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164)
1164화. 이중 간계(二重奸計) (4)
지소현은 꿈을 꾸었다.
‘이건…….’
꿈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생생한 상황.
낯설면서도 묘하게 익숙한 인상의 청년이 담담하게 물었다.
“정신 차렸소?”
조금은 건조하면서도 자신을 걱정해 주는 목소리였다.
“당신은?”
“뒤에 물이랑 주먹밥 있소. 배고플 텐데 자시오.”
청년의 말대로 댓잎에 잘 싸인 주먹밥과 수통이 있었다.
“이게 무슨 상황이죠?”
“…….”
“내 내공을 봉쇄했군요?”
“그렇소.”
“날 납치한 이유가 뭔가요? 당신들은 누구예요?”
당신들? 내가 왜 이런 말을 했지? 눈앞엔 저 청년 하나밖에 없는데?
청년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설마 그 ‘당신들’이라는 말에 산적 놈들까지 포함되어 있는 거면, 그놈들과는 초면이오.”
산적이라니?
‘아!’
그제야 지소현은 기억해 냈다. 거대한 외날의 도끼를 든 이 청년을 만나기 전, 산적과 한바탕 크게 싸웠다는 사실을.
그들을 모두 물리친 직후 이 청년이 나타났다. 산적들이 쓸 법한 도끼를 든 데다가 나타난 시기도 공교로워서 곧장 공격에 들어갔다.
그리고 일초도 교환하지 못하고 쓰러져 버렸다.
‘그렇다면?’
마침내 지소현은 청년의 정체를 깨달았다.
‘연호정!’
벽산호장이라는 별호로 불리는 의정군의 대수이자, 비슷한 연배임에도 자신은 꿈도 꿀 수 없는 경지를 이룬 무림 최고의 기린아.
이 사람은 연호정이었다.
‘이 기억은 설마하니…….’
자신이 연호정에게 납치되었던 때의 기억이었다. 그 기억이 꿈에서 그대로 펼쳐진 것이다.
지소현은 당황했다. 꿈과 기억은 밀접한 연관성을 지니지만, 또한 완전히 다른 영역이었다. 한데도 당시 기억 그대로의 꿈을 꾸다니? 그것도 이렇게 선명하게?
당황하는 사이 대화는 쭉쭉 이어지다가, 마침내 연호정이 그 이름을 언급했다.
“당신 사부가 음제 하은교, 맞소?”
“설마 당신, 내가 아니라 스승님을……?”
“맞군.”
연호정이 손을 털며, 조금은 미안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 내공은 내가 아니면 풀어 줄 수 없소. 음제라면 또 모르겠지만, 적어도 자력으로 풀 순 없을 거요.”
“…….”
“밥이나 드시오.”
지소현은 저도 모르게 말했다.
“스승님은 없어요.”
기억과 다른 말이 튀어나왔다. 꿈을 꾸는 당사자인 자신의 의지가 강하게 들어간, 기억을 근본으로 한 이 꿈을 무너트리기 시작한 말이었다.
연호정의 대사도 그때와 달라졌다.
“왜 없소?”
“저를 떠나셨어요.”
“왜 떠났소?”
“그분은…….”
지소현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분께는 저보다 중요한 사람이 있어요.”
“스승에게 있어 제자보다 중요한 사람이 세상천지 어디에 있단 말이오?”
“…….”
“참 나쁜 사람이군.”
지소현은 이를 악물었다.
반박하고 싶었지만, 왜인지 말문이 턱 막혔다.
‘스승님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나쁜 분이 아니야!’
그녀는 스승을 이해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내 배로 낳은 자식을 버리는 실수를 저질렀다. 평생의 한으로 남은 그 상처를 메우기 위해, 스승은 비로소 생사를 초월한 결단을 내렸다.
자식을 낳아 본 적은 없지만, 자신이라도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누가 되었든 제자를 버리고 떠났으니, 결국 당신은 혼자가 된 셈이군.”
꿈속의 연호정이 씨익 웃었다.
고아한 선비 같았던 그의 얼굴이 점점 악귀처럼 일그러졌다.
“하은교는 널 버렸다. 그렇지?”
“아니야!”
“맞아. 너는 아무것도 아니야. 그러니까 버려졌지.”
“나, 나는……!”
“널 버린 사람을 위해 울어 줄 이유는 없다. 이제 너는 너만을 위해 살면 돼. 적어도 하은교 그년, 너에게 악기 다루는 법만큼은 잘 알려 줬잖아?”
“난…….”
“뭣하면 괜찮은 기루 하나 소개해 주지. 그곳에서 음(音)과 웃음을 팔면서 살아. 그 정도면 널 납치한 행위에 대한 사과로 충분할 것 같군.”
지소현은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왜 그러셨을까.’
스승은 스승의 천명을 위해 나아가셨다. 그뿐이다.
하지만 어찌 이리도 섭섭하고 서운한가.
머리로는 이해하겠는데, 가슴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자신은 아직 배울 게 많았다. 무공이든 음악이든, 경지에 이르지도 못한 어정쩡한 상태로 세상을 살아가면 십중팔구 객사할 것이다.
