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174)
흑백무제 1174화(1174/1200)
1174화. 신(神)과 마(魔), 그리고 악(惡) (6)
지소현은 숨을 헐떡이며 수면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되었지?’
점혈 봉쇄가 풀린 지 얼마 되지도 않았다. 그 와중에 한계까지 끌어올린 힘으로 암공파를 펼쳐서 머리가 띵했다.
오감이 제멋대로 뒤틀리는 상황, 지소현은 수면 아래의 싸움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때였다.
번쩍! 번쩍!
어두운 밤, 강물 안에서 색색의 광채가 피어올랐다.
어떨 때는 붉은빛이, 어떨 때는 푸른빛이 솟구쳤다. 지상이었다면 폭음을 일으켰을 게 분명한 그 빛의 폭발들은 수면을 들썩이게 만드는 것 이외의 충격을 주지 못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번쩍!!
천하의 모든 색 중에 가장 존귀할 것 같은 황금빛 광채가 온 강물을 뒤덮었다.
지소현의 눈이 그 강렬한 황금빛을 받아 찬란하게 물들었다.
그야말로 전설에서나 나올 법한 광경이었다. 요동치는 황금빛 수면은 수중에서 황룡 한 마리가 헤엄치는 듯한 장관을 연출했다.
그리고.
퍼엉! 촤르르륵!
새하얀 손도끼와 연결된 쇠사슬이 지소현 옆으로 날아가 거목 한 그루를 칭칭 휘감았다.
“연 성주님!”
밝아진 지소현의 얼굴은, 이내 심각하게 변했다.
강물의 도도한 흐름에 따라 쇠사슬이 아래로 움직이고 있었다.
‘이런!’
물살이 강하지도 않은데 그 흐름에 휩쓸린 채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정신을 잃었거나 힘이 다 빠져 버린 게 분명했다.
지소현은 재빨리 교룡쇄를 쥐고 힘차게 끌어당겼다.
카가가각!
땅을 긁으며 짧아지는 교룡쇄.
이윽고 연호정과 사우가 모습을 드러냈다.
“쿨럭!”
거의 한 바가지는 될 듯한 물을 토해 낸 연호정이 땅 위에 벌러덩 누웠다.
“연 성주님! 괜찮으세요?”
“콜록콜록!”
밭은기침을 뱉는 연호정의 얼굴은 이 어두운 밤에도 눈에 띌 만큼 창백했다.
지소현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목숨이 붙어 있으니 다행이었다.
“……후우.”
몇 번이나 호흡을 고르던 연호정이 눈을 감으며 말했다.
“몸은 좀 어떻소? 보아하니 점혈은 푼 것 같은데.”
“성주님 덕분에 풀었습니다.”
“좋군.”
지소현의 눈이 사우에게로 향했다.
몸을 가누기 어려운 상태로도 어떻게든 사우의 멱살을 잡고 올라온 연호정이다. 그냥 죽였다면 그럴 일도 없었을 것이다.
“이자는…….”
“죽이려고 했는데, 마침 좋은 생각이 나서.”
목소리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내공으로 청력을 틔우지 않았다면 웅얼거리는 소리만 들렸을 것이다.
“성주님. 정말 괜찮으신가요?”
“괜찮다고 한 적 없소.”
연호정의 호흡이 다시 부자연스러워졌다. 도통 호흡이 잡히질 않았다.
“정말 괜찮지 않아.”
차라리 박 터지게 싸우다가 심각한 내외상을 입었다면 고통을 참고 움직였을 것이다.
‘이렇게까지 몸을 갉아 먹을 수 있는 건가.’
상단신기의 극단적인 사용이 안 그래도 쌓인 피로를 극대화한다.
과거 흑암제 시절에도 무극에 오른 후 이 정도로 피로를 느낀 적은 없었다. 정말이지 정신이 아찔했다. 신기의 과다한 사용이 완전에 이른 무극수의 육신을 이 정도로 지치게 만들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새삼 아버지가 대단하게 느껴졌다.
‘아버지는 대체 어떻게 그 힘을 자유자재로 다루시는 겁니까.’
마음 같아선 모든 걸 다 때려치우고 푹 쉬고 싶었다. 극단적인 피로는 사람의 의지를 이 정도로 불살라 버리는 것이다.
‘안 돼.’
연호정은 어떻게든 호흡을 고르려 애썼다.
‘쉬어도 애들과 선배를 만난 연후에 쉬어야만 한다. 만에 하나 그쪽에 문제가 터졌다면 지 소저를 보내서라도 도와야 해.’
이미 놈들을 다 정리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건 바람에 불과했다.
