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201)
흑백무제 1201화(1201/1255)
1201화. 이복형제 (1)
무서운 속도로 남하한 야율대극과 영귀사제들은 순식간에 호북으로 접어들었다.
당연히 하남은 거치지 못했다. 그곳은 무림맹과 소림사가 자리한 곳으로, 무림 정보력의 밀도가 가장 높은 곳이었다. 아무리 조심히 남하해도 걸릴 수밖에 없을 터다.
섬서를 끼고 남하한 그들은 거대한 산을 앞에 두고 멈춰 섰다.
“불쾌하군.”
야율대극의 얼굴이 한껏 찌푸려졌다.
오히려 영귀사제들보다 더 끔찍해하는 것 같았다. 이 산에서 흘러나오는 비범한 영기(靈氣) 때문이었다.
무당산(武當山).
선해봉이 아니더라도 무당의 도사들이 산맥을 둘러보며 남기고 간 선기가 산의 정기와 맞물려, 안 그래도 도교 명산이라 칭송받던 무당산의 선기를 한껏 키워 놓았다.
오염된 영음산의 사마기(邪魔氣)를 이용, 사정(邪精)을 얻어 궁극의 무공을 연마한 그에게 있어 무당산은 존재 자체만으로도 평정심을 뒤흔드는 곳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벽을 넘어 극사의 경지에 진입한 이에게는, 이 영기도 불쾌할지언정 무공이나 성정에 영향을 주지는 못했다.
“이곳을 다 뒤질 수는 없을 터.”
야율대극이 품에서 작은 구슬 하나를 꺼내 들었다.
“어쩔 수 없지.”
혈존대사의 혈마기(血魔氣)를 추적하는 비보(秘寶), 적란(赤卵)이었다.
전성기 때의 혈교에서도 고작 다섯 개를 제조했을 뿐이며, 이제는 그 존재조차 불분명해졌다는 전설의 보주(寶珠)가 시공을 뛰어넘어 무당산 앞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적란이 움직이면 무당파도 움직일 것이다. 그 망할 도사 놈들이 마기를 읽고 찾아오면 큰 싸움이 벌어질 터, 너희는 목숨을 걸고 놈들을 막아야 할 것이다.”
“명심하겠습니다.”
“그나저나 호연합은 지금 어디 있나?”
“잠시 거점에 정보를 받으러 갔습니다. 곧 올 것입니다.”
“음.”
야율대극은 초조함을 느꼈지만, 심호흡으로 마음을 다스렸다. 평소라면 이런 일로 초조해하지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들자 새삼 무당산의 선기가 증오스러웠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빠르게 달려온 호연합이 야율대극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사제관님.”
“새로운 정보가 있나?”
“사천에서 큰 싸움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혈황단으로 추정되는 부대가 사천성 악산이라는 곳에 도달하였고, 이내 모두 산화하였다고 합니다.”
“산화? 혈황단이?!”
“그리고…….”
호연합의 얼굴에 초조함이 일었다.
“엄청난 마기를 뿌리는 붉은 머리카락의 괴인이 사천성을 벗어나 동쪽으로 움직이고 있다 합니다. 조금 전에 들어온 정보이니, 그자가 극사에 도달한 고수라면 지금쯤 호북에 들어왔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야율대극의 눈이 흔들렸다.
붉은 머리카락의 괴인이 누군지는 모른다. 그러나 엄청난 마기를 뿌리는 작자가 동쪽으로 이동했다면, 만에 하나의 경우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적란을 발동하겠다! 모두 전투를 준비해라!”
* * *
사왕단을 백 장 밖으로 물린 연호정은 고요히 풍도박혼진을 바라보았다.
화아아아악!
이제 남은 마인은 백 명도 되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며, 연호정은 뜻밖에도 안타까움을 느꼈다.
‘사는 방식은 다 다르다지만.’
어쩌면 저 마인들은 자신들의 삶을 제대로 선택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아주 어릴 때부터 잡혀 와 교도들의 자식이 되어, 광신에 가까운 세뇌로 저런 삶을 살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토록 열렬한 광신으로 생을 불태우던 저들의 삶은 이런 식으로 마무리되고 있었다.
물론 연호정은 안타까움을 느낄 뿐, 저들을 동정하진 않았다. 저들에게는 저러한 행위 자체가 행복일 수도 있었다. 타인 한 명 한 명에게 연민과 슬픔을 느낀다면, 정작 내 삶을 제대로 살지 못한다.
나아가, 저들이 봤을 때는 오히려 중원 무림의 사람들이 훨씬 더 불쌍할지도 모른다. 아니, 그럴 것이다. 평생 그런 환경에서 살아왔으니까.
