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183)
흑백무제 1183화(1183/1200)
1183화. 마신(魔神)과 암천(暗天) (2)
도발적인 언사에도 천위룡은 전혀 화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가느다란 미소 한 자락만 지어 보일 뿐.
“그대의 욕망이 느껴지는군.”
당형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모든 것을 내려놓았음에도 단 하나의 욕망만큼은 내려놓지 못했어. 그것이 그대에게는 자존심인 게로군.”
“더는 긴말이 필요치 않겠지.”
“물론 그렇지. 하지만 아쉽구나. 그대의 눈에서 인간사 지독한 업보와 해탈의 간격이 보인다. 내 팔십 년을 넘게 살아왔지만, 그처럼 극과 극의 삶을 산 사람의 눈은 처음이야.”
당유광이 눈살을 찌푸렸다.
나이가 팔십이 넘었다면 자신과 비슷한 연배였다. 한데 겉으로 봐선 도저히 팔순 노인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역시 괴물이군.’
당유광이 품에서 기다란 원통 하나를 꺼내 들었다.
그때, 규홍이 말했다.
“허튼수작은 부리지 말라.”
“시끄럽다, 개놈의 자식아.”
“……!”
“어디 사람 앞에서 짖고 지랄이야? 확 주둥이를 꺾어 버릴라.”
팔십이 훌쩍 넘은 나이에도 뒷골목 파락호와 같은 쌍욕을 잘도 뱉는다.
어디에서도 이런 모욕을 받아 본 적 없던 규홍은 분노를 느끼기 이전에 어이가 없었다.
당유광이 투덜거리며 원통의 뚜껑을 열었다.
“나도 차라리 은거하면서 무공이나 수련할 것을 그랬군. 직접 주먹으로 두들겨 패 줘야 속이 시원할 것 같은데, 참으로 원통하구먼.”
그는 그 자리에 쪼그려 앉아 원통 안에 든 장침들을 꺼냈다.
마치 어린아이가 소꿉장난을 하는 것 같았다. 서 있는 곳 사방, 동서남북에 장침을 꽂고 손가락만큼 작은 초자 병을 꺼내 그 안에 든 액체를 침두(針頭)에 한 방울씩 떨어트리는데, 도대체 뭘 하려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자, 일단 이 정도면 충분하고.”
다시 원통에서 장침들을 꺼낸 당유광이 사방 사이에 침을 꽂았다. 총 팔방(八方)을 점한 것이다.
차가운 눈으로 당유광을 노려보던 규홍이 공손하게 말했다.
“교주님. 저자를 먼저 처리해도 되겠습니까?”
천위룡이 유쾌한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재롱을 떨려는 것인지 지켜보세.”
당유광이 피식 웃었다.
“제법 험한 재롱이 될 거다. 이 재롱 앞에 죽어 나간 사람이 한둘이 아니거든.”
규홍이 다시 한번 물었다.
“교주님. 교주님의 신위야 만천하가 인정하는 것이지만, 굳이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명령만 내려 주신다면 속하가 바로…….”
“이 또한 유희가 아니겠는가. 어차피 사씨가 대사의 목숨줄을 휘두르기 위해 사람을 보낼 터인데, 그자가 대륙으로 들어오기 전까지 즐길 건 즐겨야지.”
당형의 눈이 반짝였다.
‘사씨? 대사?’
그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천위룡이 아무 생각도 없이 중원으로 들어온 게 아니라는 건 알 수 있었다.
그에게는 분명한 목적이 있었다. 그 목적을 이루는 것이 천위룡의 목표이리라.
‘어쩌면 삼교의 비밀에 관해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
동시에, 조금은 부담이 되는 것을 느꼈다.
다 들어도 상관없다는 듯 낭랑한 목소리로 말하는 천위룡의 태도는, 자신이 절대 죽지 않을 것임을 확신하고 있었다.
‘적어도 함께 갈 수는 있을 것이다.’
그때, 규홍이 말했다.
“하면, 저 무도한 당형이라는 자를 제가 먼저 치워도 되겠습니까?”
“안 되네.”
분명한 거절이었다.
“내가 자네를 막은 것은 내 유희 때문이기도 하나, 자네의 안전 때문이기도 하네.”
“예?”
“저 침을 꽂는 늙은이에게 접근하는 순간, 자네는 중독되어 땅을 굴렀을 것이네.”
규홍의 얼굴이 놀라움이 어렸다.
천위룡이 웃으며 당형을 보았다.
“그렇지 않은가, 대륙의 독술사여.”
당형이 마주 웃으며 오른손을 들어 보였다.
아무런 기의 흐름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오른손을 들자마자 꽤 향긋한 냄새가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눈을 감고 그 향기를 맡은 천위룡이 눈을 번쩍 떴다.
“그렇군.”