천근의 피로도, 만근의 책임감도 다 짊어지고 갈 수 있다. 하지만 움직여야 할 때 움직이지 못해서 후회를 남긴다면, 그건 정말이지 참을 수 없을 것이다.
번쩍!
일부러 황룡기를 불사른 연호정이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정말 신기한 기분이었다. 아직 황룡기가 이만큼이나 남았는데도 힘이 없다니.
“교룡쇄 좀 풀어 주시오.”
지소현은 곧장 거목으로 가서 백룡부로 단단하게 고정된 교룡쇄를 풀었다.
우웅.
황룡기가 깃들자 교룡쇄가 알아서 줄어들며 연호정의 소매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신기한 광경에 지소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교룡쇄에서 백룡부를 분리해 허리춤에 매단 연호정이 한옆에 떨어진 광룡부까지 들고 왔다. 평소에는 나뭇가지처럼 가볍게 들렸는데, 지금은 그 무게에 상체가 오그라질 것 같았다.
“이걸 들고 날 따라오시오.”
“성주님.”
지소현의 얼굴에 다시 걱정이 깃들었다.
“정말 괜찮으신가요? 안색이 너무 안 좋아요.”
“나는 안 좋지만 그대는 멀쩡하잖소. 어지간한 무뢰배들 걱정은 안 해도 되겠군.”
극단적인 피로 앞에 나약해질 것 같은 정신을 붙들기 위한 농담이었다. 물론 지소현 입장에서는 그 말이 농담으로 들리지 않았다.
그렇게 지소현이 광룡부를 들고, 연호정이 사우를 들었다. 그럴 일은 절대 없지만, 만에 하나라도 사우가 깨어나면 지소현을 기절시키고 도망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대형!”
“형님!”
강량과 진양의 목소리가 이렇게 반갑게 들릴 줄이야.
일말의 걱정을 단박에 날려 버리는 만남이었다. 연호정이 씨익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들의 반가움이 어찌 사제지간의 반가움에 비할 수 있겠는가.
“소현아!”
“스, 스승님?!”
단숨에 강량과 진양을 뛰어넘은 하은교가 지소현을 끌어안았다.
“소현아, 괜찮으냐?”
지소현의 눈에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스승님.”
스승이 함께 있다는 사실은 들었지만, 실제로 만나기 전까지는 실감이 나질 않았다.
하지만 스승의 얼굴을 보고, 목소리를 듣고, 체취까지 맡으니 이제야 비로소 실감이 났다.
지소현은 어린애가 된 듯 엉엉 울며 하은교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하은교 역시 눈물을 뚝뚝 흘리며 하나뿐인 제자를 안아 주었다.
더 이상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지난 시간 서로가 힘든 시간을 보냈지만, 이렇게 재회한 순간 과거의 서운함이나 미안함 따위는 아무 의미가 없어진 것이다.
강량이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다행입니다.”
진양이 머리를 긁적였다.
“뭐가 다행인지는 모르겠지만, 이거 나도 콧날이 제법 시큰시큰한데?”
지소현은 서럽게도 울었다. 심마를 이겨 냈다곤 해도 스승을 실제로 보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게다가 제자가 납치당했다는 사실에 부리나케 이곳까지 날아온 것이니, 그 감격을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강량이 웃으며 연호정의 어깨를 툭툭 쳤다.
“전쟁 끝나면 우리도 제자나…….”
그때였다.
풀썩.
연호정이 그대로 쓰러졌다.
“형님!!”
* * *
쓰러진 연호정이 다시 깨어난 것은 무려 사흘이 지난 정오였다.
눈을 뜨자마자 연호정은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차렸다.
‘분양지부.’
눈은 떠졌지만,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그 상태 그대로 내부를 점검했다.
잠시 후.
“……이제 좀 살겠군.”
연호정이 힘없이 투덜거렸다.
“빌어먹을, 나는 아직도 멀었어.”
기절해 있는 동안 알아서 모인 황룡기가 팔 할 가까이 복구되었고, 상단신기 역시 쓰러지기 전보다 훨씬 풍부해진 상태였다.
완벽한 몸이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이제야 좀 움직일 만한 상태가 된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감지덕지했다.
연호정이 쓴웃음을 지으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지금 이 꼴을 스승님께서 보신다면 혀를 차셨을 것이다.’
황룡신왕공은 사신무의 극한으로, 최종 오의라 할 수 있었다. 그런 무공을 익히고도 힘이 없어 기절이나 해 대니, 이 부족한 제자를 스승께서 보신다면 얼마나 애석해하실 텐가.
물론 그건 연호정의 지나친 자학이었다.
