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202)
흑백무제 1202화(1202/1255)
1202화. 이복형제 (2)
“이……!”
백 장 밖이라도 고수인 당패의 눈은 천위룡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설령 눈으로 보지 못했더라도 알 수 있었다. 풍도박혼진이 찢겨 날아가며 뿜어진 독기와 그 안에서 풍겨 나오기 시작한 절대적인 마기가 모두의 신경을 자극하고 있었으니까.
“형님.”
당악의 얼굴에 숨길 수 없는 긴장이 떠올랐다.
“정말로…… 광혈교주가 튀어나왔소.”
당패가 이를 악물었다.
‘도대체 왜?!’
하늘이 무너져도 연호정의 말은 믿으라던 가주님의 말씀.
당패는 그 무시무시한 신뢰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가주님께서 예전과 많이 달라지셨다는 건 알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같은 혈족이 아닌 타인을 이렇게까지 믿을 수 있단 말인가.
‘흑백무제의 명성이 천하를 진동한다는 건 알고 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이 상황은…….’
상황 자체도 이해할 수 없을뿐더러 강렬한 불쾌함이 올라왔다.
풍도박혼진.
저 진법은 당가 진법 기예의 궁극이자 무신조차 잡아 죽일 수 있는 절대의 봉인기다.
비록 잠깐이었지만 당패 역시 풍도박혼진의 원리를 공부하다가 고개를 저었을 정도였다. 대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는 진기의 흐름이 상상을 아득히 초월하는 섬세함으로써 이루어진 진법이 풍도박혼진이었다.
그리고 그 진법은 당가의 기술이었다.
당가의 기술이라면 중원 제일 기술이라는 말과도 상통한다. 한데 광혈교주가 그 진을 찢고 나온 것이다.
‘제아무리 희생양이 필요했다지만…….’
어떤 방식으로라도 진법을 파괴한 순간 당가의 명예에 오점이 생긴 셈이었다. 당유광을, 당형을, 나아가 사천당가 자체를 누구보다 사랑하는 당패 입장에서는 정말이지 울분을 참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흑제성주. 그대는 당가의 자존심을 짓밟았소. 도대체 무엇을 얻기 위해 이런 짓을 저질렀는지 모르겠지만, 사태가 악화된다면 그대는 응당 당가의 분노를 받아 내야만 할 것이오.’
그때, 당악이 말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되오.”
“뭐가 말이냐.”
여전히 천위룡을 주시하는 당패의 얼굴은 바위처럼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다.
당악이 혀로 입술을 축이며 말을 이었다.
“광혈교주가 풍도박혼진에 갇힌 순간 그의 호위 부대가 이동했다고 들었소. 과연 그놈들은 교주의 신상에 이상이 생긴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싶소.”
당패가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개방의 거지들이 말하는 것을 듣지 못했느냐? 놈들에게는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 사술이 있다. 교주와 영적으로 이어졌다면, 교주의 신상에 이상이 생긴 순간 움직여야만 한다는 걸 깨달았겠지.”
“그런 공부가 정말 존재할 수 있는 것인지 모르겠소.”
“나도 모른다. 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하려 할 필요는 없다. 적어도 지금은.”
“더 이상한 건 놈들의 행동이오.”
연호정의 무시무시한 언령에서 해방된 이후라 그럴까?
당악은 평소와 달리 상당히 냉정하고 꼼꼼했다.
“풍도박혼진은 우리도 처음 보는 기예 아니오? 한데 놈들은 저 진을 보자마자 뛰어들었소.”
“그게 뭐가 이상하단 말이냐?”
“그게 어찌 안 이상하오? 진법을 부수려고 칼을 뽑아 휘두른 것도 아니고, 기공술로 후려친 것도 아니오. 마기를 퍼붓지도 않았지. 너무 당연하다는 듯 곧장 달려들었을 뿐이오.”
“……?”
“마치 그렇게 하면 교주 놈을 살릴 수 있다고 확신하는 것처럼.”
“……!!”
당패의 눈이 흔들렸다.
당악의 말이 옳았다. 저 미친 마인들은 풍도박혼진이 어떤 진법인지도 모르면서 마구 뛰어들어 목숨을 잃었다.
‘생각해 보니…….’
심지어 눈앞에서 동료들이 가루가 되어 흩어지는 걸 봤음에도 당황하지 않았다. 마치 그것이 당연하다는 듯 광신에 젖어 스스로 목숨을 내놓았을 뿐.
‘어떻게 그런 것이 가능하지?’
이내 당패가 탄성을 질렀다.
‘설마 천리전음(千里傳音)과 비슷한 수법을 쓸 수 있었단 말인가?’
