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19)
119화. 결심의 순간 (1)
땅! 땅! 땅!
쇠망치 두들기는 소리가 꽤 경쾌하게 들렸다.
오 층 건각 창가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모용군의 얼굴에 짙은 미소가 어렸다.
“참으로 활기차군.”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인부가 무림맹 건물을 손보고 있었다.
무림맹 본성은 하남성 대별산(大別山)에 존재한다.
성벽의 둘레만 수십 리요, 그 안에 크고 작은 건각들과 성이 즐비한 무림맹은 그 자체로 하나의 나라와 같았다.
다만, 워낙 평화로운 시대였기에 무림맹은 터전만 남아 있을 뿐 그 안에 사람은 살지 않았다.
그러나 구파일방과 육대세가, 그 외에 소속 문파원들은 매달 무림맹 본성 유지비를 헌납했다.
그래서일까? 건물들이 잘 유지되어서인지 보수할 곳이 많지는 않았다.
“땀 흘리며 일하는 저 인부들의 모습이 몹시 활기차 보이는구려. 저 안에 삶이 있소이다. 땀 흘리지 않는 자, 대가를 요구할 수 없는 법이지.”
“…….”
“하지만 저이들과 우리는 다르다오. 강호 무림에 적을 두고 사는 이들은 올바른 대상이 아닌 존재를 위해 땀을 흘릴 때, 가진 모든 것을 빼앗기게 되지.”
“…….”
“당신은 어떻소?”
“…….”
“그간 능력 없는 수장 밑에서 고생을 많이 한 것으로 알고 있소이다. 마땅한 대우도 받지 못하고, 그 칼에 묻은 피도 닦아 주지 않았지.”
모용군이 빙긋 웃었다.
“어떻소? 이참에 본가로 들어오는 건.”
어두운 인상의 사내가 비로소 입을 열었다.
“당신은 내 전 계약자보다 낫다는 거요?”
“글쎄? 그거야 당신이 판단할 일이지. 난 그저 제안할 뿐이오.”
사내의 안광이 어두침침해졌다.
마음에 적지 않은 변화가 이는 듯했다. 모용군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그대의 안목이 썩 괜찮은 편이라면, 이 내가 그대의 주군으로 어울리는 사람이라는 걸 모르지 않을 것이오.”
“자신감이 대단하시오.”
“나는 겸양과 미덕이 필요한 만큼만 발휘되는 걸 좋아하오.”
모용군이 찻잔을 들었다.
지이이잉!
실처럼 얇은 푸른 빛줄기가 번진다 싶더니, 이내 식은 차가 다시 모락모락 김을 뿜었다.
사내의 얼굴에 흔치 않은 놀라움이 어렸다.
“뇌기(雷氣)?”
“알아보시는구려.”
뇌정(雷霆)의 기운이란 본디 하늘에만 허락된 힘이라 알려져 있었다. 무림인이 제아무리 대단한 내공을 익혀도 자체적으로 뇌기를 생성해 낼 수는 없다.
그것이 상식이었다. 한데 모용군은 그 상식을 완전히 뒤엎고 있었다.
“진짜 벼락은 아니외다. 다만 이 힘을 진짜 벼락과 다르지 않은 힘으로 가꾸어 낼 수 있다면, 이 세상에 나를 막을 사람은 없소.”
모용군이 멋쩍은 듯 웃으며 덧붙였다.
“사람 중에는 그렇단 말이외다. 애초에 그만한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고.”
“…….”
“다만 무인으로서 당신의 주군이 될 만한 역량은 갖추었다고 생각하는데, 어떻소?”
사내는 말이 없었다.
그는 과거 천하제일가라 불렸던 구주명가 소속으로 있던 남자였다.
명가는 세(勢)를 넓히기 위해 작정을 했고, 대외적으로 내보일 수 없는 음지(陰地)의 무사들까지 포섭하길 주저하지 않았다.
청랑이 바로 그 그림자 무사 집단 중 하나였다. 가히 인간 말종이라 불리어도 부족하지 않은 집단이었지만, 다시 말하자면 그만큼 인재 욕심이 컸다고 볼 수 있겠다.
그리고 이 사내, 몽의(蒙宜)는 그 그림자 무사 중 손에 꼽히는 무력의 소유자였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소.”
“얼마든지 물어보시오.”
“현재 무림맹에 수감된 명가의 고수들은 음양(陰陽)을 막론하고 수천에 이르오.”
“정확히 이천육백칠십이 명이외다. 어제까지는. 본래 이천육백구십오 명이었는데, 내상의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죽어 버렸거든.”
몽의가 눈을 빛냈다.
“아마 당신만이 아니라 구파일방, 육대세가의 수장 대부분이 쓸 만한 전력을 포섭하려 들고 있음을 모르지 않소.”
“허허.”
“내가 궁금한 것은 그것이오. 하고많은 사람 중 왜 하필 나요?”