결국은 서로를 절대 이해할 수 없는 사이다. 안타깝기는 해도 저들의 무의미해 보이는 죽음을 막지 않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었다.
설령 그런 마음이 들지 않았더라도 저들은 적이었다.
저들 중 하나가 살아남아 무고한 민간인을 죽인다면, 연호정은 평생 후회할 것이다. 그럴 바에야 스스로 소멸하는 저런 천명도 그의 입장에서는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좋지.’
연호정이 눈을 감았다.
‘싸워야 할 놈들이 줄어드는 거니까.’
씁쓸한 현실, 그러나 지금은 냉정해야 했다.
‘결국 이 모든 분란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머리를 잘라 버리는 것이 유일한 길이다.’
다시 뜨인 연호정의 눈은 흔들리지 않았다.
우우우우웅!!
풍도박혼진의 떨림이 처음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졌다.
초절정고수라도 단순히 불길함을 느낄 뿐, 현재 어떤 일이 발생하는지는 모를 것이다.
그러나 연호정은 알고 있었다. 극단적으로 발달한 상단전과 새로이 탄생한 황룡신왕공의 신안(神眼)은 풍도박혼진의 기본 원리와 현재 상태를 모조리 꿰뚫어 보았다.
‘사라진다.’
내부에 갇힌 자의 기(氣)를 빨아들여 성장하는 죽음의 진.
기생자가 죽으면 진도 허물어진다. 한번 갇히면 무신(武神)이라도 살아남을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놀라운 공부였다.
그러나.
무신이 아닌 사신(邪神)이나 마신(魔神)이라면 저 진을 파훼할 수 있다.
무시무시한 공양물을 바쳐서.
‘결국 이렇게 되는구나.’
혈황단은 호위 부대가 아니다.
그들은 먹잇감으로 키워졌다. 다른 누구도 아닌 광혈교주의 목숨을 위해.
그중 절반은 진짜 호위인 전대 사제장들을 소환하기 위한 제물이었고, 남은 절반은 광혈교주의 생을 불사르기 위한 제물이었다.
극심한 부상, 죽음에 준하는 피해를 입었을 때 광혈교주는 혈황단의 마인들을 치료제나 영약처럼 사용하여 생을 이어 간다. 어쩌면 그 방법이야말로 가장 불사(不死)에 가까운 길인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불사는 마도(魔道)다. 생(生)과 사(死)는 하나인 법, 이 세상에서 나고 자란 생물은 생사 중 어느 하나만을 취사선택할 수 없는 법이었다.
대자연의 진리이자 원칙을 거부하고 한길만을 고집하니, 이것이 곧 역천(逆天)이다. 마도의 정점이 불사라는 것은 당연한 수순인 것이다.
‘그러나.’
연호정의 눈이 번뜩였다.
이제 마지막 열 명만이 남았다.
‘너는 불사가 아닌 죽음을 위해, 다시 이 세상에 나와야 할 것이다.’
‘혈신강림, 일심제신’이란 말을 외치며 다섯 명이 더 풍도박혼진으로 뛰어들었다.
그때였다.
퍼버벅!
앞서 가루가 된 마인들과 달리, 방금 뛰어든 다섯 마인의 몸은 산산이 박살 나서 사방으로 흩어졌다.
치이이이익!
동시에 진에서 자욱한 독기가 뿜어져 나왔다. 반구형으로 검게 일렁였던 표면이 이리저리 출렁이며 형태를 바꾸기 시작했다.
‘드디어.’
형태가 변하며 독기를 뿜었다는 건, 풍도박혼진의 근본인 십만십방벽의 내부 독기가 외부로 빠져나오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 말인즉, 풍도박혼진이 붕괴되고 있다는 뜻으로도 볼 수 있었다.
‘무려 오백에 가까운 목숨을 집어삼키고서야 무너진단 말인가.’
새삼 풍도박혼진이 얼마나 지독한 진법인지 알 수 있었다. 진기의 밀도 차이가 극심하다 해도 고수라 할 만한 마인 오백 명의 마기와 생명력까지 빨아먹고 나서야 만족하고 무너지려 하다니? 심지어 그전까지는 광혈교주의 내공을 빨아먹고 있었을 터다.
‘한계가 있구나.’
동시에, 풍도박혼진도 완벽하지는 않다는 것이 증명된 셈이었다.
내부에 갇힌 자는 누구도 살아남을 수 없지만, 외부에서 동류(同流)의 내공을 퍼부으면 자생하던 진이 만족하여 스스로 붕괴한다.
이를 달리 말하면 오백에 이른 마인의 기운을 다 합쳐야 광혈교주의 힘과 비슷하다는 뜻. 밀도 계산을 따져도 인세에 이만한 내공량을 가진 자는 또 없을 것이다.
