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218)
흑백무제 1223화(1218/1255)
1223화. 악의 도로(道路) (9)
“오신다는 얘기는 들었습니다.”
“……!”
“처음 뵙겠습니다. 후학 당관이 음제를 뵙습니다.”
깍듯하게 고개를 숙이면서도 딱히 대단한 예의가 있지는 않다.
그것은 그의 기질 때문이었다. 사천의 패자로서, 그리고 새로운 사천의 제왕으로서의 자존심과 무게감이 진하게 실린 목소리였다.
한 가문의 수장으로서, 동시에 무림의 후배로서 부족함이 없는 인사였다.
하은교는 감히 그 인사를 편하게 받지 못했다.
“하은교라 하네. 명성 자자한 당씨 문중의 주인을 보게 되어 영광일세.”
포권지례로 가볍게 화답한다. 무림의 선후배끼리가 아닌 일대 종사끼리의 인사였다.
“한데 나와 제자가 사천으로 오고 있다는 걸 어떻게 아셨는가?”
“아직 부족하지만, 사천과 인근한 지역의 정보까지 저희에게 들어옵니다. 물론 선배님께서 작정하고 몸을 숨기셨다면야 저희로서도 알 수 없었을 겁니다.”
하은교는 내심 감탄을 금치 못했다.
‘대단하구나.’
청성과 아미, 구대문파 중 무려 두 곳이 있는데도 사천 하면 사람들은 당가부터 떠올린다.
그것은 당가의 무력 이전에 그들의 존재감 때문일 것이다. 차라리 소림을 건드리고 말지 당가는 건드려선 안 된다는 말, 강호 무림에서 가장 위험한 집단이라는 인식 때문에 사람들은 사천 무림을 두려워했다.
하지만 이렇게 보니, 실제로 그만한 능력이 있는 듯했다. 평생 고고하게 강호를 전전했지만, 이렇게까지 빠르게 자신의 위치를 잡아내는 세력은 단 하나도 없었던 까닭이다.
“사람들이 사천당가를 두려워하는 이유를 알겠네. 하물며 당대 가주의 무력이 이처럼 대단하니, 차기 천하제일가의 명성은 사천에서 나겠네.”
하은교로서도 이와 같은 칭찬은 흔치 않은 일이었다.
당관의 반응은 더 놀라웠다.
“부족하기가 한량이 없습니다. 더 위대해질 수 있도록 목숨 걸고 노력하겠지만, 천하제일은 당치도 않습니다.”
뜻밖의 대답이었다.
만난 적은 없어도 당가 사람들의 자부심을 넘어선 오만함을 하은교라고 모를 리가 없었다. 한데도 이런 대답을 하는 것이다.
그저 선배 앞이니 예의를 차리는 건가 싶었지만, 아무리 봐도 그런 건 아닌 듯했다.
진실로 천하제일은 멀었다는 눈빛, 표정과 목소리에도 진심만을 담아냈다. 굳이 거짓을 논할 필요가 없다는 자부심의 일환이라면, 그 또한 당가답다고 할 수 있겠다.
“좋네. 참으로 좋아. 호정이 자네를 그리도 높게 평가하더니, 다 이유가 있었어.”
당관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랬습니까.”
“구대문파와 육대세가의 수장 중 대단하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겠나. 그중에서도 유독 자네만을 콕 집어 말했어. 친분과는 별개로 입에 발린 소리를 할 만한 아이가 아니잖나.”
당관의 눈이 반짝였다.
이미 알고는 있었지만, 지금 그 말로 인해 하은교와 연호정의 친분을 실감할 수 있었다. 몇 마디 안 되는 말속에 연호정을 향한 절대적인 신뢰가 있다. 친자식처럼 여기는 듯했다.
‘역시나 대단한 놈이야.’
연호정이라는 공통분모가 있어 얘기를 꺼내면, 누구 하나 연호정을 불신하는 사람이 없다. 심지어 한평생 조직에 매이지 않고 살아온 하은교조차도 그런다.
조직, 성별, 고하(高下)를 따지지 않고 신뢰를 쌓아 올렸다. 이미 천하에는 연호정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는 것이다.
“나와 제자가 이곳으로 오는 걸 알았다면, 왜 왔는지도 알고 있을 걸세.”
“그렇습니다. 싸가지 그 녀석은 광혈교주를 보러 왔지요.”
“싸가지?”
“제 나름의 애칭입니다.”
하은교와 지소현이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애칭이라기에는 담겨 있는 의미가 단순하지 않은데? 악우(惡友)처럼 여기는 듯하네만.”
“제 입장에선 싸가지가 없기도 합니다.”