풍도박혼진은 진 내부와 외부를 완벽하게 분리하는 수법이다. 실제로 그 안에서는 시간의 흐름마저도 다르다고 들었다.
말하자면 진법 안과 밖이 이승과 저승만큼이나 철저하게 분리되어 있다는 뜻인데, 광혈교주는 그조차도 무시하고 부하들에게 전음 비슷한 술수를 쓸 수 있었단 말인가?
‘정말 무섭구나.’
그게 사실이라면 광혈교주는 단순히 강하기만 한 고수가 아니었다.
마공은 물론 온갖 사술이나 법술에도 능할 가능성이 크다. 대자연의 기(氣)를 이용한다는 관점에서 무공과 술법은 극에 가까워질수록 경계가 희미해진다고 하나, 본질적인 차이는 분명한 법이다.
시작부터 무공과 술법을 다 배우고 있었다면, 그로 인해 궁극의 영역에 도달했다면.
정말 그렇다면 광혈교주야말로 약점이 없는 지상 최강의 인간이라고 할 수 있었다.
당악이 우울한 얼굴로 말했다.
“빌어먹을, 이제는 정말 하늘에 빌어야 할지도 모르겠소.”
상념에 젖었던 당패가 당악을 돌아보았다.
“그건 또 무슨 말이냐?”
“형님도 체감하고 있지 않소? 광혈교주가 얼마나 무시무시한 놈인지.”
“……그래. 그 무시무시한 놈을 본가의 태상과 방계 어르신께서 잡았지.”
“두 분도 두 분이지만, 흑제성주 연호정은 무림에서 삼교와 가장 많이 싸웠다는 맹장이 아니오. 삼교를 향한 증오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깊다고 하던데.”
“나도 그렇게 들었다. 그래서 더 지금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어.”
“그렇소. 광혈교주가 굳이 수하를 불렀다는 건, 수하 없이는 풍도박혼진을 탈출할 수 없었다는 뜻이오.”
“당연하지. 누구도 풍도박혼진을 벗어날 수 없다.”
“그걸 흑제성주라고 몰랐을 리가 없을 것이오.”
당악이 한숨을 쉬었다.
“세상 누구보다 삼교를 증오한다면 교주가 진 안에서 죽어 버리도록 놔뒀어야 했는데, 굳이 우리를 물리면서까지 끄집어냈소. 그렇게 삼교를 증오하는 인간이.”
“……?!”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뭔가가 있다는 뜻일 텐데…… 제기랄, 그게 뭔지를 알아야 말이지.”
당패의 눈이 살짝 커졌다.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뭔가가 있다?”
“안 그러면 흑제성주가 왜 광혈교주를 풀어 줬겠소?”
“…….”
“만약 그게 아니라면 정말로 흑제성주가 광혈교주와 한패라는 뜻인데, 가주님 말씀을 생각하면 절대 그럴 양반은 아니고.”
당악의 눈이 깊어졌다.
“하지만…… 솔직히 나는 저 양반을 아직 믿질 않소. 그러니 광혈교주와 한패일 수 있다는 가정도 버릴 수가 없소. 그리고 정말로 그렇다면…….”
“…….”
“중원은 중원 무림을 가장 잘 아는 동시에 가장 큰 신뢰를 받는 차기 천하제일인을 상대해야 한다는 뜻이오.”
무시무시한 말이었지만, 당패는 당악의 마지막 말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뭔가가 있다고?’
대체 그게 뭘까?
당패는 가주 당관을 믿었다. 당관이 흑제성주를 믿으라고 했으니 불만이 있어도 물러나 준 것이다.
만약 그가 광혈교주에게 원하는 것이 있다면.
도대체 그게 무엇일까?
* * *
“사신무장…….”
천위룡의 눈이 깊어졌다.
“사색광인과 무슨 사이냐.”
단번에 사색광인을 언급한다.
청해 신마림에서 만났던 전대 광혈교주처럼, 당대 교주인 천위룡 역시 사색광인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반응은 사뭇 달랐다.
전대 교주는 사색광인을 향한 뿌리 깊은 증오를 품고 있었다. 그러나 천위룡은 놀라기만 했을 뿐, 증오가 아닌 흥미를 품고 있는 듯했다.
연호정은 그 차이가 무공에서 기인한 것이라 보았다.
완전한 상태가 아니었던 전대 교주의 무공도 충분히 무시무시했다. 하지만 천위룡의 무공은 그보다 더 대단했다.
