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162)
1162화. 이중 간계(二重奸計) (2)
치이이익!
하은교의 장심에서 허연 연기가 피어올랐다.
정신이 든 이후, 본능적으로 체내에 남은 탁기를 외부로 배출하는 것이다. 중원 정점을 논해도 모자람이 없는 신공 덕분이었으며, 그만큼 그녀의 깨달음이 대단하다는 뜻이기도 했다.
정신을 차린 하은교는 곧바로 눈을 감고 몸을 점검했다. 비록 무(武)보다 음을 더 중시하는 사람이지만, 천하 최강에 가까운 무인인 만큼 자신의 상태를 바로잡는 것이 최우선임을 알았다.
가만히 하은교를 내려다보던 연호정은 곧 그녀의 장심에서 뿜어져 나오는 연기가 빠르게 줄어들고 있음을 확인했다.
그리고 연기가 더 이상 나오지 않게 된 순간.
우두둑.
벼락처럼 그녀의 어깨를 맞추고 마혈 봉쇄를 푼 연호정이 무릎을 꿇었다.
“선배님.”
하은교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여기는 어딘가?”
“섬서입니다.”
“섬서.”
가볍게 심호흡을 한 그녀가 천천히 눈을 떴다.
피로가 가득한 눈이지만, 흑백이 또렷한 아름다운 눈매는 여전했다.
“몸은 어떠십니까?”
“좀 힘들긴 하지만, 괜찮네.”
그녀 성격에 어지간하면 힘들단 말도 안 할 것이다. 내공이 풍부하다 해도 심신의 고단함이 극심하다는 증거였다.
연호정은 하은교를 부축해 상체를 일으켜 세워 주었다.
하은교의 얼굴은 창백했다. 깊은 눈빛은 여전했지만, 혼란을 떨치지 못한 듯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내가 어찌 이곳에……?”
순간 하은교가 얼굴을 찌푸리며 머리를 짚었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하은교의 뒤로 가 상반신을 지탱한 연호정이 그녀의 미간에 손을 올려 두었다.
“일시적으로 저의 신기(神氣)를 선배님의 상단전에 채워 두었습니다.”
“……!”
“서서히 회수하겠습니다. 긴장을 푸십시오.”
우우우웅.
연호정의 손에서 부드러운 흡력(吸力)이 일었다.
하은교의 목까지 채워져 있던 신왕기가 서서히 그의 손으로 이동했다.
본래라면 신체 접촉 없이, 체외의 흡력만으로도 빨아들일 수 있었다. 하지만 연호정은 현재 하은교의 상태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했다. 신중에 신중을 기하기 위해서는 직접 진기의 통로인 미간과 백회에 접촉, 흡기를 조종하는 것이 좋았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움찔!
하은교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연호정이 이를 악물었다.
‘빌어먹을.’
이 부분만큼은 그도 발견하지 못했다.
고독을 죽이고 독액까지 제거해서 모든 일이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고가 죽고 독액도 사라졌지만, 그녀의 상단전과 연결된 주독(呪毒)은 살아 있었다. 물론 그 양은 지극히 미비했으나, 신왕기가 제거되는 순간 발작하여 활동을 시작할 것이다.
‘그것도 그렇지만.’
주독이란 곧 주술사(呪術師)와 영적으로 통하는 술법의 독이었다.
‘암고독을 품고 있는 주술사는 하 선배가 죽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 부분만큼은 확실하다. 하은교의 두뇌에 숨은 주독은 제대로 발화조차 되지 않았기 때문에 수고독과 함께 죽어 버렸다고 착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개화 자체를 하지 않았던 주독이 깨어나면, 주술사는 그 즉시 하은교의 생존을 깨달을 것이다.
‘씨앗을 발아시키지 않은 채로 없애 버려야 한다.’
그것은 어렵지 않다.
정확히 말하면, 방법은 어렵지 않지만 연호정 자신의 결단이 필요했다.
‘선배는 지금 너무 지쳤다. 상단전의 신기도 거의 고갈되었어. 주독이 활동을 시작하면, 당장 그걸 막을 힘도 없을 것이다.’
연호정은 결단을 내렸다.
‘신기(神氣)의 조각을 하나 떼어서 선배의 목숨을 살릴 수 있다면, 오히려 남아도 한참 남는 장사야.’
후우우웅!!
천천히 빠져나가는 신왕기 중심에서, 반대로 상단 중심을 향한 원형의 인력(引力)이 생성되었다.
잠시 후.
훅!
신기의 일부를 떼어 주독의 씨앗을 감싸 버린 연호정이 손을 떼었다.
풀썩.
순간 어지럼증을 느낀 연호정이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호정.”
지친 와중에도 연호정이 무슨 일을 한지 깨달은 그녀였다. 재빨리 몸을 돌린 하은교가 연호정을 부축했다.
“자네…….”
“괜찮습니다.”
