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193)
흑백무제 1193화(1193/1200)
1193화. 이전투구(泥田鬪狗) (3)
“후우.”
크게 숨을 들이쉬어 청정한 공기를 마신 야율대극이 다시 숨을 내뱉었다.
머리가 차가워지는 기분이었다. 동시에 적당히 차가운 기운이 사지 끝까지 다 들어차는 느낌에 저절로 미소가 드리워졌다.
그리고 그 미소는 금세 씁쓸함으로 바뀌었다.
‘인정할 수밖에 없군.’
세상은 넓다.
그중엔 풀 한 포기 나기도 쉽지 않은 황야도 있고, 모래만 가득한 사막도 있다. 사시사철 눈보라가 몰아치는 빙하의 대지도 있으며, 이렇게 산과 들이 펼쳐진 놀라운 땅도 있다.
그야말로 각양각색이지만 어디서나 해는 비추기 마련이다. 공기도 어디에나 있다.
그래서 다 똑같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그간 대륙 공기를 몇 번 마셔 봤지만, 돌아갈 때쯤이 되어서는 세상 사는 게 거기서 거기라고 생각했다.
틀렸다.
야율대극은 지금에야 인정했다. 대륙의 공기는 영음산의 공기와 또 다르다고.
더 생명력이 넘치고, 더 풍부한 기운을 머금고 있다. 날씨도 더 따뜻하며, 사방을 둘러봐도 그림자 진 곳이 없었다.
‘굳이 불신자들을 개화할 필요가 없더라도, 정말 탐이 나는 땅이다.’
야율대극은 신을 떠올렸다.
그분 역시 과거 중원을 한 차례 다녀왔다고 했다. 설령 다녀오지 않으셨더라도 이 대륙 땅이 얼마나 매혹적인지는 알고 계실 것이다.
‘조금만 기다리십시오. 조만간 이 야율대극이 대륙 땅에 최고로 큰 신전을 세워 드릴 것입니다.’
산 정상에서 끝없이 펼쳐진 산과 들을 내려다보니, 그렇게 장엄할 수가 없었다. 적어도 이 감동에 뒤지지 않는 신전을 세우리라.
흐뭇하게 웃는 야율대극의 뒤로, 한 명의 사내가 나타난 것은 조금 어둡던 세상이 완전히 밝아졌을 무렵이었다.
“사제관님.”
“왔는가.”
사내가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영귀사제(影鬼司祭) 십 인, 수석 사제인 저까지 총 십일 명 도착하였습니다.”
“고생했다.”
“아닙니다.”
“조금만 쉬었다가 출발하자꾸나. 아직은 여유가 충분하니.”
“알겠습니다. 다만, 보고 사항이 많기에 그것부터 전해 드려도 되겠습니까?”
“얼마든지.”
“영귀수의 총대장에게서 연락이 끊겼습니다.”
야율대극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사우에게서?”
“그렇습니다.”
“마지막 연락 장소는?”
“대륙의 산서성입니다. 제 신법으로 이곳에서 하루 정도 걸리는 거리입니다.”
야율대극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 망할 놈이.’
애초에 그는 사우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그는 알고 있었다. 신께 절대복종하는 듯하지만, 언제고 사우가 신께 발톱을 세울 것임을.
그 시기가 언제인지 알 수 없기에 그는 더더욱 사우를 증오했다. 사우는 뭐 하나 제대로 예측이 되지 않는 놈이었다. 속이 빤히 보이기라도 하면 안심할 수 있을 텐데, 그게 안 되는 놈이란 말이다.
만약 신께서 그를 두고 보자고 하지 않으셨다면 당장 사제들을 다 끌고 가서 잡아 죽였을 터.
‘하지만 마각을 드러내기 전까지 그는 충성스러운 교도로서 살아갈 것이다. 지금껏 내린 명령을 한 번도 거부하지 않고 모두 완수하기도 했어.’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그놈의 능력 하나만큼은 대단하다고 아니 말할 수 없었다.
무공이 뛰어나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무공만 보면 야율대극은 사우 따위 오십 합 내에 제압할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닳고 닳은 싸움, 창의성과 순발력이 필요한 작전에선 그를 이기기 어렵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적어도 교군(敎軍)의 작전 능력만큼은 최상인 사우가 이번 일을 실패했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드디어 이빨을 드러낸 것일까?’
가만히 생각해 보던 야율대극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없다. 그놈은 사냥꾼이야. 무엄하게도 신을 사냥감 삼아 노리고 있지만, 진짜로 반역을 저지르려 했다면 되레 임무를 성공시켜 대전 안으로 들어갔을 것이다.’