동등의 고수에게 신기를 있는 대로 쏟아붓고 천 리가 넘는 길을 주파했으며, 와중에 머리는 머리대로 쓴 데다 무극수와 생사결까지 벌였다. 그나마 황룡신왕공이었기에 이나마 버틸 수 있었던 것이지, 사흘이 아니라 열흘 동안 정신을 잃었대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아니, 같은 무극수라도 이렇게 무리를 하면 목숨이 위험했을 것이다.
우우웅.
습관적으로 황룡기를 일으켜 전신의 근육을 푼 그가 이불을 걷어 내고 일어났다.
우당탕!
황룡기의 기척을 읽은 강량과 진양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거처로 뛰어 들어왔다.
“형님! 괜찮으십니까?”
연호정이 소지로 귀를 후볐다.
“소리가 너무 크다. 머리가 아프잖아.”
“괜찮냐니까요!”
“아, 괜찮으니까 일어났지!”
강량이 미소를 지었다. 일어나자마자 버럭 소리를 지르는 것이, 정말 괜찮은 모양이었다.
진양이 투덜대듯 말했다.
“무극에만 오르면 세상에 어려울 게 없을 줄 알았는데, 대형을 보니 그것도 아닌 모양이오. 무제라고 불리는 인간이 왜 이렇게 픽픽 쓰러져 대?”
물론 진양도 알고 있었다. 연호정이 얼마나 무리했는지. 이건 진양 나름의 축하 인사였다.
“하 선배님은?”
“잠시 지 소저를 데리고 지부 밖 야산에 가셨습니다. 저녁 전에 돌아오신다고 했어요.”
“내가 쓰러진 지 얼마나 지났지?”
“사흘째입니다.”
사흘간 회포를 풀었을 텐데도 더 할 얘기가 남은 모양이었다.
“사우는?”
“예? 아, 그 피풍의 뒤집어쓴 놈들 대장이요? 형님이 잡은?”
“그래.”
“창고에 처박아 뒀습니다. 아직도 의식이 없어요. 하긴, 형님이 가한 혈도 봉쇄 위로 하 선배님이 혹시 모른다고 또 점혈을 가했습니다. 하 선배 말씀이, 이쪽에서 깨우지 않는 이상 일어나지도 못하겠지만 설령 깨어나도 영영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할 거라던데요?”
추가 점혈. 다른 말로 이중 점혈이라고도 한다. 자칫 잘못하면 상대의 근육과 신경이 돌이킬 수 없을 지경으로 굳을 수 있고, 심할 경우 호흡 곤란으로 사망할 수도 있다.
물론 하은교의 실력이라면 이중 점혈을 절묘하게 해냈을 것이다. 그렇다면 사우에 관해서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렇다면 할 일은 하나.
“지부장 불러서 그간 쌓인 정보들 싹 긁어모아 오라고 해라.”
진양이 혀를 내둘렀다.
“좀 쉬는 게 낫지 않겠소? 너무 무리하는 것 같은데.”
“쉬어야 할 때라고 느꼈으면 그냥 쉬었어. 지금은 움직여야 할 때다.”
“하지만…….”
“움직여야 할 때 움직이지 않아서 벌어진 참사는 훗날 지독한 후회만을 남길 뿐이다. 차라리 팔 하나를 잘랐으면 잘랐지, 내 그 꼴은 못 본다.”
진양이 강량을 바라보았다.
강량이 쓴웃음을 지었다.
“지부장에게 곧장 연락을 취하겠습니다. 그래도 밥은 먹고 일하십시오.”
“여기서 먹고, 여기서 보고를 받겠다. 진양, 너는 내 밥 좀 가져다줘.”
진양이 투덜거리며 방을 나섰다. 내가 하인도 아니고 식모도 아닌데 도끼는 왜 맡기는 거고 밥은 왜 달라는 거냐며 중얼중얼 말이 많았지만, 결국 그의 발은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흑혈신마는?”
“마구간에서 자고 있습니다.”
“좋아.”
“한데 형님, 뭐 걸리는 거라도 있으십니까? 너무 급하신 것 같은데요.”
“급할 수밖에.”
팔짱을 낀 연호정이 창밖을 바라보았다.
날씨는 좋았지만, 연호정의 눈은 어두웠다.
“광혈교의 마인들이 사천으로 진입했다고 하였다. 이건 필시 사음교에서 수작질을 부린 거야. 지 소저를 손쉽게 납치하기 위해 광혈교를 움직인 것이다.”
“……예?”
“문제는 광혈교가 정말로 사음교의 뜻대로만 움직이고 있냐는 거다.”
연호정의 턱이 불거졌다.
“만약 광혈교가 사음교의 수작질을 알고도 당해 준 거라면…… 이건 꽤 위험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