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178)
흑백무제 1178화(1178/1200)
1178화. 사천대란(四川大亂) (3)
탁!
별 힘도 들이지 않고 내리친 도끼질 한 방에 제법 큼직한 장작이 좌우로 쪼개졌다.
비쩍 말랐지만, 아주 오랫동안 이 일을 했음을 알 수 있었다. 동작 하나하나에 익숙함이 묻어 나왔다.
그렇게 수십 개의 장작을 패어 한옆에 묶어 둔 노인은 문득, 낯선 시선을 느꼈다.
누군가가 자신을 주시하고 있다는 걸 알았지만, 노인은 결코 놀라거나 당황하지 않았다. 그저 평상에 걸터앉아 대충 던져둔 천으로 흐르는 땀을 닦을 뿐이었다.
땀을 닦은 노인은 바가지에 뜬 물을 한껏 들이켜고는, 평상에 놓여 있던 곰방대를 물었다.
틱!
부싯돌 없이 손가락 한 번 튕긴 것만으로도 불이 붙었다.
몇 번 뻑뻑대며 연기를 뿜은 노인이 재를 털며 말했다.
“갈 때 다 된 늙은이를 보러 올 사람이 몇 없는데. 내 아는 사람은 거의 다 죽었고 속세와 연을 끊은 지도 이십여 년이 되었으니, 나를 아는 사람은 이제 하나뿐이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지만, 노인을 지켜보는 누군가는 그 목소리를 다 듣고 있었다.
다시 몇 차례 곰방대를 빤 노인이 물을 한 모금 마시고 말했다.
“네 녀석이냐?”
스륵.
놀랍게도 평상 한옆에 당형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렇소.”
노인이 당형을 바라보았다.
이채도 띠지 않는 눈. 오랜만에 봤을 것이 분명한데도 놀라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네 녀석이 아들놈에게 가주직을 이양한 이후로 처음 보는 것 같구나.”
“그렇구려.”
“많이 말랐다.”
“그러는 형님도 많이 늙으셨소.”
형님.
사천당가의 태상가주이며 직계 혈족으로 장남이었던 그에게 형님은 없었다.
하지만 그 시야를 방계로 넓힐 경우, 그가 형님이라 부르는 사람은 꽤 많았다. 그리고 그의 형 중 살아 있는 사람은 오직 이 노인뿐이었다.
“오랜만에 뵙소, 유광 형님.”
당유광.
전대 사천당가 방계 출신의 이인자였던 걸물.
방계 출신임에도 직계만이 익힐 수 있는 무공 연마가 허락된 세 사람 중 하나이며, 당형만큼은 아니지만 천재적인 재능으로 당가의 모든 공부를 엄청난 속도로 흡수했던 기린아.
다만 얄궂게도 방계 출신이라, 오히려 가문의 어른들에게 밉보여 지닌바 재능을 다 떨치지도 못했던 비운의 인물이 그였다.
그리고 그런 그를 비롯해 다른 방계 출신 인사들을 어느 정도 챙겨 준 사람이 바로 당형이었다.
당형은 오만하고 독선적인 군주였으나, 적어도 방계를 향한 태도만큼은 전대에 비해 훨씬 유순했다. 직계와 방계 사이의 넘을 수 없는 벽 앞에서 좌절하고 분노했던 방계 출신 인사들도 당형에게는 그 분노의 화살을 돌리지 않았다.
그건 당유광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갈라진 핏줄 특유의 어색함은 어디로 가는 게 아니었다.
당유광이 곰방대를 또 한 번 털었다.
“심맥이냐?”
느닷없는 질문이지만, 당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용케 아직까지 살아 있군. 무극수라도 너 같은 별종이 아니었다면 진즉 한 줌 핏물이 되었을 게다.”
“갈 때가 다 된 것은 형님만이 아니외다. 이젠 내 귀에도 하늘의 부름이 들리오.”
당유광이 클클클 묘한 웃음소리를 흘렸다.
“세상이 암왕이라 부르며 칭송하던 당가 역사상 최고의 군주도 세월 앞에서는 어쩔 수 없구나. 설마하니 네가 그리도 약한 소리를 뱉을 줄은 몰랐다.”
“자연의 당연한 섭리외다. 강하고 약하고를 따질 문제가 아니오.”
“그건 그렇지.”
당유광이 허리춤에 매단 주머니에서 잘 말린 푸른 잎 몇 조각을 꺼내 곰방대에 넣었다.
“그래서, 이제 가실 때 다 된 당가의 태상가주께서 어인 일로 나를 찾아오셨는가?”
“학정홍(鶴頂紅)이군.”
“…….”
