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205)
흑백무제 1205화(1205/1255)
1205화. 이복형제 (5)
노인의 모습은 참혹했다.
마른 체형이라도 정도가 있는 법, 노인의 몸은 그 정도를 넘어 거의 백골로 보일 만큼 야위어 있었다.
오랫동안 입은 옷은 거의 다 해졌고, 그마저도 뼈밖에 남지 않은 몸 때문에 헐렁하여 더욱 볼품이 없었다. 가부좌를 튼 다리는 앙상하기 그지없어 땅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울 듯했다.
두 발의 발톱은 세 개를 제외하고 다 빠졌으며, 손톱은 마치 짐승의 그것처럼 두꺼웠다. 두피에는 거의 다 빠져서 얼마 남지 않은 머리카락들이 제멋대로 뻗쳐 있었다.
중병에 걸려 죽은 시체를 보는 듯했다. 와중에 호흡도 지극히 가늘어서, 자세히 보지 않으면 숨을 쉬기나 하는 건지 의심이 갈 정도였다.
스으으.
그런데도 한 번씩 안개처럼 퍼진 무언가가 노인의 콧속으로 서서히 빨려 들어갔다.
안개를 빨아들일 때마다 노인의 눈썹이, 손끝이, 혹은 몸통이 희미하게 떨렸다. 그러다가 다시 시체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고, 또다시 안개가 들어오면 신체의 한 부분이 떨리거나 꿈틀거렸다.
누가 봐도 기괴하다는 말이 절로 나올 광경이다. 하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허억.”
느닷없이 입을 벌려 신음을 토하던 노인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툭.
노인의 등 뒤에서 무언가가 뽑혀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끔찍하게도 노인의 등에는 바로 뒤에 있던 나무의 얇은 뿌리들이 박혀 있었다. 본래는 수십 개가 박혀 있었을 것이 분명한데, 이제는 다섯 줄기밖에 남지 않았다.
“……너무 늦는구나.”
노인이 눈을 떴다.
해골을 연상케 하는 얼굴, 그리고 그 얼굴 위에 둥둥 뜬 시뻘건 안광.
시체에서 귀신이 되는 순간이었다. 도무지 사람처럼 보이지 않는다.
“이렇게 가는가.”
노인은 원통함을 느꼈다.
동시에, 생에 대한 강렬한 집착이 올라왔다. 그는 정말이지 선기 만발한, 이런 불쾌하기 그지없는 곳에서 최후를 맞고 싶지 않았다.
“사문향…… 진정 나를 버릴 셈이더냐.”
노인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귀신 같은 눈동자에 분노와 원한, 살기와 초조함, 슬픔과 억울함 등의 감정이 배어 있었다.
“나를 버리면, 네놈은 절대 삼교를 일통할 수 없을 것이다.”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너무나도 미약했다.
심지어 몇 마디 중얼거린 게 전부인데도 어느새 호흡이 거칠어졌다. 그에 따라 주위 안개도 일렁거렸다.
노인은 독살스러운 눈으로 안개를 노려보았다.
“호시탐탐 나를 죽이려고 애를 쓰는구나.”
그때였다.
-자연으로 보내 주기 위함이야.
순간 노인의 눈이 번뜩였다.
“닥쳐라, 이 저주받은 망령아!”
죽은 줄 알았던 인격이 다시 올라왔다.
노인은 믿을 수가 없었다. 혈신의 힘을 받아들이고 그분을 모시기 시작한 후, 기존의 머저리 같았던 인격과 영혼을 빠르게 말살했다고 생각했으며 실제로 그러했다.
한데 죽음이 가까워져 오자 소멸했다고 생각한 그 인격이 되살아나 말을 걸고 있었다.
과거, 강호삼기(江湖三奇) 중 일인이라 불리던 최고의 점복술사이자 천기를 읽는 도사 통천진인(通天眞人)의 인격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는 흙에서 태어나 흙으로 돌아가는 이들이다. 너도 그와 같다.
“닥쳐라! 나는 절대 죽지 않는다! 삼교를 하나로 만드는 쐐기이며 영원불멸의 세상으로 나아갈 첫 번째 영혼이다!”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순환뿐이다.
“닥치라고 했다! 어서 꺼져!”
투둑!
감정이 격양되어 소리를 지르자 등에 꽂힌 나무뿌리가 두 개 더 뽑혀 나갔다.
이제 남은 뿌리는 세 개에 불과했다. 나무의 생명력과 무당산의 선기를 마(魔)로 가공해 억지로 목숨을 붙들고 있었는데, 이제는 그조차도 힘들게 생겼다.
노인이 이를 악물었다.
“나는 절대 죽지 않는다. 이렇게는 못 죽어.”
그때였다.
두근!
심장이 강하게 뛰었다.
노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건?’
두근! 두근!
