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190)
흑백무제 1190화(1190/1200)
1190화. 어둠이 지다 (4)
“후우, 잠시 쉬자꾸나.”
“예.”
하은교가 나무에 기대어 앉자 지소현이 서둘러 냇가에서 물을 떠 왔다.
하은교가 미소를 지었다.
“나는 괜찮으니 너부터 목을 축이거라.”
“하지만 스승님.”
“예전보다 회복이 다소 늦다고는 하나, 이 스승은 강호에서 가장 강한 열 사람 중 하나다. 아직 제자의 부축을 받을 만한 나이도 아니야.”
지소현이 고개를 숙였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물로 목을 축인 지소현이 하은교 옆에 앉았다.
“그나저나 정말 빠르군요.”
“누구 말이냐? 연 성주?”
“예. 연 성주도 그렇고 두 신장도 그렇고요. 아, 그 검은 신마(神馬)도 놀랍기는 마찬가지입니다.”
하은교가 한숨을 쉬었다.
“강량 신장과 진양 신장의 공부가 정말 대단하더구나. 비록 무극에는 이르지 못했지만, 두 사람의 나이를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지. 오히려 그 연배에 무극을 코앞에 둘 정도로 발전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야.”
“예에.”
“특히 두 사람의 신법과 체력이 눈에 띈다. 강호를 살아가는 자 중 대부분이 무종을 넘어서면 체력 단련을 소홀히 하고 본인의 신법에 만족하기 마련이야. 그러나 사람이란 동물은 과거, 무공을 모를 적에 달리면서 사냥감을 잡았다. 달리기란 모든 무사의 시작이자 끝이며, 그래서 하체의 단련이 중요한 것이지.”
“…….”
“이것이 바로 젊은 사람이 무종을 넘었을 때의 강점이다. 오만에 빠진 자들은 거기서 만족하지만, 열혈의 청년들은 만족하지 않고 더 열심히 수련하지. 두 사람이 무극에 이르지 못했는데도 연 성주에게 뒤처지지 않는 것은 섬세한 내공 운용 따위 때문이 아니라 숱한 전투를 치르며 체력의 소중함을 알았기 때문이다.”
체력의 소중함을 알았으니 단련도 소홀히 하지 않았을 것이다.
고수일수록 작은 것에서 큰 차이를 느끼게 마련이다. 대부분의 초절정고수들이 하지 않는 수련을 한 두 사람이 재능 자체를 발전시켜 놀랍도록 성장한 것에는 그러한 이유가 있다.
“너도 두 사람을 본받도록 하여라. 평생 무극에 오르지 못하더라도, 네가 무공에 뜻을 두었다면 두 사람이 세상을 보는 방법을 알아 둘 필요가 있느니라.”
“명심하겠습니다.”
그때였다.
쿠르릉.
먹구름 가득한 하늘에서 천둥소리가 울렸다.
지소현이 눈을 끔뻑였다.
“곧 비가 오겠어요, 스승님.”
“……그래, 그럴 것 같구나.”
“어째 천둥소리가 묘합니다. 우렁차다기보다는 어둡고…….”
지소현의 눈이 깊어졌다.
“어쩐지 서글픈 느낌이군요.”
“내게도 그리 들리는구나.”
하늘을 올려다보는 하은교의 눈에 옅은 슬픔이 어렸다.
“저 하늘이, 이 세상을 위해 애를 쓴 위대한 장인 하나를 데려가기라도 하는 모양이다.”
* * *
흑혈신마에 타지 않고 나란히 달리던 연호정은 순간 눈을 번뜩였다.
‘뭐지?’
회복된 상단전이 불안정하게 일렁였다.
몸 상태가 나쁜 게 아니었다. 알 수 없는 무언가를 전달해 주려는 듯 제멋대로 꿈틀거리는 것이, 아주 불안한 느낌이었다.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인가?’
연호정의 몸에서 자연스레 황룡기가 치솟았다.
치솟은 황룡기는 곧 신왕기를 불렀고, 잠에서 깬 신왕기는 그의 상단전 이곳저곳을 훑으며 강렬한 신기(神氣)를 일깨웠다.
연호정의 눈이 흐릿해졌다.
앞으로 나아가는 길을 보고 있으면서도, 그의 눈에는 수많은 무언가가 보였다.
‘이건?’
후우우우웅.
사천으로 들어와 산길을 달리는데, 산 이곳저곳에서 희뿌연 무언가가 꿈틀거렸다.
이 세상의 물질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산에 불이 난 것도 아니었다.
마치 귀신이나 영혼처럼 꿈틀대는 무언가가, 연호정의 신안(神眼)에 포착되고 있었다.
쿠르르릉.
하늘이 천둥을 토해 냈다.
잠시 후.
쏴아아아!
