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197)
흑백무제 1197화(1197/1200)
1197화. 이전투구(泥田鬪狗) (7)
눈을 감은 채 나른한 얼굴로 잠을 자고 있던 사내가 번쩍 눈을 떴다.
“혈존?”
부르르.
사내의 왼손이 살짝 떨려 왔다.
호화로운 반지와 보석으로 치장된 손은 마치 학질에 걸린 듯 덜덜 떨리고 있었다.
사내의 얼굴에 선명한 불쾌함이 떠올랐다.
신(神)을 자처하지만, 그는 신이 아니었다. 그저 남들이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한 인간일 뿐.
아무도 볼 수 없는 자신만의 공간에서 마음껏 인간미를 뽐내며, 그가 중얼거렸다.
“참으로 곤란한 남자로다.”
후우우우웅!
왼손에서 뿜어져 나오는 회색빛 연기가 사내의 눈앞에 두둥실 떠오르며 서서히 회전했다.
휘이이이잉!!
점차 엄청난 속도로 회전하던 회색빛 연기가 이내 어두운 구슬 비슷한 무언가를 만들어 냈다.
사내가 그 구슬에 대고 물었다.
“뭔가?”
구슬은 아무런 말도, 소리도 뱉지 않았다.
그러나 불쾌함으로 가득했던 사내의 눈은, 마치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듣기라도 한 듯 살짝 커졌다.
“……유천주가?”
구슬이 마치 사내의 왼손이 떨리던 것처럼 은은한 진동을 발했다.
사내의 얼굴이 점점 진지해졌다. 그 와중에도 크게 놀란 기색은 없었다.
“당금 강호에 유천주를 어찌할 수 있는 사람은 단둘뿐이다. 그중 하나는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반쪽짜리 선인에 불과해. 남은 하나도 불도(佛道)보다 마도(魔道)에 더 가까운 녀석이지.”
구슬이 또 한 차례 떨렸다.
사람이 들을 수 없는, 진기의 파동과 의념으로 전달되는 무언의 대화였다.
사내의 눈이 깊어졌다.
“유천주가 죽을 수도 있다…… 확실한 미래는 누구도 볼 수 없다지만, 자네가 그리 말할 정도면 뭔가 큰 사건이 터지긴 하는 모양이군.”
천기(天機)를 읽고 미래를 예지하던 당대 최고 기인이 혈신(血神)의 정통 제사장이 되었다.
광혈의 사제장과는 그 의미부터가 다른 진정한 의미의 제사장으로, 과거 혈교 때부터 교의 길흉화복을 점치던 최고 중요직이자 군사직까지 겸하는 만인지상의 위치가 바로 제사장의 자리다.
그 사람을, 혈교인들은 존경과 두려움을 담아 혈존대사(血尊大師)라 불렀다.
비록 아직 혈교가 부활하지는 못했으나 제사장만큼은 확보되었다. 물론 그 후보들도 존재하나, 당대 제사장이 죽지 않는 한 후보들은 아무 쓸모가 없다.
말하자면 혈존대사의 존재 자체가 혈교 부활의 신호탄이 될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실제로 삼교는 혈존대사가 나타난 후, 본격적으로 내부 정리에 착수했다.
만약 중원 내부에서 일이 터지지 않았다면, 삼교 내부부터 어떻게든 정리를 끝낸 연후에 전쟁을 일으켰을 터.
그리고 사내는, 삼교의 다른 사람들이 막연하게 생각해 왔던 삼교일통의 준비를 아주 오래전부터 해 왔던 남자였다.
그런 사내에게도 유천주가 죽을 수도 있겠다는, 다른 사람이 말했다면 코웃음을 쳤을 그 말은 꽤 충격적일 수밖에 없었다. 죽음을 목전에 두어 흉성(凶星)의 힘을 오롯이 발휘하지 못하는데도 가능성이 있다고 말하다면, 정말 유천주가 위험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일단 알겠네. 조금만 더 버티도록 해. 자네의 생명을 연장해 줄 물건을 보냈으니까.”
구슬의 떨림이 희미해졌다.
사내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나저나 자네, 예전과 다른 곳에 있는 듯하군. 내 착각인가?”
후우우우웅.
구슬이 점점 그 형태를 잃어 갔다. 사내가 아닌 구슬 너머에 있는 누군가의 힘이 다했다는 뜻이었다.
화아악!
흩어진 회색빛 안개가 다시 사내의 왼손으로 빨려 들어갔다.
“……천위룡.”
사내의 얼굴에 묘한 빛이 어렸다.
“그 녀석이 죽을 수도 있다고?”
천위룡이 혈황단까지 이끌고 대륙으로 향했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초전을 치르고 이제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되려는 순간에 삼교 수장 중 하나가 직접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은 보통 큰일이 아니다. 같은 삼교에게도, 대륙에게도.
