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180)
흑백무제 1180화(1180/1200)
1180화. 사천대란(四川大亂) (5)
“…….”
찰극평이 눈을 떴다.
어두운 밤, 흔들리는 두 개의 촛불 사이로 누군가의 얼굴이 보였다.
“언제 들어오셨소.”
기천웅이 미소를 지었다.
“방금 왔네.”
그간의 오랜 대화로 관계가 제법 단단해진 두 사람이었다.
가만히 기천웅을 바라보던 찰극평이 툭 던지듯 말했다.
“단순히 날 보고 싶었던 거라면 기척을 냈을 터.”
“…….”
“이제야 날 죽일 마음이 들었소?”
기천웅이 피식 웃었다.
“웃기지도 않는 소리. 애초에 난 자네에게 아무런 원한도 없다고 하지 않았나. 죽일 생각이었다면 황궁 북부전에서 개전을 요청했을 걸세.”
찰극평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신화교를 이끌었던 사람이 잘도 그런 소리를 하는구려.”
무언가를 요청했을 거라는 말 자체가 찰극평의 심기를 건드렸다. 비록 지금은 관계가 어중간해졌지만, 그에게 있어 기천웅은 분명 교주였던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누군가에게 부탁을 했을 거라 말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 알량한 고집은 이만 버리시게. 신화교주라는 자리는 분명 위대한 것이지만, 그 자리에서 내려온 이상 나 역시 필부에 불과할 뿐이야.”
“필부가 아닌 사람만이 그 자리에 오를 수 있소.”
“틀렸네. 기씨만이 그 자리에 오를 수 있지.”
“…….”
“아무리 대단한 재능을 타고났다 해도, 그 누구보다 믿음이 깊다 해도 교주 자리에 앉을 사람은 이미 정해져 있어.”
기천웅의 얼굴에 씁쓸한 기색이 어렸다.
“그렇게 생각하면, 신화교주라는 자리 자체도 아무것도 아닐 수 있지.”
스으으.
찰극평의 몸에서 은은한 살기가 피어올랐다.
그 살기는 기천웅을 향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기천웅의 말에, 교주 자리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그 발언에 자연스럽게 반응해 버린 것이다.
“당신이 쫓겨난 자리라고 그리 가벼이 얘기하는 것이오?”
“그 권좌에 수십 년을 앉아 있었던 사람에게 할 말은 아니군.”
“…….”
“이미 자네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 자존심이나 죄책감 때문에 그리 날 선 반응을 보이는 거라면, 앞으로는 사적으로 찾아오지 않겠네.”
찰극평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기천웅의 말이 맞았다. 그는 기천웅이 신화교를 배신한 게 아님을, 누구보다 신화교를 위하는 사람임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괜히 말꼬리를 잡고 성을 내는 것은 죄책감 때문이었다.
이미 이들과 함께하기로 결정을 내렸음에도 자꾸만 뒤를 돌아보게 된다. 그 이유는 당연히 교단에 남은, 부족한 자신을 위해 음으로 양으로 도움을 준 사람들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 죄책감보다 훨씬 더 강한 자존심이 그를 지탱하고 있었다.
뛰어난 재능 외에, 강철처럼 단단한 자존심과 지독한 목적의식이 있었기에 그는 일왕이 될 수 있었다. 그래서 일왕 찰극평을 경외하는 교도들이 많았다
“나는…….”
기천웅의 말에 힘이 빠진 것일까.
찰극평의 입에서 작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소.”
그 단단한 자존심을 잠시 내려놓고 진심을 드러낸다.
기천웅이 고개를 저었다.
“자네는 이미 결정을 내렸어. 결정을 내렸다면, 앞으로 자네가 할 일은 하나뿐이지.”
“…….”
“연 성주의 말은 사실이야. 당대 교주는 자네들을 죽으라고 중원에 보냈네. 차라리 죽었어야 했다고 자책할 거면, 지금 당장 이곳에 있는 모두와 죽어도 나쁘지는 않을 걸세.”
자존심 강한 찰극평을 자극하는 말이었다.
하지만 기천웅은 확신했다. 찰극평이 절대 죽지 않리란 것을.
자존심이 강한 만큼 자신의 판단을 믿는 사람이 그였기 때문에.
말없이 촛불을 응시하는 찰극평의 얼굴은 잠깐 사이 몇 년은 늙은 듯했다.
“결국, 당신이나 당신 아들이나 다 우리를 버린 셈이로군.”
자존심을 내려놓으니 자괴감이 올라온다.
기천웅이 눈을 빛냈다.
