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182)
흑백무제 1182화(1182/1200)
1182화. 마신(魔神)과 암천(暗天) (1)
“노구당원 삼십 명이 패사했다고?”
“그렇습니다.”
가득상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는 노구당원들 한 명 한 명을 전부 기억하고 있었다. 친분이 깊지 않은 사람도 있었지만, 개방의 차기 방주로서 그들 대다수에게 가르침을 받은 적이 있었다.
‘부디 후생에 다시 만나 뵐 수 있기를.’
불같은 분노와 슬픔을 느꼈지만, 지금은 감정에 젖어 있을 때가 아니었다.
“다른 쪽은?”
“남은 노구당원들은 악산을 포위하고 있습니다. 타구당원들은 만에 하나를 대비하여 동부와 남부에 전선을 형성, 전투 준비를 마쳤습니다.”
노구당원 삼십 명을 반 각도 안 되어서 몰살시킨 놈들이다. 그런 그들이 전선을 뚫겠다고 마음먹으면 반드시 뚫릴 것이다.
지금 타구당원들은 목숨을 내놓고 정보를 보내기 위해 대기하고 있는 것이었다.
“안 되겠다. 우리도 악산으로 이동해야겠다.”
이미 사천 성도 인근에 도착한 그였다. 모든 정보를 이곳에서 받아 보려 했지만,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후개. 냉정해지셔야 합니다. 지금 후개가 악산으로 가 봤자 상황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현실을 명확히 일깨우는 말이었다. 가득상이 고개를 저었다.
“화가 나서 가는 게 아니다. 현재 서북부에 대기 중인 광혈교의 병력은 움직이지 않고 있어. 저쪽에서 받을 정보라면 뻔하지.”
“지금 당장 전투가 벌어질 수도 있습니다.”
“광혈교주 놈이 죽지 않는 이상, 놈들은 쉽게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예?”
“모르겠나? 총력전을 벌일 생각이었다면 일천만 파견했을 리가 없어. 즉, 저 일천 병력은 광혈교주의 명령으로 대기 중인 것이다. 말하자면 저들은 교주를 호위하기 위해 함께 내려온 부대라는 거야.”
“……!”
“먼발치에서나마 광혈교주를 직접 보고, 이후에 다시 물러나도 물러나야지. 지금은 그게 맞아.”
“……알겠습니다.”
그때였다.
“급보입니다! 현재 당가의 태상가주 암왕과 방계 혈족 최고수 중 하나가 악산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뭐?!”
깜짝 놀라는 철곤개와 달리, 가득상의 눈은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불구대천의 원수 놈이 앞마당에 들어왔는데, 당가가 움직이지 않을 리가 없지.”
“하, 하지만 암왕께서 직접 움직이시리라고는…….”
“가주를 살리기 위함이다.”
“당가주 당관 말입니까?”
“암왕께서 움직이지 않으면, 필시 당가주가 움직일 것이다. 십중팔구 패사하겠지.”
가득상이 이를 악물었다.
그는 당형이 어떤 마음으로 광혈교주에게 향했는지 알 것 같았다.
행위는 다르지만, 홀로 죽음을 맞이하러 간 스승 화진천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당형은 죽음으로써 가족을 살리려 했고, 화진천은 죽음으로써 후계자에게 마지막 깨달음을 건네줬다는 것이 차이라면 차이였다.
“나름대로 조치를 취하고 오셨을 것이다. 다만, 당가주가 암왕 선배님의 말을 순순히 따를까 하는 문제가 있는데.”
당관의 무공은 중원 무림에 있어서 너무나도 소중한 것이었다. 절대 이런 싸움으로 죽어선 안 될 사람이었다.
“일단 가자.”
* * *
끼익.
팔걸이를 잡고 천천히 일어나는 사내의 등은 놀라울 정도로 곧았다.
느릿한 움직임. 팔을 다 가린 소매가 기분 좋은 소리를 냈다.
바로 앞에 강이 흐르는데도 의자가 삐걱거리는 소리와 주름진 소매가 마찰하는 소리가 다 들렸다. 그것은 비단 당형의 귀가 좋아서만은 아니었다.
‘강하다.’
어떤 기파도 드러내지 않지만, 사내가 일어나는 순간 당형은 세상이 어두워지는 듯한 착각을 느꼈다.
‘예상은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쿠르릉.
구름 많은 하늘에서 천둥소리가 들린다.
환청이 아니었다. 진짜로 천둥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겹겹이 쌓인 구름 속을 누비는 번개, 번뜩이다가 사라지는 새침한 빛 뒤로 준엄하기 그지없는 하늘의 일갈이 끊임없이 쏟아져 내려왔다.
