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222)
흑백무제 1227화(1222/1255)
1227화. 탕마멸사(蕩魔滅邪) (2)
“…….”
막원의 얼굴이 굳어졌다.
“왜 그러십니까, 선배님?”
천효락의 질문에 막원이 표정을 풀었다.
“아닐세. 잠깐 기분이 이상해서.”
“어떤 기운이라도 읽으신 겁니까?”
“아니야. 워낙 상황이 어지러워 그런지 나도 모르게 예민해져 있었던 모양이네. 별거 아닐 거야.”
말은 그렇게 하지만 막원은 알 수 없는 긴장감을 느끼고 있었다.
‘분명 뭔가가 있어.’
본디 섬서에서 전열을 정비하고 무림맹으로 돌아가려 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섬서 무림은 막연히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극심한 타격을 입은 상황이었으며, 떨치지 못한 불길함으로 공기마저 우중충해져 있었다.
무림맹에는 많은 병력이 상주해 있었고 섬서는 그렇지 않았다. 이번 섬서 전쟁으로 수천 병력이 죽어 버렸으니, 적을 물리쳤다 하더라도 남아서 그들을 수습할 사람이 필요했다.
결국 막원과 천효락, 화향은 섬서에 남았다.
백병신군의 이름값은 실로 대단했다. 그가 섬서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많은 무림인이 안도했다.
아는 것이다. 무극수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
비록 고전을 면치 못했지만, 검제 남궁승과 느닷없이 참전한 창왕 소현립의 무공은 실로 압도적인 것이었다. 단숨에 전황을 뒤바꿀 수 있을 정도의 무력, 가히 신인(神人)이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다.
나아지고는 있다지만 상단전 치료를 제대로 받기 위해 무림맹으로 복귀한 남궁승을 생각하면, 막원이라도 남는 것이 옳은 판단이었다.
막원이 남으니 천효락도 남았고, 천효락이 남으니 시녀인 화향도 남았다.
그렇게 벌써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르겠다.
“그나저나, 자네는 괜찮겠나?”
“예?”
“이런 시국에 할 말은 아니지만…… 자네는 광혈교 본단으로 가야 할 이유가 있지 않은가.”
천효락의 눈이 깊어졌다.
“그렇지요.”
신마림이 박살 나면서 그의 여동생이 광혈교로 납치되었다.
마(魔)의 길을 걸었기에 마도(魔道)의 극치라는 광혈교가 얼마나 사이한지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런 곳에 여동생이 납치되었으니, 얼마나 걱정스럽겠는가.
그런데도 천효락은 지금껏 한 번도 그런 내색을 보이지 않았다.
“어차피 지금 가 봤자 제힘으로는 여동생을 구할 수 없습니다.”
“물론 그렇긴 하네만, 나와 몇몇 사람들이 도와준다면 어떻게든…….”
“저도 동생이 걱정스럽습니다. 그런 생각을 안 해 본 것도 아니지요. 그러나 삼교와의 싸움이 절정에 달한 지금, 천씨 가문의 일 때문에 병력의 공백을 만들 수는 없습니다.”
“…….”
“오히려 이번 싸움에서 광혈교가 치명적인 타격을 받았을 때, 그때가 바로 여동생을 구출할 기회입니다.”
“……틀린 말은 아니네만.”
다 옳은 말이다. 하지만 사람 마음이 어디 그런가. 되든 안 되든, 내 혈육이 잡혀갔다면 앞뒤 안 가리고 찾으러 가는 게 보통이었다.
그런데도 천효락은 냉정했다. 정확히는, 최대한 냉정하게 사태를 지켜보려 하고 있었다.
단순히 똑똑하다고 해서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천효락은 초월적인 정신력으로 자신의 마음을 수습하고 있을 것이다.
“결정적으로, 어느 정도의 믿음이 있습니다.”
“믿음?”
“예. 제 여동생이 안전할 거라는 믿음이요.”
천효락이 저 멀리 서북쪽을 바라보았다.
실상 광혈교의 본단이 어딘지도 알 수 없는 판국이었다. 다만, 그들이 중원에서 서북 방향에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신마림의 경전을 읽으며, 차후 대륙 땅에 혈교 본단이 세워질 때 광혈의 마가(魔家)를 유천(幽天)이라 칭하리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유천이란 곧 서북쪽 하늘을 뜻하는바. 그들의 광기 어린 마도를 상상해 보면 실로 어울리는 표현이기도 했다.
“본래 제 동생은 한 번 죽은 몸입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한 번 죽은 몸을 되살리기 위해 많은 대법과 상상키 어려운 희생이 필요했지요.”
“……?”
“안전할 겁니다. 당분간은.”
아득한 목소리였다. 확신을 갖고 있지만, 그만큼의 불안감도 깃들어 있었다.
