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175)
흑백무제 1175화(1175/1200)
1175화. 신(神)과 마(魔), 그리고 악(惡) (7)
“한 번도 와 본 적이 없었지.”
사내의 목소리는 낮으면서도 정갈한 느낌을 줬다. 듣기가 좋았다.
“솔직히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라는 생각도 많이 했다. 우리가 사는 세상도 충분히 괜찮으니까. 풍족하고 만족스러운, 지금보다 나아지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못하진 않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어. 말하자면 굳이 싸우고 싶지 않았다는 거지.”
“…….”
“한데 말이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찝찝하더란 말이지.”
“…….”
“이 세상에 나만큼 마(魔)의 본질에 대한 탐구를 깊이, 오래 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태어났을 때부터 그랬어. 마의 피를 이은 내가 마의 본질을 탐구했다는 것은 곧 나의 자아와 정체성을 고민했다는 뜻과 다르지 않다.”
“…….”
“결국 나는 그 찝찝함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아 버렸어. 그것은 내가 마(魔)이기 때문에 갖고 있는 본능을 거부했기 때문에 생긴 거부감에 가까웠다.”
규홍(圭鴻)은 신중한 태도로 사내의 말을 경청했다.
사내가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결국 사람은 타고난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어. 교내 사람들은 말하더군. 운명이라는 게 어디 있냐고. 먹을 수나 있는 거냐고. 하긴, 사람 생각하는 건 다 비슷비슷해서 대륙 놈들도 운명에 대한 본능적인 거부감을 갖고 있었어.”
“…….”
“하지만 그건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우자(愚者)의 변명에 가까워. 운명이란 타고난 천품에서 시작되는 거야. 내가 이렇게 생겼고, 내가 이런 성정을 가지고 있고, 내 행동이 이러한 결과를 내고 있는데 어찌 운명에서 벗어날 수 있단 말인가?”
“그렇다면…….”
규홍이 조심스레 물었다.
“운명을 개척한다는 말은 다 허상이옵니까?”
“운명을 개척한다는 것은 곧, 여기까지일 뿐인 내 운명의 수명을 늘린다는 소리다. 타고난 운명에서 벗어나는 길은 누구라도 불가능해.”
“……그렇군요.”
“그래서 사람들은 이런 말을 싫어한다. 자신의 삶이 비참할수록 더더욱 그런 경향을 보여. 타고난 대로 사는 거라면, 내가 비참하게 사는 것도 운명이니 받아들이란 뜻인가? 그런 식으로 해석하는 것이지.”
“저는 이해합니다.”
“그 또한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자의 무식한 헛소리다. 비참하게 사는 게 운명이 아니라 인생을 비참하게 만든 자신의 천품을 들여다봐야 하거늘, 언제나 사람들은 주위 환경과 상황만 주시하며 하늘을 저주하지.”
“환경은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요소가 아닙니까?”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나 자신을 잘 알아야만 하는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비참한 환경일지라도, 누군가에게는 축복과도 같은 환경이 될 수 있으니까.”
“…….”
“결국 내 환경을 지옥으로 만드는 것도 나고 극락으로 만드는 것도 나이며, 아무것도 아니게 만드는 것도 나다.”
감히 쳐다도 볼 수 없을 만큼 높은 곳에서 거니는 분이지만, 규홍은 사내의 말을 쉬이 납득할 수가 없었다.
어떤 의미로는 말장난 같기도 했고, 지나친 운명론자의 광언(狂言) 같기도 했다. 애초에 이 세상의 진리는 어느 한 사람의 깨달음으로 설명할 수 없는 고로, 이 사내의 말도 세계의 진실이라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규홍은 생각했다. 신처럼 떠받드는 분의 말을 듣고도 믿지 아니하고 거부감부터 느끼는 자신의 천품은, 정말이지 어쩔 수 없는 거라고.
그 역시 태어났을 때부터 그러했다. 자신이 보고 들은 바와 생각이 다른 자의 말은 일단 거부부터 하고 봤다.
물론 그건 대다수의 사람이 보이는 본능적인 성향에 가까웠지만, 자신은 그런 면모가 유독 심했다. 신이라 믿는 사람의 말조차 당장 믿지 않으니, 이게 천품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보아라.”
사내가 턱으로 눈앞에 쌓인 시신들을 가리켰다.
시신들은 그야말로 끔찍한 몰골을 하고 있었다. 그 수만 오백을 훌쩍 넘기는데, 단 한 구의 시신도 사지가 멀쩡하지 않았다.