먹구름이 쏟아 내는 빗물이 순식간에 온산을 흠뻑 적셨다.
어딘지 모르게 갑작스럽다는 느낌을 주는 비였다. 비가 올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다.
‘이상하다. 이상하게 가슴이 답답해. 정말 사천에 무슨 일이 생기기라도 한 것일까.’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형님!”
저 뒤에서 강량이 외쳤다.
“저희 둘은 체력을 회복하고 가겠습니다! 먼저 가십시오!”
연호정은 대답 없이 손을 흔들며 속도를 올렸다.
히히히히힝!
황룡기를 이어받은 흑혈신마 역시 힘차게 발굽을 휘둘렀다. 놀랍게도 흑혈신마의 체력은 초절정고수인 강량과 진양보다도 더 좋았다.
실제로 지치지 않게 만들어진 마물이기도 했지만, 황룡신왕기를 받아 가며 연호정과 거의 하나가 된 덕이었다. 연호정이 지치지 않는 한, 흑혈신마 역시 지치지 않을 것이다.
시간이 흘렀다.
쉼 없이 하루를 더 달린 연호정의 눈에 마침내 저 멀리 성도가 보였다.
번쩍!
성도 인근에서 한 줄기 위험한 기운이 솟구쳤다.
놀랍도록 잘 정제된 힘이었지만 왠지 모르게 불안정하기도 했다. 그래서 위험했다. 저 불안정한 기운이 폭발하면 일대가 초토화될 것이다.
‘당가주님!’
연호정은 단숨에 그 기운의 주인을 읽었다.
‘가주님이 성도에?’
그때, 위험하게 솟구치던 기운이 다시 잠잠해졌다.
연호정의 황룡신왕기를 읽은 것이다. 그의 존재를 느낀 당관이 스스로의 마음을 추스르고 있었다.
연호정은 더 강한 불길함을 느꼈다.
자신에게 못난 모습을 보여 주지 않기 위해 기운을 가다듬었지만, 그전에 느꼈던 기운이 너무 위험했다.
난적을 맞이한 게 아니라 그 자신의 상태가 이상한 듯했다. 무극의 고수가 저 정도로 기운을 갈무리하지 못한다는 건 정신적인 충격이 크다는 뜻이었다.
‘빌어먹을!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그때, 저 멀리서 한 마리 전서구가 무서운 속도로 날아왔다.
개방의 전서구였다. 연호정은 단숨에 흑혈신마 위에 올라탔다.
히히힝!!
우렁찬 흑혈의 포효에 전서구가 하늘을 빙빙 돌다가 단숨에 연호정에게로 떨어졌다.
팔뚝으로 전서구를 받아 작게 말린 서신을 펼쳐 읽은 연호정이 흑혈신마의 옆구리를 박찼다.
남쪽으로 달린 흑혈신마는 순식간에 악산에 다다랐다. 얕은 강물과 산을 그대로 뚫고 달린 흑혈신마의 속도는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연 성주!”
흑혈신마를 멈춰 세운 연호정이 곧바로 땅에 내려섰다.
정말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가득상이 손을 흔들며 달려오고 있었다.
“후개.”
가득상이 활짝 웃었다.
“이게 얼마 만이오?”
“그러게 말이오. 잘 지냈소?”
“나야 뭐 썩은 음식 주워 먹어도 탈 안 나는 거지니까.”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몇 번을 봐도 정이 안 가는 사람이 있고, 수년에 한 번을 봐도 어제 만난 것처럼 정이 넘치는 사람이 있다. 당연히 가득상은 후자였다.
“그나저나 엄청나게 빨리 왔구려. 사흘 안에 도착할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그보다 반나절은 더 빨리 올 줄이야.”
“사태가 사태이다 보니. 한데…….”
연호정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 기묘한 독기(毒氣)는 뭐요?”
가득상이 한숨을 내쉬었다.
“따라오시오.”
잠시 후.
“저건……?”
“풍도박혼진이라 하더이다.”
대불누각 앞, 표면이 꿈틀거리는 기묘한 반구형 흑색 물체를 보는 가득상의 얼굴엔 떨떠름함이 가득했다.
“광혈교주는 저기 갇혀 있소.”
순간 연호정의 안광이 불을 뿜었다.
반사적으로 살기가 튀어나오려 했지만, 그는 애써 흥분을 가라앉혔다.
푸르륵.
흑혈신마가 투레질을 반복했다. 연호정의 상태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풍도박혼진이 무엇이오?”
“당가 최상위 진법으로, 일종의 봉인진이자 필살의 진법이라 하오. 한번 갇히면 무극수라도 반드시 죽고야 만다고 하더이다.”
“그렇다면……?”
“그렇소. 당가의 태상가주께서 적의 수괴를 봉인하고, 함께 온 사제장 하나를 세상에서 지워 버렸소.”