“이해하네.”
“어쨌든, 호정은 다시 떠났습니다.”
“뭐라고?!”
하은교는 깜짝 놀랐다.
“어디로 말인가?”
“제 부친과 당숙 어른께서 광혈교주를 붙잡아 두었었지요. 그를 데리고 사천을 벗어났습니다.”
“싸우지 않고…… 벗어났다?”
섣부른 짓 하지 말고 자신을 기다리라 했건만, 기어이 건드린 모양이었다. 그것부터가 심장이 덜컥 내려앉을 일이었다.
한데 싸우지 않고 함께 어딘가로 향했다?
연호정의 성격을 생각하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상대가 삼교, 그것도 수장 중 하나라면 눈이 돌아가서 생사결부터 펼쳐야 마땅하다.
“그곳으로 보낸 전투 부대 수장에게 들은 바로, 광혈교주를 가두었던 당가의 진법을 일부러 파훼하는 데에 일조한 모양입니다.”
“당가의 진법?!”
“풍도박혼진이라는 절세의 기진입니다. 그 안에 갇힌 자, 삼교주가 아니라 그 누구라도 버틸 수 없습니다. 실제로 광혈교주는 그 안에서 죽어 가고 있었지요. 본가 진법 중에서도 비견될 만한 것이 없는 역작이니 당연합니다.”
진법은 펼치기까지가 어려울 뿐, 한번 펼쳐지면 어지간한 고수도 대처가 힘들다. 하물며 당가 진법 중에서도 역작이라면 그 얼마나 대단할지 짐작이 간다.
하은교의 얼굴이 굳어졌다.
“가만두면 죽었을 것을, 호정이 일부러 빼냈단 말인가?”
“그렇다고 합니다.”
“……도대체 왜?”
당관이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습니다. 그놈 머리 안에 뭐가 들었는지 아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해도 사곤 하지요.”
“오해라니? 설마…….”
“예. 그놈이 삼교와 손을 잡고 중원을 배신한 게 아니냐는 말이 나왔습니다.”
순간 하은교의 눈빛이 강렬해졌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분노한 음제의 호통이었다. 내공을 끌어올리지 않았는데도 산천초목이 떨리는 위엄 넘치는 목소리가 나왔다.
“호정은 당대 무림의 중심이요, 선봉장이야! 호정이 아니었다면 중원은 진즉에 삼교 놈들 손에 떨어졌을 터! 그런 호정을 두고 배신자라니, 말 같지도 않은 헛소리일세!”
흥분한 하은교와 달리 당관은 침착했다. 침착한 걸 넘어 무덤덤하기까지 했다.
“호정은 무림맹 안에서 흑도로 전향한 것에 대한 비난도 감수했습니다. 그를 비난했던 자들 모두가 삼교 세작의 손에 놀아났다는 걸 알게 된 뒤로, 호정은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중원 무림의 핵심이 되었지요.”
“내 말이 그 말이네! 어떤 상황이라도 호정이 중원을 배신할 가능성은 없어! 대체 어떤 정신 나간 놈들이 그런 소리를 한 건가! 호정이 지난날 세운 공훈과 목숨 바쳐 지켜 낸 생령들의 존재를 벌써 잊어 먹기라도 한 것인가!”
순간 당관 뒤에 도열한 당패와 당악, 그리고 사왕단원들의 얼굴이 붉어졌다.
당관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만큼이나 신뢰를 받는 녀석이 혹 배신자가 아닐까라고 생각할 정도로 광혈교주를 놓아준 것은 엄청난 일입니다. 특히 저희에게는 더더욱 그렇지요.”
“아무리 그렇다 한들……!”
“광혈교주를 진에 가두기 위해 제 부친께서는 목숨을 내놓으셔야 했습니다.”
“……!!”
순간 하은교는 말문이 콱 막히는 것을 느꼈다.
당관의 아버지라면 암왕 당형을 뜻한다. 사천 무림 최강자이자 당가 무공의 전능자로 평가받는 당대 무림에서 가장 위험한 남자.
그런 사람이 광혈교주를 진에 가두고 죽었다고 한다.
비록 패도로 얼룩진 인생이었다고는 하나, 당가를 넘어 사천 무림의 자존심과 같았던 사람이 당형이었다. 그런 그가 목숨을 불태워 가둔 광혈교주를 풀어 줘 버렸으니, 사천 무림의 분노도 이해할 만했다.
“그래, 마음은 알겠네. 하지만 지금은 전쟁 중이야. 그리고 호정은 지금도 심장을 꺼내 놓고 살지. 지금껏 호정이 해 왔던 일과 그의 심성을 안다면, 빈말로도 배신자라는 말을 해서는 안 될 일이야.”
