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195)
흑백무제 1195화(1195/1200)
1195화. 이전투구(泥田鬪狗) (5)
무림 육대세가 중 제일을 논하자면 모두의 의견이 분분할 것이다.
제갈세가는 무공보다 신산의 지혜로 이름이 높았으며, 벽산연가는 두 명의 무극수를 배출한 이후 천하제일무가(天下第一武家)의 명성을 얻었으나 세력 자체는 어지간한 중소 문파보다 작았기에 완성된 무가로서 제일을 논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남은 무가는 넷.
남부로 내려갈수록 중원 검가(劍家) 중 제일이라는 남궁세가나 만무(萬武)에 통달했다는 모용세가를 꼽는 사람이 많을 것이며, 북부로 올라가면 전략 전술에 능하고 신력(神力)을 타고난 하북팽가를 꼽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같은 맥락으로, 서부로 가면 사천당가를 꼽는 사람이 많아질 것이다. 이처럼 사람들은 각자의 환경과 이해관계 속에서 최고로 치는 가문이 저마다 달랐다.
그러나, 잠재력과 전쟁 수행 능력으로 제일을 논한다면 불편해하면서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가문이 바로 사천의 당가였다.
그들은 독과 암기를 희대의 절기로 승화시켰으며 각종 제철 기술은 물론 화약 병기까지 보유한, 그 자체로 소국(小國)에 가까운 힘을 갖고 있다.
사천 제일이라 하면 청성과 아미를 제치고 다들 당가를 꼽는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당가는 사천 최후의 보루이자 상징과도 같았으며, 특유의 지리적 이점 덕분에 중원 내부에서 터진 전란에서도 언제나 우위를 점했다.
그리고 그것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바로 당가의 수뇌부들이었다.
당관은 당호의 반역으로 한차례 홍역을 앓은 가문을 새로이 개편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다.
조직과 법도, 분위기가 예전보다 많이 부드러워졌기에 가문 전체에 활력이 돌았으며, 특히 방계라고 천시받던 인재들을 적극적으로 등용하여 요직에 앉히고 능력이 부족한 직계들은 오히려 외원으로 쫓아 버렸다.
그야말로 파격적인 인사이동이었지만 당관의 절대 권력과 무공, 그리고 암왕 당형의 무시무시한 존재감 덕분에 소소한 불만은 있을지언정 아무도 이 변화를 틀렸다고 외치지 못했다.
그렇다고 직계를 소홀히 한 것도 아니라서, 가내 분위기와 기조는 확실히 변화하고 있었다. 분란을 일으킨 썩은 알곡들은 서슴없이 뽑아냈기에 변화는 빨랐고, 특히 가주가 직접 아들인 당양선을 죽였을 때 당가는 또 한 번 다시 태어났다.
덕분에 새로 개편한 대규모 군대 중 하나인 사왕단(蛇王團)의 단주로 추대된 당패(唐覇)는 가주를 향한 일말의 의심마저 버릴 수 있었다.
당대 방계 출신 중 최고의 재능을 타고났다는 그는 구석에 처박혀 무공 수련에 힘쓰는 와중에도 새로운 독을 제조하거나 암기술을 개발하는 등, 그야말로 만능의 재능을 타고난 천재였다.
하지만 방계 출신 천재들은 하나같이 비운의 인생을 살았다. 애써 개발한 독과 암기는 시간이 지나면 직계의 손에서 개발된 것으로 날조될 것이며, 애초에 그 좋은 재능을 무림에 자랑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지금, 당패는 오랜 세월 형제들과 함께 인내한 자신의 인생이 비로소 꽃을 피우고 있음에 만족했다.
그리고 앞으로 더더욱 만족스러운 인생을 살기 위해 목숨을 걸어 보기로 했다.
“사왕단 전원 나락독사진(奈落毒蛇陣)을 펼쳐라.”
스스스.
오백의 정예가 움직이는데도 그 소리가 크지 않았다.
마치 뱀이 땅을 기어가는 소리와 비슷했다. 그러면서도 빨랐다. 섬뜩한 이동술이었다.
당패의 눈이 깊어졌다.
‘저것이 풍도박혼진.’
이백 인원이 풍도박혼진을 주시하며 진을 형성하고, 삼백 인원이 사방을 에워싸며 외부의 공격을 방비했다.
‘본가 최고의 진법이 깨져서는 안 되겠지만.’
저 진법은 방계의 먼 어른인 당유광이 만들어, 암왕 당형과 함께 완성한 진법이라 했다. 당패는 이곳으로 오기 전, 가주에게 직접 풍도박혼진의 운용 원리에 대해 들었다.
