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189)
흑백무제 1189화(1189/1200)
1189화. 어둠이 지다 (3)
대불누각 앞은 초토화가 되어 있었다.
무극에 이른 고수들 세 명이서 난투를 벌인 장소였다. 땅 이곳저곳이 움푹 파였고,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곳곳에 금이 갔다.
어느 부분은 반경 십여 장이 시커멓게 물들어 있었는데, 누가 봐도 죽은 땅이었다. 어떠한 독기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다시 생명이 나기까지 오랜 세월이 걸릴 것이다.
그리고 그 너머, 살아 움직이는 듯한 시커먼 반구가 놓여 있었다.
당관의 눈이 흔들렸다.
“풍도박혼진…….”
당유광이 당관을 바라보았다. 전대의 지식을 어찌 아는지 궁금했던 것이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이미 당형과 화해했다면, 당형이 전대의 비밀스러운 지식들을 전수했을 것이다.
“나를 앉혀 다오.”
당관이 조심스레 풍도박혼진 맞은편에 당형을 앉혔다.
우우웅.
이미 가진 모든 내공을 소모했음에도 자리에 앉자마자 당형의 눈에 다시 빛이 돌아왔다.
시력은 돌아오지 않았지만 안광이 번뜩인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없었던 사람이 양손으로 다리를 접어 가부좌를 튼다. 살짝 구부리고 있던 허리를 꼿꼿이 편 채 두 손은 자연스레 무릎 위로 늘어트린다.
그 끊임없는 힘이 어디서 나오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어쩌면 그가 그리도 마음에 담은 사천 사람들의 원혼이 그에게 힘을 주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가득상은 눈을 감았다.
더할 나위 없이 경건한 모습이었다. 자세 때문이 아니었다. 당형이라는 사람 자체가 풍기는 기운이, 분위기가 그러했다.
당형이 담담하게 말했다.
“절대 오지 않기를 바랐지만, 이왕지사 왔으니 어쩌겠느냐. 다행히 난적 중 하나는 봉인해 두었고 나머지 하나는 처치하였으니, 가주 일신엔 화가 없을 것이다. 실로 안심이다.”
“…….”
“앉거라.”
당관이 당형의 맞은편에 앉았다.
앞이 보이지 않는데도 당형의 눈은 정확하게 당관을 향해 있었다. 신기한 일이었다.
“관아.”
“말씀하십시오.”
“내, 이날 이때까지 살아오며 수많은 후회를 하였다. 그중 가장 큰 후회 두 가지 중 하나는 잘 처리하였고, 다른 하나 역시 처리 중에 있었다.”
“…….”
“태상이 아닌 아버지로서, 내가 끝내지 못한 가업을 네 손으로 이뤄 주었으면 한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내 거처에 후회의 흔적을 남겨 두었다. 너라면 능히 잘 해낼 것이라 믿는다.”
“알겠습니다.”
아버지의 담백한 말에 어울리는 무덤덤한 대답이었다.
그러나 이 자리에 모인 사람 모두가 알고 있었다. 대답이 무덤덤하다고 하여 진심이 없지 않다는 것을. 당관은 아들로서, 그리고 가주로서 당형이 남긴 숙제를 반드시 완수할 것이다.
“내가 관여할 바는 아니나, 또한 먼저 세상을 살아 본 사람으로서 너에게 조언한다.”
“…….”
“내 손주이자 너의 아들, 양선은 현재 가문의 뇌옥에 갇혀 있다.”
“그렇습니다.”
“너 정도 정신력이라면 수십 년이 지난다 한들 스스로를 놓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양선은 너와 다르다. 양선을 그리 키운 것은 너의 잘못이다. 아마도 지금쯤 폐인이 되었으리라.”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당형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만 보내 주거라.”
순간 개방도들 전원은 등줄기를 훑는 살벌함을 느꼈다.
지금 당형은 제 손자이자 아들의 자식을 죽이라고 하였다. 그것도 아들에게 직접 그리 말했다.
놀랍게도 당관의 얼굴에는 일말의 동요도 없었다.
“녀석이 당가인으로서 마지막 기개를 보여 준다면, 저는 결코 녀석을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야지.”
“그러나 그놈이 정신을 놓았다면, 제 손으로 직접 선조들의 곁으로 보낼 것입니다.”
“실로 옳다. 양선이 그리된 것은 부모의 잘못이나, 이유가 어찌 되었건 그놈은 도를 지나쳤다. 잘 키우는 것이 부모의 사명이라면, 자식의 고통을 덜어 주는 것 역시 부모의 책임이다.”