모용군은 내심 그를 비웃었다.
‘자신감이 과한 친구군.’
그는 오늘만도 이런 자리를 여섯 번이나 만들었다. 그리고 그들 모두를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었다. 몽의라고 특별할 게 없다는 말이다.
다만 몽의는 ‘선물’이자 ‘경고’로서의 가치는 있었다.
모용군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당신의 능력을 높이 샀을 뿐이오. 뇌옥에서 썩기에는 너무도 아까운 실력이 아니오이까?”
“내 실력에 자부심은 있소만, 한 가문의 수장인 당신에게는 나보다 더 필요한 인재들이 있을 것이오.”
모용군이 고개를 저었다.
“굳이 나나 내 가문의 사정까지 알려 줄 생각은 없소.”
“…….”
“다만, 이 말만큼은 해 주리다. 이제는 죽고 없는 내 형님 되는 사람은 모용세가 역사상 최고를 논하는 인재였소.”
모용군의 웃음이 서늘한 살기를 머금었다.
“그 최고의 인재를 밟고 올라선 사람이 나요.”
“……!”
“나는 명가주처럼 세력 확장에 집착하는 사람이 아니외다. 내, 천하를 위한다는 입에 발린 소리는 하지 않겠소. 다만 나는 내 울타리 안에 있는 사람만큼은 반드시 지키는 사람이오.”
“그런 말은 누구나 할 수 있소.”
“누구나 할 수 있지만, 그 말을 제대로 지키는 사람은 한 줌밖에 안 되지.”
“그게 당신이다?”
“그게 나요. 나는 내 사람이 되지 않을 사람과 이리 말을 섞는 자가 아니오. 남이 먼저 가져갈까 무서워 불태워 버린다면 모를까.”
섬뜩한 말이었다.
천하에 두려운 게 없다고 자신만만해하던 몽의조차도 한순간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모용군의 목소리에는 진심이 가득했다. 그는 가히 탐욕의 화신과도 같았다.
“아, 그러고 보니 하나 있군.”
“……?”
“늦둥이 막냇동생이 있소이다. 나와는 거의 이십 년 차가 되지. 내 그 아이는 살려 두었소이다.”
자신의 길을 방해하면 혈육마저 거침없이 베어 버리는 성정이다. 몽의는 대화가 이어질수록 모용군의 냉혈철심에 압도되는 것을 느꼈다.
“그 아이는 역사상 최고라던 형님만큼이나 뛰어난 재능의 소유자요.”
“……한데 왜 살려 둔 것이오?”
“글쎄? 왜일까?”
모용군이 머리를 긁적였다.
“나도 정확히는 모르겠소. 다만 그 아이의 성정이라면 절대 내 뒤통수를 치지 않을 거라고 확신하고 있소.”
“…….”
“정이 많은 아이거든. 특히나 혈육에게는.”
모용군이 창가로 시선을 돌렸다.
표정에 변화는 없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아련함이 느껴지는 그 눈빛은 그도 사람이라는 걸 증명하는지도 몰랐다.
“계륵이라면 계륵이오. 어쩌면 나는 바라고 있을지도 모르겠소. 그 아이가 자진하여 내 밑으로 들어오는 것을.”
몽의가 고개를 저었다.
“헛된 바람은 접는 게 좋소.”
“그렇소. 헛된 바람이지. 하나 당신은 아니오.”
모용군의 눈빛이 바뀌었다.
“나는 당신의 눈에서 풀지 못한 욕망을 보았소.”
“…….”
“내게로 오시오. 어디에서도 쉽게 드러내지 못하는 당신의 칼에, 피가 마르지 않게 하여 주리다. 또한, 피가 엉겨 쓰지 못할 칼을 언제든 닦아 줄 것이오.”
그때였다.
꾸우욱!
창가 저편에서 제법 큰 비둘기 한 마리가 날아왔다. 정확히 모용군이 있는 쪽이었다.
푸드드득!
푸른 기가 도는 전서구가 창틀에 앉았다.
“잠시 실례하겠소.”
전서구의 다리에는 제법 두꺼운 서신이 돌돌 말려 묶여 있었다.
모용군이 서신을 풀어 펼쳐 보았다.
작은 종이 위, 극도로 가늘고 작은 글자들이 빽빽하게 적혀 있었다.
‘……?!’
모용군의 눈이 빛났다.
“……오호?”
그는 몇 번이나 서신을 살펴보았다.
몇 번을 봐도 같은 내용이었다. 잘못 읽은 것이 아니었다.
“허허허!”
모용군이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다.
“이거, 오늘 날은 날인 모양이오. 생각지도 못한 사람에게서 바라 마지않던 연락이 왔소이다.”
“……?”
“방금 말한 막내에게서 온 서신이외다.”
모용군이 몽의에게 서신을 건넸다.
“한번 읽어 보시겠소?”
