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177)
흑백무제 1177화(1177/1200)
1177화. 사천대란(四川大亂) (2)
“…….”
의식을 되찾은 순간, 사우는 쓰러지기 직전의 기억부터 보다 먼 과거의 기억까지 단번에 떠올릴 수 있었다.
기억을 한다는 것은 죽지 않았다는 것이고, 죽지 않았다는 것은 누군가에게 잡혔다는 뜻.
‘내공 봉쇄.’
곧장 자신의 내부를 점검한 사우는 현 상황을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물론 화도 났고 혼란도 느꼈다. 그러나 결코 경거망동하지 않으려 했다. 누가 보는 것이 아닌데도 위기 상황에서 냉정해지려 하는 것은 지독한 경험과 후천적 학습 덕분이었다.
‘결국 졌단 말이지.’
사우는 연호정과의 마지막 전투를 떠올렸다.
이미 쇠사슬에 묶여 강물로 끌려 들어간 순간 패배는 확정이었다. 상대 역시 많이 지쳐 보였지만, 수중에서 드러내는 그 압도적인 기파는 사우가 감당하기 힘든 것이었다.
‘애초에 싸울 때부터 정상이 아니었다. 그놈은 나보다 더 고수였어.’
물론 고수라고 반드시 이기란 법은 없다. 사우 역시 자신보다 강자였던 이들을 수십 번 쓰러트리고 지금 이 자리에 오른 진짜 강자였다.
하지만 세상에는 자신보다 더 잘 싸우는 무사도 존재하는 법이다.
‘그 연배에 그토록 대단한 무공을 연마한 것도 놀랍지만…….’
진짜 놀라운 것은 전투술이었다.
딱히 지저분한 싸움을 한 게 아닌데도 진흙 위를 구르며 격하게 싸운 것처럼 느껴진다.
정정당당하고 격식 있는 싸움이 아니었다. 내가 선 땅, 내 주변 상황을 완벽하게 인지한 후 적극적으로 써먹으며 싸웠다. 자신의 힘만을 믿고 싸우는 자가 아니란 뜻이었다.
‘하늘이 내린 천재라도 무수한 경험 없이는 그런 싸움을 벌일 수 없다. 극사에 이른 고수와 싸운 경험도 많아 보였어. 대체 어떻게 그런 게 가능했던 것일까.’
어쩌면 대륙 무림이 세상을 속이고 은밀히 양성해 낸 비밀 병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이곳에도 있겠지.’
내공은 물론 육신까지도 봉쇄되었다. 사음의 무공과 기술로도 풀 수 없을 만큼 철저한 봉인술이었다. 그나마 목과 복부, 허리 정도는 움직일 수 있었지만, 지금 이 상황에선 아무 의미가 없었다.
다행인 건 완성된 육체 덕분에 잘 다듬어진 오감만은 날카롭다는 것이다. 창가와 문틈으로 들어온 희미한 빛만으로도 그는 이곳이 거대한 창고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사우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짐짝 취급이군.”
그때였다.
“그보다 더 나은 취급은 못 해 주지.”
순간 헛바람이 나올 정도로 놀랐지만, 사우는 티 내지 않고 목소리가 들린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창가 옆 그림자 진 벽에 사내 하나가 앉아 있었다. 너무도 어두워서 얼굴을 확인할 수 없었지만, 희미하게 드러난 자세와 목소리가 상대의 정체를 알려 주었다.
“너군.”
사내,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다.”
“내가 깨어날 때까지 거기서 기다리고 있었나?”
“너와는 달리 할 일이 많은 몸이시다. 그런 시간 낭비는 안 하지.”
괜한 도발이라고 생각한 사우가 코웃음을 쳤다.
“네놈이 날 깨운 것이로군.”
“물론이다. 사나흘 더 깨우지 않았다면 몸의 신경이 다 죽어서 평생 걷지도 못했을걸?”
섬뜩한 얘기였다. 사우가 피식 웃었다.
“고맙다고 해야 하나?”
“아직 고마워하긴 일러. 네 사지는 아직 그 상태 그대로니까.”
“…….”
“사나흘 놔두면 병신 되는 건 여전하다는 거지.”
사우의 눈매가 살짝 일그러졌다.
“이유가 뭐냐? 왜 날 살려 둔 거지?”
스륵.
연호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닫혀 있던 창문을 활짝 열었다.
사우는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오랫동안 빛을 보지 못한 눈이 강렬한 햇빛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연호정이 창틀에 양손을 짚었다.
