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165)
1165화. 이중 간계(二重奸計) (5)
흑혈신마의 앞에서 달리는 연호정의 자세는 유독 역동적으로 보였다.
천종운행비의 꼿꼿한 자세가 다소 무너졌다. 속도를 내기 위해 일부러 낮춘 것이다.
그리고 그런 연호정의 빠른 신법 속도를, 흑혈신마는 무리 없이 따라잡고 있었다.
하은교는 무척 놀랐다.
‘보통 마물이 아니구나.’
경황이 없어서 신경을 쓰지 못했는데, 이 거대한 말은 전신이 마기로 꽉 차 있었다.
강철을 연상케 하는 마기였다. 필시 외부 공격에 대한 강력한 방호력을 갖고 있을 것이다.
‘호정의 신왕기로 마성을 씻어 내고 있구나.’
피폐한 상태였지만, 그녀 역시 연호정의 신왕기를 받아들였기에 흑혈신마의 상태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엇다.
아직 전부 사라진 건 아니지만, 흑혈신마의 마성은 크게 줄어들어 있었다. 조만간 남은 마성 또한 신왕기에 완전히 잡아먹힐 것이고, 그때부터 흑혈신마는 연호정과 진정한 영통(靈通)을 시작할 것이다.
하은교는 빠르게 달려 나가는 연호정의 뒷모습을 보았다.
‘호정은 정말이지 언제나 그렇게 바쁘구나.’
자신이 떠난 후, 연호정이 얼마나 치열한 싸움을 벌이며 성장했는지 알 수 있었다.
놀랍게도 연호정은 그 자신의 성장을 크게 기뻐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무인으로서 어느 정도 기쁜 마음은 있었지만, 그보다 다른 일들을 훨씬 더 기뻐했다.
그는 죽을 뻔한 사람을 살린 것에 지극한 기쁨과 안도를 느끼는 사람이었다.
내 무공이 발전하는 것보다, 이 중원 땅에 뿌리를 둔 사람들이 외세의 난적에게 당하지 않도록 지켜 내는 걸 훨씬 더 기뻐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그런 마음을 티 내지 않는 사람이기도 했다.
하은교는 연호정의 기억과 마음을 읽으며, 크나큰 부끄러움을 느꼈다.
‘호정이야말로 진정 대협이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다.’
나이는 자신보다 어리지만, 나이 ‘따위’는 연호정이라는 사람을 알아가는 데에 아무 문제도 되지 않는다.
연호정은 연호정으로서 완벽했다. 하은교는 그렇게 생각했다.
‘사무치는구나. 차라리 내가 영음산에서 죽었어야 했다. 그랬다면 호정이 무리해서 이곳에 올 일도 없었을 것이야.’
하루도 마음 편히 쉴 날이 없는 사람을 더 바쁘게 만들었다는 생각에 자괴감이 들었다.
그리고 그 자괴감은 조금씩 조금씩 하은교의 분노에 불을 지폈다.
‘더는 바보처럼 살지 않겠다. 나는 죽지도 못하고 적에게 이용이나 당한 채 돌아왔다. 스스로 인생을 마무리 짓지도 못했으니, 이제부터 나의 인생은 소현과 호정을 위해 쏟겠다.’
지소현은 자식 같은 제자요, 호정은 세상을 위해서 사는 사람이다. 이 둘을 위해 남은 인생을 바쳐도 후회가 없을 것이다.
‘한데 묘하구나.’
하은교의 눈이 깊어졌다.
‘기억의 조각들이 맞지 않는 부분이 있어.’
청해 신마림 건을 마무리 짓고 홀로 나선 연호정은 분명 누군가를 만나러 갔다.
하지만 그 부분이 뭉텅이로 잘려 나간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얼마 되지 않은 일인데도.
가만히 생각을 거듭하던 하은교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상단신기의 전달은 본디 위험한 술수다. 기억과 마음의 공백이 생길 수도 있다. 지금은 그런 걸 생각할 때가 아니야.’
하은교의 눈빛이 바뀌었다.
‘소현아. 이 못난 스승이 어떻게든 구해 주마.’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연호정이 오른 주먹을 높이 들었다. 서서히 속도를 줄이라는 뜻이었다.
쿠르르릉.
흑혈신마가 육중한 발로 몇 번이나 땅을 두들기며 속도를 줄였다.
스르릉.
진양과 강량이 연호정 앞으로 튀어나와 도검을 살짝 뽑았다. 언제든 병장기를 뽑아 들 수 있는 자세였다.