‘보면 볼수록 대단한 진법이다. 갇힌 자의 생명력을 기반으로 자생한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진법의 한계를 넘어선 작품이야.’
그 역시 천재라 불리긴 하지만, 진법만큼은 당유광을 절대 따라잡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 정도로 대단한 공부였다.
그러나.
‘이 세상 모든 것에 완벽은 없는 법. 하물며 상대는 삼교의 수괴 중 하나다. 성천의 최강자들도 승패를 감당키 힘든 고수라면 더더욱 방심해선 안 돼.’
당장 당형조차도 당유광이 없었다면 패사했을 거란 얘기를 들었다.
당가 사람에게 부정할 수 없는 무림 최강자인 당형조차도 죽을 뻔했다면, 저 풍도박혼진 역시 부서질 수 있다는 뜻이다.
‘설령 다시 나온다고 해도, 사왕단의 목숨을 걸고 막는다.’
어른들이 목숨을 내놓았다면, 이제는 당대를 책임지는 자신들이 목숨을 내놓을 차례다.
그렇게 당패가 한껏 투지를 불사르고 있을 때였다.
쿠르릉!
저 멀리서 무서운 굉음이 울려 퍼졌다.
“이게 무슨 소리지?”
사왕단의 부단주이자 당패의 동생인 당악(唐岳)의 얼굴에 의문이 깃들었다.
당패가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일천 마인과 아군이 싸움을 벌이는 소리다.”
“뭐, 뭐라고?!”
당악은 혀를 내둘렀다.
“여기까지 거리가 얼만데 소리가…….”
“그 정도로 화려하게 부딪치고 있다는 뜻이다. 적의 군세는 구파 중 두 개 문파에 필적할 만큼 강하고, 아군에는 차기 천하제일이라는 연가의 장남이 있다.”
당패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막으려는 자들과 뚫고 들어오려는 자들의 싸움, 양측 모두 목숨을 돌보지 않고 싸우겠지. 피해가 클 것이다.”
“형님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정말 아군이 저들을 막을 수 있을 것 같소?”
“힘들 거다.”
당패의 목소리는 낮고도 낮았다.
“숫자가 적어도 전력 자체가 대단하다면 막을 수 있겠지. 하지만 양측의 전력이 비등한 상태라면 숫자가 적은 쪽이 많은 쪽을 다 잡아내긴 힘들어. 승패의 문제를 떠나서, 누구 하나라도 이쪽으로 온다면 그게 곧 실패다.”
“몇 놈쯤 여기까지 온대도 무슨 짓을 벌일지는 모르잖소?”
“그래서 실패다. 무슨 짓을 벌일지 상상도 가질 않으니까.”
“……!”
“대처 자체가 힘들다는 뜻이야. 적 중 일부가 이곳으로 돌진한다면, 삼백의 사왕단원들이 출격하여 무조건 없애 버려야만 한다.”
당패의 눈이 풍도박혼진으로 향했다.
냉정하기 그지없는 그의 눈에서 일말의 초조함이 엿보였다.
“……본가 최고 어른의 희생으로 만들어진 진법이다. 고로 반드시 이겨야만 한다.”
* * *
‘대단하구나!’
용호타구대진의 중심축인 장곤의 얼굴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달려 나가는 이 순간마저도 등허리가 서늘할 지경이었다. 적과 가까워질수록 신체에 전해지는 부담이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심지어 타구대진을 운용해 진세를 일으키며 돌진하는 와중인데도!
‘어떻게 나올지 상상하기도 힘들다. 공격보다 수비에 능하다는 것은, 반대로 말하면 하나 되어 움직이는 데에 능하다는 뜻이야.’
장곤은 남들이 생각하지 못한 그 이상을 볼 줄 알았다.
공세보다 수세에 능하기에 뚫고 들어오기 힘들 거라고 본 가득상과는 완전히 다른 시각이었다. 오히려 수세에 능하기 때문에 진법의 완성도가 높을 것이며, 파격적인 공격력은 부족해도 꾸준하게 밀고 들어오는 데에는 강점이 있을 거라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이었다. 유파마다 지닌 진법이 다르더라도 핵심 진리는 공유하는 법, 단단한 바위처럼 밀고 들어온다면 아무 생각 없이 부딪치는 건 자살 행위가 될 것이다.
‘게다가.’
화아아아악!
치솟는 마기는 마치 거센 화마가 휩쓸고 지나간 어느 폐허의 분위기와 같았다.
곳곳에서 시커먼 연기가 무럭무럭 올라온다. 맡기만 해도 숨통이 답답해질 것 같은 무거운 마기였다.
‘과연! 정예는 다르구나!’
