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168)
흑백무제 1168화(1168/1200)
1168화. 이중 간계(二重奸計) (8)
‘저놈들이군.’
강량은 묘한 섬뜩함을 느꼈다.
밤이라서 그런지 숨지도 않는다. 오히려 모닥불까지 버젓이 피워 두고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는데, 몸통은 물론 눈까지 다 가리는 피풍의를 둘러써서 그런지 마치 유령들이 모인 것처럼 보였다.
‘만만치 않아.’
섬뜩함 다음으로 느낀 감정은 놀라움이었다.
저들 중 대부분이 절정고수 수준이다. 하지만 여느 절정고수와는 분위기가 전혀 달랐다.
음울하고 잔잔한, 마치 시커멓게 오염된 호수를 보는 것 같다. 그 호수 주변을 장식한 나무들은 하나같이 말라비틀어졌고, 땅은 갈라져 있으며, 하늘은 검붉다. 놈들을 보는 것 자체만으로도 그런 귀기 가득한 장면이 연상되었다.
‘자칫 잘못하면 어디 하나 날아갈 수도 있겠는데.’
순수 무력으로 비교하자면 저들 중 누구도 이쪽의 상대는 못 된다. 열 명, 스무 명이 덤벼들어도 어떻게든 이길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저 형용하기 힘든 기도가 자꾸만 걸린다. 목적을 이루기 위해 목숨조차 돌보지 않는 독종들은 많이 봐 왔지만, 저놈들은 뭔가가 달랐다.
건드리면 반드시 죽을 것 같은 살벌함.
이승에 있으면 안 될 것 같은 이질감.
죽여도 죽지 않을 것 같은 기괴함.
‘확실한 건, 이 싸움이 생각보다 훨씬 어려울 거란 것이다.’
그때였다.
“따뜻들 하냐?”
우렁차기가 말도 못 할 정도로 큰 목소리였다. 강량은 기겁하여 진양을 바라보았다.
이미 대도(大刀)를 뽑아 든 진양이 대놓고 이죽거렸다.
“어이구, 따뜻하기도 하겠지. 뭐 그리 친하다고 모닥불 하나만 피워 놓고 옹기종기 모여서 덜덜 떨고 있어? 몇 개 더 피워 줄까?”
누가 봐도 흑도 뒷골목의 파락호를 연상케 하는 언행이었다. 건들거리며 다가가는 모양새 또한 불량하기 짝이 없었다.
실제로 두 사람 모두 기도를 있는 대로 갈무리한지라, 먼 거리에서는 초절정고수라도 진정한 힘을 읽을 수 없을 것이다.
즉, 저들 눈에도 진양은 파락호 그 자체로 보일 터.
강량은 서둘러 전음을 날렸다.
[형님! 뭐 하는 거요! 놈들 기세 안 느껴지오?]진양은 돌아보지도 않은 채 손을 대충 흔들었다. 닥치고 따라오라는 뜻이었다.
결국 강량도 그를 따라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야, 너희가 그놈들 맞지? 마적들 다 작살낸 놈들?”
번쩍!
강량은 볼 수 있었다. 두건으로 가려진 영귀수들의 눈 부분에서 싯누런 광채가 뿜어져 나오는 것을.
진양이 능글거리는 말투로 주절거렸다.
“그놈들 우리한테 상납하러 오던 길이었어. 근데 그걸 너희가 작살을 내놨다, 이거야. 어떻게 할래? 보상 어떻게 할 거냐고, 이 우중충한 새끼들아!”
그때, 영귀수들 중 하나의 입에서 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얌전히 가라.”
진양이 턱을 쭉 당기며 말했다.
“얌전히 가라.”
과장스럽게 목소리를 깔며 상대의 말을 따라 한다. 놀리려는 의도가 다분했다.
턱을 풀고 피식 웃은 진양이 한결 위압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지랄하고 자빠졌네. 목소리 그렇게 깔면 새끼야, 우리가 ‘아이쿠, 죄송합니다!’ 하면서 물러날 줄 알았어? 이런 창의력 없는 새끼들.”
진양이 말을 한 영귀수에게 대도를 겨눴다.
“네가 대장이냐? 이리 나와 봐. 일단 낯짝 좀 보자. 어떤 눈치 없는 개새끼들이 우리 돈줄을 끊어 먹었는지 이 어르신께서 확인 좀 해야겠다.”
츠츠츠츠.
영귀수들 주변으로 묵직하고 차가운 기운이 흘러나왔다.
더 이상 귀찮게 굴면 실력 행사에 들어가겠다는 경고성 기파였다. 모든 힘을 개방한 건 아니지만, 어지간한 고수는 찔끔해서 물러날 정도로 사이한 기운이었다.
슬쩍 진양을 보던 강량은 저도 모르게 속삭이듯 말했다.
“형님, 저 새끼들 아무래도 심상치가 않은데요? 이번에는 그냥 물러나시죠?”
