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217)
흑백무제 1222화(1217/1255)
1222화. 악의 도로(道路) (8)
무림맹이 천라지망을 펼치던 그 시각.
무당산에 변고가 있음을 알아챈 승현진인은 옥청을 위시한 무당 제자들과 함께 전선을 뚫고 무당산으로 향했다.
“이것은……?!”
옥청의 눈이 흔들렸다.
아직 산에 들어가기도 전이지만, 그는 느낄 수 있었다. 산 전체를 감싸고 도는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그것은 마기(魔氣)의 흔적이었으며 파괴된 산이 토해 내는 울부짖음이었다.
우우우웅!!
무당파의 무신(武神)이라 일컬어지는 검선 탁무자가 집대성한 신공, 혼원결(混元訣)의 진기가 요동쳤다.
무당 무공의 정수가 깃든 혼원결의 내공이다. 깨달음과 이어지는 문(門)은 곧 무당산에 드리워진 선기(仙氣)와 강렬하게 동조하며 그 감정을 읽어 내고 있었다.
‘산이 울고 있다…….’
멍하니 산을 바라보는 옥청.
마치 무언가에 홀려 버린 것 같았다.
옥청과 달리 심유한 눈으로 무당산을 보던 승현진인이 입을 열었다.
“너희는 옥청과 함께 상청궁으로 오르거라.”
“장문인께서는……?”
“나는 산을 좀 둘러봐야겠다. 어서 가거라.”
그때, 옥청이 말했다.
“장문 사형. 저도 사형과 함께 가겠습니다.”
“짐작하고 있는가?”
“그렇습니다.”
“하면 그리하도록 하자.”
상황이 심상치 않은 듯한데도 문파로 돌아가지 않고 산부터 둘러보겠다고 한다. 이해할 수 없는 판단이지만, 제자들은 익숙한 듯 먼저 걸음을 옮겼다.
승현진인은 무극을 코앞에 둔 초절정고수였다. 세간에선 이보다 더 과한 힘이 필요치 않아서 굳이 무극에 오르지 않는다고 할 만큼 깨달음이 깊은 사람이 승현진인이었다.
하물며 그 옆에는 검선 탁무자가 무당 역사상 최고의 기재라 극찬한 옥청이 있었다.
비범하기 그지없는 두 사람이 느끼는 것은 아무래도 남다를 수밖에 없다. 제자들이 아무 말도 없이 본산으로 향하는 이유였다.
파아앙!
승현진인과 옥청이 산속을 내달렸다.
무당 최고의 신법 제운종이었다. 강력한 혼원기의 힘을 받아 다소 격해진 옥청의 제운종과 달리, 승현진인의 제운종은 여전히 부드럽고 자연스럽기만 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이건?!”
이 광경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반경 수십 장이 초토화가 되어 있었다. 뿌리째로 뽑혀 나간 거목들은 흔적만 남긴 채 가루가 되었고, 다소 경사졌던 땅은 부서지고 깎여 평평함을 자랑했다.
시커멓게 눌어붙은 흔적, 매캐한 냄새가 아직도 진동을 했다. 무당산의 신성한 바람으로도 씻어 내지 못한 격전의 향기였다.
옥청은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이런 마기(魔氣)가 있다니.’
잔존하는 것은 탄내만이 아니었다.
곳곳에 마기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한데 그 흔적에 불과한 마기만으로도 무시무시한 공포가 밀려든다.
파사현정의 힘을 품은 무당의 신공, 혼원결을 익히고 있음에도 스며드는 두려움을 막을 길이 없다. 상극이라는 힘이 무색한 절대마기(絶代魔氣). 인간의 육신에 담을 수 없는 역천기(逆天氣)의 총화(總和)였다.
“……대단하구나.”
형용키 힘든 감정으로 주위를 둘러보던 옥청과 달리, 승현진인은 무척이나 담담해 보였다.
천천히 자세를 낮춘 그가 바닥에 깔린 흙 일부를 손에 쥐었다. 초고온의 불꽃에 굳어 버린 땅에 얼마 남지 않은 흙이었다.
엄지로 천천히 흙을 쓸어 보던 승현진인이 손을 내렸다.
푸스스 흩어지는 검은 흙은 마치 악졸의 영혼이 부서지는 것만 같았다.
“발산한 힘은 화(火)요, 음양(陰陽)의 충돌로 빚어낸 뇌전기(雷電氣)다. 비록 발화의 근원에는 마공이 있었지만, 실질적으로 튀어나온 힘은 극에 이른 자연기(自然氣)다.”