“…….”
“너는 결코 다른 누군가에게 그 책임을 넘기지 말라. 네 손에 죽어야 그놈이 선조들의 곁으로나마 갈 수 있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무시무시한 대화였다. 한 사람이 죽어 가면서 할 만한 얘기가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사천당가의 사람들이었다. 많이 유해지고 상식적인 도리를 따지기 시작했다지만, 핏줄이라도 자격이 없다면 냉엄하게 쳐 낼 수 있기에 그들은 당가인인 것이다.
당형이 말을 이었다.
“너는 당관이란 한 사람이기 전에 당가의 가주다. 가주이기 때문에 자격 없는 모습을 보인 네 자식을 죽이라고 하는 것이다. 지나치게 엄격한 법도와 쓸데없는 규범은 없앨 필요가 있지만, 그러한 유함이 수장에게도 적용될 수는 없는 법이다.”
“…….”
“수장이 스스로에게 엄격해야 가원들에게 행복이 찾아온다. 너는 가문의 수장으로서 가원 모두를 위해 피눈물을 머금고 칼을 휘둘러야 할 사람이라는 것을 잊지 말라.”
“명심하겠습니다.”
그제야 개방도들도 당형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물론 그러한 이유라도 심한 처사이긴 했다. 하지만 당가의 일에 끼어드는 것은 안 될 일이다. 저들은 저들의 규칙대로, 저들의 역사대로 살아가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사천당가, 서부 무림 최강이라 불리는 당씨 문중 사람들의 실체였다.
“설령 양선이 스스로를 돌아보아 죄를 뉘우친다 하더라도, 그놈을 후계로 세울 수는 없는 법이다. 공은 공이고 과는 과라 하였으나, 그놈의 과는 후계자가 되기에 적합하지 않다.”
“저 역시 그리 생각합니다.”
“과거, 나는 상아의 재능이 본가 역사상 손에 꼽히는 것임을 깨닫고 안타까워하였다. 만약 그 아이가 사내아이로 태어났다면 본가를 더욱 위대하게 만들었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지.”
“그러셨지요.”
“하지만 이제 와서 느낀다. 남아면 어떻고 여아면 어떠하냐? 상아에게는 너 이상의 재능이 있다. 양선과는 달리 갖은 부담과 시련 속에서 살아왔음에도 결코 삐뚤어지지 아니하였다. 너도 알고 있을 것이다.”
“제게는 과분한 딸입니다.”
“하여, 가주의 일임에도 태상으로서 차기 가주로 상아를 추천하는 바다.”
또 한 번 모두를 놀라게 하는 발언이었다. 무림이 일반 세상보다 덜 보수적이라고는 해도, 여인을 가문의 주인으로 삼는 경우는 흔치 않았다.
하물며 무림에서 가장 독하고 보수적이라는 당가에서 여가주가 탄생하다니?
더 놀라운 건 당관의 반응이었다.
“녀석이 그럴듯한 사위 놈 하나 물고 온다면, 적극적으로 밀어 줄 생각입니다.”
데릴사위에게 당가를 맡긴다는 뜻이 아니었다.
여인이 가주가 되면, 특히 당가의 주인 자리에 앉게 되면 평생 독신으로 살아야 할 것이다. 그건 당연하다. 세상 어떤 문파의 기린아도 당가의 여가주에게 장가를 올 일은 없을 테니까.
즉, 당관은 당상아가 혼인부터 하고 가정을 꾸린다면 가주직을 넘기겠다고 한 것이다.
당가의 선조들이 들으면 기절초풍할 일이지만, 당형과 당관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대화를 이어 나갔다.
“너의 뜻이 그와 같다면 참으로 안심이다. 내 생각에 당장 상아만 한 재목은 없다. 녀석을 어떻게 다루는가에 따라 본가의 명운이 결정될 터, 너는 나의 전철을 밟지 말고 후대를 위하여 가문의 터를 잘 닦아 놓기를 바란다.”
“명심하겠습니다.”
“다만, 상아의 기질이 일문의 수장과 맞지 않을 수 있다. 만에 하나 상아가 가주직을 적극적으로 거절한다면, 너는 직계와 방계를 따지지 말고 새로운 후계자를 찾는 데에 열을 올려야 할 것이다.”
당유광의 눈이 흔들렸다.
당관은 덤덤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또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 안다. 알아도 또 한 번 말하고 싶었다.”
“이해합니다.”