그 본능적인 연기에 화답하는 진양의 반응 속도는 실로 벼락을 방불케 했다.
“야, 이 머저리 같은 새끼야! 그게 지금 할 말이야? 이대로 가면? 대장한테 시발, 맞아 뒈지자고?”
와중에 목소리 끝이 살짝 떨리는 게 압권이었다.
진양이 헛기침을 하며 말을 이었다.
“가더라도 최소한 어떤 새끼들인지 낯짝은 보고 가야지. 안 그러냐? 그리고 시발, 말이 나와서 말이지 우리가 꿀릴 게 뭐가 있어? 저 병신들 저거, 우리 피해서 도망칠 수 있을 것 같냐? 야! 여기 산서야! 우리 구역이라고!”
말을 하면 할수록 화가 나는지 목소리가 격양된다.
강량은 진양의 혼신의 힘을 다한 연기에 내심 감탄을 금치 못했다.
왜 이런 짓거리를 하는지는 몰라도, 흑도 뒷골목에 반드시 있을 법한 파락호 연기를 기가 막히게 선보인다. 그것도 무공깨나 익혀 욕심 많고 자만심 넘치는 파락호의 반응을 그대로 보여 주고 있었다.
혹 모종의 이유로 무공을 소실해도 먹고 사는 데 아무 지장이 없을 것 같은 연기력이었다. 어디 유랑극단에 들어가서 악당 역만 전문으로 맡아도 떼돈을 벌지 싶었다.
“커허허험!”
다시 한번 헛기침을 한 진양이 다소 떨떠름한 목소리로 말했다.
“거, 한 수가 있긴 한 양반들 같은데 서로 불필요하게 피 보지 맙시다. 우리도 체면이라는 게 있고, 솔직한 말로 그쪽도 작정하고 덤비는 우리 쪽 사람들을 전부 감당하진 못할 거요.”
그때, 입을 열었던 영귀수가 또 한 번 말했다.
“어디 소속이냐?”
진양이 코웃음을 쳤다.
“이제야 좀 상황 판단이 되나 보군. 나, 흑봉파(黑鳳派) 소정광이오.”
흑봉파는 산서성에서 유명한 흑도 문파였다. 실제로 지금도 상당한 세를 구축하고 있으며, 흑제성 소속이기도 했다.
“흑봉파?”
영귀수의 몸에서 은은한 살기가 일었다.
“네놈, 정말 흑봉파 맞느냐?”
“시벌, 그럼 아니겠소?”
“흑봉파라면 우리가 누구인지 모를 리가 없을 텐데.”
생각지도 못한 반응에 강량은 당황했다.
하지만 진양은 달랐다.
“이보쇼. 나 지금 많이 참고 있는 거요. 설마하니 우리 대장이 건드려도 될 사람, 안 될 사람을 미리 언질도 안 줬다는 게 말이 되오?”
“…….”
“아까는 화가 나서 내가 좀 심하게 굴긴 했는데, 우리 그러지 맙시다. 이쪽도 좋게 좋게 말하고 있으니까 헛소리는 그쯤하고 얼굴 좀 까시오. 낯짝이라도 확인하고 가야 문책 안 당한다고, 나도.”
영귀수 하나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안 통하는군.”
그 한마디에 강량은 깨달았다. 놈들이 거짓말을 했다는 것을.
놈들도 쓸데없이 싸울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서 즉각적으로 거짓말을 뱉은 것이다.
평소라면 강량 역시 이런 단순한 술수에 놀아나지 않았을 것이다. 전쟁이라는 상황, 나아가 흑도 문파의 배신에 관해 민감한 그였기에 순간 속아 넘어간 것이다.
그때, 진양에게서 전음이 날아왔다.
[준비해.]강량의 눈이 흔들렸다. 준비라니? 갑자기 뭘?
“쓸데없이 일 만들지 마라.”
그간 대화를 나누었던 영귀수가 아닌, 모닥불에 가장 가까이 있던 덩치 큰 영귀수가 입을 열었다.
“귀한 독 낭비하지 말고, 최대한 빨리 목부터 날려.”
그 순간 강량은 저 덩치 큰 영귀수가 이들의 좌장이라는 걸 깨달았다.
나아가 진양의 목적 역시 깨달았다.
‘기가 막히는군.’
지금 자신과 진양은 한 번 도검을 휘둘러 저들 모두를 휩쓸어 버릴 수 있는 범위 안쪽으로 아슬아슬하게 들어온 상황이었다.
실제로 한 방에 다 죽일 순 없을 것이다. 아니, 열 명도 해치기 어려울 수 있다.
하지만 중요한 건 싸움을 더 쉽게 풀어 갈 수 있는 위치에 들어왔다는 사실이었다.
‘이 양반 정말…….’
영귀수가 진양을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불길하기 그지없는 보법, 마치 둥둥 떠서 다가오는 듯했다.
