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215)
흑백무제 1215화(1215/1255)
1215화. 악의 도로(道路) (1)
치이이이익!
스러지지 않은 마기.
그 어느 때보다 불안정하지만, 마기 자체가 사라진 건 아니었다.
덕분이라고 해야 할까? 광세마공의 힘을 받은 황룡신왕공은 이전처럼 순식간에 연호정의 오른팔을 고쳐 놓았다.
우둑. 우두둑.
피가 멎고 뒤틀린 뼈가 본래 자리로 돌아간다.
무극에 이른 고수라면 신체를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다지만, 이런 속도는 낼 수 없다.
그리고 앞으로는 연호정도 이와 같은 회복 능력을 선보일 수 없을 것이다. 이 능력은 오직 천적, 광세마공을 마주한 황룡신왕공의 몸부림 덕에 태어난 것이니까.
하지만 연호정은 빠르게 정상으로 돌아오는 오른팔보다, 그 손에 쥐어진 도끼 손잡이에 더 신경이 쓰였다.
‘잘 가라.’
흑룡부.
한 자가 넘는 길이의 짧은 손도끼였지만, 그 안에는 사천당가 비전의 주조 기술이 집약되어 있었다. 명품 중의 명품, 신병(神兵)에 가깝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간 함께하며 무수히 많은 적을 물리쳤던 흑백 두 자루의 도끼 중 한 자루가 부서졌다. 악신과 마신의 충격파를 버티지 못한 것이다.
만약 흑룡부에도 의지가 있다면, 천하 최강을 넘보는 마신과 함께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에 기뻐할까.
“……대단하군.”
손잡이만 남은 흑룡부를 놓으며 천위룡을 바라보는 연호정.
뜻밖에도 그의 얼굴에는 싸우기 전까지 보여 주던 지독한 분노나 원한이 남아 있지 않았다. 담백하다 못해 단정하기까지 한 표정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천위룡 역시 마찬가지였다.
“대륙이 넓고도 넓다는 것은 들어서 알고 있었다. 이왕이면 이 넓은 구주 천하를 혈신의 궁전으로 삼고 싶었거늘.”
점점 불안정하게 꿈틀대는 마기.
그 정도 되는 무인이 진기를 통제하지 못한다는 것은 곧 치명상을 입었다는 뜻이었다. 다리와 몸통에 남겨진 참혼광룡의 절상도 낫지 않았다.
죽음이 임박한 것이다.
연호정이 눈을 감았다.
“하나만 묻지.”
“…….”
“그분의 마지막은 어떠했나.”
건조하기 그지없는 목소리에서, 다시 보지 못한 작은 인연을 향한 그리움이 묻어났다.
천위룡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분이라…… 암왕을 말함인가.”
“…….”
“친분이 있어 보이지는 않던데 왜 그런 걸 묻는지 알 수가 없군.”
깊은 친분까지는 없다. 그러나 언제나 가까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당관의 아버지이자 성천의 일인이었으며, 결정적으로 사천 대란이 종료된 후 그에게 받은 가르침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평생에 스승은 한 분뿐이나, 아버지나 남궁승처럼 자신을 깨달음으로 인도해 준 당형 역시 스승과 같았던 이라고 볼 수 있다.
담백한 얼굴 너머의 서글픔을 읽은 것일까.
천위룡이 한층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대단한 자였다. 내 휘하에 그보다 강한 자는 있지만, 그처럼 인상적인 무인은 없었지. 독공을 익혔기 때문이 아니야. 평생에 그처럼 위협적인 상대는 없었다. 너를 제외하고 말이다.”
다시 눈을 뜬 연호정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가문을, 자식을 지키기 위해 죽을 줄 알면서도 당당하게 길을 나섰던 태상가주.
비록 상종 못 할 악인이라고는 하나, 위대한 경지를 이룬 마신의 평가가 이와 같다면 저승에서도 만족하며 웃을 수 있을까.
‘꼭 알려 드려야지.’
지금 천위룡이 한 말, 반드시 당관에게 전해 줄 것이다.
아비의 복수조차 하지 못한 아들. 가주이기에 나설 수 없는 이 상황에 피눈물을 흘렸을 것이 분명한 그다. 적어도 이 말을 들으면 가슴 깊은 한의 일부나마 씻어 낼 수 있을 것이다.
“허무하구나.”
다시 고개를 내리는 연호정.
무릎을 꿇은 채 툴툴대듯 말하는 천위룡이다. 그동안 보여 주던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말투, 마공이 깨지며 인간적인 면모가 드러나는 것일까.
