사내에 대한 존경보다는 두려움이 더 깊은 것 같았다.
사내가 금반지로 가득한 오른손을 들었다.
“고개를 들라.”
두 사람이 천천히 상체를 세웠다.
사내의 눈이 야율대극에게로 향했다.
“가장 가까이서 신을 보필하는 신장(神將)답게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으니, 요 몇 달 사이에 또 다른 성취를 얻었구나. 기특한 일이다.”
야율대극의 얼굴에 환희가 어렸다.
신에게 칭찬을 받았다. 자애로운 만큼 엄격하기도 한 사신은 크게 화를 내는 일도 없지만, 그만큼 칭찬에도 인색했다.
“모두가 신의 은덕입니다.”
“차후 사왕들을 이끌 준비가 되어 가고 있구나. 기대가 크도다.”
야율대극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조아렸다.
교내에서 그를 칭하는 별호가 사음제(邪淫帝)였다. 그야말로 대단한 별호였지만, 신 앞에서는 모든 것이 무의미할 뿐이었다.
제(帝)든 왕(王)이든, 결국 속세를 살아가는 사람에게 붙는 명칭일 뿐이다. 삼라만상을 지배하는 신 앞에서는 한낱 인간이 어떻게 불리든 아무 의미도 없다.
그래서 야율대극은 자신의 별호를 당당히 받아들였다. 신 앞에서 그의 별호는 오만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술사.”
“예, 존엄하신 분이시여.”
사내의 오른손에서 은은한 진동이 일었다.
훅!
순간적으로 대전 안의 공기가 그의 손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다.
아무 힘도 주지 않고 편안하게 들어 올린 오른손 위에, 어느 순간 은은한 회색빛 연기가 원형을 그리며 모여들었다.
어디서 나왔는지도 모를 연기였다. 엄청나게 짙은 안개 같기도 하고, 연소되며 뿜어져 나오는 염화의 연기 같기도 했다.
스스스스스.
엄청난 속도로 중심으로 빨려 들어가는 회색빛 연기에, 우윳빛 구체가 점점 그 크기를 불려 갔다.
재차 고개를 들어 구체를 보는 야율대극의 눈이 몽롱해지고, 사괴술사라 불린 노인 역시 황홀한 눈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
화아아아악!
모든 연기가 흡수된 사내의 오른손에 어른 주먹보다 큰 동그란 구슬이 만들어졌다.
실재하는 구슬이 아니다. 그것은 외양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구슬이지만, 은은한 우윳빛 아지랑이를 발하는 구체는 얼핏 푹신해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실재하는 구슬이기도 했다. 사내는 수많은 공부를 극에 이르도록 연마하고 그만큼 많은 수의 공부를 창조한 이로, 기(氣)를 다루는 능력이 인세의 상식을 초월해 있었다.
기의 구체.
본디 무형인 기의 밀도를 올려 유형의 구슬을 만들어 냈다.
자신의 내공을 내단(內丹)으로 형성해도 찬사를 받는 판국에, 그는 체외로 내공을 뽑아 순식간에 단을 형성한 것이다.
일시적이라고는 하나 천하의 누구라도 흉내 낼 수 없는 신선의 능이었다. 인간의 육신에 담아 둘 수 있는 축기의 한계를 깬, 진정한 무신(武神)의 힘이었다.
그토록 놀라운 위업을 달성했음에도 사내의 얼굴에는 어떠한 감흥이라는 게 없었다. 그에게도 힘이 드는 일인지 눈빛이 유독 강렬해졌지만, 그뿐이었다.
“혈존대사(血尊大師)가 연락을 취하였다. 속세의 목숨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한다.”
“아……!”
“당대 혈존대사가 이승을 벗어나면, 차후 언제 혈신(血神)의 사자(使者)가 나타날지 모른다.”
사괴술사는 사내가 왜 자신을 불렀는지 깨달았다.
“마침 사백고(邪魄蠱)가 아흐레 뒤에 성충이 됩니다. 그것을 대사에게 전하면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 것으로 사료되옵니다.”
“들었는가.”
야율대극에게 하는 말도, 사괴술사에게 하는 말도 아니었다.