그런 자신의 미래를, 스승은 조금도 걱정하지 않았던 걸까? 정말 본인의 인생만이 중요했던 것일까? 그렇다면 왜 나를 제자로 삼았던 걸까?
그렇게 마음대로 떠나 버릴 생각이었다면, 애초에 정도 주지 말아야 하지 않았을까? 최소한 내 마음이 정리될 때까지는 함께 있어 줘야 하지 않았을까?
“네 스승은 보잘것없는 인간이야.”
어느새 완전히 악귀가 되어 버린 연호정의 목소리는 저 깊은 지하에서 들려오는 것처럼 무서운 악의와 울림으로 가득했다.
“뭐 하나 제대로 된 선택을 내리지 못한 반편이에 불과해. 나잇살을 그렇게 처먹었는데도 주변에 온통 민폐만 끼치고 다니지.”
“아니야! 아니야!”
“책임지지도 못할 제자를 받아 놓고는, 네가 마음을 다스릴 시간도 주지 않은 채 멋대로 떠나 버렸다.”
“아니야!”
“그년은 스승으로서도, 부모로서도 낙제점이다. 너도 잘 알잖아?”
뱀처럼 끝이 갈라진 악귀의 혓바닥이 지소현의 볼을 스치고 지나갔다.
“증오해도 돼. 미워하는 게 당연하다. 그년은 그 정도밖에 안 되는 인간이야.”
“…….”
“이제 미련을 훌훌 털어 버려라.”
그때였다.
말없이 오열하던 지소현은 문득, 악귀의 등 뒤에서 기묘한 진동을 느꼈다.
천천히 고개를 드니, 그곳에 스승이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있었다.
‘스승님!’
코앞에는 악귀가 있지만, 그 뒤에는 선경(仙境)이 있었다.
그 선경 속에서, 스승은 웃으며 금을 탔고 자신은 그 옆에서 스승과 비슷한 웃음을 머금은 채 바느질을 했다.
스승이 피리를 불면 자신은 사슴과 놀았고, 스승이 북채를 쥐면 자신은 권법을 연마했다.
그곳에는 모든 것이 있었다.
하늘이 정해 준 사제지간의 인연, 그 자체가 환상과도 같은 아름다움으로 물들어 있었다.
‘아!’
그제야 지소현은 깨달았다. 그 선경이야말로 자신이 추억하는 스승의 모습, 그리고 자신의 진실한 마음 그 자체라는 것을.
그리고 지금 기억 속 연호정의 모습을 빌려 나타난 악귀는…….
‘내 서운함이다.’
마음 한구석에 남은 서운함의 찌꺼기다.
지소현은 스승을 이해했지만, 동시에 젊은 제자로서 마땅히 가질 수밖에 없는 서운함을 다 버리지 못했다. 온전히 스승의 삶을 살아 보지 못한 그녀로서는 절대 ‘완벽하게’ 스승을 이해할 수 없었다.
당연히 남을 수밖에 없는 서운함.
‘고작 그것뿐이다.’
서운함은 당연했지만, 그것은 별것 아니다.
지소현의 눈에 더는 악귀가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시야를 가득 채운 선경이야말로 추억이요, 스승을 향한 마음이었다.
저리도 아름다운 추억에 비하면 한낱 서운함 따위, 웃으면서 털어 버릴 수 있는 것이다.
지소현이 천천히 고개를 내렸다.
어느새 악귀는 잔뜩 쪼그라들어 쥐보다도 더 작은 몸뚱이로 ‘날 봐! 날 봐!’ 하고 소리치며 애쓰고 있었다.
지소현은 그대로 악귀를 짓밟았다.
훅!
동시에 세상이 빛으로 물들었다.
그녀의 눈에서 다시 눈물이 흘렀다. 하지만 그 눈물은 슬픔이나 서운함이 아닌, 환희의 감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스승님의 손을 처음 잡은 순간, 나도 스승님도 서로를 버릴 수 없게 된 것이다.’
스승의 존재는 이미 내 마음속에 있는 것.
스승은 자신을 믿었다. 이 정도면 충분히 스스로의 인생을 개척할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기에 떠나셨던 것이다. 그러고도 부족하여 연호정 곁에서 잠시나마 세상을 배우는 것도 좋을 거라는 조언도 주시고 가셨다.
스승이 안 계셨다면 거지로 살다가 객사하거나, 어느 기루에 팔려 사내들의 노리개가 되었을 수도 있다.
생각만 해도 진저리가 쳐지는 가능성들을 모두 없애 버린 후 자신에게 새로운 세상을 보여 준 사람.
그것이 바로 스승이었다.
스승 속에는 내가 있었다.
‘나는 이제야 나를 보았다.’
마음의 짐을 털어 버리고 진정한 나 자신을 찾으니, 심마(心魔)를 이겨 낸 그녀의 정신이 한층 높은 세상으로 올라간다.
깨달음이었다. 스승을 향한 서운함을 버리자, 그녀는 새로운 세상에 발을 들일 수 있었다.