“하늘은 언제나 독존을 용납하지 않았지. 언제고 나와 맞설 자가 나타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렇게 빠를 줄이야. 대륙에 첫발을 내디딘 때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하늘이 독존을 용납지 않는다 함은 스스로가 언제든 파멸할 수 있다는 걸 염두에 두었다는 뜻. 천리(天理)를 알고도 역천을 행하고, 천적이 찾아올 걸 알면서도 무고한 사람들을 죽였으니 이 결과는 오롯이 네가 만든 것이다.”
아득한 목소리였다.
나아가, 평소의 연호정이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말이다. 치열한 전장에서 신이라고까지 불렸던 남자지만, 운명이 내려 준 숙적과 싸우며 하늘의 이치를 조금이라도 엿보게 된 것일까.
연호정의 말을 들은 천위룡의 얼굴이 차츰 굳어졌다.
“그렇다고 후회하지는 않는다. 나는 나만의 인생을 잘 살아왔어. 천적인 네가 나타났고 이 싸움에서 이기지 못했다는 사실보다, 혈신의 경지에 오르지 못했다는 사실이 더더욱 아쉬울 뿐.”
“잘났군.”
“하지만 조심하는 것이 좋을 거다.”
푸스스.
천위룡의 손등 위로 기이한 가루가 휘날렸다.
손등 피부가 멀쩡한데도 마치 갈려 나간 살점이 흩뿌려지듯 섬뜩한 광경이었다.
연호정은 그것이 폭주한 마공 때문임을 알았다. 폭주한 마공이 마기를 역류시켰고, 역류한 마기가 생명의 원천인 원정의 그릇을 깨부수고 있었다.
돌이킬 수 없는 상세다. 참혼광룡으로 뿜어진 황룡신왕공의 기운이 금강불괴에 이른 천적의 육신과 마공의 그릇을 전부 깨부쉈다는 증거였다.
물론 천위룡이라면 이 상태에서도 되살아날 방법이 있을 것이다. 깨진 원정으로 역류하는 마기를 모조리 집어넣어 다스린다면, 어쩌면 살아날 수도 있다.
그러나 천위룡은 그러지 않았다.
그렇게 산다 한들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이성이 날아가고 파괴밖에 모르는 괴물이 될 수도 있었다.
“본교에는 아직 여물지 않았으나 나 이상의 재능을 지닌 후계가 버젓이 존재한다. 내가 마흔에서야 깨우친 마공의 이치를 이립도 되기 전에 깨우친 불세출의 마인이지. 제아무리 너라도 쉽지는 않을 것이다.”
“걱정하지 마라.”
연호정의 안광이 은은한 금빛으로 물들었다.
“상대가 누구라도 광혈의 맥을 이었다면, 절대로 내 손에서 벗어나지 못할 테니까.”
사음교, 그리고 사음교주는 죽어서도 잊을 수 없는 원수이자 반드시 소멸시켜야 할 일생일대의 대적이다.
그와는 천리(天理)를 얘기할 필요가 없다. 천적이니 숙적이니 하는 표현도 어울리지 않는다. 그는 연호정에게 있어 가장 악랄한 적이며, 무조건 파멸시켜야 할 최악의 난적일 뿐이다.
하지만 광혈교주 천위룡은 달랐다.
파멸시켜야 할 악인이자 침략자는 맞지만, 같은 근원을 공유하는 존재로서 반드시 마주쳐야만 하는 숙적이기도 했다.
천위룡과 싸우며 연호정은 많은 것을 깨우쳤다. 조금 전까지 발휘되던 경천동지의 무력을 선보이긴 어려울 테지만, 이번 싸움에서 얻은 깨달음으로 황룡무(黃龍武)를 발전시킨다면 스승의 이름에, 사신무장이라는 별호에 부끄럽지 않은 최강의 고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개인적인 원한 이전에 태생부터가 만날 수밖에 없었던 두 사람.
차아아앙!
연호정이 백룡부를 뽑아 들었다.
짝을 잃어버린 서글픔에 부르르 떠는 백룡부의 도끼날이 신비로운 살기를 발했다.
천위룡이 미소를 지었다.
“그래, 무사로서 보내 주겠다는 뜻인가.”
“복호사태.”
“…….”
“아미파의 복호사태, 그분은 진실로 대단한 분이었다. 하늘이 내린 숙적이라고는 하나 너 같은 마졸의 손에 죽기에는 너무나도 대단한 분이었어.”
“…….”
“그것은 암왕 어르신도 마찬가지다. 살업(殺業)과 패도(覇道)로 얼룩진 인생이었다고는 하나 사천 사람들을 위해 항상 목을 내놓고 살던 분이다.”
화아아악!
연호정의 살기가 사위를 휩쓸었다.
“너의 손에 죽은 억울한 목숨이 어디 한둘이겠느냐. 하나, 그들 모두를 알지 못하는 나로서는 나와의 연이 깊은 그분들의 복수로 갈음하려 한다.”