눈 밑, 코부터 턱까지 시커먼 복면으로 가린 마귀들은 마치 꼭 닮은 인형을 여럿 늘어 놓은 것만 같았다.
한눈에 봐도 보통 재질이 아닌 듯한 검은 경갑을 찼고, 그 경갑 위에 시커먼 피풍의를 둘렀다. 시커먼 바지 위에는 각반을 찼으며, 검은 장갑까지 껴서 두 눈만 빼고는 피부가 드러난 곳이 없었다.
그야말로 흑색 일색의 부대다. 검은 파도가 몰아치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 파도의 중심에는 유독 덩치가 크고 검붉은 피풍의를 휘날리며 돌진하는 기수가 있었다.
‘저자가 이 부대의 장이다!’
눈빛부터가 달랐다. 존재감은 일천 군세의 마기로 인해 잘 느껴지지 않았으나, 필경 노구당원 중 맞상대할 만한 자를 찾기 어려울 만큼 강할 것이다.
‘어려운 싸움이 되겠어.’
하지만, 그래도.
적의 존재에 잔뜩 긴장한 와중에도 장곤은 투지 넘치게 돌진했다.
그뿐만이 아니라 모두가 그러했다. 어떤 일에도 심각하게 반응하는 일이 없던 노구당원들이 지금은 두 눈에 불을 켠 채 달려 나가고 있었다.
어디서부터 기인했는지 알 수 없는 놀라운 투지.
뜨거운 가슴으로 적을 향해 공세를 퍼부으려던 장곤은, 시기적절하게 터져 나온 ‘누군가’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물을 짜라!”
쩌렁쩌렁하지 않은데도 반경 수백 장을 뒤덮는 목소리.
용호타구대진의 중심인 장곤과 풍운타구대진의 중심인 대죽신개(大竹神丐)가 저도 모르게 외쳤다.
“용호신망(龍虎神網)!”
“풍운천라(風雲天羅)!”
파바바박!
좌측으로 돌진하던 용호타구대진이 넓게 산개하며 촘촘한 그물을 형성했다. 우측으로 돌진하던 풍운타구대진은 두 겹으로 중첩되며 기세를 일으켰다.
용호풍운의 타구대진 중 가장 완벽에 가까운 방어력을 자랑하는 진법이 펼쳐졌다. 적의 첨병을 분쇄하여 기세를 꺾으려던 장곤과 대죽신개의 판단과 달리, 이 전장을 주시하는 누군가는 시작부터 완벽한 보호막을 치려고 했다.
그때, 검붉은 피풍의를 입은 덩치 큰 기수가 외쳤다.
“열망(裂網).”
그 목소리를 들은 노구당원들은 순간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숨 막히는 마기가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듣는 것만으로도 시야가 흔들리고 내공이 폭주할 것만 같았다.
‘엄청난 마기!’
마기의 밀도가 상상을 초월했다. 나아가, 단순히 높은 경지에 이른 게 아니라 마기 자체에 정신과 마음을 흔드는 섭혼(攝魂)의 이능이 섞인 것만 같았다.
파바바박!
순식간에 두 개의 송곳처럼 나뉜 마인들의 진세가 단숨에 용호풍운과 격돌했다.
콰아아아앙!!
진세와 진세가 부딪치며 천지를 뒤집을 듯한 폭음이 울려 퍼졌다.
“크아악!”
“으윽!”
시작부터 화려한 충돌이었다. 한순간 넓게 퍼진 용호풍운의 진세를 뚫지 못할 것을 직감한 마인들의 서슴없는 돌격진이었다.
노구당원 십여 명이 피를 토하며 쓰러졌고, 그물을 친 노구당원들의 장력에 맞은 마인 십여 명이 그 자리에서 허물어졌다.
그때, 놀라운 일이 발생했다.
콰드드득!
쓰러진 동료들을 그냥 밟고 지나간다.
밟힌 마인들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내기가 역류하며 피를 토했고, 척추와 사지가 부러져 죽어 갔다.
장곤의 눈이 흔들렸다.
‘이 독한 놈들이!!’
그 광경만으로도 이놈들이 어떤 각오로 왔는지 알 수 있었다. 만약 이놈들을 악산에 들이면, 무슨 일이 생겨도 크게 생길 거라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막아라! 한 놈도 놓쳐선 안 돼!”
하지만 시작부터 불안했다. 연신 치고 들어오는 마인들의 돌격진에 벌써 용호풍운의 그물이 힘을 잃는 듯했다.
장곤과 대죽신개의 눈빛이 흔들리던 그때.
번쩍!
일직선으로 날아온 검은 돌풍 두 개가 마인들, 혈황단의 두 첨병을 갈아 버렸다.
콰드드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