“나를 보게.”
“…….”
“나는 자네를, 나아가 자네들을 버리지 않았어.”
“내가 이곳에 오지 않았다면 그런 소리도 못 들었겠군.”
“세상 모든 선택은 무언가를 버림으로써 성립되는 거라네. 난 자네들을 버리지 않았지만, 하나의 선택을 내림으로써 오해를 풀 기회를 놓친 셈이야.”
“…….”
“그러니 혼란스러운 마음은 슬슬 정리하게.”
흔들리는 눈으로 기천웅을 보던 찰극평이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래서, 이 야심한 시각에 아무도 몰래 나를 찾아온 이유가 무엇이오?”
순간 기천웅의 두 눈이 번쩍였다.
천하의 일왕조차 순간적으로 섬뜩함을 느낄 만큼 강렬한 안광.
“나는 자네를 믿네. 자네의 자존심과 충성심, 그리고 우둔하다는 평가를 들을 정도의 순수성과 우직함을 믿는다네.”
“…….”
“그렇기 때문에, 우환이 놈이 자네에게는 말해 주지 않은 것이 있을지도 몰라.”
“……?”
“동시에, 그런 자네이기에 순순히 말해 준 것이 있을지도 모르지.”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것이오?”
기천웅의 상체가 살짝 앞으로 기울어졌다.
“광혈교주가 사천에 강림했다는 첩보가 들어왔네.”
“……!!”
훅.
일순간 뿜어진 기파에 촛불이 꺼졌다.
하지만 시린 달빛 덕분에 두 사람은 서로를 인지할 수 있었다.
찰극평의 얼굴에 숨길 수 없는 놀라움이 어렸다.
“광혈교주가 사천성으로 들어왔다고?!”
“그렇다네.”
“…….”
“그 부분에 관해서 짐작 가는 게 있나?”
“……당연히 그런 건 없소.”
찰극평이 눈살을 찌푸렸다.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술까지 매만지는 모습은 그의 말이 진실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광혈교주가 미치지 않고서야 왜 지금 사천으로 들어온…… 혹시 광혈교의 전 병력을 이끌고 침공한 것이오?”
그랬을 확률이 지극히 높다고 생각했다. 그게 아니라면 광혈교주가 직접 올 리 없으니까.
“아니, 그러지 않았네.”
“그럼?!”
“사제장 하나만을 대동하고 왔어. 나아가 일천의 광혈교 병력이 나타났다고 하는데, 그들은 아마도 광혈교주 직속 호위 부대이자 최강의 방패라는 혈황단(血皇團)일 걸세.”
사음교주에게도, 신화교주에게도 직속 호위 부대는 존재한다.
하지만 광혈교의 혈황단처럼 막강한 호위 부대는 존재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 숫자가 일천으로, 호위 부대이면서도 어지간한 정예 부대 전력의 몇 배를 웃도는 게 혈황단이었다.
광혈교만이 아닌, 삼교 전체를 통틀어 최강의 방패라 일컬어지는 신(神)의 부대.
공식적으로는 그러했다.
“사제장 하나와 혈황단만을 대동하고 왔다는 것은…… 말 그대로 개인적인 일 때문에 왔다는 뜻이 아니오?”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기천웅의 안광이 더욱 진해졌다.
“광혈교주가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인 건 맞네. 하지만 전쟁이 터진 와중에 이처럼 과격한 돌발 행동을 할 만큼 미친 사람은 아니야.”
“…….”
“혹 그 부분에 관해서 아는 게 없나? 우환이 놈이 따로 언질을 준 게 없다면, 기억에 지금 사태와 연관된 어떤 내용도 없겠나?”
“없소.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런 것은…….”
말을 하던 찰극평은 순간 놀라서 기천웅을 바라보았다.
“설마 내 거처에 아무도 모르게 찾아온 이유가……?”
“자네가 아니면 오화왕 철흠기에게 무언가 언질을 주었을지도 모른다네.”
찰극평과 철흠기의 거처는 불과 십 장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
“그건 불가능하오. 설마하니 당대 교주가 우리 모두 당신과 함께하리라고 생각했겠소? 예측까지는 할 수 있을 거요. 하지만 지금 사태는 우연에 가깝소. 철흠기에게 뭔가를 바라거나 하지는 않았을 것이오.”
“나도 그렇다고는 생각하네. 그러나 나는 우환이 놈의 광증이 얼마나 커졌는지 알지 못해. 여러 가능성을 논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란 말이네.”