사내는 구체를 향해 물었다. 마치 구체를 살아 있는 대상으로 여기는 듯했다.
잠시 후.
우우우우웅.
구체가 서서히 붉어지더니, 이내 완연한 핏빛으로 물들었다.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훅!
생성되기까진 약간의 시간이 걸렸지만, 사라지는 것은 순간이다.
진기의 구체는 순식간에 사내의 몸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본디 그의 힘이라 한들 엄청난 기가 집약된 내단형 물체인데, 그만한 힘을 한순간에 빨아들였는데도 아무런 내력 충돌 증세도 보이지 않았다.
말 그대로 바다와도 같은 내공이었다. 몸에 몇 개의 단전이 있어도 부족할, 무(武)의 상식을 초월하는 신의 힘이었다.
사내가 오른손을 비볐다.
손가락 하나하나마다 끼워진 금반지들이 부딪치며 기묘한 소리를 냈다.
“둘을 한자리에 부른 이유가 있다.”
두 사람이 다시 고개를 조아렸다.
사내가 말을 이었다.
“성충이 된 사백고는 곧 혈존대사의 목숨 그 자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것을 안전하게 운반할 만한 자는 본교에 많지 않아. 하물며 불의 마가(魔家)가 먼저 전쟁을 일으킨 고로, 무지한 대륙 놈들의 정보원들이 사방천지에서 감시의 눈길을 보내고 있다.”
사내가 야율대극을 바라보았다.
“하여 홀로 대륙에서 죽어 가고 있는 혈존대사에게 새로운 목숨을 안겨 줄 사람으로 너를 택하였다.”
“사신의 기대에 필히 부흥할 것입니다.”
기실 사왕 하나를 보내도 될 일이었다. 대륙 최강자들인 성천급의 능력을 보유했으니, 극도로 조심히 침투하면 대륙의 정보망에도 걸리지 않을 것이다. 정보원들이 아무리 많아도 그 넓은 산천을 다 감시할 수는 없을 테니까.
그런데도 야율대극을 보낸다는 것은, 그만큼 이 일이 중요하다는 뜻이었다.
“급하다면 급한 일이나, 기실 진정 급하다고 생각했다면 내 따로 방책을 마련했을 터이다. 그러하지 않은 이유는, 설령 혈존대사가 죽는다 해도 대업 자체에 큰 차질은 없을 거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사신께서 보시는 것이 천도(天道)가 아니겠습니까.”
“다만, 그렇다 해도 혈존대사의 목숨이 중한 것은 사실이다. 지금 내 눈엔 혈존대사의 목숨이 얼마나 남았는지가 보이지 않아.”
사내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의미를 알기 힘든 미소.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대전 공기가 맑아지는 것 같았다.
“대극, 너는 본교에서 나와 적흠을 제외하고 사음의 무공과 사술(邪術) 양면에서 지극히 뛰어난 성취를 이룬 자다.”
“사신께서 이끌어 주신 덕입니다.”
“혈존대사의 목숨, 혈존대사의 혈신지기(血神之氣)가 얼마나 남았는지 제대로 꿰뚫어 볼 수 있는 사람이 너밖에 없다는 뜻이다. 하여, 사왕이 아니라 너를 보내려는 것이다.”
“……?”
“네가 보기에 혈존대사의 생기와 혈신지기의 균형이 크게 어긋나 사백고가 제 역할을 못 할 것 같다면.”
우우우웅.
태사의 옆, 화려하기 그지없는 탁자 위에 놓여 있던 작은 상자가 야율대극 앞으로 날아갔다.
야율대극이 공손히 상자를 받았다.
“그곳에 혈신지기의 씨앗만을 봉인한 후, 또 다른 자에게 사백고와 씨앗을 심거라.”
“새로운 그릇으로는 어떤 자를 염두에 두셨나이까.”
“과거, 인간으로 태어나 스스로 깨달음을 얻어 등선한 걸물이 있었다. 그 걸물은 본인이 수행하던 산에 모든 선기(仙氣)를 흩뿌리고 한 줌 재가 되어 스러졌으니, 그의 공부를 이어받은 자들이 산에 모여 도(道)를 좇기 시작했느니라.”
