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194)
흑백무제 1194화(1194/1200)
1194화. 이전투구(泥田鬪狗) (4)
“많기도 하군.”
언제부터였을까?
아마 황룡을 깨달은 이후였을 것이다. 그때도 삼교를 막아야 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지만, 저들을 향한 맹목적인 살의와 분노는 많이 희석되었다.
물론 삼교의 교도들을 호의적으로 보게 되었다는 것은 아니었다.
연호정에게 있어 삼교는 여전히 내 고향, 내 터전을 무너트리려는 적일 뿐이다. 나아가 저들 손에 내 사람들이 죽는다면, 안 그래도 저들을 물리치는 것에 일생을 건 그의 인생은 저승에 가서도 저들의 혼을 불살라 버릴 인생으로 바뀌게 될 것이다.
과거에도, 지금도, 나아가 전후에 어떤 결과가 나올지 모르는 미래에도 그에게 삼교는 적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의 눈은 평온하기만 했다.
‘사부님.’
그는 스승을 떠올렸다.
고금 제일의 무공과 깨달음으로 반쯤 신선의 영역에 올라선 그분은, 인간에게 허락된 시간을 아득히 뛰어넘어 무려 한 세기를 세 번이 넘도록 살다가 등선하셨다.
‘저는 더 이상 증오와 살기에 매몰되지 않습니다.’
미래는 모르는 것이지만, 적어도 지금 온전한 나 자신을 찾았다면 훗날 어떤 사건이 벌어져 광기에 몸을 맡기게 될지라도 본래의 나를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사부님이 아니었다면 저는 아직도 천지에 살기를 흩뿌리고 있었겠지요.’
연호정은 잠시 눈을 감았다.
그러자 스승의 얼굴이 선명해졌다.
세상을 볼 때는 은인의 얼굴을 잊고, 세상에서 눈을 돌려야만 은인의 얼굴을 되찾는다.
그리고 그의 기억과 마음속에 있는 스승은, 황룡을 처음 깨달았을 때의 사념처럼 활짝 웃고 있었다.
‘사부님, 사부님.’
인자한 미소를 짓는 스승.
‘솔직히, 조금 지치긴 합니다.’
이 전쟁이 하루라도 빨리 끝나기를, 더 이상의 희생 없이 금세 종식되기를 그는 바라 마지않았다.
놀랍게도, 전쟁이 시작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는데도 마치 수년은 지난 것처럼 느껴졌다.
연호정은 자신이 느끼는 이 정신적 피로가 이번 생이 아닌, 과거 흑암제 시절부터 이어져 온 오랜 경험 때문이라는 걸 알았다.
당장 감숙, 섬서, 하북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아군과 적군이 죽어 나갔는가. 초전에서만 만 단위의 사람이 죽었는데, 과거 흑암제 시절까지 포함하면 얼마나 많은 생명이 스러졌겠는가.
그 지옥 같은 광경을 다 보고 왔으니 지칠 만도 했다. 증오와 분노를 그 정도로 불사르지 않았다면 진즉에 지쳐서 포기했을, 참으로 벅찬 죽음의 무게였다.
‘후개에게 한 말은 결국 저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후개와 달리 저는 지쳐선 안 됩니다. 잘못 판단해서는 안 돼요. 그러니까…….’
번쩍!
연호정이 눈을 떴다.
‘제게 힘을 주십시오.’
처음이었다. 누군가에게 이토록 힘을 바란 것은.
그 대상이 스승이었기에 그는 부끄럽지 않았다.
철컹!
광룡부와 연결된 교룡쇄가 서늘한 쇳소리로 전의를 들끓게 했다.
그때였다.
“훌륭하다.”
전의로 가득하던 연호정의 눈이 흔들렸다.
‘사부님?’
그가 좌우를 둘러보았다.
그 어디에도 스승은 없었다.
‘환청인가?’
그때, 또 한 번 스승의 목소리가 들렸다.
“증오와 한의 무게를 내려놓았지만, 아직 진짜 무장(武將)은 아니었지. 스스로를 무장이라 소개만 했을 뿐.”
연호정은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이건 환청이다. 한데 도무지 환청처럼 들리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마음이 불러낸 목소리인지, 아니면 저 하늘로 올라가신 스승의 영령이 천도(天道)를 어기고 내려와 자신을 보살펴 주려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스승의 말은 계속되었다.
“그러나, 내 유일무이한 제자가 지금에 이르러서야 진정한 사신무장(四神武將)이 되었으니 스승으로서 어찌 기뻐하지 않을 수 있을까.”
연호정의 눈이 흐려졌다.
그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저 지쳤을 뿐인데, 힘들었을 뿐인데 무장이 된 겁니까?”
“주위를 둘러보아라.”
연호정이 다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전히 스승은 없었다. 보이는 거라곤 어두운 하늘과 다가오는 거대한 마기(魔氣)뿐.