어떻게 생각해 봐도 사우가 일부러 임무를 망쳤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야율대극이 빠르게 말했다.
“사제 둘을 보내 어떻게 된 일인지 소상히 알아보도록 하라.”
“예.”
“다른 일은?”
“두 가지 더 보고드릴 것이 있으며, 그중 하나는 혈존대사의 위치입니다.”
야율대극의 눈이 번뜩였다.
“설마 어딘가로 이동하기라도 했나?”
“그렇습니다.”
“어디로?”
호연합의 얼굴에 난처함이 일었다.
“정확히 어딜 목적지로 삼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이동 경로 안쪽에 호북 북부가 있습니다.”
“호북 북부라면…….”
야율대극이 인상을 찡그렸다.
“무당파(武當派)와 제갈세가가 있는 융중산 인근이 아닌가?”
“그렇습니다.”
실제 지역별 전력이 어떻게 되는지는 붙어 봐야 안다.
그러나 상징성과 영향력, 예상 전력을 전부 고려했을 때 공격하는 입장에서 가장 신중해야 할 곳이 딱 두 곳이 있다.
하나는 태산북두 소림이 버티고 있는 하남이고, 다른 하나는 남존이라 불리는 무당과 신산의 지혜로 가득하다는 제갈세가가 있는 호북이다.
하남이야 무림맹도 있으니 애초에 공략 대상이 아니었지만, 호북이라고 쉬운 게 아니었다. 소림처럼 무당파 역시 무수히 많은 속가 문파를 다스리고 있고, 그 뒤를 제갈세가가 받쳐 주기에 지역 자체가 하나의 요새와 같았다.
‘도대체 왜?!’
이해할 수 없었다.
혈존대사는 자신의 목숨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가만히 앉아서 자신을 기다리기만 하면 될 텐데, 왜 쓸데없이 움직이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것도 중원에서 첫손에 꼽히는 위험 지역인 호북으로.
“일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는군.”
“어떻게 할까요?”
“뭘 어떻게 하겠나. 우리의 임무는 혈존대사가 생존할 수 있도록 이 물건을 전해 주는 것이다.”
물론 혈존대사가 죽어 버린다면 대체할 사람을 찾아야 한다. 다행히 그 대체자가 무당의 원로인 검선 탁무자로 정해졌으니 새로 물색할 필요까지는 없었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야율대극이 빠르게 말했다.
“산서 남부까지 천천히 남하한다. 그때까지 영귀수와 사우에 관한 정보를 다 가지고 와라. 그 정보가 확인되면 곧바로 혈존대사를 찾아갈 것이다.”
“존명!”
“마지막 보고는 무엇인가?”
“그것이…….”
호연합의 목소리에서 조심스러움이 묻어 나왔다.
“앞선 보고들과 달리 확실한 정보는 아니기에 어느 정도 걸러 들으시면 될 듯합니다.”
“말하라.”
“유천(幽天)이 움직이고 있다는 보고입니다.”
순간 야율대극의 안광이 불을 뿜었다. 평소 함께하는 일이 많았던 호연합과 사제들조차 순간 진땀이 날 정도로 무시무시한 눈빛이었다.
“유천이?”
“그렇습니다.”
“어떻게 말이더냐?”
“확실하지는 않습니다만…… 지금껏 움직였던 것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라 합니다. 병력을 파견한 것 자체는 사실로 판명이 되었는데, 그 칼이 대륙을 향하고 있는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
만약 그 칼이 대륙이 아닌 영음산을 향하게 된다면?
‘그럴 리가.’
당연했다. 광혈교가 그 조직명답게 미친놈들로 가득하다지만, 아직 대륙을 정벌하기도 전인데 아군을 향해 칼을 뽑을 리는 없다.
그렇다면?
“유천주(幽天主)의 신상에 이상이라도 생긴 건가?!”
그 또한 쉽게 믿을 수가 없었다.
교주라는 직위는 단순히 신성한 혈통만으로 거머쥘 수 있는 만만한 자리가 아니었다. 특히 광혈교는 그 특성상 모든 마인을 압도할 수 있어야 하기에, 과거부터 삼교 최강자가 아니면 올라설 수 없는 자리라고 하였다.
물론 야율대극은 당대 교주이자 신께서 그를 압도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광혈교주의 무공이 만만하다는 것도 아니었다. 영음산주를 제외, 삼교에서 가장 강한 마인이 광혈교주일 것이다.