“만약 우리 둘에게 아무런 언질도 없었다면 어쩔 거요? 이대로 신화교로 쳐들어가기라도 할 것이오?”
기천웅이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수는 없지. 그건 중원 무림에 폐가 될 거야. 이들이 힘을 잃으면 우리도 신화교를 되찾을 수 없다네.”
“그럼 어쩔 생각이오?”
“만약 우리 모두가 움직여야 한다면…….”
기천웅이 저 멀리 서쪽을 바라보았다.
“내가 직접 광혈교주를 만나는 수밖에 없지.”
* * *
“그건 아닐 거야.”
연호정의 말은 단정적이었다.
“허 단주 말마따나 삼교의 공통적인 목표가 정통성에 관한 것일지 모른다. 하지만 기천웅 교주가 그것을 알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아.”
허백이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사실 허백 입장에서도 쉽게 할 말은 아니었다. 만약 기천웅이 정말 모종의 흉계를 품고 중원에 투신했다면, 그 속내를 연호정이 못 알아챘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기천웅 교주를 의심할 필요는 없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나아가 그를 믿는다. 그는 현재 절대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아군이다.”
강량이 물었다.
“그렇다면 광혈교주의 사천 진입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겁니까?”
“해석이 안 돼. 정보가 없으니까.”
“끄응.”
“그리고 해석할 필요도 없다. 적어도 지금은 그래. 아무리 생각해 봐도 답이 안 나오는 문제를 두고 모두가 머리를 싸맬 필요는 없잖아.”
“그건 그렇습니다만, 적의 의도를 알 수만 있다면 우리의 대응도 달라질 텐데요.”
“그러니까 그건 정보단에게 맡겨야지. 아니면…….”
연호정의 눈이 깊어졌다.
“기천웅 교주에게 물어볼 수도 있겠지.”
“신뢰한다면서요?”
“그는 신화교의 모든 사정을 알고 있었던 사람이다. 우리가 생각지도 못했던 지식을 많이 갖고 있지. 그중 하나가 지금 사태를 해석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면, 충분히 시간을 투자할 만해.”
진양이 거들었다.
“그럼 당장 움직입시다. 아직 하북에 있을 거 아뇨?”
연호정은 쉽게 판단을 내리지 못했다. 그만큼 광혈교주의 행동이 의외였기 때문이다.
그의 고민이 한참 깊어 갈 즈음.
“호정.”
하은교의 아름다운 목소리가 연호정의 집중을 부드럽게 깨트렸다.
“말씀하십시오, 선배님.”
“상대의 의도를 모르겠다고 고민만 하는 것은 자네답지 않군.”
연호정이 쓰게 웃었다.
“판단 한 번에 안 죽어도 될 사람이 죽을 수 있습니다. 저는 그것을…….”
“언제는 그러지 않았는가?”
“……?!”
“전쟁이 터지기 전에도 안 죽어도 될 사람이 죽었다네.”
“하지만…….”
“내 말은 어쩔 수 없으니 포기하자는 게 아니야. 전쟁이 터졌다고 이전과 상황이 크게 달라진 건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네.”
이제야 과거의 총명하고 깊은 지혜를 되찾은 하은교의 눈이 맑게 빛났다.
“오히려 대놓고 전쟁이 벌어진 지금이 더 나을 수도 있다네. 각 지역에서 전투 준비를 하고 있으니까.”
“…….”
“자네가 그들 모두를 살리겠다고 날뛰는 거라면, 미안하네만 정신을 차리라고 말하고 싶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민폐만 잔뜩 끼친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자네 혼자서는 절대 모든 사람을 구할 수 없어.”
연호정의 눈이 흔들렸다.
하은교의 말은 단순했다.
전쟁 중이라고 스스로를 잊지 마라.
누군가는 반드시 해 줘야 할 말이었고, 빠르면 빠를수록 좋았을 말이기도 했다.
“지금은 자네 직감이 움직이는 대로 행동하게. 자네가 불세출의 천재인 것은 알고 있으나, 언제나 귀신 같은 책략을 세우고 번번이 적의 속내를 들여다볼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가만히 하은교를 보던 연호정이 이내 미소를 지었다.
“생각해 보니 선배님의 말씀이 실로 옳습니다.”
연호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상대가 너무 파격적으로 나와서 잠시 방황한 듯합니다. 어차피 고민해도 답이 안 나온다면, 저도 저답게 행동하는 게 최선이겠지요.”
그의 최선은 모든 사람이 예상할 수 있었다.
연호정이 한옆에 놓아둔 광룡부를 쥐었다.
“지금 즉시 사천으로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