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192)
흑백무제 1192화(1192/1200)
1192화. 이전투구(泥田鬪狗) (2)
‘복호사태.’
개방 노구당원들과 함께 달려 나가며, 연호정은 복호사태를 떠올렸다.
아미파의 장문인이자 무림맹의 봉공 중 하나로, 맹 내 정치 싸움에서 언제나 자신을 지지해 주었던 사람이었다.
사적인 친분이 없는데도 그러했다. 자신의 행동이 무림을, 나아가 대륙 전체를 위한 것임을 알았기에 그녀는 그리했을 것이다.
선한 사람이었다. 선한 성품을 지니고도 일파의 장문인다운 위엄도 갖춘 사람이었다.
그 위엄은 오랫동안 친분을 나누었던 청성파의 장문인, 풍벽자가 삼교의 세작으로 밝혀졌을 때도 스러지지 않았다. 큰 충격을 받았지만, 그래도 그녀는 무림의 기둥으로서 맹의 운영에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봉공들과 함께 크나큰 행정적 위업을 달성하기도 했다.
그런 그녀가 죽었다니.
그런 좋은 사람이 좌장을 맡은 아미파가 멸문을 당했다니.
당형이 죽었다는 말보다 훨씬 더 믿기지 않았다. 당형이 당형답게 귀천한 것과 달리, 복호사태는 느닷없는 재해에 휩쓸린 거나 다름이 없었다.
‘광혈교주.’
그와 사제장 둘이서 아미파를 멸문시켰다는 소리를 듣고, 그는 풍도박혼진을 박살 내고 직접 광혈교주의 목을 베어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될 일이었다. 지극한 분노와 별개로, 연호정은 사태를 냉정히 보았다.
그래서 당가에 지원을 요청한 것이고, 개방의 고수들과 함께 교주의 호위 부대를 쓸어 버리기 위해 출진한 것이다.
“연 성주! 잠시 멈춥시다!”
가득상의 외침에 연호정이 흑혈신마의 속도를 줄였다.
잠시 후.
“이곳이오.”
가득상이 지도의 한 부분을 가리켰다.
“곧 그놈들이 감락을 통과해 악산 남부로 올라올 것이오.”
“그렇군.”
“더 가 봤자 지리적 이점을 취하기도 어려울 터이니, 차라리 지금 이곳에서 놈들을 맞이하는 것이 나을 것이오.”
“그리합시다.”
“연 성주.”
“말씀하시오.”
잠시 망설이던 가득상이 조심스레 물었다.
“괜찮소?”
연호정은 솔직히 말했다.
“괜찮지 않소.”
“…….”
“누가 괜찮을 수 있겠소? 아미의 복호사태는 존재만으로도 사천을 수호하던 기둥이자 진정 천하를 생각할 줄 아는 분이셨소. 그런 분이, 고작 나들이처럼 중원에 온 적의 수장에게 죽어 버렸는데 괜찮으면 그게 더 이상한 일 아니겠소?”
“성주 말이 맞소.”
연호정의 눈이 깊어졌다.
“그 죽음을 막지 못했다면, 최소한 복수는 해 줘야지. 그게 흑제성주로서 그분께 할 수 있는 도리요.”
“그리고 우리 모두의 도리이기도 할 것이오.”
가득상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나마 당가에서 광혈교주까지 처리했으니 다행이라면 다행이겠소.”
과연 그럴까?
연호정은 저도 모르게 그리 말할 뻔했다. 하지만 시기상조인 듯하여 가까스로 참았다.
그는 아직 광혈교주가 죽지 않았음을 직감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듣자 하니 풍도박혼진은 그 안에 갇힌 사람의 내공과 생명력을 빨아먹고 성장하는 죽음의 진이며, 더 이상 빨아먹을 게 없다고 판단하면 진법 자체가 녹아내리며 시체가 된 숙주도 함께 지워 버린다고 했다.
존재 자체를 멸하는 희대의 진법이다. 그러나 아직 그 진이 유지되고 있다는 건, 광혈교주 역시 죽지 않았다는 뜻이다.
한데도 이 사람들은, 나아가 당가 사람들은 광혈교주가 죽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곧 죽을 테니 죽은 것과 진배없기는 할 것이다. 하지만 연호정은 절대 방심하지 않았다.
과거에도, 지금도 죽었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돌아오는 광경을 꽤 많이 본 그였다. 확실하게 목을 베어 버린 게 아니라면 죽음을 확신해서는 안 될 일이다.
하물며 그 대상이 삼교의 수장이라면 더더욱.
‘놈들이 이동한 것도 심상치 않아.’