적어도 야율대극은 그렇게 믿었다.
“안 되겠군.”
야율대극이 진기를 끌어올렸다.
“사우에 관한 정보를 취득하면 곧장 우리를 찾아오라 명령해라. 우리는 이 시간 이후로 최대한 빨리 혈존을 찾는다.”
* * *
“헛!”
공동파가 자랑하는 천재 검수 중 하나, 일랑이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일랑이 장로님을 뵙습니다.”
“고생이 많구나.”
“아닙니다.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인 것을요.”
일랑의 밝은 목소리에 오히려 초검자는 울적함을 느꼈다.
차기 장문인으로 거론되는 인재 중 가장 나이가 어린 사람이 바로 일랑이었다. 아직 부족한 면이 많지만 무서운 재능과 엄청난 열정으로 벌써 절정고수의 면모를 보이는, 공동 최고의 자랑 중 하나였다.
그런 녀석이 감숙 북부 전선 끝자락에서 공동을 대표해 지역 문파들을 다독이고 혹시 모를 적의 침입을 대비하고 있다.
기특하면서도 안쓰러웠다. 전쟁을 알기에는 너무 젊은 나이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감숙 전쟁에서 사형제들을 여럿 잃었을 때, 일랑은 하늘을 저주하며 울었다.
다행히 밝은 천성 덕에 금세 회복했지만, 정상이라고 볼 수는 없었다.
“한데 장로님께서는 여기까지 어인 일로 오셨습니까?”
공동산에서 이곳, 감숙 기련산까지는 상당히 멀었다. 초검자 같은 원로가 수행원도 없이 올 만한 곳이 아니었다.
“이놈아, 너 같은 젊은 제자가 서늘한 바람을 맞아 가며 전선을 지키고 있는데 나 같은 늙은이가 뒷방에 눌러앉아 놀아서야 쓰겠느냐?”
초검자가 미소를 지었다.
“당분간 이곳에서 지낼 것이다. 만에 하나 적이 쳐들어오면, 전과 같은 실수를 저질러선 안 되겠지.”
“아…… 예에.”
일랑은 뛰어난 눈치 덕에 곧바로 알 수 있었다. 장문인께서 일부러 초검자를 이곳에 보내셨다는 것을.
용맹하고 때로는 과격하기까지 한 공동파라도 문 내 사람들끼리는 다정하다.
하지만 이번 전쟁으로 입은 피해가 너무 컸다. 장로들은 제자들을 잃었고, 제자들은 스승과 교관의 죽음에 절망했다.
당연히 모두가 삼교를 증오해야 마땅하지만, 일차적으로 가까이 있는 현장 책임자에게 분노를 쏟아 낼 수밖에 없었다. 그 사람이 바로 초검자였다.
장문인은 이번 초검자의 실수 아닌 실수를 일부러 지탄했고, 장로직을 박탈하는 대신 당분간 북부 전선에서 적의 동태를 살피도록 유배를 보낸 것이다.
물론 말이 유배일 뿐, 문 내 사람들의 분노에서 한 발 벗어날 수 있도록 배려한 셈이었다.
일랑은 애써 마주 미소를 지었다.
“저희 거처가 무척 괜찮습니다. 당분간 그곳에 함께 지내도록 하시지요.”
“그래, 그러자.”
그때였다.
“일랑 검사!”
저 멀리서 감숙 화궁문(火弓門)의 소문주가 달려왔다.
“검사! 큰일…… 헛!”
초검자를 발견한 소문주는 깜짝 놀랐다.
“초검자 장로님을 뵙습니다! 화궁문의 소문주 경천이라 합니다!”
“인사는 생략하세. 무슨 일인가?”
경천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가, 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심상치 않은 일임을 직감한 초검자와 일랑이 경천을 따라 서둘러 기련산 정상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그들은 보았다.
저 멀리 서북향에서부터 몰려오는 검은 안개를.
먼지구름을 일으키며 다가오는 그들은, 떨어진 거리를 감안해도 지나치게 빨랐다. 저 속도가 끝까지 유지되는 한, 한나절이면 이곳에 도달할 것이 분명했다.
문제는 숫자였다.
“어, 엄청난 수입니다! 족히 수만 병력은 되는 듯합니다!”
초검자의 얼굴에 살기가 어렸다.
“각 문파와 무림맹에 전서구를 띄워라! 적의 공세다!”
시커먼 구름과 함께 몰아치는 검은 파도.
흩어지듯 퍼진 포말의 정체는 마기(魔氣)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