탄식 어린 하은교의 말에 사왕단원들은 고개를 숙였다.
하은교의 말이 맞다. 당형도 중요하고 자존심도 중요하지만, 진짜 중요한 것은 전쟁에서 이기는 것이었다.
순간의 화를 이기지 못하고 연호정에게 배신자의 굴레를 뒤집어씌운다면 그 자체가 적에게 이로운 일이 될 것이다. 나아가 진짜 연호정이 배신하지 않았다면, 지금껏 모욕과 오해 속에서도 묵묵히 싸워 온 그를 어찌 다시 볼 수 있겠는가.
“선배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다른 건 몰라도 그놈, 배신 따위를 할 놈이 아니지요.”
그때였다.
저 멀리서 두 명의 남자가 뛰어왔다. 하은교와 지소현보다 앞서 나갔던 강량과 진양이었다.
두 사제보다 훨씬 더 빨리 사천에 도착했던 둘이었다. 무언가를 알아보고 오는 길인지, 꽤 험한 몰골이었다.
“오셨습니까, 선배님.”
서둘러 하은교에게 인사를 한 강량이 당관을 바라보았다.
“알아봤습니다.”
“어디라고 하던가.”
“호북입니다. 방향만 보자면 무당산을 통과할 것 같습니다.”
사천에도 흑도는 있다. 기를 펴지 못할 뿐, 정보망은 충분하게 가동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사천과 인접한 지역에선 흑도의 정보력이 유독 강하게 발휘되었다. 흑도가 기를 펴기 힘든 지역이기에, 오히려 그 주변에 막강한 정보망을 구축한 것이다.
사천 안에서는 당가가 최고지만, 그 밖의 지역에서는 흑제성의 정보력을 따라오지 못한다.
두 사람은 당관과 만나자마자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파악했고, 곧장 사천에서 가장 가까운 흑도 정보망을 통해 연호정과 천위룡이 향한 위치를 알아낸 것이다.
“그리고 특기할 만한 정보도 하나 있습니다. 이 정보는 확실하지 않고 오히려 사실일 가능성이 희박합니다만, 만약 성주님과 광혈교주가 무당산으로 향했다면 이 정보 역시 사실일 확률이 높아집니다.”
“말씀하시게.”
“산서 쪽에서부터 호북까지, 정체를 알 수 없는 고수 집단이 움직였다는 보고입니다. 언제 산서로 들어왔는지는 포착하지 못했는데 호북까지 움직인 것이 어떻게든 파악되었다는 것은 그들이 중간에 다급하게 움직였다는 뜻이겠지요.”
“고수 집단이라…….”
“중원 무림인 같지는 않다는 보고인데, 그조차 느낌일 뿐이라고 합니다. 실제로는 확실하진 않은 것이지요.”
“그러나 만약 그들이 삼교에서 파견한 고수라면…….”
당관의 눈이 번뜩였다.
“싸가지 그놈이 천위룡과 함께 무당산으로 향했던 것에 분명한 목적이 있다는 것이로군.”
“그렇습니다.”
“일단은 추이를 지켜보도록 하지. 감숙 무림의 움직임도 심상치 않다는 보고가 들어왔어. 괜스레 밖으로 뛰어나갔다가는 전력이 분산될 소지가 있으니, 자네들도 우리와 함께 이곳에서 체력을 끌어올리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그때, 하은교가 다급하게 끼어들었다.
“이보게, 가주.”
“말씀하십시오, 선배님.”
“정체불명의 고수 집단이 호북으로 향했고 호정과 광혈교주도 그곳으로 갔다면, 이건 호정이 위험하다는 뜻이 아닌가?”
“그럴 수도 있겠군요.”
“이럴 게 아니라 소수 정예라도 파견하지 않겠는가? 물론 나 역시 갈 생각이라네.”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뭐라?”
당관이 무덤덤하게, 그러나 확실한 믿음을 갖고 말했다.
“그놈은 다른 누구도 아닌 광혈교주를 풀어 주었습니다. 광혈교주의 무공이 천외천이라는 걸 알고도 그랬지요. 하물며 그를 잡기 위해 누가 희생되었는지도 알면서.”
그가 동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오명을 뒤집어쓰더라도 이 일을 해결할 자신이 있는 겁니다. 더 확실하게 말하자면, 광혈교주를 죽일 자신이 있는 겁니다.”
“……!”
“그게 아니고서야 그 여우 같은 놈이 이런 말도 안 되는 짓거리를 자행했을 리가 없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