무언가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러자 심박이 빨라지며 심장에 자리를 잡은 벌레가 구슬피 울음을 터트렸다.
노인의 얼굴에 환희가 어렸다.
“왔구나!”
적란의 마기(魔氣)에 몸이 반응하고 있었다.
어느새 주위의 안개도 무섭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한없이 자유롭던 선기의 안개조차 질겁을 할 만큼 막강한 마기가 접근하고 있는 것이다.
“늦지 않았구나. 진정 늦지 않았어.”
잠시 후.
안개를 헤치고 나타난 그림자가 노인의 시야에 포착되었다.
바로 야율대극이었다.
“왔는가.”
노인에게 다가선 야율대극은 순간 눈살을 찌푸렸다. 노인의 외양이 너무 비참했기 때문이었다.
“혈존대사, 맞소?”
순간 노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끔찍하기 그지없는 모습.
“이놈! 말투를 바로 하라! 혈교의 유일무이한 제사장에게 예를 갖추거라!”
야율대극이 차갑게 웃었다.
‘다 죽어 가는 늙은 망령 따위가.’
그는 유일무이한 신만을 인정할 뿐, 신이 아니면 존재 가치가 없는 이 멍청한 제사장을 인정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말투 같은 데 신경 쓸 시간에 힘이나 비축하시오.”
“이……!”
“성질낼 힘도 있고, 늦지는 않은 모양이군.”
야율대극의 불경한 태도에 노인은 정신이 다 아찔해지는 것을 느꼈다.
힘을 회복하고 사문향과 만나게 되면, 그때 이놈을 벌하라고 당당히 외칠 것이다.
“사백고는 가져왔느냐.”
야율대극이 품에서 상자를 꺼냈다.
노인은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어서, 어서 이리 내거라.”
“…….”
“뭐 하느냐, 이리 내지 않고!”
야율대극은 말없이 노인을 내려다보았다.
다급함에 침만 꼴깍 삼키던 노인은 문득 야율대극의 얼굴에서 서늘한 광기를 보았다.
“……네놈, 설마 나를 죽이려는 것이냐?”
“안 죽여도 알아서 죽을 것 같군.”
“이, 이놈!”
“신께서 말씀하셨소. 그대의 몸에 깃든 혈신지기(血神之氣)와 본연의 생기가 균형을 이루고 있다면 능히 사백고를 쓸 만하나, 그렇지 않다면 혈신지기의 씨앗을 여기에 봉인하여 또 다른 이를 제사장으로 만드는 게 좋을 거라고.”
“……!”
“사왕이 아니라 내가 온 이유요. 사술에 정통하여 제사장의 내부 상태를 온전히 볼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으니까.”
노인은 욕지기가 튀어나오려는 것을 느꼈다.
‘사문향, 이 빌어먹을 개자식이!’
혈교의 제사장을 언제든 바꿔 버릴 수 있는 하인처럼 취급하고 있다. 정말이지 이런 수모를 당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하지만 노인은 화를 내지 않았다. 눈앞의 이 미친놈 앞에서 교주 욕을 해 봤자 성질만 건드리게 될 뿐이다.
“그렇다면 더더욱 빨리 내놓거라. 네 눈에는 보일 것이다. 내 몸의 생기와 혈신기가 균형을 이루고 있다는 게.”
“……그래, 그래 보이는군.”
야율대극의 눈이 깊어졌다.
“하지만 그 생기는 귀하 본연의 생기가 아닌 목기(木氣)를 기반으로 하고 있어.”
“……!”
“아까운 사백고를 이런 식으로 낭비해서야 쓰겠소?”
노인이 버럭 소리쳤다.
“이 멍청한 놈아! 나무의 생기를 빨아들였다는 것 자체가 언제든 부활할 수 있다는 뜻이다! 세상 만물 모든 기운을 생기로 치환할 수 있는 게 나다!”
“흐음.”
야율대극은 잠시 고민했다.
‘이자를 정말 살려도 좋은가.’
다급한 건 분명했지만, 노인의 말은 사실이었다. 만물의 기운을 생기로 치환할 수 있다면 그 성질이 조금 다를 뿐, 혈신지기와 균형을 이뤘다는 면에서 크게 문제 될 건 없었다.
진짜 문제는 이자의 성품이었다.
물론 감히 신 앞에서 사특한 언동을 부릴 거라 생각지는 않지만, 저 독랄한 성품을 보면 훗날 큰 해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야율대극의 눈빛이 점점 싸늘해지는 것을 본 노인이 황급히 말했다.
“나는 이전 제사장들과 달리 스스로 혈신과 접하여 힘을 얻었다. 그런 나의 능력이라면 너희 교주에게도 큰 도움이 될 터, 또한 교주의 능력이라면 언제든 나를 없애 버릴 수 있을 것이다.”