팔다리가 괴상한 방향으로 뒤틀린 것은 기본이요, 얼굴이 사방으로 뜯겨 나가 붉은 꽃처럼 보이는 시신도 있었고, 척추가 통째로 뜯기다 말아서 등 뒤에 하얗고 굵은 밧줄을 대고 있는 듯한 시신도 있었다.
짐승에게 파먹힌 것처럼 복부가 난자된 시신도 흔했으며, 전신의 뼈가 오므라져 커다란 공처럼 변해 버린 시신도 있었다.
마치 지옥에서 올라온 악귀들이 축제를 벌인 것만 같은 광경이었다. 어린아이가 벌레를 가지고 노는 것처럼 사람의 몸을 제멋대로 가지고 놀다가 흥미를 잃고 대충 버려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 끔찍한 광경을 보는데도 사내는 눈 하나 깜빡하질 않았다. 물론 그건 규홍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에겐 이들 나름의 사명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사명이 진정 자신의 마음에서 우러나온 사명이라고 할 수 있는가? 이중 대다수는 어쩔 수 없이, 휩쓸리듯 이 자리에 왔다가 비참하게 생을 마감한 것이다.”
“…….”
“그저 길을 열어 두었다면, 훗날 좋은 세상에서 함께 살아갈 수도 있었을 것을.”
사내의 눈에 작은 안타까움이 어렸다.
규홍은 사내가 보이는 감정이 진심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이 사내가 무려 오백이나 되는, 대륙 무림의 기둥 중 하나인 아미파의 무승들을 광소를 터트리며 다 죽인 것도 진심이고, 운명을 받아들이지 못한 이들의 죽음에 슬퍼하는 것도 진심이다.
그래서 규홍은 사내가 무서웠다.
단신으로 아미파를 공격해 거의 멸문에 가까운 피해를 주고도 생채기 하나 입지 않은 무력도 무서웠지만, 진짜 무서운 것은 종잡을 수 없는 저 진심의 방향이었다.
‘그래서 신이라 불리시는 것이지.’
성마에 이르렀다 한들, 규홍 자신의 눈에 보이는 세상은 예전과 다르지 않았다. 아마 앞으로도 쭉 그럴 것이다.
하지만 이분은 달랐다.
‘본디 신이란 무감하기 때문에 행위의 결과가 감정적으로 해석될 수 있고, 무정하기 때문에 만사를 공평하게 처리할 수 있는 것이다.’
엄밀히 말해 이 사내는 아직 진정한 신이 되지 못했다.
그러나 규홍은 확신했다. 조만간 이 사내가 진짜 신이 될 거라고.
유구한 역사를 지닌, 생명 그 자체의 힘을 신봉했다는 피의 종교에서도 가장 성스럽고 위대한 피를 이은 이 사내가 당대에 이르러 삼백 년 전의 전설을 다시 일깨울 거라고.
규홍은 진심으로 그리 믿어 의심치 않았다.
“쿨럭!”
저 멀리 무너진 암자 속에서 늙은 비구니 하나가 꿈틀거리며 기어 나왔다.
규홍이 사내에게 살짝 고개를 숙였다.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되었다.”
규홍을 막은 사내가 여유롭게 앞으로 걸어 나갔다.
어느 순간 사내는 비구니 앞에 도달해 있었다. 거리만 이십여 장이 넘고 그 가운데에 오백 구에 달하는 시신이 쌓여 있는데 언제 거길 넘어갔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대단하군.”
사내는 진심으로 감탄하는 듯했다.
“너의 심장이 힘을 잃지 않았음은 알고 있었다. 하나 언제 꺼져도 이상하지 않을 상태라 얌전히 보내 주려 하였지. 한데 기어이 힘을 내어 그곳을 빠져나왔구나.”
간신히 머리만 내밀었을 뿐 여전히 무너진 암자 밑에 깔려 있는 비구니의 얼굴에 짙은 수치심이 어렸다.
제자들처럼, 사매들처럼 제대로 싸우다가 이 꼴을 당했다면 기가 막혔을지언정 부끄럽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사내가 발산한 알 수 없는 무공에 휩쓸려 치명적인 내상을 입고 날아갔을 뿐이었다. 주먹 한번, 칼 한번 제대로 휘둘러 보지 못하고 일격에 전투 불능 상태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야말로 신과 같은 무공이었다. 정면으로 공격당한 것도 아니요, 그저 휩쓸렸을 뿐인데도 이 지경이라니?
‘무허대사님이라면 이런 신위를 펼칠 수 있을까?!’
수치심 속에 은은한 두려움이 꽃피운다.