“그래.”
당형의 호흡이 조금씩 조금씩 거칠어졌다.
“관아.”
“말씀하십시오.”
“비록 이십여 년을 후회 속에서 보냈다고는 하나, 말년에 너와 가문을 위해 큰일을 해내기 위한 웅크림이었다고 생각하면 그 또한 좋은 세월이었다.”
당관은 작게 침을 삼켰다. 침을 삼키지 않으면 뭔가가 울컥하고 올라올 것만 같았다.
“가주의 자식들은 불안정한 유년기를 보낸다. 나는 그것을 알고 있었어. 알고 있었는데도 고칠 생각을 안 했다. 단순히 가업이 바빴다고 변명하기에는 내게 주어진 시간이 너무나도 많았다.”
폭군에 가까운, 그러나 명군이기도 한 사람으로서 당형은 가문을 이끌어 나갔다.
그런 당형 밑에서 당관처럼 오만하고도 통찰력 있는 자식이 난 것도, 당호처럼 뒤틀린 자식이 난 것도, 당윤처럼 성품이 올곧은 자식이 난 것도 다 운명일 것이다.
“그러나 다시 고칠 수는 없는 일이기에 그때의 과거는 후회하지 않으려 한다. 다만 나는 언제나 너희에게 미안했다.”
“알고 있습니다.”
“이 못난 애비를 용서해 주거라.”
“아버지를 용서하고 자시고 할 게 뭐가 있습니까. 저는 아버지보다도 부족한 사람입니다.”
“네가 나보다 잘났든 못났든 너와 동생들을 방치한 나의 잘못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며, 너 또한 나 때문에 큰 희생을 치렀다. 나는 응당 네게 미안해야 한다.”
당관이 미소를 지었다.
“아버지께서 느끼시는 미안함, 그때 다 받았고 다 풀었습니다.”
당형의 얼굴에도 미소가 드리워졌다.
“그래, 그랬었지.”
“그러니까…….”
당관은 잠시 목을 가다듬었다.
또다시 뭔가가 울컥 올라오려 했다. 그러나 그는 그 알 수 없는 뭔가를 토해 내지 않을 생각이었다.
당가 역사상 가장 위대한 가주가 다시 대자연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웃으며 보내 줘도 아쉬울 위대한 무사요, 가주였으며, 아버지였다.
“그러니까, 걱정은 다 내려놓으시고 편안하게 가십시오.”
“당가인들의 핏줄 속에는 언제나 반골의 광기가 녹아들어 있지.”
“…….”
“나는 결코 편히 갈 수 없다. 저기 봉인된 적이 만에 하나라도 빠져나와 또 한 번 사천을 전란으로 물들인다면 어쩌겠느냐? 내 마지막 생명을…….”
“그때부터는 저와 사천인들이 저 무도한 악귀를 막겠지요.”
당관의 목소리가 잘게 떨리기 시작했다.
“저희에게 맡기시면 됩니다. 걱정 마십시오.”
“……그런가.”
천천히 눈을 감았던 당형이 이내 탄성을 질렀다.
“그래, 그러면 된 것이지. 어쩌면 나는 가문과 사천을 걱정한다는 핑계로 마지막까지 이 세상에 내 흔적을 드리우려 했는지도 모르겠다.”
“아버지.”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내게 깨달음을 주는구나.”
그때였다.
그때부터 당형의 몸 곳곳에서 희미한 가루가 날렸다.
“이로써 나는 내 삶을 마무리할 수 있게 되었다.”
“……아버지.”
그 순간, 당형의 눈에서 엄청난 광채가 뿜어져 나왔다.
“가주는 결코 후회 따위 남기지 않는 생을 살라!!”
푸스스스.
엄청난 일갈로 자식에게 마지막 당부를 한 당형의 전신이 가루로 화해 하늘로 날아갔다.
그가 앉아 있던 자리에는 소검 한 자루만이 달랑 남아 있었다.
가득상이 눈을 감았고 노구당원들이 탄식을 토하며 눈물을 흘렸다.
당유광은 목을 놓아 울부짖었으며 당관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소검 앞에 무릎을 꿇었다.
소검을 든 당관의 눈에서 기어이 눈물 한 방울이 떨어졌다.
떨어진 눈물이 소검을 적시고 수백 개의 생명이 되어 검은 땅에 떨어졌다.
“잘 가십시오.”
성천의 일인이자 강호에서 가장 위험한 남자라고 불렸던 당가의 태상가주, 암왕 당형의 귀천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