스륵.
정기(正氣) 넘치는 백룡부의 도끼날이 천위룡의 목덜미에 닿았다.
“유언은 없느냐.”
평소라면 절대 뱉지 않았을 말이다. 곧장 도끼를 휘둘러 목을 쳐 버렸을 것이다.
그럼에도, 또 다른 원수라면 원수일 수 있는 광혈의 수괴에게 연호정은 나름의 예를 취했다. 상대가 대단해서가 아니었다. 그저 자연스레 이런 언행이 나왔다.
천위룡이 눈을 감았다.
“내가 살아온 인생이 곧 나의 출사표이자 유언이니라. 어정쩡한 강자가 아닌 하늘이 내린 숙적에게 패배했으니, 적어도 자존심은 가지고 갈 수 있겠군.”
최악의 배신자 사색광인.
그 사색광인의 후예에게 혈교 적통인 자신의 목숨이 날아간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후손을 낳기 힘든 천씨 일가임에도 자신보다 더 뛰어난 재능을 타고난 아들을 두었다는 것 정도.
‘얄궂기 그지없도다.’
천위룡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이미 완성을 향해 달려가는 무공일지라도, 아비가 아닌 교주로서 한 번 더 봐주고 싶었거늘.’
목덜미에서 예기가 사라졌다.
허공으로 떠오른 백색의 손도끼. 예기는 사라졌지만 살기는 더 강해졌다.
‘부디 혈교를 부활시킬 수 있기를.’
퍼어어억!
내리친 도끼에 천위룡의 목이 잘려 나갔다.
더할 나위 없이 깔끔한 일격. 목숨을 끊는 것을 넘어, 침투한 황룡신왕기가 꽉꽉 들어찬 마기까지 찢어발겼다.
퍼버버버버벅!
미친 듯이 흔들리던 목 없는 시신이 결국 옆으로 쓰러졌다.
사아아악.
쓰러진 육신은 점점 돌처럼 하얗게 굳어지더니, 이내 퍼석! 소리와 함께 부서졌다.
마인의 최후였다. 혈신의 경지에 이르지 못한, 아직 사람일 수밖에 없는 마도대종사의 죽음이었다.
“…….”
연호정의 눈이 깊어졌다.
뭔가 기분이 묘했다.
삼교의 수장을 처음으로 본 것은 기천웅이었다. 처음 그를 봤을 때, 은연중에 느껴지는 충격적인 기파와 놀라운 깨달음에 속으로 얼마나 긴장했던가.
하지만 그와는 적이 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것은 논리로 설명할 수 없는 육감이었다.
광혈교주 천위룡.
그가 풍도박혼진에서 나오기도 전부터 필연코 부딪칠 수밖에 없는 자라는 걸 확신했다.
그리고 지금.
삼교 중 무공만으로는 최강이라는 광혈교주를 죽였는데도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전생이자 미래였던 당시에는 얼굴 한번 본 적 없던 마인.
광혈교주의 죽음은 곧 삼교 세력 판도의 한 축이 무너진 것으로도 볼 수 있으니, 이는 중원에 있어 축복과 같을 것이다.
‘허무하구나.’
천위룡이 투덜거리듯 뱉었던 그 말이, 왜인지 이해가 갈 것 같기도 했다.
허무하다. 세상을 위진한 광혈교주가 죽었음에도 후련하지가 않다. 꼭 이런 식으로 마주쳤어야 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끝난 게 아니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니, 신세계를 보여 주던 황룡신왕기도 어느새 잠잠해졌다.
피로가 무섭게 엄습했고, 꽉 찬 내공도 돌덩이처럼 무거웠다. 상대할 마공이 사라지자 이번 싸움에서 얻은 부담이 심신을 짓누르고 있었다.
‘삼교를 모두 몰아내고 사음교주 놈까지 죽였을 때, 바로 그때 이르러서야 후련함을 느낄 수 있을는지.’
연호정이 고개를 돌려 기천웅 쪽을 바라보았다.
흉엄한 격전에 차마 다가오지도 못했던 두 사람. 기천웅이 고개를 끄덕이자 연호정이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든 연호정의 눈이, 무당산 한쪽에서 솟구치는 강렬한 선기(仙氣)를 읽었다.
적란의 마기, 기괴한 사기.
우우우우웅!
왼손에는 백룡부를, 오른손에는 광룡부를 든 연호정이 힘차게 땅을 박찼다.
숙적과 싸우며 얻은 황룡보법, 전설이 될 무장의 보법이 주인을 순식간에 목적지로 데려다주었다.
잠시 후.
콰아앙!
폭음과 함께 솟구치던 사기가 거세게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