탁월하다는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안목이다. 산에 남은 흔적만 보고도 이름 모를 마인의 마공이 어떤 것인지를 단박에 유추해 내고 있었다.
“마기 자체를 촉매로 쓴 것에 가깝구나. 당연히 신체가 받는 부담도 대단했을 터. 그런 힘을 이토록 무절제하게 썼다는 것만 봐도 그 마인의 심성이 얼마나 뒤틀렸는지, 또 이룬 경지가 얼마나 지고(至高)한지 알 수 있겠다.”
옥청이 힘겹게 입을 떼었다.
“도대체 어떤 마인이 있어 이와 같은 힘을 낼 수 있었을까요.”
승현진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옥청에게는 아직 일러 주지 않았지만, 사천의 아미파가 멸문했다는 정보가 어젯밤에 들려왔다.
그리고 아미파를 멸문시킨 것이 광혈교의 수장이라는 것도.
‘복호사태.’
깨달음 깊은 비구니였다.
어떤 의미로는 불가에 속했다기엔 지나치게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 주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승현진인은 복호사태가 좋았다. 불법과 인정(人情)을 한데 품은 사람, 찾아보기 힘든 그릇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어느 날인가, 갑작스레 좋지 않은 예감이 든다며 아미파로 돌아가 버린 복호사태는 삼교의 수괴에 맞서 제자들과 함께 입적해 버리고야 말았다.
승현진인은 저도 모르게 탄식을 토해 냈다.
‘어쩌면 나는 도(道)를 좇는다는 명목하에 세상사에 지나치게 무관심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더 열정적으로, 더 적극적으로 무림사에 뛰어들었다면.
정의로운 마음가짐으로 무림맹의 행사에 참여했다면, 어쩌면 복호사태도 그 지경이 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것은 승현진인의 잘못이라고만 볼 수 없었다.
흉수는 광혈교주였다. 미리 대비하지 못했다고 자책하기에는 그가 지닌 힘이, 사천으로 들어온 그의 존재가 너무나도 예상 밖이었다.
‘그러고도 모자라 이제는 무당산까지.’
사박. 사박.
눌어붙은 땅을 걸어가던 승현진인의 눈에, 문득 부스러진 회색빛 돌과 같은 물체가 보였다.
“이것은……?!”
다가가기 싫으면서도, 왜인지 눈을 뗄 수가 없는 물체다.
승현진인이 눈을 감았다.
“이 마기를 발산한 자다.”
“예?!”
“삼교에 대해 잘은 몰라도, 이처럼 파멸적인 마기를 발산하는 자가 또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기 힘들다.”
옥청의 눈이 부릅떠졌다.
“설마?!”
“그래. 이자가 바로 광혈교주인 모양이다.”
다시 눈을 뜬 승현진인.
순간 옥청은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봄날의 시냇물을 보는 듯 맑고 깊은 승현진인의 눈동자, 그 속에 깃든 강렬한 분노가 옥청의 가슴을 두들겼다.
제아무리 인자한 사람이라도 화가 날 수밖에 없다. 하물며 무당산은 영산(靈山)이라, 그 자체로 살아 있는 것과 같다는 것이 무당 어른들의 가르침이었다.
실제로 그러하든, 그렇게 믿어 왔을 뿐이든.
도가의 성지에서 이런 싸움이 났다는 것만으로도, 이런 마인이 출몰했다는 것만으로도 분노가 치밀 수밖에 없으리라.
“그렇다면 광혈교주와 싸운 사람은 대체……?”
“저기로 가 보자.”
옥청의 말을 자른 승현진인이 단숨에 제운종을 펼쳤다.
잠시 후.
“…….”
옥청은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아 버렸다.
“사숙…….”
완전히 증발해 버리고야 말았지만, 그들이 남기고 간 도복 자락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승현진인의 입에서 억눌린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칠성군검진의 흔적이구나. 광혈교주 외에, 또 감당키 힘든 마인이 출몰했던 모양이다.”
감긴 옥청의 눈에서 기어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하산한 후로 한 번도 뵌 적이 없지만, 오랜 세월 가족처럼 지냈던 사숙들이다.
그런 사숙들이 등선했다. 옷가지만 남았을 뿐이지만, 일대에서 그분들의 혼(魂)이, 무당신공의 잔향이 느껴졌다.
승현진인이 담담하게 말했다.
“슬퍼하지 말아라. 생사를 하나로 보는 경지에 오른 분들이다. 오롯이 무당산을 지키기 위해 모든 걸 던지셨으니, 결과가 어떻든 후학인 우리가 슬퍼하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다.”
“……예.”
하지만 사람의 감정이 그런 것이 아니다.