“거기에 단혼산의 원료인 자각초와 단장산의 원료인 홍음실 약간.”
“나이를 먹었어도 코는 여전하군.”
“가내 독공을 집대성한 사람이 나요. 당연히 알지.”
지금 당유광이 피우는 연초는 다름 아닌 독초였다. 그중에서도 독하기로는 당가에서도 손에 꼽힌다는 극독의 원료들을 배합해 만든 것이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반경 십 장 안에 들어오는 순간 중독 증세를 겪을 만큼 독한 연기였다. 그가 혼자 지내는 이유가 달리 있는 게 아니었다.
당형이 희미한 웃음을 지었다.
“지금껏 독초로 연명하고 계신다는 건, 마지막까지 본인의 쓰임을 증명키 위함이오?”
“확실히 늙기는 늙었어. 그런 웃기는 소리를 다 하다니.”
연기를 뿜은 당유광이 크게 하품을 했다. 나이를 그렇게 먹었는데도 치아가 성했다.
“유종 형님 유언이었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버텨 달라고. 도저히 버틸 수 없으면, 그때 죽으라고.”
“…….”
“그때까지 가문에서 도움의 손길을 뻗치지 않으면, 그걸로 연이 끊어진 걸로 알고 마음 편히 죽으라고 했지. 그 유언이 아니었다면 뭐 하러 이날 이때까지 재미없는 인생 붙들고 있었겠느냐?”
투덜거리면서 말하는 것이, 정말 죽음을 별것 아닌 것처럼 생각하는 듯했다.
“유종 형님은 언제?”
“십오 년 전에.”
“그러셨구려.”
“징글징글하게 살다가 갔지, 그 양반도. 진짜 웃긴 건, 이제 내 나이가 죽었을 때의 그 양반보다 다섯이 더 많다는 거다.”
당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유감이라거나 진작 와 보지 못해 미안하다는 등의 말을 하지 않았다.
이제는 그런 말도 할 줄 알게 되었지만, 그래도 하지 않았다. 그와 당유광은 그런 사이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어디 두 사람만 그러하겠는가.
당가 사람은 다 그랬고, 앞으로도 그런 기질은 이어질 것이다.
“그래서, 네 녀석은 어찌 나를 찾아왔냐니까?”
“유종 형님께선 무공에는 별 재능이 없었지만, 앞날을 보는 혜안은 갖고 계셨던 것 같소. 하긴, 언제나 그랬지.”
당유광의 눈이 번뜩였다.
“내가 필요한 것이냐?”
“그렇소.”
“무슨 일로?”
당형은 그간 중원에서 벌어졌던 일들에 대해 차분하게 설명했다.
그리고 지금, 사천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도.
“아미파가 멸문을 당했다고?”
“완전 멸문은 아니오. 주요 병력 일부가 청성산에 있으니까. 하지만 본산이 초토화되고 장문인과 장로 이하, 수많은 무승이 모두 죽었소.”
“흐음.”
당유광이 턱을 쓰다듬었다.
“아미의 비구니들이 제법 사나운데, 대체 어떤 놈들이 왔길래 둘이서 아미산을 쓸어 버렸지?”
“무극수 둘일 것이오.”
“무극수 둘이라.”
“정확한 것은 아직 모르오. 하지만…… 예감이 좋지 않소이다.”
무극수의 예감은 그냥 넘겨들을 수가 없다. 특히나 누구보다도 오랫동안 무극의 영역을 거닐었던 암왕의 예감이라면 더더욱.
가만히 당형을 바라보던 당유광이 툭 던지듯 물었다.
“넌 괜찮은 거냐?”
“무엇이 말이오?”
“연은 끊었어도 듣는 귀는 있었다. 관이 놈과 안 좋았잖느냐?”
“부모 자식 관계라는 게, 끊고 싶어도 쉬이 끊어지는 게 아니더이다.”
“화해했다고?”
“부족한 아비에게 자식이 먼저 다가와 주었소. 그때 내 인생은 완성이 되었지.”
티는 내지 않았지만, 당유광은 내심 무척 놀랐다. 설마하니 당형이 이토록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 줄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래서 날 찾아온 것이냐? 화해한 아들의 가문이 큰 해를 입기 전에, 손잡고 가서 그 두 놈을 작살내자고?”
“내 아들의 가문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가문이오.”
당유광의 눈이 흔들렸다.
표정과 달리 그의 입에선 독한 말이 튀어나왔다.
“내게는 우리 가문이 아니었다. 고개를 조아리지 않으면 채찍질을 하는 못된 주인집일 뿐이었지.”
“관이 때부터는 다를 것이오.”
“그걸 내가 어찌 믿느냐?”