도대체 무엇이 있기에 주위를 보라고 하셨는가?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거리던 연호정은 순간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노구당원들이 있었다.
“보이느냐?”
전의를 불태우는 개방의 노고수들.
희학적인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제각기 타구봉을 어깨에 걸친 채 기세를 불태우는 그들의 모습은 죽음을 각오한 병사와도 같았다.
멍하니 그들을 보던 연호정은 문득, 저 멀리 또 다른 누군가가 보인다는 걸 깨달았다. 실제 눈으로 보이는 것이 아닌, 마음으로 보이는 광경이었다.
‘당가.’
어떻게 그런 게 가능한지 의문이었지만, 연호정은 성도에서 파견된 수백의 당가인들이 악산 근처로 진입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엄청나게 빠른 속도였다. 연락을 받은 당관이 그 즉시 병력을 파견한 게 분명했다.
“사람은 홀로 살 수 없다. 홀로 산다면, 그건 더 이상 사람이 아니지. 이 스승은 그러했다.”
혈교지란이 끝난 후 삼백 년이 넘는 기간을 홀로 살아온 과거의 전설.
사람으로 태어나 반선의 영역에 도달한 스승은, 그 엄청난 시간의 무게를 버티지 못하고 스스로를 잃어 갔다.
“너 역시 그러하다. 지금껏 오랜 시간 고군분투하였으나, 네 주위에는 사람이 있었다. 너는 그들을 인정하면서도 언제나 홀로 나서려 했지. 그게 최선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돌이켜 보면 그러했다.
탕마멸사의 의정군을 이끌었을 때도, 이후 흑제성을 재건하고 함께 나아가자 외쳤을 때도 아군이 다칠까 봐 무서워 대부분의 일을 홀로 해결하려 했다.
그리고 그건 수장으로서 당연한 일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당가주님.’
당관은 이곳에 오지 않았다.
병력은 파견했지만, 본인은 오지 않았다. 그 누구보다도 이곳에 오고 싶었을 사람이 가문에 남은 것이다.
이제는 자신만큼이나 조직을 소중히 생각하는 사람인데, 어째서 함께 오지 않았을까?
‘아는 것이다.’
광룡부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자신이 가문에 남아서 중심을 지켜야 한다는 것을 아는 거야. 그래서 오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믿는 것이다.’
파견한 병력을, 개방의 노고수들인 노구당의 힘을.
그리고 흑제성주이자 흑백무제라 불리는 자신의 능력을.
“너도 사람이다. 지치고 힘들 수 있어. 그럴 때는 이승에서 사라져 버린 이 스승에게 기대지 말고, 너와 함께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두에게 힘을 빌려라.”
우우웅.
연호정의 몸에서 황금빛 기운이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사신무장이란 전쟁의 선봉에 서는 이. 그리고 선봉이라 함은 가장 앞일 뿐, 그 뒤에도 무수히 많은 사람이 존재한다. 너는 그들을 대표하여 적을 상대하는 무장이나, 홀로 적 모두를 상대할 수는 없어.”
지이이이잉!!
신왕기가 극성으로 달아올랐다.
정신적 피로가 조금씩 조금씩 사라져 간다.
다 알고 있었던 사실이지만, 애써 무시했던 진실이기도 했다. 적의 대군을 맞이하여 새삼 진실을 돌아보자, 심신의 피로가 눈 녹듯 사라져 버렸다.
“삼교를 막기 위해 고군분투했지만, 어느새 너를 따라 무수히 많은 사람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무장의 자질이다. 그러나 독불장군은 결코 훌륭한 무장이 될 수 없어.”
“…….”
“지금껏 홀로 나아갔다면, 이제부터는 함께다.”
연호정의 안광이 불을 뿜었다.
동시에 흑혈신마의 마안(魔眼)에서도 섬뜩한 안광이 번뜩였다.
히히히히힝!!
토해 내는 울음이 용음을 방불케 했다.
그 소리는 산천초목을 떨게 할 정도로 엄청났지만, 놀랍게도 노구당원들의 귀에는 어떠한 피해도 주지 않았다.
화아아아악!
오히려 기세가 증폭된다. 연호정의 장군기(將軍氣)를 이어받아 포효하니, 그 기운 가득한 외침에 노구당원들의 기세도 무섭게 폭증하기 시작한 것이다.
서로 배운 내공심법은 다르지만 적을 맞아 싸우겠다는 의지는 같았다. 전혀 다른 기질을 지닌 이들이 한데 모였으나, 그들은 그렇게 하나가 되었다.
파라락.
흑혈신마에 올라탄 연호정이 천천히 전진했다.