“여전하구나, 천위룡. 네놈에게는 이 전쟁이 아무것도 아니지. 그저 최고에 오르기 위한 수단에 불과할 뿐.”
그리고 그것은, 사내도 마찬가지였다.
신화교 놈들은 하나같이 멍청하다. 애초에 삼공가 시절부터 그러했다. 놈들은 그저 불의 상징으로서 앞을 가로막는 것을 다 태우는 것에 급급했을 뿐, 진정한 본질이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 한 자락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이렇게 휘둘리는 것이다. 덕분에 꽤 편해지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안쓰러운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천위룡은, 그가 이끄는 광혈교는 달랐다.
‘혈신의 힘을 발화하지도 못한 주제에 스스로 대군을 일으켜 대륙으로 향했다…… 네 녀석도 어지간히 급했던 모양이다.’
다만, 영음산에서 혈존대사와 비밀리에 접촉하고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는지는 궁금했다.
다 떠나서 거기까지는 알 수 있다 치더라도, 고(蠱)를 보내기도 전에 대군을 이끌고 갔다는 건 영음산 내부의 정보가 천위룡에게로 넘어갔다는 것을 뜻했다.
사내가 다시 눈을 감았다.
‘사우 그놈은 아니야.’
처음에는 그놈을 의심했지만, 떠오르자마자 사라진 의심이기도 했다.
사우는 사냥꾼이다. 그놈은 분수에 맞지 않게 영음산의 주인을 사냥하려 하고 있으며, 그 과정에서 무슨 짓이라도 저지를 수 있는 놈이다.
즉, 사우가 중간에서 광혈교의 세작 노릇을 하는 것은 사냥꾼 노릇을 하는 것과 아무 상관이 없다. 오히려 큰 공을 세워 독대를 청하거나 교주의 개인 호위가 되어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는 것이 사우의 방식이었다.
그렇다면 결국 답은 하나.
“이보게, 혈존.”
사내가 미소를 지었다.
온화하기 그지없는 그 미소는 흉신악살의 얼굴보다 공포스럽고 흐린 달빛 아래의 어느 묘지만큼이나 음산했다.
“자네는 혈신을 보필하는 자일 뿐, 혈신을 고르는 자가 아니라네. 천기를 읽는 그 눈으로 스스로를 돌아보지 못하니, 참으로 제사장이라는 자리에 걸맞은 자가 아닌가 싶군.”
스륵.
사내가 태사의에 몸을 더 깊이 묻었다.
그러자 그의 얼굴이 어둠에 잠기는 듯했다.
“세상은 여전히 재미있어. 아주 먼 옛날부터 지금까지.”
* * *
쩌어어어어엉!!
휘어지듯 휘둘러진 광룡부 일격에 전(前) 세대 삼사제장이었던 동령의 몸이 미친 듯이 뒤로 밀려났다.
동령의 사이한 눈동자에 놀라움이 어렸다.
“네놈, 정말 대단하구나!”
연호정의 왼손이 광룡부를 든 오른손 밑으로 질러졌다.
퍼어어엉!
실로 오랜만에 펼쳐진 금룡번천장이었다. 산봉우리를 통째로 뒤흔들 것 같은 강력한 장법에 마인 십여 명이 또 휩쓸려 나갔다.
동령은 정말이지 감탄을 금치 못했다.
상대가 구사하는 무공도 무공이지만, 이룬 경지가 너무나도 대단했다. 온전한 육신을 갖고 있어도 이길 수 없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네놈은 절대 우리를 막을 수 없을 것이다.’
혈황단의 특성을 어떻게 알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만약 이와 같은 경우를 어디선가 본 것이라면, 필시 그 자존심도 없는 사음교 놈들이었을 테지.
하지만 사음교와 광혈교는 뿌리부터가 달랐다.
깃대를 들고 전진하며, 동령이 외쳤다.
“슬슬 눈들을 떠라!”
번쩍!
그 외침에 혈황단의 대주직을 맡던 두 사람의 안광이 번뜩였다.
훅!
그때, 연호정의 신왕지안(神王至眼)에 심상치 않은 마기 두 줄기가 포착되었다.
숨 쉴 틈 없이 몰아치는 마인들의 파도 속, 이상할 정도로 어두운 기운 두 개가 음험하게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연호정의 미소가 짙어졌다.
“뭐가 달라도 다르군.”
“그렇게 여유를 부릴 때가 아닐 텐데!”
쩌어엉!
흑혈신마가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깃대로 연호정의 광룡부를 내리친 동령이 재차 돌진하며 깃대를 찔렀다. 마치 거대한 장창을 운용하는 듯했다.
사락!