“당형이라는 이름을 걸겠소.”
“…….”
“암왕이라는 같잖은 별호 말고, 사천당가의 태상가주라는 신분 말고, 내 이름을 걸겠소.”
당형을 보는 당유광의 얼굴이 복잡해졌다.
“그렇다면 왜 진즉 날 찾아오지 않았느냐?”
“찾아오면? 형님은 본가로 돌아오고 싶었겠소?”
“…….”
“그도 아니면? 내 사과를 받고 내 정성 어린 술잔을 받으면 그간의 한이 다 풀어지겠소?”
“그럴 리 없지.”
“어차피 형님이나 나나 그렇게 살아왔고, 그렇게 갈 인간들이오. 그나마 마지막에 와서 가문을 위해 함께 죽어 줄 수 있냐고 물었으니, 아주 만족스럽진 않더라도 충분하지 않소?”
가만히 당형을 보던 당유광의 얼굴에 미소가 드리워졌다.
“그래. 좋으나 싫으나 빌어먹을 당씨 핏줄을 이은 나는 지금 네 모습만으로 충분하지.”
당형이 눈을 감았다.
이런 말을 하는 게 오히려 모욕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변해 버린 그는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미안하오. 너무 늦게 찾아와서, 함께 죽어 달라고 해서.”
당유광의 미소가 씁쓸해졌다.
십 년 전이었다면 저 말을 듣고 꺼지라고 했겠지만, 정말로 갈 때가 머지않은 그는 당형의 사과가 고마웠다.
“늦게라도 찾아왔으니 떠난 사람들도 웃어는 줄 게야.”
진심 어린 사과와 담백한 용서였다.
당유광이 평상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함께 죽어 달라고 해 줘서 고맙네. 우리 인생이 아무것도 아닌 걸로 끝나지 않게 해 줘서 고마워.”
당형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몇 번 더 연초 연기를 뿜어내던 당유광은 이내 곰방대를 아무렇게나 던져 버린 후 물로 입을 헹구었다.
“그래서, 내가 무엇을 해 주면 되겠는가?”
“내가 형님보다 모든 면에서 우월했지만, 단 한 가지만큼은 형님의 발치도 따라가지 못했소이다.”
당유광이 피식 웃었다.
“무슨 진법(陣法)이 필요한데?”
“북부 전선에서 대기 중인 적군의 일천 병력은 공격보다 수비에 치중된 부대라 하였소. 그 전력이 막강하여 최소 구파급 문파 이상이라더군.”
“사천을 말아 잡수려고 온 놈들이 어중이떠중이일 리는 없지.”
“그들은 사천 무림에 맡기려 하오.”
그제야 당유광은 당형이 바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두 놈을 잡는 데 풍도박혼진(酆都縛魂陣)을 쓰자고?”
“예감이 좋지 않다고 했잖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게다가.”
당형이 자신의 가슴을 툭툭 건드렸다.
“정말 얼마 남지 않았소이다. 본래 기량의 칠 할이나 내면 다행일 것이오.”
“……그렇단 말이지.”
잠시 생각에 잠겼던 당유광이 눈을 빛내며 물었다.
“내게 얼마의 시간을 줄 수 있나?”
“당연히 빠르면 빠를수록 좋소. 늦어도 내일 새벽에는 출발해야 하오.”
“빠듯하겠군.”
당유광이 웃통을 벗었다.
깡마른 상체였지만 골격은 훌륭했다. 오히려 당형보다도 뼈대가 굵었다.
“새벽 전까지 준비를 끝내 볼 테니까 예서 기다리게. 할 일 없으면 무릎 꿇고 돌아가신 방계 어른들께 사죄의 인사나 올리든가.”
“형님에게 한 사죄가 모두에게 한 사죄요.”
“완전히 변한 줄 알았더니, 그런 면은 그대로구먼.”
그렇게 당유광이 집 뒤편 공터로 걸어갔다.
가만히 평상에 앉은 당형은 가볍게 숨을 몰아쉬었다.
‘어떻게든 버틸 수는 있겠구나.’
지금이라도 다른 지역의 무극수들을 소환해 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무극수라도 사천에 진입하려면 아무리 빨라야 닷새는 걸릴 것이다. 게다가 독공의 극을 이룬 당형으로선 아무래도 같은 당가 사람과 싸우는 게 나았다.
결정적으로, 당형에게는 버리지 못한 마지막 자존심이 있었다.
사천은 사천의 패자가 지키겠다는 절대적인 자존심.
“하늘이 영 우중충하구먼.”
그날 자정.
당형과 당유광이 길을 나섰다.
사촌지간의 처음이자 마지막 여행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