천위룡의 얼굴에 미소가 사라졌다.
“규홍이 주제넘게 나서겠다 한 것도 이 향 때문이었나?”
“눈치가 빠른 건지, 실력이 좋은 건지.”
천위룡이 규홍에게로 시선을 던졌다.
“자네는 절대 이 싸움에 나서지 말게. 저 독은 본디 무취가 아님에도 나와 자네는 지금껏 냄새를 맡지 못했어.”
“예?”
“이 냄새는 인간의 신경을 자극하는군. 자네가 시종 노릇이나 하라는 본좌의 말을 무시하고 자꾸만 저들을 해치우겠다 나선 것은 다 암왕의 술수였네.”
규홍의 얼굴이 살짝 창백해졌다.
‘말도 안 돼.’
성마에 이르면 어지간한 독에는 면역이 된다. 독이 들어와도 끊임없이 탁기를 불사르는 신체가 순식간에 해독 작용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한데 그런 고수조차 눈치채지 못하는 독을 썼단 말인가?
“이 세상에는 너희 같은 잡것들이 모르는 무수한 지식이 있다.”
스륵.
아무것도 없던 당형의 오른손에 어느새 불그스름한 약병 하나가 들렸다. 성인 남성 검지보다도 작은 초자 병이었다.
“진정 신선이 되지 않는 한, 자연 만물의 일부인 인간을 중독시키지 못할 독은 없어.”
당형이 주먹을 쥐었다.
우두둑 소리와 함께 으스러진 초자 병. 천천히 손을 펼치니 붉은 연기와 함께 초자 가루가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규홍은 본능적으로 호흡을 멈추고 마기를 일으켜 전신을 감쌌다. 독이 체내로 침투하지 못하게 막은 것이다.
당형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계속 그러고 있거라.”
마기로 몸을 보호하는 규홍의 자태를 비웃는다. 규홍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쳐 죽일……!”
그때였다.
“그만.”
우우우우우우웅!!
담담한 목소리가 사방팔방으로 퍼져 나갔다.
엄청난 울림을 지닌 그 목소리에는 상상할 수 없는 마기가 깃들어 있었다. 내력이 약한 자들은 듣는 순간 환청과 환시에 시달릴 만큼 묵직한 마기였다.
당형이 주춤하고, 당유광은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혹시 몰라 내공으로 전신을 보호하고 있지 않았다면 잠시나마 정신이 날아갈 뻔했다.
하지만 그 목소리가 규홍에게는 큰 도움이 되었다. 분노로 얼룩졌던 규홍의 얼굴이 놀란 와중에도 다소 편안해졌다.
천위룡이 쓴웃음을 흘렸다.
“사제장의 심중을 흐트러트리다니, 그것도 독 하나로.”
“그게 독이다.”
“인정한다. 정말 대단해.”
그제야 규홍은 부끄러움을 느꼈다. 지금껏 자신이 도가 지나치게 흥분했음을, 그리고 그것이 대륙의 한낱 고수 때문이라는 걸 인정했기 때문이다.
‘위험한 자다.’
사실을 인정하자, 그제야 두려움을 느낀다.
당형도 당형이지만, 독에 대한 근본적인 공포였다.
‘인지하기도 전에 중독시켜 버릴 수 있는 실력자라니. 이건 너무 위험해.’
하지만 주군이자 신의 능력을 의심하지는 않았다. 저분이라면 이 사특하고 위험천만한 독술도 일개 잡학으로 만들어 버릴 수 있을 것이다.
그 와중에도 당유광은 열심히 바닥에 침을 꽂았다.
어느새 그의 존재감은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 그 자신이 의도적으로 존재감을 죽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랜 세월을 살아왔지만, 이런 신선함은 참 오랜만이야.”
“앞으로 보여 줄 신선함들도 꽤 아찔할 것이다.”
“확실히 대화가 길긴 했어. 이제는 저 대불보다 그대에게 더 흥미가 가네.”
진짜로 시작하자는 뜻.
당형은 기다렸다는 듯 제왕독공(帝王毒功)을 개방했다.
훅!
나직한 소리와 함께 당형을 중심으로 반경 십여 장이 반투명한 흑색 구름으로 뒤덮였다.
파앙!
구름이 공간을 완전히 잠식하기 전에 이미 규홍은 뒤로 물러서고 있었다.
만약 저 구름에 닿았다면 절대 멀쩡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규홍은 본능적으로 그것을 깨달았다.
‘이런!’
당형을 보는 규홍의 눈이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렸다.
‘뭐 이런 말도 안 되는 무공이!’
경지의 차이를 무(無)에 가깝게 만들어 버리는 독공이었다. 닿는 순간 누구라도 멀쩡할 수 없을 것이다.