광혈교주가 사제장과 함께 나돌 때는 전선을 유지했으면서, 광혈교주가 진에 갇히자 곧장 움직였다고 한다.
달리 연락을 취할 방도가 없었을 텐데도 그들이 움직였다는 건, 광혈교주가 진에 갇힌 채로도 멀리 떨어진 수하들에게 연락이 가능하다는 뜻이었다.
심상치 않은 일이었다.
“일단은.”
연호정이 지도 위 악산을 가리켰다.
“당가의 지원군이 오면 이곳, 풍도박혼진이 자리한 곳에 위치시키는 게 좋을 것 같소.”
“어째서?”
“일천 병력의 전력이 구파급 대문파 두 개의 전력을 자랑한다면 아무리 나나 노구당원이라도 힘든 싸움이 될 것이오.”
가득상이 고개를 저었다.
“내 생각에 놈들은 곧장 교주에게 갈 확률이 높소. 싸워서 이기는 게 목적이 아니라 통과가 목적이라면, 오히려 상대하기가 더 쉬울 수 있소.”
“틀린 말은 아니오만.”
연호정이 가득상을 바라보았다.
“나는 후개가 이 사태를 너무 쉽게 바라보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오.”
가득상의 얼굴이 굳어졌다.
“무슨 말이오?”
“구파 중 이 개 문파에 달하는 전력을 가진 놈들이오. 단순히 전력만으로 따지면, 성천의 고수 둘도 감당할 만하다고 볼 수 있소.”
“물론 그렇소. 그러니 더더욱…….”
“그런 전력이 광혈교주의 호위 부대란 말이오. 교주의 무력을 믿었든 명령 때문에 전선을 지키고 있었든, 그 먼 거리를 떨어져 있었음에도 교주에게 이상이 생긴 걸 알고 찾아오는 길이오.”
“……!”
“교주에게 가는 것이 일 순위라고는 하나, 가는 길이 막힌다면 어떻게든 그것을 뚫고 가려고 혈안이 될 것이오. 하물며 삼교가 아니오? 놈들에게 얼마나 많은 비밀 병기가 있는지 그대는 알고 있소?”
“그것은…….”
“당장 사음교의 황풍독탄도 대다수가 그 존재조차 모르고 있었소. 당가에 그 황풍독탄의 해독약을 개발하라고 건네준 사람은 나요.”
가득상의 얼굴에 놀라움이 어렸다.
“사음교에는 그런 병기들이 많소. 하면, 광혈교라고 다르겠소?”
“……!!”
“애초에 일천 호위 부대와 영적으로 이어졌다는 것도 무림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소. 무극수 정도면 상단전의 활용 능력이 극에 이른다고는 하나, 이놈들의 사술은 그것과 또 다르단 말이오.”
연호정이 지도를 내리쳤다.
“놈들과 관련한 일 중 무엇 하나 섣불리 확신하지 마시오. 또한, 광혈교주는 풍도박혼진에 갇힌 것이지 아직 죽은 게 아니오. 그가 죽었다고 확신하다가 만에 하나라도 빠져나온다면, 그래서 피를 보지 않아도 되었을 사람이 죽어 나간다면 그대는 그 후회를 감당할 자신이 있소?”
“…….”
“놈들을 절대 우습게 보지 마시오. 당대 중원에서 삼교와 가장 많이 싸워 본 나는, 싸우면 싸울수록 혼란을 느끼고 있소. 그만큼 강한 상대이기 때문에 굳이 당가의 지원 병력까지 소환한 것이외다.”
연호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과거의 당신은 이러지 않았소. 당신의 정보 분석 능력과 미래를 예측하는 지혜는 내게도 인상 깊은 것이었지.”
“…….”
“지쳤다면 쉬시오. 지치지 않았는데도 과거보다 못하다는 건 결국 마음가짐의 차이인즉, 그대는 스스로를 돌아보시오.”
그 말을 끝으로 연호정은 흑혈신마에게로 걸어갔다.
연호정이 남기고 간 말은 가득상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내가 과거와 달라졌다고?’
사람은 변하기 마련이다. 당연히 옛날과 같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과거보다 퇴보했다면, 이건 분명 문제가 된다. 그는 언제나 앞만 보며 달렸지, 모든 걸 포기한 적도, 제대로 놀아 본 적도 없었다.
‘연 성주의 말은 옳다.’
광혈교주의 호위 부대.
말하자면 왕을 지키기 위한 최강의 방패다. 비록 공격보다 호위에 치중된 전술을 구사한다 해도, 그들의 전력이 엄청나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교주에게 가는 게 목적일 테니 더 쉽게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다?