하은교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지금 연호정은 묵비에게 황룡기를 떼어 줬을 때와 비슷한 일을 했다. 비우면 다시 차는 내공의 그릇, 즉 기만 남긴 게 아니라 그릇의 일부를 떼어다가 하은교의 상단전에 심어 둔 것이다.
동시에, 황룡기를 떼어 준 것과는 전혀 다른 상황이었다. 황룡기의 경우 연호정의 축기 능력이라면 반년, 짧게는 두세 달 안에 원래의 상태로 회복할 수 있겠지만 상단신기인 신왕기는 달랐다.
한 조각에 불과하나, 그것은 연호정 스스로의 깨달음과 마음 일부를 남기고 간 것과 같았다.
당장 내일 신왕기를 다 회복할 수도 있고, 평생을 가도 회복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나마 신왕기의 구결이 아니었다면 씨앗을 남긴 순간 남은 신기까지 뭉텅이로 딸려 들어갔을 수도 있었다.
‘띵하군.’
왠지 시야도 조금 어두워진 것 같았다.
기분 탓일 수도 있지만, 상단전을 예전처럼 문제없이 다루려면 얼마간의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연호정은 애써 정신을 부여잡으며 말했다.
“선배님. 잘 들으십시오. 그간 무슨 일이 있었느냐면…….”
“말하지 않아도 아네.”
하은교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다 알아.”
전부는 아니지만, 신왕기의 씨앗에는 연호정의 기억도 들어가 있었다.
특히나 최근에 겪었던 일들은 아직 생생하여, 거의 누락 없는 기억 전송이 가능했다. 하은교는 연호정의 최근 일이 년 사이의 기억 대부분을 받아들였다.
“자네가 어떻게 발전했는지도, 자네가 얼마나 힘든 일을 겪었는지도, 자네의 고뇌가 얼마나 지독했는지도 그리고…….”
“…….”
“선배랍시고 해 준 것도 없는 사람의 민폐를 이해해 주고, 그런 사람을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해 줬는지도 다 아네.”
고개를 숙인 하은교가 숨죽여 울었다.
연호정이 웃으며 말했다.
“제가 똑같은 상황이었다면, 선배님 역시 저를 위해 나서 주셨을 것 아닙니까.”
“미안하네. 정말 미안하네.”
“정히 미안한 마음을 지우기 어려우시다면, 제게 사과하십시오. 그 진심 어린 사과를 잘 받아서 오늘의 일을 전부 잊어 두겠습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당신 마음이 편할 것 같다면 얼마든지 사과를 받아 주겠다는 말이었다.
나이는 어리지만 정말 큰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자식 같다는 느낌을 받았지만, 지금의 연호정을 보니 장성하여 하늘을 훨훨 나는 아들을 눈앞에 둔 것 같았다.
하은교는 서둘러 마음을 추슬렀다. 지금은 감정에 취해 눈물이나 쏟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가세.”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연호정이 하은교를 빤히 쳐다보았다. 정확히는 그녀의 정수리 부근을 바라보았다.
우우우우웅.
불안정하게 일렁이는 신왕기가 다시 두 눈을 밝게 틔웠다.
‘없어졌다.’
백음귀의 대장에게 이어지는 그 허연 선이 사라졌다.
즉, 영력으로 이어진 관계가 완전히 끊어졌다는 뜻. 그렇다면 이해할 수 있다. 본래 하은교가 정신을 차리는 순간 백음귀들이 발광했어야 정상이지만, 그중 대장은 죽었거나 목숨이 위험한 상황일 것이다.
신왕기를 거둔 연호정은 순간 울컥 올라온 핏덩이를 토해 냈다.
“자네, 괜찮은가?”
“토해 냈더니 시원합니다.”
거짓말이었다. 무리한 상단 운용으로 코피까지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귀에서는 이명이 울리고, 속이 메스꺼워서 걷기도 힘들었다.
“일단 여기서 좀 쉬게. 어차피 자네 수하들이 놈들을 에워싸고 있을 테니.”
연호정은 그녀의 제안을 거부하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잠시 후.
스륵.
암무단주 허백이 연호정의 뒤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성주님.”
연호정이 눈을 감은 채 물었다.
“놈들은 어찌 됐나?”
“대장으로 보이는 작자를 제외한 모두가 사망했습니다. 수장 역시 피를 토하며 쓰러졌는데, 극심한 내상을 입은 듯합니다. 기식이 엄엄합니다.”
하은교의 눈에 살기가 어렸다.
한순간 번뜩이다가 사라진 살기지만, 어찌나 날카로웠는지 허백조차 움찔했다.
“백음귀라는 것들이네.”
“백음귀.”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선배를 이용해서 혈음사공을 완성시킬 그릇이지요?”
“자네가 그걸 어떻게……?”
말을 하던 하은교는 문득 탄성을 질렀다.
“자네는 이상할 정도로 사음교에 대해 잘 알더군. 그래, 내 머리에 남겨 둔 자네의 기억에 혈음사공에 대한 것도 있구먼.”