밖을 바라보는 연호정의 뒷모습이, 조금씩 빛에 익숙해진 사우의 눈에 들어왔다.
“잘 싸우더군. 역시 영귀수의 총대장이야. 예나 지금이나 그 실력에는 변함이 없구나.”
“…….”
“하지만 넌 사냥꾼이지 납치범 따위가 아니야. 교주 놈도 그걸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널 사람 하나 납치하는 데에 파견한 건 어인 이유인가?”
사우에게 묻는 게 아니었다. 연호정의 말은 혼잣말에 가까웠다.
사우가 무거운 목소리로 물었다.
“싸울 때도 의아했다. 너, 나를 어떻게 아는 거냐? 나는 널 본 적이 없다. 당연히 너 같은 놈과 싸운 적도 없어.”
“…….”
“한데 너는 마치 나와 많이 싸워 본 것처럼 굴었다. 실제로 내 무공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어. 그게 아니었다면 결과는 지금과 달랐을 것이다.”
“다른 건 몰라도 그 자존심은 영 별로군.”
“뭐?”
“패자의 입에서 ‘만약’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만큼 추한 일이 없지. 그것도 싸움에 이골이 난 작자가 그런 의미도 없는 말을 주절거리다니.”
“…….”
“그 같잖은 자존심 한 자락까지 내려놔도 이기기 힘든 괴물들이 득실거리는 게 세상이다. 너도 아직 멀었어.”
사우는 저도 모르게 이를 악물었다.
연호정의 마지막 말에는 정말 자존심이 상했다. 동시에 화가 났다. 상대의 말이 맞다는 사실에, 동시에 내가 그리 못난 모습을 보여 줬다는 사실에 화가 치밀었다.
자연스레 사우의 목소리는 날카로워졌다.
“그만 농락하고 죽일 거면 죽여라.”
“미안하지만 난 네 사냥감이 아니라서 말이다.”
“……?!”
“패배한 사냥꾼은 사냥감의 뿔에 치여 죽든, 이빨에 물려 죽든 하지. 내가 널 살려 둔 것엔 몇 가지 이유가 있지만, 너와 나의 사이가 사냥꾼과 사냥감이 아니라는 것도 있다.”
“웃기는…….”
“그래서 교주 놈도 너를 보낸 게 아닌가 싶군.”
“뭐?!”
창밖을 보던 연호정이 창틀에서 손을 떼고 몸을 돌렸다.
역광으로 들어오는 빛이 연호정의 얼굴을 가렸다. 사우의 눈에 연호정은, 은은한 황금빛 안광을 뽐내는 그림자 괴물처럼 보였다.
그 괴물이 상상을 초월하는 말을 꺼냈다.
“네 일생의 목표가 사음교주라는 걸 안다.”
“……!!”
“정확히는 모르지만 네가 직접 창안한 내공심법의 이름도 음황무를 분쇄하고 싶어서 지은 것이라 들었는데, 맞나?”
사우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지금까지 자신에 대해 주절거린 거야 세작을 이용했다거나 하는 식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럴 리는 절대 없지만, 어떻게든 이해할 수 있단 말이다.
하지만 자신의 무공 명칭에 관해서도 알고 있다는 건 전혀 다른 문제였다.
확신을 갖기 전까지는 누구에게도 무공의 이름을 말해 준 적 없던 그였다. 만에 하나라도 그 얘기가 교주에게 들어가면, 약점을 파악하기도 전에 반역도라는 이유로 처형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너…… 대체 정체가 뭐냐?”
“지금은 그런 게 중요하지 않아.”
“말해라! 네놈은 대체 누구냐! 누구기에 나에 대해 그리 소상히……!”
“이거 하나만은 말해 주마.”
연호정의 금빛 안광이 진해졌다.
“삼교 중에서도 가장 증오하는 사음교의 소속인 너를, 나는 생각보다 그리 싫어하지 않아.”
“……?!”
사우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당연히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연호정이 과거 그와 적장으로 만나 숱하게 싸웠다는 사실도, 하도 싸우고도 결판이 나지 않은 두 사람의 관계가 적임에도 어느새 전우 비슷하게 바뀌었다는 것도 모를 것이다.
물론 진짜 전우애를 느낀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거장의 끝나지 않는 예술 행위를 눈앞에서 직관한 애호가의 환희에 가까웠다.
그리고 마침내 연호정은 깨달았다. 사우가 평범한 사음교도들과는 다른 사람이란 걸.