이 독을 헤치고 공격하려면, 반드시 중독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공격해야 한다. 그 공격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는 순간, 패배는 확정이다.
그야말로 극단적인 승부를 종용하는 독공의 고수.
반면 천위룡은 제왕독공의 기파를 정면으로 받아 냈는데도 중독 증세를 보이지 않았다.
당형이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대단하군.”
천위룡이 미소를 지었다.
“어디, 천하가 두려워하는 사천당가의 무공을 견식해 볼까?”
순간 당형이 녹색 안광을 번뜩였다.
‘천독천출(千毒千出), 만독귀진(萬毒鬼陣).’
흑색 구름 위로 무형의 기파가 퍼지는 순간, 당형의 독정에 잠들어 있던 일천 가지의 독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십만십방벽(十萬十方壁).’
콰르르릉!
흑색 구름이 무형의 기파와 만나 순식간에 거대한 반구를 이루었다.
대불누각 앞에서 어느새 삼십 장 밖으로 물러난 당유광의 앞까지 뒤덮는 초거대 기공술이었다. 과거 당관이 청해성에서 선보인 바 있는 만독십방벽의 완성형인 십만십방벽이 초고속으로 생성된 것이다.
그야말로 만독(萬毒)의 제왕이라는 이름이 어울리는 기공술이었다.
당관은 뒤이어 융해삼생공(融解三生功)으로 모든 것을 녹여 버리는 궁극의 독공을 만들었지만, 당형은 그 술수를 쓰지 않았다.
콰르릉!
십만십방벽은 그 자체로 융해삼생공에 비해도 모자라지 않은 절대의 방벽을 만들었다. 안에서 밖으로 나갈 수 없고, 밖에서 안으로 들어올 수도 없는 공간 단절의 무공이었다.
무려 반경 삼십여 장에 달하는 공간 속에 당형과 천위룡만이 존재하게 되었다.
천위룡은 순수하게 감탄했다.
“이토록 거대한 독진을 일개 무인이 펼칠 수 있단 말인가. 지독한 내공이야. 내공량만 따지면 가히 본좌에 필적할 만하네.”
“말씨름을 더 하고 싶었던가?”
“하하하!”
먼저 움직인 것은 당형이었다.
번쩍!
한 줄기 섬광이 되어 날아간 그가 부드럽게 손을 뻗었다.
순간 천위룡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늙수그레한 손이 가까워질수록 시야를 가득 채울 정도로 거대해지는데, 그 안에 상상 초월의 공력이 집약되어 있었다.
당관이 아닌 당형이 펼치는 당가천독수(唐家千毒手)였다. 독을 내려놓고 허공섭물과 암기의 무도(武道)를 거머쥔 당관과 달리, 당형은 독과 암기 모든 방면에서 궁극의 경지를 이룬 자였다. 같은 천독수라도 위력, 독력, 발경의 차이가 극심했다.
천위룡이 신중하게 손을 뻗었다.
사람의 손과 거인의 손이 부딪쳤다.
콰르릉!
폭음과 함께 십만십방벽이 출렁거렸다.
세상 모든 것을 녹이는 독진이 충격파에 흔들리고 있다. 그만큼 두 사람의 공력이 엄청나다는 뜻이었다.
내뻗은 손을 회수한 당형이 곧장 회전하여 수도(手刀)를 휘둘렀다. 마치 극에 이른 검사가 맨손 수도로 적을 공격하는 것 같았다.
실제로 그것은 검공(劍功)에 가까웠다. 진한 녹색의 칼날을 머금은 당형의 수도는 단혼독검(斷魂毒劍)이란 술수로, 당관조차 제대로 연마하지 못한 제왕독경상의 무공이었다.
천위룡이 또 한 번 손을 뻗었다.
이전과 같은 공격, 같은 무공이었다.
쩌어어어엉!! 콰드드득!
손과 손이 만나 또 한 번 막강한 충격파를 일으켰다.
그 충격파를 이기지 못한 땅이 여기저기 부서지며 돌가루를 피워 올렸다. 사방으로 퍼져 나간 돌가루는 십만십방벽의 독기에 휩쓸려 무(無)로 돌아갔다.
천위룡은 깨달았다. 당형이 왜 이 진법을 형성했는지.
싸움에 밀려 튕겨 나가도 당형은 멀쩡할 것이다. 하지만 만약 자신이 튕겨 나가 벽에 닿으면 멀쩡하긴 힘들 것이다.
천위룡의 미소가 짙어졌다.
“이겨 놓고 싸우겠다, 이거군.”
“독을 다루는 자들은 군문의 장수와 비슷하지.”
훅!
허공에 떠오른 당형의 손에 세 자루 비수가 들렸다.
“이길 가능성이 없는 싸움은 안 한다네.”
번쩍!
세 줄기 비수가 벼락이 되어 쏘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