“왜 그러십니까, 형님.”
강량의 물음에 연호정이 담담하게 말했다.
“긴장 풀어라. 우리 쪽 사람이다.”
잠시 후.
사사삭.
복면을 쓴 사내 둘이 재빨리 연호정 앞으로 다가와 무릎을 꿇었다.
“산서 분양지부 소속 정보 조장들이 흑도의 지존을 영접하나이다!”
연호정이 손을 저었다.
“일어나라.”
“예!”
“분양지부장이 보냈느냐?”
“그렇습니다.”
사내 하나가 품에서 서신을 꺼내 전했다.
연호정이 서신을 펼쳐 들자, 사내가 입을 열었다.
“현재 정체불명의 고수들이 영석(靈石)과 분서(汾西) 일대에 출몰했습니다. 조사 결과 산서성 문파 소속원들은 아니라고 판단되며, 하나같이 시커먼 피풍의를 두르고 있는데 두건까지 달려 얼굴을 가린 모습입니다.”
“……!”
순간 연호정의 눈이 번뜩였다.
“시커먼 피풍의? 두건이 달린?”
“그렇습니다.”
“혹시 발목까지 가릴 정도로 길고 풍성한 피풍의였느냐?”
“상세한 보고는 올라오지 않았습니다만, 피풍의 안쪽의 내의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큰 것 같습니다. 그 외에 의복 상태에 대한 보고는 아직 없습니다.”
연호정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사납기 짝이 없는 미소.
“사음교 놈들이 맞군.”
강량이 물었다.
“어떻게 아십니까?”
“아마 그 피풍의는 발목까지 가릴 정도로 길 것이다. 그리고 그건 사음교 영귀수(影鬼手)들의 정복이다.”
“그러니까 그걸 어떻게……?”
“그런 게 있다.”
다른 건 몰라도 영귀수들에 대해서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과거, 사음교와의 전투에서 영귀수들의 손에 죽은 무림인의 숫자가 헤아릴 수 없었다. 그만큼 강하고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데에 능한 놈들로, 무공은 물론 각종 술법과 진법에 독, 암기, 화포까지 조작하는 만능의 고수들이었다.
당시 흑도의 정보력으로도 영귀수의 정확한 숫자를 파악할 수 없었다. 최소로 잡으면 오백, 최대 일천에 가까울 거란 예측만 했을 뿐이다.
그만한 재주를 가진 놈들이 오백에서 일천이라면 정말 엄청난 숫자라고 할 수 있었다. 심지어 놈들 중에는 중원 정점의 살수들에 비해도 부족하지 않은 암살공을 익힌 놈들도 꽤 많았다.
어떤 상대를 만나도 반드시 죽일 수 있도록 철저히 훈련된 귀신의 부대.
사음교가 자랑하는 정예 부대 중 하나였다.
‘놈들이 영귀수까지 파견했다는 건 지소현의 존재가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이다. 영귀수는 전쟁 초중반까지도 투입되지 않았을 정도로 꼭꼭 숨겨 놓은 전력이었어.’
도대체 지소현을 데려다가 무슨 짓을 하려는진 모르겠지만, 중요한 건 드디어 사음교가 칼을 뽑았다는 것이다.
연호정의 눈에 살기가 어렸다.
‘다 잡아 주마.’
지소현을 확보한 후, 산서성에 파견된 영귀수들을 몽땅 잡아 죽일 것이다. 단 한 놈도 살려서 보내선 안 될 살귀들이었다.
“이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젊은 여성에 관한 정보는 없었나?”
“아직 없었습니다. 다만, 종남파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뭐라고 왔더냐?”
“지소현에게 종남파 정보부와 연락할 수 있는 암호를 알려 주었다고 했습니다. 만약 그녀가 정신을 잃지 않았다면, 표식을 남겼을 확률이 있다고 합니다.”
복면 사내들이 고개를 숙였다.
“현재 산서성 청검 표국(靑劍鏢局)이 종남파의 산서지부 역할을 겸하고 있습니다. 만약 그 피풍의 괴인들이 지소현을 납치했다면, 청검 표국의 정보원들이 그 일대를 수색해 표식을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바로 청검 표국과 정보를 공유해라. 당장 정보원을 파견하라고 해.”
“이미 그리하였습니다. 사태가 다급한 듯하여 선처리 후보고 형태로 일을 진행한 점,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용서는 무슨. 아주 잘했다.”
조장들을 칭찬한 연호정이 턱으로 동쪽을 가리켰다.