칭!
단검(短劍)을 뽑은 영귀수가 음침한 목소리로 말했다.
“잘 가라.”
영귀수가 단검을 휘두르려는 그 순간.
번쩍!
불꽃을 담은 일도(一刀)가 좌에서 우로, 거대한 낫의 형상을 한 시커먼 검기가 우에서 좌로 휘둘러지며 영귀수들을 공격했다.
* * *
납치범, 사우는 깜짝 놀랐다.
“네놈이 어찌 내 이름을 아느냐?”
연호정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대답하지 못했다.
지금 이 순간, 연호정은 감탄하고 있었다.
‘언제고 만날 운명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저 하늘은 언제나와 같이 예측하지 못했던 순간에, 예측하지 못했던 만남을 선사한다. 천도의 흐름에서 벗어나 시간을 역행해 이 자리에 도달했음에도, 하늘은 인외(人外)의 영역으로 벗어난 광인을 다시 천리의 그물 안으로 데리고 오는 것이다.
‘드디어, 이렇게 보는구나.’
비천귀마 사우.
과거 흑암제로 불리던 연호정과 무려 세 번의 결전을 벌이고도 승부를 내지 못했던 뛰어난 적장이다.
당시 그는 사음교의 삼대마왕(三大魔王)으로 불렸으며, 무공도 무공이지만 살인에 관한 재능을 타고나서 수많은 무림 명숙을 죽인 난적 중의 난적이었다.
살수처럼 은신해서 죽이는 암살이 아닌, 어느 순간 나타나 적진을 다 뚫고 목표물만 죽인 채 유유히 사라졌던 귀신.
당시 구파 장문인 여섯, 흑도 명문 문주 일곱에 무림맹주 모용군의 최측근이자 무극수였던 뇌룡검(雷龍劍)까지 죽이고 귀신처럼 사라져 버린 자가 사우였다.
그중 연호정은 사우가 노린 목표물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존재였다. 사우는 두 번이나 연호정을 노렸고, 연호정은 사우의 기습 아닌 기습에 목숨이 날아갈 뻔했다.
나중에는 작전 중에 교도들을 이끌고 연호정을 습격했으며, 그때 서로의 부하들을 다 잃어 가면서 치열하게 싸웠더랬다.
무공 수준은 연호정이 근소하게 우위에 있었지만, 사우에게는 기가 막힌 신법과 상상을 초월하는 살법이 있어서 거의 박빙의 싸움을 벌였다.
결국 둘은 끝내 결판을 내지 못했다. 마지막 결전 이후 사우는 어디론가 사라졌고, 연호정은 모용군, 당관과 함께 사음교주를 죽이고 장렬하게 전사했다.
무수히 많은 적과 조우했지만, 작정을 했음에도 끝을 보지 못했던 전투가 몇 개 있다.
그중 사우는 연호정의 기억에 가장 강렬하게 남은 상대였다.
“그때 내지 못했던 결판을 지금 내라고, 저 하늘이 너와 나를 이곳에서 만나게 했나 보다.”
“다시 묻는다. 네놈, 어찌 나를 알고 있느냐?”
이제 보니 그때와는 목소리가 미묘하게 다르다. 하기야 그때의 사우는 칠십 먹은 노인이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하지만 그때보다 젊다고 한들 무공 실력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한층 젊은 사우의 기도는 훨씬 더 생동감 넘치는 불꽃을 연상케 했다.
훅!
연호정의 몸에서 무시무시한 투기(鬪氣)가 발해졌다.
살기가 아닌 투기다. 사음교도라면 누구든지 갈아 버리고 싶을 만큼 증오하는 그였지만, 사우는 조금 달랐다.
연호정에게 사우는 증오의 대상임과 동시에 결판을 보지 못한 맞수였다.
“그 뛰어난 무공으로 어린 처자나 납치하다니, 그간 익힌 무공이 아깝구나.”
두건 속 사우의 두 눈이 시뻘건 살기를 발했다.
“마지막으로 묻는다. 네놈은 나를 어찌 아느냐?”
“지금 그런 게 중요한가? 어차피 패자는 죽을 것이요, 승자는 모든 것을 거머쥐게 될 터인데.”
우우우우우웅!!
광룡부에 서린 황룡기가 엄청난 기파를 뿜어냈다. 크고 시커먼 광룡부 전체가 황금빛으로 둘러싸여 본래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증오와 투쟁심, 맞수를 향한 경쟁심과 분노.
상단전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상황이지만, 그래서 오히려 순수한 전투광의 기질을 드러내는 그였다.
“죽을 준비는 되었느냐.”
“닥쳐라, 불신자!”
파아아아악!
서로를 향해 달려드는 두 사람.
과거이자 미래의, 분명한 역사이자 다가오지 않을 미래의 나이 먹은 두 사람이 환상처럼 서로를 향해 달려드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