툭.
노인의 등에 박힌 뿌리가 또 하나 뽑혀 나왔다. 그러자 남은 두 개의 뿌리도 서서히 크기를 줄이기 시작했다.
감정이 격해지자 생기가 소모되고 혈신지기가 출렁거린다. 그 역천의 기운이 목기를 거부하기 시작한 것이다.
노인이 이를 악물었다.
“어서, 어서 내게 사백고를 다오. 교주는 한시라도 빨리 삼교를 일통하고 싶을 것이다. 새로운 제사장을 만든다 해도 자격을 갖추기까지 몇 년이 걸릴지 모르는 법, 나야말로 사음교주에게 필요한 제사장임을 정말 모르는 것이냐?”
차갑던 야율대극의 눈빛이 점점 깊어졌다.
‘틀린 말은 아니군.’
그저 신께 불경한 짓을 저지를까 봐 걱정이 될 뿐, 신의 안전에 위해를 가하지는 못할 것이다. 신은 신이니까.
그렇다면 중요한 건 쓰임새였다.
‘탁무자를 찾을까 싶었지만.’
탁무자의 무공을 생각하면 그를 제사장으로 만드는 것도 보통 어려운 일은 아닐 터.
야율대극은 입맛을 다셨다.
“좋소. 사백고를 건네겠소.”
스륵.
상자를 열자 붉은 비단 위, 눈곱만큼이나 작은 황금빛 벌레가 꿈틀거렸다. 사백고였다.
노인은 환하게 웃으며 사백고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때였다.
휘이이이잉!
주위에 가득하던 안개가 일제히 사방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야율대극의 눈이 번뜩였다.
“어떤 놈이냐!”
노인이 소리쳤다.
“어서 사백고를!”
야율대극이 노인에게 상자를 건넨 후 주위를 둘러보았다.
노인은 떨리는 손으로 사백고를 쥐고는 손톱으로 자신의 손목을 그었다.
주르륵.
피가 나자 사백고가 미친 듯이 흥분했다.
순식간에 노인의 손에서 빠져나온 사백고가 피를 쫓아 손목의 상처로 향했다. 황금빛 몸체가 순식간에 피처럼 붉게 물들었다.
그리고 사백고가 상처를 통해 혈관으로 들어가는 순간.
투두둑!
나무뿌리가 모두 뽑혀 나갔다.
“크윽!”
노인이 가슴을 움켜쥐며 쓰러졌다. 허옇게 눈이 뒤집힌 채 입에 거품을 무는 모습이 학질에 걸려 쓰러진 사람을 보는 듯했다.
하지만 야율대극은 노인에게 신경 쓰지 않았다. 노인의 저 모습이 사백고를 받아들인 후의 발작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이곳을 에워싸기 시작한, 심상치 않은 고수들의 존재였다. 데리고 온 영귀사제들로는 감당하기가 쉽지 않아 보였다.
“영귀사제들은 제사장을 보호하라.”
사사삭.
순식간에 모습을 드러낸 사제들이 노인 주변에 섰다.
야율대극이 숲을 향해 걸어가며 말했다.
“귀신 놀음은 그만하고 이리들 나오거라.”
그때였다.
“그놈 참, 버릇이 없어도 너무 없도다.”
투덜거리며 숲속에서 걸어 나온 조양진인이 머리를 긁적였다.
“근데 버릇없을 만도 하다. 나이도 어린 놈이 실로 대단한 무공을 연마했구나.”
“…….”
“아주 사특하기는 하지만.”
야율대극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러는 네놈은 나이가 많구나. 무공도 상당하고.”
“떽! 아무리 그래도 내가 네놈 조부뻘인데 말투가 너무 고약하구나.”
“누가 내 조부뻘이라고 하더냐? 내 나이도 벌써 육십이거늘.”
“어? 그래? 생각보다 많이 먹었네?”
“무당의 당대 장로들은 아니고, 전대인가?”
“눈치도 빠르고. 요새 애들은 뭐가 달라도 다르다니까.”
상대의 실력을 가늠했으면서도 장난스럽기 그지없다.
야율대극의 눈에 살기가 어렸다.
“시간이 아깝군. 다들 나오라고 하여라. 모조리 죽여 주마.”
“그게 무슨 헛소리야?”
조양진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미 다 나왔잖아.”
번쩍!
순간 조양진인을 필두로 한 다섯 줄기 검기가 하늘 높이 솟구쳤다.
야율대극의 얼굴이 굳어졌다. 다섯 개의 검기에서 심상치 않은 선기 밀도가 느껴졌다.
조양진인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원무신(元武神)도 아닌 놈이 감히 이 산의 사람들을 당해 낼 수 있을 듯싶더냐?”
“…….”
“기대하거라. 본산의 영양가 있는 간식으로 만들어 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