“그 괴인들에 대한 조사를 철저히 해라. 우리도 그곳으로 갈 것이다.”
“명을 받듭니다! 어제 영석과 분서 부근이었고 북쪽으로 이동하고 있으니, 오늘 밤 내로 평요(平遙)에 진입할 확률이 높습니다.”
“수고했다.”
그렇게 정보 조장들을 보낸 연호정이 하은교에게 말했다.
“평요로 가시지요. 종남도 나섰으니, 그곳을 중심으로 수색을 펼치면 지 소저를 찾을 수 있을 겁니다.”
하은교는 흑도의 정보력에 내심 감탄했다.
“고맙네.”
“떠나기 전에 배부터 채우시지요.”
“호정, 나는 괜찮네.”
“괜찮아도 드십시오. 저와 신장들은 물론 선배님도 지금 정상이 아닙니다. 어떻게든 체력을 보존해야 합니다.”
강량이 봇짐에서 육포와 수통을 꺼내 들었다.
“먹고 반 시진 동안 쉴 것입니다. 푹 쉰 후에 평요를 향해 전력으로 달리겠습니다.”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이 있다. 목적지가 정해진 이상, 일단은 몸부터 관리하고 철저히 준비한 후 떠나는 게 좋을 것이다.
이런 여유는 아무나 보여 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머리로는 알아도, 실제로 그렇게 행동하기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만큼 경험이 많은 것이다. 하은교는 무공과 음악에만 심취한 자신과 연호정은 비교조차 안 된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일행은 반 시진을 쉬고 평요로 향했다.
고성(古城)이라 불릴 정도로 오랜 역사를 지닌 평요. 그곳에서 작은 운명 하나가 연호정을 부르고 있었다.
* * *
“아버지!”
집무실로 들어온 당윤이 빠르게 입을 열었다.
“현재 일천의 마인들이 금천(金川) 부근에 집결했다고 합니다! 조금만 더 동쪽으로 전진하면 청성의 전선에 도달할 겁니다!”
당형의 눈이 예리하게 빛났다.
‘이놈들 보게나?’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아미산이 아니라 청성산으로 뚫고 들어오려는 모양이다.
물론 진격하다가 북쪽으로 올라갈 수도 있다. 청성산 검사들의 앞마당에서 싸우는 것보다는 서로가 모르는 지형에서 싸우는 게 마인들에게도 더 나을 테니까.
중요한 것은 놈들이 청성 부근으로 치고 들어온다는 것이다.
청성산 뒤로는 사천의 수많은 도시가 있다. 특히 성도가 멀지 않았다. 당연히 성도는 사천에서 가장 많은 인구가 밀집된 곳이었다.
만약 이곳에서 전투가 벌어지면 그야말로 대참사가 일어날 터.
그나마 성도에 당가가 자리 잡고 있어 다행이지만, 그래도 이곳에서는 싸우지 않는 게 좋았다. 죽지 않아도 될 사람들이 죽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청성에서는 어떻게 나섰더냐?”
“현재 청성의 속가 문파 둘이 북쪽으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만에 하나 놈들이 진격 방향을 틀어도 어떻게든 막을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 외에 다른 문파들은?”
“지금 속속들이 청성과 북쪽으로 이동 중입니다. 아미 역시 최소 인원만 남긴 후, 복호권사(伏虎拳士)들을 위시한 정예 일부를 청성으로 보냈다고 합니다.”
“좋구나.”
당형이 당윤에게 문서 두 장을 건넸다.
“각각 독각(毒閣)과 암각(暗閣)에 전하도록 해라.”
문서의 내용을 확인한 당윤의 눈이 커졌다.
“오대극독(五大劇毒)과 십대금용암기(十大禁用暗器)를 해제하시는 겁니까?”
“그 오랜 시간 중원을 삼키기 위해 힘을 키운 놈들이다. 어떤 목적이든 일천을 보냈다면, 중소 문파의 힘으로는 막기 버거울 것이다. 뒤늦게 청성이 달려간다 해도 피해를 최소화하는 게 좋을 테지.”
“하지만……!”
당윤이 침을 삼켰다.
“칠보단혼산(七步斷魂散)은 너무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하물며 폭우이화침(暴雨梨花針)까지…… 이 둘을 제대로 다룰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안다. 그래서 너를 보낼 생각이다.”
당윤의 눈이 번쩍였다.
아버지의 담담한 목소리에서 강한 확신과 믿음, 그리고 일말의 걱정이 느껴졌다.
당윤이 미소를 지었다.
“제가 녹왕대(綠王隊)를 이끌고 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