그러자 노구당원들도 기다렸다는 듯 그 뒤를 따랐다. 거대한 진법, 개방의 비기라는 용호타구대진(龍虎打狗大陣)과 풍운타구대진(風雲打狗大陣)을 함께 펼치며 전진하는 것이다.
두 개의 진세가 앞서가는 연호정의 등을 든든하게 받쳐 주었다. 병사들의 의지를 느낀 연호정의 황룡기는 더욱 강렬하게 맥동하며 한계까지 기파를 증폭시켰다.
콰르르르릉!!
하늘에서 천둥이 울려 퍼졌다.
쿠르르릉.
네 개의 부대로 나뉜 일천 마인이 어느새 오백 장 안쪽까지 접근했다.
대단히 빠른 속도였다. 그 멀리서 여기까지 달려왔는데도 크게 지친 기색이 없었다.
하지만 연호정은 알 수 있었다. 저들의 상태가 평소와는 조금 다르다는 걸.
광신(狂信)에 젖어 힘든 줄도 모르고 여기까지 돌진했지만, 결국 저들도 인간이기에 정신력에 한계가 있다는 걸.
‘보인다.’
제멋대로 꿈틀거렸던 신왕기가 조금씩 조금씩 중단전으로 내려왔다.
대자연 그 자체의 기운을 상징하는 황룡기 역시 신왕기가 내린 줄을 타고 상단전으로 뻗어 올라갔다.
우우우우웅!!
두 개의 기운이 섞여 들어가며 하단전, 밭으로 내려오니 온몸에 힘이 넘쳤다.
연호정의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상중하, 세 개의 단전이 더 강하게 호응하기 시작했다.
하나이자 셋, 셋이자 하나다. 이미 밟고 지나온 경지가 다시 눈앞에서 무공의 진의(眞意)가 무엇이냐며 강렬하게 호통치고 있었다.
‘아아!’
황룡을 깨달은 후 사신무의 형태와 구결을 잊어버린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사신기를 하나로 만들어 황룡을 일깨웠으면서, 황룡과 신왕을 형태 그대로만 연마했을 뿐 진정한 하나로 만들지 못했다.
고금을 논하는 최강의 무공을 연마하고 있으면서, 이 무공이 무도(武道)의 극치를 상징한다는 걸 알면서 다른 무공 연마하듯 평이한 잣대로 대했다.
그릇의 질이 바뀌었다면 그에 걸맞게 크기를 키워야만 했다. 하지만 연호정은 그것을 못 했다.
황룡과 신왕을 담기만도 벅찬 그릇에 사신무까지 있을 자리가 없으니, 자연스레 기억에서 잊힐 수밖에.
‘타고난 재능이 작다면, 그 재능의 크기를 키워 가며 발전하는 것처럼.’
연지평과 묵비, 진양은 타고난 천재다.
그러나 강량은 달랐다. 그 역시 천재 소리 듣기에 모자람은 없지만, 그 연배에 이토록 강해질 만한 재능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재능 자체의 크기를 키우는 것은 곧 그릇을 넓히는 것. 타고나지 못했다면 더 험하게 구르고 더 많이 배워서, 천하를 담을 만큼 커지면 그만인 것이다.
‘황룡신왕공은 극치의 깨달음이다. 결국 사람이 만든 이 공부는 인간을 이해하는 것을 근본으로 한다.’
독선이 아닌 평화를, 혼자가 아닌 모두를.
홀로 완성하는 것이 아닌, 모두와 함께 완성을 바란다.
번쩍!
하늘에서 한 줄기 금빛 벼락이 쏟아지는 듯했다.
그야말로 진정한 황룡신왕기(黃龍神王氣)를 맛본 기분이었다. 과거, 사념으로 남았던 스승께서 치열하게 노력해야 겨우 입문(入門)이나마 할 거라고 말씀하셨던 게 떠올랐다.
그렇다. 이것이 황룡신왕기의 입문이다.
본래 하나였던 황룡과 신왕을 나누어 육체와 의지의 힘을 불사르고, 모두가 하나라는 깨달음을 녹여 내 재탄생시킨 이 기운이야말로 황룡신왕공의 진정한 입문이라 할 것이다.
희대의 천재였던 스승께서는 단박에 깨달았을 이 입문 과정이, 연호정에겐 이제야 시작인 것이다.
그러나 연호정은 아쉬워하지 않았다.
그릇을 넓혀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면, 이제 입문이 시작되었다면.
지금 이 순간부터, 고금 제일 사방무제가 남기고 간 길을 그대로 밟아 나갈 수 있다.
천하 최강으로서의 길을.
“전군(全軍).”
위엄 넘치는 대장군의 목소리가 노구당원들의 투지를 하늘까지 도달케 하였다.
연호정이 광룡부로 마인들을 가리켰다.
“진군(進軍).”
콰르르릉!!
용호풍운의 타구대진이 연호정을 뛰어넘어 일천 마인들을 향해 질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