몽의가 움찔했다.
가문의 대소사가 적힌 서신이 분명했다. 그런 서신을 볼 테면 보라는 듯 당당하게 건네고 있다.
‘이 사람.’
몽의가 모용군의 눈을 보았다.
웃음기 가득한 눈동자 속에 이글거리는 욕망의 불꽃이 한가득하였다.
물끄러미 그 눈을 보던 몽의가 서신을 잡았다.
동시에 모용군의 미소가 더 짙어졌다.
“……절강 사업을 두 배로 키운다?”
“그 아이가 절강지부장으로 있소이다. 무재면 무재, 상재면 상재, 무엇 하나 모자람이 없는 재인(才人)이지.”
“…….”
“언제나 시키는 대로만 하던 아이이거늘, 이제는 나서서 사업을 확장한다고 하오.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뭔가 심경에 변화가 있었던 게지.”
모용군이 어깨를 으쓱였다.
“내게 있어 오늘은 길일(吉日)인 모양이오.”
“그렇군.”
몽의가 탁자에 서신을 놓았다.
이미 서신을 받은 순간 그에게 몸을 의탁기로 마음먹었다. 그것을 모용군도 알고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몽의가 옆으로 걸어가더니 무릎을 꿇었다.
“새로운 주군을 뵙소. 주군께서 먼저 날 배신하지 않는 한, 내가 주군을 배신하는 일은 없을 것이오.”
모용군이 크게 웃었다.
“앞으로 잘 부탁하네. 자네를 크게 쓸 것이야.”
“기대에 부응하도록 최선을 다하겠소.”
“하하하!”
한껏 웃음을 터트리던 모용군이 초롱초롱한 눈을 빛내며 말했다.
“이왕 말이 나온 것, 바로 일 하나 맡아 볼 생각 없나?”
몽의가 고개를 숙였다.
“수하에게 부탁하는 주군은 없소. 그저 명령을 내리면 그뿐.”
상하 관계에 있어서 철저하게 외골수적인 면모를 보인다. 모용군은 몽의를 선택한 것이 잘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이놈, 입은 가볍지 않아.’
모용군이 말했다.
“마침 자네를 얻은 오늘, 내 동생에게도 연락이 오지 않았겠는가. 동생 놈이 작심하고 사업을 키워 보겠다는데, 형이 되어 어찌 지원을 마다하겠는가.”
“……?”
“절강과 인접한 강소성의 상인들까지 끌어들여야 사업 확장이 더 쉬워질 것이네. 하나, 강소성에는 큰 기둥 하나가 버티고 있지.”
“벽산연가.”
모용군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그렇다네. 그리고 그 연가의 장남이 나와 함께 명가를 무너트렸다네.”
몽의의 눈에 기광이 떠올랐다.
모용군의 얼굴에 싸늘한 기색이 어렸다.
“보통 놈이 아닐세. 연가의 사정은 모르지만, 어쩌면 연가의 향후 행보는 연가주가 아니라 그놈에 의해 바뀔지도 몰라.”
“…….”
“적당히 몸을 추스른 뒤, 연호정을 잡아 보게.”
“……연가주가 아니라 연가의 장남 말이오?”
“그래. 벽산호장 연호정. 강동의 젊은 호랑이를 잡아 보란 말일세.”
모용군이 고개를 저었다.
“몸풀기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하네. 연호정은 강해. 내 지금까지 보았던 어떠한 사람보다도 출중한 인재일세. 쉽진 않을 거야.”
“…….”
“가문의 장남이 목숨을 잃거나 실종되면 연가주도 제정신이 아니게 되겠지. 그 틈을 노린다면, 내 동생의 일이 훨씬 쉬워지지 않겠나?”
몽의가 고개를 숙였다.
“명을 받드오.”
“점창파(點蒼派)의 전대 장문인을 죽였던 자네의 실력을 믿네.”
점창파는 곧 구파일방의 하나다.
육대세가보다도 한 수 위로 평가받는 백도 무림의 최강자들. 그중 한 문파의 수장을 죽인 실력이라면 온 강호를 뒤져도 찾기 힘든 고수였다.
모용군은 몽의의 실력을 믿었다.
점창파 역사상 최악의 재능을 타고났다던 몽의의 살검(殺劍)을 믿었다.
“지금 바로 출발하겠소.”
“몸이 정상이 아닐 터인데?”
“이동하면서 회복할 수 있소.”
“허허, 좋네. 자네가 그렇다면 그런 것이겠지.”
“연호정의 위치만 파악해 주시오.”
“걱정하지 말게. 녀석에 대해서는 나름대로 주시하고 있으니까.”
“그럼.”
한 번 더 고개를 숙인 몽의가 사라졌다.
모용군이 창가를 보았다. 햇살이 맑았다.
“선물 하나 보낼 테니 연말까지 푹 쉬게나, 호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