‘역시 혈신의 적통. 내공이 상상을 초월해.’
광혈교주 역시 풍도박혼진에 갇히자마자 이 진의 특성을 깨달았을 것이다.
그래서 혈황단을 불렀을 것이고, 결국 파훼해 냈다.
찌이이이익!
부서지는 소리가 아니라 찢어지는 소리가 난다.
이내 유독 하얀 손 두 개가 진을 뚫고 나왔다. 장막을 걷듯 손을 좌우로 천천히 벌리니, 꿈틀대던 풍도박혼진이 비명을 지르며 독기를 뿜었다.
사아아아악!
사방으로 뻗어 나가는 십만십방벽의 독기에 땅이 녹아내리고 대불누각 일부마저 삭아 버렸다.
남은 다섯 마인의 얼굴에 황홀함이 깃들었다.
“혈신강림!”
“일심제신!”
찢어진 진 속에서 묵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오거라.”
파아아앙!
다섯 마인이 단숨에 진 앞에 섰다.
그리고.
치이이이익!!
허연 연기와 함께 다섯 마인의 몸이 순식간에 쪼그라들었다.
풍도박혼진에 생기를 흡수당한 게 아니었다. 진을 찢고 나온 광혈교주에게 잡아먹힌 것이다.
“……부족하구나.”
아쉬움이 남은 듯한 목소리. 그런데도 굉장한 위엄이 실려 있었다.
“배부르지는 않지만, 이 정도면 괜찮겠지.”
사람의 생기를 빨아먹고도 아무런 죄책감이 없다.
그에게는 너무나도 당연한 일일 뿐이었다. 그리고 그에게 먹힌 마인들 역시 마음을 다해 스스로를 바쳤다.
“정말이지 지독한 진법이로다. 사라진 혈교 비전의 지옥진(地獄陣)이 이러할까. 사천제일이라 하더니, 실로 대단한 놈들이구나.”
감탄이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오랜 시간 진 안에 갇혀 있었음에도 정신적 충격을 받기는커녕 마음 한 톨도 흐트러지지 않은 듯했다.
“규홍은 죽었군. 하긴, 그 늙은이의 무공을 버티기는 쉽지 않았겠지.”
마침내.
파아아아악!
진을 완전히 파괴하고 나온 광혈의 신(神)이 눈을 감은 채 고개를 젖혔다.
우두둑!
천천히 돌아가는 목에서 섬뜩한 소리가 났다.
“며칠이나 흘렀을까. 족히 일 년은 지난 듯한데 바깥세상의 시간 흐름은 또 다를 터. 늦지 않았다면 좋겠는데.”
우둑! 우두둑!
몸 여기저기를 풀며, 그가 중얼거렸다.
“바람의 향기가 크게 다르지 않구나. 기껏해야 열흘 정도인가.”
갇히기 전에는 시커멓기만 했던 머리카락이 피처럼 붉었다.
머리카락만이 아니었다. 새하얘진 피부도, 조금은 야윈 대신 커진 골격도 이전의 그를 연상키 어려웠다.
점점 더 진체(眞體)에 가까워진다. 힘을 사용하면 할수록, 반로환동(返老還童)으로 힘의 낭비를 최소화하던 본래의 몸이 실체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그나저나.”
번쩍!
지금껏 감고 있던 눈을 뜬 천위룡이 연호정을 보았다.
“놀라운 고수로군. 그 늙은이보다 훨씬 더 강해.”
“…….”
“한데 왜인지…… 네놈에게서는 불쾌하고도 익숙한 냄새가 나는구나.”
천위룡의 마안(魔眼)이 붉게 물들었다.
“네놈은 누구냐?”
“광혈교주.”
“누구기에 오색(五色)의 힘을 담고 있는 것이냐? 누구기에 나와 같은 근원을 갖고도 이렇게나 이질적인 기(氣)를 소유한 것이냐?”
연호정이 희게 웃었다.
순간 천위룡은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상대의 웃음에 등허리가 서늘해진 것이다.
“그래, 네놈이 광혈교주로군.”
“…….”
“귀하신 몸, 이렇게나마 보게 되어 영광이라 해야 할지 모르겠다.”
심상치 않은 목소리였다. 분노, 슬픔, 회한, 광기 등 오만 감정이 다 깃들어 있었다.
여유로 가득하던 천위룡의 얼굴이 점차 굳어졌다.
“다시 묻겠다. 네놈의 정체가 무엇이냐?”
“나는 연가의 장남이고 흑제성의 성주이며…….”
광룡부가 슬피 울부짖었다.
“당대 사신무장(四神武將)인 연호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