일어난 사내가 양팔을 위로 올리며 기지개를 켰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사내의 키가 조금 더 커지는 듯했다. 허리가 굽어 있던 것도 아닌데 순식간에 두세 치는 더 커진 것 같았다.
당형은 자신이 헛것을 보고 있는 게 아님을 알고 있었다. 그 짧은 순간, 사내는 정말로 키가 커졌다.
정확히는, 본래의 모습을 찾아간 것에 가깝다고 할까.
“좋지 아니한가.”
여전히 등을 돌린 채, 보란 듯 뒷짐까지 지고 저 높은 불상의 머리를 올려다보는 사내의 모습은 여유롭기 그지없었다.
“졸린 듯 반개한 눈과 큼직한 코는 왠지 모르게 게을러 보이는군. 하지만 살짝 다르게 보면, 모든 잡념에서 해방된 무위의 표정 같기도 해.”
사내의 목소리에 감탄이 어렸다.
“보는 이에게 상반된 느낌을 주는 예술품이라. 정말 대단해. 한낱 사람의 손으로 어찌 저런 예술품을 만들었을꼬.”
천하의 암왕이 등장했는데도 긴장한 기색이라고는 요만큼도 보이지 않는다. 무극수의 기습이라면 수준 차이가 난다 해도 목숨이 위험할 것이 분명한데 여전히 등을 돌리고 있다.
자존심, 자신감 그 어떤 단어를 붙여도 어울리는 태도다. 본연의 기세를 드러내지 않아도 존재감이 뛰어나다. 존귀하기 그지없는 분위기가 실로 일품이었다.
평생을 떠받들고 성장한 자. 동시에 평생을 군림하며 지내 온 자.
세상 만물의 지배자라는 황제의 위엄을 고스란히 품고 있는 그를 향해, 당형이 말했다.
“광혈교주가 맞느냐?”
순간 한옆에 시립한 규홍의 몸에서 무시무시한 마기가 흘러나왔다.
분노와 살의로 점철된 강력한 기세였다. 고요하게 잠들어 있다가 폭발하듯 번져 나온 그 마기에 당유광은 저도 모르게 서너 걸음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본능적으로 마기를 흘렸지만, 언행이 뒤따르지는 않았다.
당형은 규홍을 신경도 쓰지 않았다. 애초에 시선 한번 준 적이 없었다.
그 태도에 규홍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때였다.
“정보가 실로 빠르구나.”
사내는 여전히 뒷짐을 진 채 석조 대불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본좌가 광혈의 주인이라는 사실은 어찌 알았을꼬.”
“세상에 비밀은 없는 법이지.”
“그건 그렇지.”
사내가 미소를 지었다.
뒷모습이라 보이지 않았지만, 당형은 그가 미소 짓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사람들은 말한다. 마(魔)는 삿되고 불온한 것이라 멀리해야 한다고. 그러면서 마음속에 깃든 마를 없애기 위해 수행하고 사죄하며 깨달음을 얻으려 하지.”
“…….”
“참으로 어리석은 자들이 아닌가. 사람이 태어났을 때부터 안고 있는 것이 마(魔)라면, 결국 마야말로 인간 본연의 특질이요, 나아갈 방향이자 운명일진대 어찌하여 타고난 것을 버리려 하는 것인가.”
“그게 사람이다.”
당형의 눈이 깊어졌다.
“그게 사람이야.”
타고난 고집과 자만은 성장하며 오만함과 위엄으로 발전했다.
그런 당형도 나빴던 자식과의 관계를 올바르게 회복하면서 모두 내던질 수 있었다. 오랜만에 그를 본 당유광이 그렇게 놀란 것 또한 당형이 과거 심신을 어지럽혔던 마(魔)를 놓았기 때문이리라.
그로써 당형은 완성되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이것이 사람이라는 것을. 모두가 마를 가슴에 안고 태어나는 것이 숙명이라면, 그 마를 씻어 내고 삶을 완성하는 것이야말로 모든 인간에게 부여된 운명이라는 것을.
웃으며 대불을 올려다보던 사내의 얼굴이 점점 무표정하게 변했다.
어인 일인지, 당형은 그를 마주하지 않았는데도 그 마신(魔神)의 표정을 다 읽을 수 있었다.
“기묘한 자구나. 그대의 이름을 알 수 있겠나?”
“당형.”