무림의 입장에선 사음교주만큼이나 위험천만한 암살자였지만, 적어도 그가 지닌 전투술은 단순한 싸움 기술을 넘어 장엄한 예술과도 같았다. 적어도 연호정에게는 그러했다.
나아가 그는 깨달았다. 사우가 사음교주를 사냥감으로 여기고 있음을. 무슨 수를 써서라도 꼭 그를 잡아 죽이겠다는 목표로 살아가는 남자임을.
그것이 단순히 사음교주가 뛰어난 무사여서가 아닌, 그에 대한 지독한 원한 때문이라는 것 또한 깨달았다.
그걸 알아 버린 순간, 연호정은 사우를 영혼까지 검게 물들일 만큼 증오하기가 어려웠다.
“중요한 건 이거다. 같은 소속이 아닌 나조차도 네가 교주 놈을 죽이려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 한데 교주 놈이 그걸 몰랐을까?”
“……!”
“소 도축할 때 쓰는 칼을 병아리 몰이에 쓴 이유가 거기에 있다.”
연호정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사음교주는 널 시험한 것이다.”
“닥쳐라!”
“인정하기 싫은 모양이군. 그렇다면 하나 묻지. 이번 납치 임무를 제외하고 몇 년을 놀았지? 영귀수의 총대장으로서 적을 섬멸하거나 암살하라는 명령을 받은 게 언제냐?”
사우는 입을 열지 않았다.
그게 오 년이 넘었다는 사실을 말해 줄 필요도 없었거니와, 어떻게 말해도 상대는 자신을 흔들려 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오히려 그의 침묵이 연호정에게는 확신을 주었다.
“너는 임무를 중요시하지. 교주 놈을 그렇게 증오하는데도. 무극, 아니 극사에 이르렀음에도 너는 너 자신을 속여야만 했다. 교주를 신이라 칭하며 고개를 조아려야 했어. 그래야 교주도 너의 목표를 알지 못할 테니까.”
“닥치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변하지 않는 진실 하나를 말해 주지.”
연호정의 미소가 악귀처럼 사나워졌다.
“그런 식으로 해 봤자, 너는 죽을 때까지 교주 놈의 옷자락 하나 건드리지 못할 것이다.”
“닥쳐!!”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 연마해도 작은 깨달음 하나 주길 꺼려 하는 것이 무(武)의 신(神)이다. 너처럼 두 마음을 품고 이만 갈아 대서는, 어떠한 깨달음도 손에 넣기 어려울 것이다.”
사우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연호정의 말은 그가 수년 동안 했던 고민을 정확하게 겨냥하고 있었다.
상대의 말이 맞다. 피땀을 쏟아 내며 한 길에만 정진해도 발전하기 어려운 것이 이 경지다. 하물며 자신을 속여 가면서 영음산에 거할 뿐인 그에게 발전은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사우는 그 사실을 인정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건 네가 상관할 바가 아니다.”
“너의 그 말은 곧, 네가 교주를 죽이기 위해 오랜 시간 와신상담하고 있다는 걸 증명하는군.”
“……!”
“목표가 같다고 친구가 될 수는 없지. 하지만 같은 목표를 지녔다면, 필요한 것을 거래할 수는 있지 않겠나.”
사우의 얼굴이 팍 일그러졌다.
“미친놈! 내가 설마하니 대륙의 불신자 놈에게 본교의 정보를 누설할 것 같으냐? 이번 납치 목표에 관한 것도 난 모른다!”
“모를 리가 없지. 교주가 널 시험하려 했다면, 왜 지소현을 납치하려 하는지 다 말해 줬을 것이다. 그렇지?”
“…….”
“어쩌면 교주는 너를 어느 정도는 신뢰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런 중요한 임무도 맡긴 거겠지. 뭐, 다르게 생각하면 지소현의 존재가 없어도 크게 아쉽지 않은 것일 수도 있어.”
연호정이 사우의 맞은편에 쪼그려 앉았다.
“하지만 난 그녀에 관해 묻지 않을 것이다.”
“……뭐?”
“알아도 말해 주지 않을 걸 붙잡고 사정하는 취미는 없거든. 내가 구슬리고 또 구슬리면, 네가 그걸 알려 주겠어?”
사우의 눈이 충혈되었다.
“그럼 내게서 무엇을 알고 싶으냐?”
“사음교와 관련되었으면서도 전혀 관련되지 않은, 어떤 의미로는 너희에게는 전혀 부담이 없을 정보.”
연호정의 얼굴이 무표정하게 변했다.
“사천에 파견된 광혈교 놈들.”
“……!!”
“어떤 놈들이 온 거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