단숨에 흑혈신마의 머리를 뛰어넘은 연호정이 좌권을 휘둘렀다.
평범한 정권이지만, 그 안에는 황금빛 비단을 뒤집어쓴 미친 용의 숨결이 담겨 있었다. 금룡번천장과 함께 창안한 권법, 금룡진악권(金龍鎭嶽拳)이었다.
콰앙!
폭음과 함께 동령의 몸이 십여 보 후방으로 밀려 나갔다.
번쩍!
천종운행비가 아니었다.
혈익휘천을 닮았지만, 그보다 훨씬 더 유연했다. 마치 청룡공의 청룡답운보와 비슷한 움직임이었다.
그러나 질주하는 발걸음에 실린 위압은 백호군림보를 닮았고, 화포를 쏴도 부서지지 않을 반투명한 금빛 기운은 현무공의 괴주부동이 자아내는 진기 방패를 닮았다.
아직 이름조차 짓지 못한 황룡보법(黃龍步法)이었다. 사신무의 특성을 하나씩 녹여 낸 창안한 것으로, 극의에 이르긴커녕 이제 시작인 보법이었다.
동령의 눈이 커졌다.
‘도끼는?’
어느새 광룡부는 흑혈신마 옆에 둥둥 떠 있었다. 연호정은 흑백쌍룡부 두 자루만 등허리에 매단 채 달려오고 있었다.
쾅! 쾅!
광룡부만큼이나 무거울 것 같은 깃대가 변칙적으로 움직이며 전진을 막았지만, 연호정의 권장은 깃대가 그려 내는 투로를 너무 쉽게 튕겨 내고 있었다.
완벽하진 않다고 해도 무공 구현 능력만큼은 과거 그 시절과 변함이 없을 터. 그런데도 연호정의 권장은 전대 사제장의 병기 투로를 손쉽게 파훼하고 있었다.
동령의 얼굴이 무섭게 굳어졌다.
‘어떻게!’
힘에서 밀리는 건 이해한다. 경지도 한 차원 높을 테니, 정기신이 일체되지 않은 지금 상태로는 이기는 게 힘들 것이다.
하지만 투로를 저리도 쉽게 파훼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영역이었다. 광혈교의 무공이, 오랜 시간 연마되고 정제된 자신의 투로가 뿌리부터 뒤흔들리고 있었다.
훅!
깃대를 올려 치고 하단 빈틈으로 들어온 연호정이 금룡번천장을 쳐 냈다.
콰앙!
“컥!”
그야말로 제대로 들어갔다. 엄청난 전사경이 걸린 장법이 동령의 복부를 시작으로 그의 온몸에 무자비한 충격파를 뻗어 냈다.
순식간에 동령의 몸이 피투성이가 되었다. 칠공은 물론 피부가 힘의 여파를 이기지 못해 찢어져서 대량의 선혈을 분출하고 있었다.
사악!
연호정은 동령을 끝장내지도 않았다. 단숨에 흑룡부와 백룡부를 양손으로 쥐고 전도(剪刀)처럼 교차해 휘두르는데, 손도끼의 거리를 초월하는 금빛 부기(斧氣)가 통과한 마인들의 목을 단번에 잘라 버렸다.
화아아악!
그 마인들까지 죽자, 음험하게 솟구치던 마기의 주인 둘이 순식간에 동령 옆으로 이동했다.
왈칵 피를 토한 동령이 핏발 선 눈으로 연호정을 노려보았다.
“아무리 너라도 셋은 어려울 것이다.”
동령 우측에 선 자는 거대한 활을 들고 있었고, 좌측에 선 자는 지마후가 휘둘렀던 것과 비슷한 크기의 참마도(斬馬刀)를 어깨에 걸치고 있었다.
궁사(弓師)는 전대 사사제장(四司祭長) 괴극, 도객은 전대 이사제장(二司祭長) 함천이었다.
괴극이 얼굴을 찌푸렸다.
“이 비루한 몸뚱이로 돌아오기 싫었거늘.”
다소 신경질적으로 느껴지는 괴극의 목소리에 비해, 함천의 목소리는 낮고 깊었다.
“적이 누구라도 남은 생(生)을 불태운다.”
동령이 씨익 웃었다. 치명적인 일격을 맞았는데도 죽지 않은 걸 보면, 생명력 하나만큼은 정말 보통이 아니었다.
“너희는 절대로 우리를 막지 못……!”
퍼어어억!!
함천과 괴극이 칼과 화살을 들어 교차해 막기도 전, 어느새 회전해 날아간 교룡쇄가 동령의 가슴을 뚫어 버렸다.
연호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다 튀어나올 건가?”
“……!!”
“더 있으면 지금 다 불러라. 박멸은 미리미리 하는 게 나도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