‘스승님. 저는 비로소 스스로를 깨끗하게 되돌아볼 수 있었습니다.’
지소현이 눈을 감았다.
‘보고 싶어요.’
그 순간, 그녀는 꿈에서 깨어났다.
“콜록! 콜록!”
밭은기침과 함께 정신을 차린 지소현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숲.’
밤의 숲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앞에는 모닥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깨어났군.”
지소현이 맞은편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기묘한 사내가 앉아 있었다.
의복부터가 이상했다. 커다란 피풍의처럼 보이는 옷으로 전신을 감쌌는데, 목덜미 쪽에 딸린 두건을 뒤집어쓰니 눈까지 가려졌다.
마치 검은 유령을 보는 것 같았다. 두건 아래로 드러난 코와 입매, 턱에 난 허연 수염을 보니 나이가 족히 오십은 넘은 듯했다.
“생각보다 오래 자는군. 배는 안 고픈가?”
무심하기 이를 데 없는 목소리였다.
지소현이 차분하게 말했다.
“고프군요.”
의외의 대답이었을까? 사내가 움찔했다.
하지만 그도 잠시.
“옆에 수통과 육포가 있다. 먹어라.”
“좋지요.”
납치를 당한 상황에도 전혀 당황하지 않는다. 오히려 보란 듯 수통 마개를 열어 물을 마시고, 육포까지 시원하게 뜯었다.
가만히 지소현을 보던 사내가 재차 입을 열었다.
“내가 한 내공 봉쇄는 특별하지. 자력으로는 물론 극사경에 이른 어떤 고수가 와도 풀 수 없을 것이다.”
극사경이 뭔진 모르겠지만, 어감상 무극과 비슷하게 들렸다.
지소현은 말없이 육포를 뜯었다. 사내의 말은 듣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크게 반응하진 않았다.
두건에 가려진 사내의 눈이 서슬 퍼런 안광을 빛냈다.
“대담하군. 일전에도 이런 경험이 있었나?”
“있었죠.”
생각해 보니 꼴이 참 우스웠다. 만인이 존경하는 음제의 진전을 이었는데도 두 번이나 납치를 당하다니? 누구에게도 없을 경험임은 분명했다.
“처음 날 납치한 사람은 좀 건방져 보이긴 했어도 좋은 사람이란 걸 한눈에 알 수 있었는데, 당신은 다르군요.”
“…….”
“당신에게서는 악취가 나요.”
사내의 눈빛이 한층 강렬해졌다.
“뭘 믿고 그렇게 주둥이를 나불대는지 모르겠군.”
“무종을 뚫고도 납치를 당했다는 사실을 잘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거든요. 당신이 이해해요.”
“…….”
“육포 더 없어요?”
“허튼 기대는 하지 않는 게 좋아.”
사내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모닥불 빛에 번뜩이는 송곳니가 무척이나 살벌해 보였다.
“그 누구도 너를 찾을 수 없을 것이다. 너는 이대로 나와 함께 신(神)을 영접하러 가야 해.”
“묻지도 않은 말을 주절주절 늘어놓는 걸 보니, 당신도 사람 납치하는 건 처음인가 보군요.”
“……!”
“당신에게 궁금한 건 없어요. 그러니까 그렇게 알려 주지 않아도 됩니다.”
“너…….”
“설마 내가 두려움에 질려 덜덜 떠는 모습을 봐야만 만족하는 건 아니죠? 혹시 지금 그걸 위해서 자꾸 날 자극하는 건가요?”
“…….”
“육포나 줘요.”
지소현을 노려보던 사내가 육포 두 덩이를 던졌다.
“네 자신감이 언제까지 이어지나 보겠다.”
“다음부턴 간 좀 적당히 한 걸로 가지고 다녀요. 아휴, 짜.”
상종도 하기 싫다는 듯 고개를 돌린 사내가 나무에 등을 기댔다.
지소현이 피식 웃으며 주절거렸다.
“그나저나 이름이 뭐예요? 딱히 궁금하진 않지만 먼 길 갈 것 같은데 서로 통성명은 해야죠. 아, 혹시 날 업고 여기까지 왔나요? 다리 아프겠는데요?”
“시끄럽다.”
“납치범의 비애죠. 이왕 육포 더 준 거, 거기 수통도 좀 줘요. 얼마나 짠지 물을 한 바가지는 마셔야 할 것 같네.”
주절주절 떠들어 대면서도 지소현의 손톱은 나무에 작은 표식을 새기고 있었다.
내공이 봉쇄당한 상태로는 절대 할 수 없는 일, 음화제무신공의 신묘함으로 외부의 기를 미세하게 끌어와 일시적으로 내공처럼 쓰는 것이다.
그녀가 남긴 표식은 순우가 알려 준, 종남파 정보원들이 쓰는 암어였다.
“그나저나 날 납치한 지 얼마나 됐어요? 사흘? 나흘? 혹시 닷새가 넘은 건 아니죠? 배가 엄청 고픈 거 보니깐 대충…….”
“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