딴에는 맞는 말이지만, 문제는 그들의 전력이 지극히 대단하다는 데에 있다.
하물며 그들과 싸우다가 죽어 나갈 개방도는 어떻게 할 것이가? 단순히 비등한 전력으로 맞서 싸우는 건 좋은 선택이 아니다. 가장 좋은 건 압도적인 전력으로 상대하는 것이고, 그게 안 되면 최소한의 피해로 적군을 막는 데 집중해야 한다.
그것을 깨달은 순간, 가득상은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나는 왜 그 당연한 사실을 잊고 마음 편히 이곳까지 왔을까?’
뒤이어 더 충격적인 사실도 깨달았다.
‘용호풍운!’
개방의 용두방주를 지키는 최강의 수호대.
비록 대리라고는 하나, 실질적인 용두방주나 다를 바 없는 그였다. 한데 용호풍운의 부대도 대동하지 않은 채 꼬리에 불붙은 망아지처럼 이곳으로 달려온 것이다.
이건 방주가 할 만한 행동이 아니었다. 한 조직의 수장이라면 결코 이렇게 방만해선 안 될 일이다.
가득상은 생각해 보았다. 내가 왜 이렇게 어설퍼졌을까?
‘…….’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답을 구하려 하자 자연스레 떠오르는 하나의 얼굴.
‘사부님.’
거지답게 살아왔고 거지답게 죽었다. 수장답게 살아왔고 수장답게 죽었다.
화진천이 죽은 이후, 그는 알 수 없는 무력감에 시달려 왔다. 더 잘하려는 의지와 큰 책임감에 짓눌려 평소의 자신을 잊고 살아왔던 것이다.
‘그렇게 어설프게 살았는데도 용케 개방에 별문제가 터지지 않았군.’
그만큼 장로들이, 지부장들이, 나아가 십만의 거지들이 각자의 위치에서 잘해 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방도들은 새 시대를 위해 살아갈 준비를 마쳤는데, 방주 대리인 자신만 후퇴했다. 가득상은 뼈저린 후회를 느꼈다.
그리고 또 하나.
‘안심했다. 아니, 안심해야만 했다.’
암왕 당형의 죽음.
무림의 최고 거물 중 하나가 적과 싸워 하나는 죽였고 하나는 봉인하였다.
그 위대한 업적을 이룬 거인의 마지막을 지켜보며, 가득상은 믿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화진천이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고 죽어 가며 자신에게 가르침을 주었던 것처럼, 그 가르침이 자신의 가슴속에 살아 숨 쉬는 것처럼.
당형이라는 고수가 목숨을 걸고 적을 해치웠다면, 적은 그냥 죽은 게 되어야만 했다. 그래서 그는 광혈교주가 죽었다고 생각하고 그 이상을 보려 하지 않았다.
“허어.”
가득상은 탄식을 토해 냈다.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바보 같을 수가.”
그때, 노구당원 하나가 툭 던지듯 말했다.
“스스로가 바보 같으시오?”
“…….”
“나는 이해할 것 같소.”
“…….”
“망할 화 방주가 죽고 나서 슬픔을 곱씹을 시간도 없었잖소. 그러기엔 하루하루가 너무 지옥 같았으니. 하물며 방도들의 삶이 내 손에 달렸는데 바보가 안 되는 게 신기할 지경이지.”
“…….”
“충분한 시간을 들여야 했소. 쉬어야 했소. 후개가 생각보다 훨씬 더 멍청해진 건, 쉬어야 할 때 쉬지 않았기 때문이오.”
“아닙니다.”
가득상이 고개를 저었다.
“다 변명일 뿐입니다. 그냥 제가 못난 겁니다.”
노구당원들이 피식거리며 웃었다. 아무리 거지라도 곧 수장이 될 사람이 저런 말을 하기도 쉽진 않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가득상을 믿었다. 적어도 화진천만큼은 해 줄 재목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가득상이 눈을 빛냈다.
“이제부터라도 방주답게 살아야겠군요. 그렇기 때문에…….”
“…….”
“저는 도망치겠습니다.”
노구당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그래야지.”
“다만, 연 성주와 얘기를 좀 더 해 봐야겠습니다.”
가득상이 연호정에게로 걸어갔다.
누군가가 말해 주지 않았다면 계속 엇나갔을 개방의 후계자가, 이제 진짜 방주가 될 준비를 마친 것이다.
반나절 후.
일천 마인이 봉우리를 넘어 달려오는 광경이 모두의 눈에 포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