“당형…… 들어 본 적 있는 이름이다. 당씨에 형이라는 이름이라면…….”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대륙에선 성마에 이른 고수들을 일컬어 성천십삼좌라 한다고 했지. 그중 암왕(暗王)이라 불리는 자의 이름이 당형이라 했다.”
“내가 바로 그 당형이다.”
“실로 기묘한지고. 성천의 고수 중 가장 마(魔)와 가까운 자는 혈옥마군 곽준이라는 자라고 알고 있다.”
뜻밖의 대답이었다. 이미 죽고 사라졌지만, 마선 혁련휘야말로 진정한 마도대종사로 추앙받았던 사람이 아니던가. 그런데도 사내는 그가 아니라 곽준을 언급했다.
이미 죽어서 없어진 사람이라 그런 건지, 애초에 그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건지, 아니면 정말로 마선보다 혈옥마군이 더 마에 가깝다고 생각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를 제외하면 암왕이라는 자가 마에 가깝다고 생각했지.”
“의외로군. 사파의 고수들도 많은데.”
“아, 그 마도(魔道)를 버티지 못해 떨어져 나간 잡마(雜魔)의 찌꺼기들 말인가?”
그 대답으로 확실해졌다.
사내는 사마공을 익혔다는 것만으로 마인이라 생각지 않는다. 그 사람의 인격, 그 사람의 행위, 그 사람의 오염 정도를 보고 마와의 거리를 재는 듯했다.
“암왕의 독과 암기는 전 대륙에 공포를 불러일으켰다고 했지. 세상 어떤 고수도 암왕과의 싸움은 꺼린다고 했다. 설령 천하제일인이라는 무허대사조차도.”
“깨달음 깊은 고승이 싸움을 멀리하는 것은 당연지사. 너 같은 마귀 놈이 이해할 수 없는 분이시다.”
“점점 재미있는 말을 하는군. 어쩌면 그대가 나보다 더 많은 사람을 죽였을지도 모르는데.”
어쩌면 그 말이 사실일지도 모른다고, 당형은 생각했다.
실제로 그는 엄청난 피를 본 끝에 가주위에 올랐다. 가주가 되고 나서도 남만의 문파를 정리하고 당가의 위상을 세우는 데에 혁혁한 공을 세웠지만, 그건 당가를 위해서였지 세상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당대, 사람을 가장 많이 죽인 자를 꼽으라면 당형은 항상 첫손에 꼽힐 것이다.
“오해할까 봐 하는 말인데, 이건 칭찬이라네.”
“사람 많이 죽인 걸로 칭찬을 하는 걸 보면, 확실히 사교도의 주인 노릇을 할 만하다.”
“이유도 없이 사람을 해치는 것은 그냥 미친놈일 뿐이야. 그러나 그대는 자신의 욕망을 위해, 가문을 위해 수천의 피를 보지 않았나?”
“나에 대해서 조사를 꽤 한 모양일세.”
“세상에 비밀은 없다잖나.”
그제야 사내가 몸을 돌렸다.
푸스스스.
몸이 완전히 돌아가기도 전에 그 큼직한 의자가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당형의 눈이 깊어졌다.
‘엄청나다.’
가볍게 뿜어져 나오는 외기(外氣)만으로 의자가 가루로 변했다. 딱히 의도한 게 아닌데도 주변 물체를 파괴한 것이다.
저런 자가 세상에 나오면 진정 재앙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실력 이전에 스스로의 힘을 갈무리할 생각 자체를 안 하는 자였다.
지극히 자유롭기 때문에 그 어떤 방해도 받지 않는 자.
사람의 생사도, 집단 간의 전쟁도, 사바세계의 갈등도 그에게는 흥미 이상의 일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정식으로 소개함세.”
화려하기 그지없는 외모였다. 피부, 턱선, 눈매, 콧날 등 어느 것 하나 속세의 사람 같지가 않다. 아름다움이라는 개념을 한데 모아 놓은 듯한 얼굴이었다.
그래서 오히려 나이를 가늠하기 힘들었다. 그냥 보면 이십 대 청년 같은데, 그 신비로운 외모와 기괴한 존재감 때문에 사십, 오십, 어쩌면 육십 대로도 보인다.
“당대 광혈교의 주인이자, 유일하게 혈신(血神)의 적통을 이어받은 천씨 일가의 가주 천위룡(天威龍)이라 하네.”
“당형이다.”
암왕이라는 별호도, 태상가주라는 직책도 필요 없다. 그는 오롯이 당형이었다.
“사천 무림의 원수이자 희대의 난적 광혈교주를 한 줌 핏물로 녹여 버리기 위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