야율대극의 눈이 번쩍였다.
“무당산을 말씀하시는 것이옵니까.”
“그렇다. 혈존대사가 이르길, 유일하게 자신의 예지 능력을 포착하고 선행(先行)을 막았던 자가 하나 있다고 하였다. 비록 깨달은 이가 남기고 간 선기 덕분이었으나, 무(武)보다는 도(道)에 어울리는 도사라 하였으니 그릇으로는 최적일 것이다.”
“……혈존대사의 상태를 본 후, 여의치 않으면 탁무자에게 씨앗을 심어 두겠습니다.”
검선 탁무자.
상단전이 온전치 않다고는 하나, 그 무력은 중원 제일을 논하는 강자였다. 한데도 야율대극은 너무나도 담담하게 그 일을 수행하겠다고 말했다.
신의 명령이기 때문이었다.
신께서 그리하라 명을 내린 것은, 자신에게 그만한 능력이 있기 때문이리라.
사내가 만족한 듯 미소를 지었다.
“내, 너를 믿겠다.”
“신께서 바라시는 대로 될 것이옵니다.”
그때였다.
“컥!”
사괴술사가 갑자기 가슴을 부여잡으며 융단에 머리를 박았다.
느닷없는 상황이었지만 사내나 야율대극은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야율대극은 엄한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신전 내에서 어인 불충이오. 육신을 똑바로 하시오.”
“죄, 죄송합니다.”
부르르 떨면서도 어떻게든 자세를 바로 한다. 온몸의 장기가 짜부라지는 고통조차 참아 낸 것이다.
사내가 물었다.
“무슨 일이냐.”
사괴술사는 침까지 질질 흘렸다. 떨어진 침이 융단을 더럽혔지만 인지하지 못하는 듯했다. 그만큼 고통이 극심한 것이다.
“하, 하은교의 몸속에 심어 둔 혈고(血蠱)가 죽었습니다.”
순간 사내의 눈이 번뜩였다.
“그 계집이 죽었다고?”
“……암혈고가 몸부림치는 건 하은교의 심장에 자리한 수혈고가 죽었다는 뜻이니, 숙주의 목숨도 끊어졌을 것입니다.”
“호오.”
사내의 얼굴에 흥미가 일었다.
“이리 빨리 백음이 완성될 수 있는가.”
야율대극이 고개를 숙였다.
“경하드리옵니다.”
“아니, 생각해 보니 그것은 모르는 일이다. 혹여 누군가가 그 계집에게서 혈고만 뽑아 죽였을지도 모르는 일 아니더냐.”
사괴술사는 절대 그럴 수 없다고 생각했다. 애초에 혈고는 영음산에서 만들어진 물건이었다. 하물며 주술을 걸어 주독(呪毒)까지 품은 놈이지 않던가.
의술이 신의 경지에 이르러도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만약 정말 혈고만 뽑아 죽였다면, 그자는 이미 사신과 동격인 수준이거나 고금의 모든 사마외도(邪魔外道)를 분쇄하는 역천의 힘을 가지고 있을 터.
당연히 그런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계획대로 하은교가 죽었다면, 싱싱한 제자의 몸이 수중에 들어왔다는 것인데.”
사내의 얼굴에 흥미가 일었다.
“천한 잡종이라도 그 계집이 품은 힘은 범상치 않았다. 제자가 아직 청백지신이라 하였으니, 사음의 은총을 받기에 모자람이 없을 것이다.”
“나아가 백음을 완성하였다면, 곧 파탄이 없는 혈음의 사공도 사신의 손에 들어올 것입니다.”
야율대극이 소리 높여 외쳤다.
“경하드리옵니다!”
사내가 손을 저었다.
“대극은 대륙으로 갈 준비를 하고, 사괴술사는 사백고 관리에 성심을 다하도록.”
“예.”
“이만 물러들 가거라.”
잠시 후.
홀로 남은 사내가 피식 웃었다.
“그년의 핏줄은 진정 예사롭지 않았지. 천리(天理)로 이어진 사제지간에 깨달음으로 이어지는 대(代)라…… 벌써부터 기대가 되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