연호정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성도에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알 수 없는 불안감이 계속 가슴을 짓눌렀다. 한데 태상가주가 어떻게든 적을 죽인 것이다.
이건 정말 대단한 위업이었다. 사제장 둘을 죽였대도 엄청난 전과인데, 심지어 그중 하나가 광혈교의 수장이다.
비록 봉인진이라 하니 당장 죽은 건 아니겠지만, 이렇게 진 주위를 그냥 비워 둘 정도면 위력 하나는 확실한 모양이었다. 당가가 자신하는 진법이라면 실로 믿을 수 있었다.
안도하며 풍도박혼진을 보던 연호정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
“태상가주께서는?”
“…….”
“많이 다치셨소?”
가득상이 침중한 목소리로 답했다.
“암왕 어르신께선 돌아가셨소.”
연호정은 저도 모르게 탄식을 토해 냈다.
‘노선배님.’
당형과 깊은 친분은 없었다. 아니, 오히려 첫 만남은 악연에 가까웠다. 그를 끄집어내기 위해 상처가 될 만한 말들을 마구 퍼부어 댔으니까.
답답한 노인이었지만, 충분히 이해가 가기도 했다. 연호정은 그의 꼬장꼬장한 모습에 연민을 느꼈다.
이후 가문에 닥친 재앙을 더는 두고 보지 못하여 뛰쳐나온 당형이 악적들을 몰아내는 데에 큰 공을 세웠을 때, 두 사람은 서로에게 가진 서운함과 미움의 감정을 모두 내려놓았다.
그 뒤로 당형과 비무도 했고 적당한 친분도 나누었다. 다른 노선배들만큼의 친분을 쌓진 못했지만, 함께 이 세상을 살아가는 무극수라는 사실만으로도 마음 한구석에서 든든한 방벽이 되어 준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죽었다니.
‘그래서 그랬구나.’
자신이 느낀 불안함도 그렇고, 특히 성도 인근에 도달했을 때 당관의 기운이 지극히 불안정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이십여 년 만에 관계를 개선한 아버지가 악적들과 싸우다가 목숨을 잃었다.
당형다운 죽음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다운 죽음이라 한들, 아버지가 죽었는데 당관의 마음이 정상일 리 없다.
‘정말 위대한 일을 하셨습니다. 부디 선조들의 곁으로 가셔서 편히 쉬시길.’
눈을 감은 연호정은 속으로 당형의 명복을 빌었다.
“어쨌거나 큰 난적을 해치웠으니 다행이오만, 문제는 거기서 끝이 아니오.”
연호정이 가득상을 바라보았다.
가득상이 지도를 펼쳤다.
“이곳, 북부 전선을 이루고 있던 적의 일천 마인들이 움직이기 시작했소. 빙 둘러서 아미산을 통해 내려오고 있는데, 어떻게 안 건지 이곳 악산 쪽으로 방향을 잡은 듯하오.”
연호정의 눈이 깊어졌다.
“그들의 무력은?”
“보통이 아니오. 최소 구파급 대문파 이상으로 추정되는데, 실상은 그보다 훨씬 더 강할 거라고 보고 있소. 단순 전력만 따지면 구파 두 개급의 전력이 통째로 움직인다고 보면 될 것이오.”
구파 두 개의 전력.
실로 엄청난 전력이었다. 경우에 따라 다르지만, 통상적으로 무극수 하나가 구파급 대문파 하나를 감당할 수 있다고 본다면 무극수 둘에 해당하는 전력이 남하하는 셈이었다.
“게다가 남하하는 속도도 워낙 빨라서 사전에 막기도 힘드오. 대치하던 고수들이 뒤를 쫓았는데, 반나절도 안 되어 놓치고야 말았소.”
“따로 연락도 안 했는데 이곳으로 온다는 건…….”
연호정이 차가운 눈으로 풍도박혼진을 노려보았다.
“저놈과 뭔가 영적으로 연결이라도 되어 있는 모양이군.”
“우리도 그런 식으로 생각해 보긴 했소. 쉽게 믿기가 힘들어서 확신하긴 어렵소만.”
“아마 그럴 것이오. 삼교는 기본적으로 사술이학에 능하오. 특히 사음교와 광혈교가 그러하지.”
“실제로 그놈들은 공격보다 수비에 능하다는 보고가 많았소.”
“아마 교주의 호위 부대일 것이오.”
혈교의 적통을 이어받은 자를 지키려면 구파 두 개급의 전력이 호위 부대로 존재해도 이상하지 않다.
연호정이 한숨을 쉬었다.
“그나저나 아미파가 섣불리 나서지 않아야 할 터인데.”
“……아직 못 들으셨소?”
“뭐가 말이오?”
가득상이 눈을 감았다.
“아미파가 멸문했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