결국 옥청은 바닥에 엎어져 통곡했다. 그간 몇몇 전우들을 보내며 지독한 상실감을 느껴 봤지만, 가족 같은 사숙들이 이리도 허무하게 돌아가셨다는 사실이 견딜 수 없을 만큼 괴로웠다.
승현진인은 옥청을 그대로 놔두었다. 슬프기는 그도 매한가지였다. 하지만 무당파의 장문인으로서, 그에게는 할 일이 있었다.
“여기구나.”
승현진인의 손이 나무 옆, 유독 검게 물든 자리를 매만졌다.
“지독한 마기다. 광혈교주로 추정되는 그 마기와는 또 달라. 그쪽이 힘의 마기였다면, 여기는 근원을 알 수 없는 마기의 핵(核) 그 자체다. 이 또한 인간의 몸으로는 받아 낼 수 없는 성질의 것인데.”
승현진인이 눈을 감았다.
우우우웅!!
탁무자가 창안한 원무치상결은 상단전을 다스리는 데에 특별한 힘이 있었다. 술사들이 익히면 그 자체로 상단 심법과 같은 공능을 발휘하며, 술사가 아니더라도 청정한 마음과 차가운 이성을 유지케 하고, 나아가 천지에 퍼진 영기(靈氣)를 느낄 수 있었다.
무당 장문인으로서, 비록 무극에는 오르지 못했다고 하나 그의 깨달음 역시 지고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번쩍!
원무치상결과 형제와도 같다는 상단 심공(心功), 일원양신결(一元養神訣)이 오랜만에 모습을 드러냈다.
어딘지 모르게 혼탁하게 변한 승현진인의 눈빛. 그러나 그것은 그의 눈이 이승의 물질적인 세계 너머에 존재하는 영적인 세계를 보기 시작했음을 의미했다.
‘이런……!’
승현진인은 크게 당황했다.
‘이런 마귀가 있단 말인가.’
마치 용암 한 덩이가 뚝 떨어졌다가 식은 것처럼.
육안으로는 시커멓게만 보이던 그 흔적이, 영안(靈眼)이 트인 승현진인의 눈에는 불길하기 그지없는 핏빛으로 보였다.
‘말도 안 되는 밀도다. 이 정도의 마기는 존재할 수도 없고, 존재해서도 안 돼. 득도를 눈앞에 둔 선인(仙人)의 정신조차 삽시간에 파괴할 만큼 진한 기운이다.’
주르륵.
승현진인의 코에서 핏물이 흘렀다.
원무치상결보다 더 적극적으로 상단전의 힘을 끌어다 쓰는 것이 일원양신결이었다. 다스리고 치유하는 힘인 원무치상결과 달리, 선도(仙道) 수련의 막바지라는 양신(養神)을 완성하지 못한 자라면 큰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우우우웅!
일원양신결을 다독인 승현진인이 코피를 닦았다.
“도저히 믿을 수가 없구나. 이 정도 마기를 지닌 자가 들어왔음에도 산의 정기가 무너지지 않은 것은, 이 땅에 흩어진 선사들의 영기 덕분이라고밖에 설명할 수가 없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읽은 옥청 역시 애써 마음을 다스렸다. 가눌 길 없는 슬픔에 가슴이 진탕되었지만, 지금은 슬픔에 젖어 있을 때가 아니었다.
“광혈교주만 한 마인이 또 있다는 것입니까?”
“광혈교주와는 다르다. 광혈교주의 마기 흔적은 실로 지독했지만, 그래도 그 안에 인간적인 생기(生氣)가 있었다. 사람의 힘이었다는 것이지.”
“하면……?!”
“이 마기는 근본적으로 뭔가가 다르다. 밀도만 본다면야 광혈교주의 그것과 큰 차이가 없으나, 생령(生靈)으로서 연마한 흔적이 없다.”
“……!!”
“마치 진실로 마신(魔神)이 있어, 그 마신의 힘을 빼앗아 오기라도 한 것 같다. 인간이라면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힘이야. 설령 깨달음 깊은 수행자가 받아들였다 해도, 수년 내에 영육(靈肉)이 흩어지고야 말 것이다.”
승현진인이 저 멀리 북쪽을 바라보았다.
북쪽에서부터 천천히 서쪽으로 움직이는 고개. 조양진인조차 볼 수 없는 것을 보는, 당대 무당파 장문인의 능력이었다.
“서천(西天)에 암운(暗雲)이 드리운다. 북쪽에서는 전화(戰禍)의 씨앗이 움트고 있어. 양신결을 적극적으로 이용해서라도 두 화(禍) 중 하나는 끊어 놔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