경지도 경지지만, 연마하고 있는 마공의 완성도가 실로 엄청났다. 아직 겪어 보지 못했으나 느껴지는 마기 밀도만 봐도 가히 천하제일을 논할 만한 정도였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나와 비슷하다.’
황룡신왕공의 진기와 상대의 진기가 묘하게 공명한다.
신(神)과 마(魔)의 차이가 있을 뿐, 근본적으로 같은 힘을 공유하고 있다.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실제로 느껴 보니 이렇게나 불쾌하고도 그리운 힘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사부님.’
천위룡의 무시무시한 마기 너머로 스승의 얼굴이 보인다.
‘사부님께서도 이와 비슷하셨군요.’
이십 대 나이에 이미 완성형의 무공을 손에 넣었고, 이후 전전대 사신무장을 만나 새로이 태어난 스승은 얼마나 위대한 무인이었나.
일생일대의 난적을 앞에 두고 할 생각은 아니었지만, 연호정은 정말이지 스승이 보고 싶었다.
‘저는 이제야 증오와 한을 제대로 내려놓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연호정의 눈이 조금 더 맑아졌다.
과거 자신이었다면 광혈교주를 만난 즉시 문답 무용으로 도끼를 휘둘렀을 것이다. 하늘조차 증발시킬 살기로 온몸을 불태우며 맹목적으로 적을 죽이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러한 난적을 앞에 두고도 증오보다 스승을 향한 그리움을 느낀다.
이 순간, 연호정은 자신이 크게 성장했음을 깨달았다.
무인이 아닌 사람으로서는 어린애와 같았던 자신이, 이제 진짜 인간다운 인간이 되어 가고 있음을 느낀 것이다.
“어찌하여 말이 없는가.”
“사신무장에 관해서 잘 알고 있군.”
“사신무장은 몰라도 사색의 힘을 다루는 미친 배신자에 대해서는 아주 잘 알고 있지. 전쟁이 끝난 후, 사색광인은 사색의 힘을 합쳐 놀라운 신공을 창안했다고 하였다.”
천위룡의 눈이 가늘게 뜨였다.
“본교의 오색지옥공을 가져가서 말이다.”
“…….”
“네놈에게서는 지옥의 냄새가 나. 내 몸에서 풍기는 나락의 향기와 같다.”
연호정은 속으로 심호흡을 했다.
증오와 한을 온전히 내려놓았다지만, 그것은 맹목적인 감정의 영역이었다.
상대가 내 고향을 짓밟을 광신도들의 수장 중 하나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를 향한 분노와 살기가 없을 수가 없었다.
연호정은 그러한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숨긴다고 못 알아볼 상대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이제부터 나는 사신무장이기 전에 혈교 역사상 최강자로 불리던 무인의 제자일 뿐이다.’
연호정이 눈을 부릅떴다.
“그대의 힘이야말로 놀랍군. 같은 지옥력(地獄力)에서 시작했지만 이렇게나 다른 가지를 뻗어 낼 수 있다니,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신마(神魔) 어디든 갈 수 있는 힘이다. 그렇다 해도 놀랍구나.”
천위룡이 고개를 저었다.
“본교 역사상 최고의 천재라더니, 이렇게나 완성도 있는 신공을 만들어 냈을 줄이야. 우리는 수 세대를 지나 삼십 년 전에야 완성했거늘, 그는 삼백 년 전에 홀로 완성시켜 이처럼 본인의 대(代)를 잇고 있었단 말이지.”
연호정이 사방무제의 직전제라는 것은 모른다.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아무리 그라도 연호정의 스승 천인룡이 삼백 년을 넘게 살았다고는 생각하기 힘들 것이다.
천위룡이 좌측을 바라보았다.
백 장 밖으로 떨어진 사왕단의 모습이 그의 눈에 고스란히 보였다.
잠시 그들을 보던 천위룡이 다시 연호정을 돌아보았다.
“굳이 저들을 물리면서까지 나를 도와준 이유가 무엇이냐? 그대의 간접적인 도움이 없었다면 일이 아주 힘들어졌을 터, 그걸 모르진 않겠지.”
천위룡이 미소를 지었다.
너무나도 잘생긴 얼굴과 기가 막히게 어울리는, 동시에 기괴하게도 느껴지는 살기 넘치는 미소였다.
“나를 직접 죽이고 싶었나?”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내 비록 천하제일의 재능을 타고났다고 자부하나, 연륜이 깊지 못하여 아직 궁극에 이르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죽이고 싶어도 아직은 그대의 힘에 미치지 못해.”
천위룡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다면 어찌?”
“이렇게 대화할 여유가 있나?”
“뭐?”
연호정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대사(大師)를 손에 넣고 싶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