“사정이 있었습니다.”
“알겠네. 그 부분에 대해서는 묻지 않겠네.”
하은교가 한숨을 내쉬었다.
“영음산에 관한 기억이 거의 없다네. 다만 내가 알고 있는 건 놈들이 나를 이용해 혈음사공을 완성하려 했다는 것, 그리고 내 무공을 탐냈다는 것뿐이었어.”
“이해합니다.”
고독이든 주술이든, 의식이 날아가고 신체의 통제권을 빼앗겼던 그녀였다. 딱 그 부분의 기억만 오려 내듯 사라진 게 아니라 그전의 기억 일부도 상실했을 것이다. 당연한 일이었다.
연호정이 허백에게 말했다.
“놈을 이곳으로 데리고 와라. 흑혈신마와 아군도 전부 소환해.”
“예!”
허백이 다시 사라지자 연호정이 물었다.
“또 다른 건 없습니까?”
“무슨 말씀이신가?”
“만약 선배님께서 기억을 잃었다면, 사음교주 놈과 싸웠을 확률이 높습니다. 혹시 그 부분에 대한 기억은 없으십니까?”
하은교의 아미가 살짝 일그러졌다.
무언가를 떠올리려는 듯 집중하던 그녀가 이내 한숨을 쉬었다.
“잘 기억나지 않네. 그나마 단편적인 영상은 떠오르지만, 놈의 얼굴은 도무지 모르겠네.”
“그렇군요.”
“다만…… 태사의에 앉은 자가 오른손에 금반지를 주렁주렁 달고 있었던 건 기억하네.”
연호정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맞군.’
과거, 시원하게 한판 붙었을 때도 놈은 금붙이며 보석들을 온몸에 장식처럼 달고 있었다.
연호정은 애써 사음교주에 관한 생각을 접었다.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해서, 어떻습니까?”
“…….”
“자녀분은 보셨습니까?”
민감할 수 있는 질문이지만, 연호정은 가감 없이 솔직하게 물었다.
심신이 극도로 지쳤지만 신왕기가 두뇌를 보호하고 있는 상황, 충격으로 몸져눕거나 이성을 상실하진 않을 것이다. 나중에라도 문제가 될 만한 일은 빨리 처리하는 게 낫다는 생각이었다.
“……모르겠네.”
하은교가 한숨을 쉬었다.
“모르겠어. 기억이 흐릿하네.”
“그러시군요.”
“뭔가 떠오르는 듯도 한데…… 그것이 날조된 기억인지, 나의 바람을 뒤틀어 버린 악몽인지 모르겠네.”
결국 그녀는 자신의 인생을 제대로 정리조차 못 했다.
하은교가 고개를 숙였다.
“자네에게는 정말 면목이 없네.”
“선배님.”
연호정이 인자한 얼굴로 말했다.
“저는 선배님의 마음을 아주 조금일지라도 이해합니다. 그래서 보내 드린 것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온갖 감언이설을 뱉어서라도 막았을 겁니다.”
“…….”
“차라리 목숨을 던지는 한이 있더라도 가야만 했다는 사실, 저는 알고 있습니다.”
“고맙네, 고마워.”
연호정은 선배의 자식이 살아 있다거나 죽었을 거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상처를 건드려서라도 해야 할 말이 있고 하지 말아야 할 말이 있는 법이었다.
“깨어나신 지 얼마 되지 않아 머리가 복잡하실 겁니다. 푹 쉬시고 기억을 정리하시지요.”
“그래야겠네. 다만, 그전에 이거 하나만은 분명히 말하겠네.”
하은교의 하얀 손이 연호정의 투박한 손을 꼭 쥐었다.
“나의 행동이 민폐가 되었음을 아네. 솔직히, 그것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네. 난 내 인생을 정리해야 했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늘이 자네를 보내 날 멀쩡히 살게 해 준 이유가 있을 걸세. 자네는 내 생명의 은인이야. 자네가 아니었다면 난 제정신이 아닌 채로 고향 사람들을 죽이고 다녔을지도 모르네.”
“…….”
“이번 전쟁이 끝나기 전까지, 자네를 도와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겠네.”
“굳이 저와 함께하시지 않아도 좋습니다만, 선배의 그 다짐은 정말 반가운 것이로군요.”
하은교가 말없이 연호정의 어깨를 쓰다듬었다. 미안함과 고마움, 그리고 말 못 할 정이 다 느껴지는 손길이었다.
연호정는 실로 오랜만에 진심 어린 따뜻함을 느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며칠 푹 쉬시고 지 소저에게로 가시지요.”
“아! 소현이!”
“마침 종남에 있습니다. 어쩌면 지금쯤 선배의 무공을…….”
그때였다.
“헉!!”
하은교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안 돼!”
“선배님?”
“소현이가 위험하네!”
연호정이 벌떡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