사내를 향한 두려움이 아닌, 상상할 수 없는 무공이 실재한다는 사실 자체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쿠르릉!
아미파의 장문인, 복호사태의 몸에서 무서운 기세가 피어올랐다.
치명적인 내상을 입었지만, 그래도 힘을 발산한다. 당장 여기서 빠져나가 사내를 향해 주먹을 휘두르고 싶었다.
사내는 여유롭게 그녀를 기다렸다. 뒷짐을 지고 한 줄기 미소까지 드리운 그의 모습은 실로 귀공자와 같았다.
콰득! 콰드득!
제 몸을 깔아뭉갠 돌무더기를 치우고 기어이 모습을 드러낸 복호사태가 숨을 헐떡였다.
이미 왼팔은 부러졌고 등은 피투성이였다. 깨진 머리에서 흘러나와 볼을 적신 피는 굳어서 갈변했다.
“네놈은 대체…….”
말을 하던 복호사태가 울컥 피를 토해 냈다.
쏟아 낸 피의 색깔이 지나치게 어두웠다. 원정이 손상된 것, 죽음이 코앞이었다.
그래도 복호사태는 외쳤다.
“대체 누구냐!”
사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죽음을 코앞에 두고도 그리 어리석은 질문을 던지는가. 대륙의 사람들은 실로 기묘한 작자들이로군.”
“네 이름이 무엇이냐! 광혈교의 사제장이냐?!”
순간 규홍이 소리쳤다.
“무엄하구나, 늙은 계집!”
쩌어어엉!
화살처럼 날아와 박히는 엄청난 목소리에 복호사태의 몸이 휘청거렸다.
그녀의 눈이 흔들렸다.
‘이런 말도 안 되는……!’
항마(降魔)의 진결은 소림사 못지않은 것이 아미파였다. 무공 본연의 위력은 소림사가 한 수 위였지만, 사마외공에 대한 강력한 방어력은 아미파의 불가신공이 한 수 위였다.
한데 내공 섞임 외침 한 번에 단전이 찢어질 것처럼 아파 왔다. 극에 이르렀다 해도 마기(魔氣)는 마기일진대, 어떻게든 잡아 놓은 금정진기(金鼎眞氣)가 순간적으로 흩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상극을 압도하는 힘. 성마에 도달한 마인의 진짜 힘이었다.
후우우웅!
어느새 사내의 뒤로 다가온 규홍이 엄기 가득한 목소리로 외쳤다.
“이분은 만마(萬魔)의 종주이시자, 차후 삼공가(三公家)를 통합하여 진실된 피의 종교를 세우실 혈신(血神)의 적통이시니라! 천하 모든 마를 품에 안으신 분이며, 천하 모든 땅을 손에 쥐실 분이고, 나아가 저 하늘에 이르러 삼라만상의 이치조차 마(魔)로 물들이실 인신(人神)이시니라!”
복호사태가 또 한 번 피를 토했다.
“그게 무슨 말 같지도 않은……!”
“그리고 사제장인 나는, 우리는.”
규홍의 눈이 착 가라앉았다.
“하늘에 이르러 혈신의 생명을 만천하에 흩뿌리실 인신을 떠받드는 시종에 불과할 뿐이니라.”
복호사태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스스로 사제장이라 밝히면서도 당당히 시종이라 칭한다.
사제장이라면 중원 무림에서 성천을 제외하곤 맞수가 없는 강자다. 그런 사람이 누군가의 종을 자처한다니?
“설마……!”
복호사태의 얼굴이 충격으로 물들었다.
“당신…… 광혈교주(狂血敎主)인가?!”
우둑!
스며든 마기가 폭발하여 그녀의 좌측 무릎을 산산이 부쉈다.
저도 모르게 무릎을 꿇었지만, 복호사태는 고통을 느끼지 못했다. 정신적 충격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사내가 천천히 한쪽 무릎을 꿇은 채 그녀와 눈을 맞추었다.
“이보게, 젊은 비구니여.”
“……!”
“부처의 가르침 따위는 환상에 불과하다네. 그런 것은 종교라 하기도, 학문이라 하기도 뭣한 좌도일 따름이야.”
“닥쳐라, 이놈!”
사내의 손이 복호사태의 머리에 닿았다.
“내세는 없겠으나, 미물로 다시 태어난다면 나의 권속으로 들어오라.”
“이노옴!”
“잘 가거라.”
콰득!
사내의 손아귀에서 복호사태의 머리통이 산산조각이 났다.
그렇게, 일부 병력을 제외한 아미파가 단 한 사람의 손에 의해 지상에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