가만히 천효락을 주시하던 막원이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은 알겠네. 당분간 여동생 얘기는 안 하도록 하지. 괜스레 신경만 쓰일 테니.”
“그건 그렇고.”
분위기를 환기하고 싶은 듯, 천효락이 애써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시간이 나면 비무를 부탁드립니다. 점점 기량이 상승하고 있는데, 성장이 빠를수록 기둥이 허술해진다는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자네의 발전 속도는 옆에서 지켜보는 내가 다 놀랄 정도라네. 이만한 천재가 위대한 경지에 이르는 데에 한몫할 수 있다면, 비무 정도야 언제든 해 줄 수 있지.”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웃으며 대화하는 두 사람.
그러나.
“……!!”
막원의 얼굴에서 단숨에 미소가 사라졌다.
사락.
빠르게 일어나 저 멀리 서쪽을 보는 막원의 얼굴은 그야말로 심각하기 그지없었다.
“선배님?”
“…….”
“……선배님?”
“군기(軍氣)다.”
“예?!”
“군기이며…… 동시에 마기(魔氣)로군.”
희미하게 떨리는 막원의 목소리.
그 순간, 천효락과 화향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수년 동안 함께한 건 아니더라도 막원의 목소리가 이토록 깊은 감정적 울림을 발하는 것은 처음 들었기 때문이다.
“마군(魔軍)이야. 마인들의 부대인 것 같다. 한데…… 그 숫자가 상상을 초월해.”
사아아악.
뜨겁게 깔리는 바람.
막원의 의복이 소리 없이 펄럭였다.
천무신병기(天武神兵氣)가 불타오르며 그의 온몸에 금속성 기운을 퍼트렸다. 차갑고도 서늘한 신병이기의 기운은 곧장 천무병장공(天武兵將功)을 극한까지 구사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마쳤다.
“여기서 기다리게.”
파아아아아!
한옆에 놔둔 백뢰창까지 집어 들고 저 먼 언덕을 향해 날아간다.
긴장 때문일까? 평소보다 몸놀림이 거칠었다. 그래도 백강비(白鋼飛)는 언제나처럼 그의 몸을 쏘아 낸 화살처럼 날아가게 만들어 주었다.
‘강하다.’
빠르게 언덕을 넘고, 또 하나의 언덕을 넘어가며 막원은 생각했다.
‘엄청난 숫자야. 무시무시한 광기가 느껴져.’
천재는 천효락만이 아니다.
막원 역시 희대의 천재 소리를 들으며 성장해 온 강자였다. 무종문의 역사를 바꿀 인재라는 평가까지 받은 그 또한 무수한 실전 덕에 그 경지가 조금씩 상승해 가고 있었다.
연호정을 제외, 성천 중 가장 젊지만 그 무력은 왕(王)이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다. 상대에 따라 삼제(三帝)와의 싸움에서도 상당한 승률을 보일 수 있을 만큼, 그의 기량은 절정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막원은 더더욱 긴장했다.
이 정도 경지에 오르기 전이라면 저 군기에 불쾌함만을 느꼈을 것이다. 한데 지금은 등줄기를 훑는 섬뜩함 또한 느껴진다.
‘수천 병력 정도가 아니야. 끝이 없다. 수만 단위의 병력이 움직이고 있어. 그것도…… 전원이 무공을 익힌 마인들이다!’
무지막지한 병력이었다.
보급 부대를 두었는지, 첨병을 두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설령 저 마군 중 칠 할이 보급 부대라도 어지간한 대문파를 삽시간에 쓸어 버릴 만한 전력이었다.
적어도 막원이 느끼기에는 그러했다.
콰앙!
몇 개의 언덕을 넘고, 몇 개의 개울을 넘었다.
그리고 비로소 눈에 보이는 광경.
“……이런 미친!”
저 멀리 까마득한 곳에서부터.
먼지구름을 일으키며 남하하는 거대한 뱀이 있었다.
꿈틀거리며 움직이는 마인들 하나하나가 마치 용이 되다 만 이무기의 비늘처럼 보였다. 그 행렬의 끝이 보이지 않았다.
‘이럴 수가 있나!’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저들이 누구인지.
‘광혈교에서?!’
저 정도면 가히 전 병력을 보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막원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왜지? 느닷없이 전면전이라고? 이런 상황에서?’
그는 무공에 심취한 구도자에 가까웠기에 실제 전쟁이나 군략에 관해서는 남들보다 아는 게 적은 편이었다.
그래도 연호정과 다니며 여러 경험을 했고, 최소한의 지식을 쌓을 수 있었다.
‘전면전은 절대 함부로 벌어지지 않는다고 했다. 그것은 당연한 거야. 최소 피해로 승리를 거머쥐는 것이 정석이다. 전면전은 압도적인 병력으로 몰아붙여 이길 자신이 있을 때, 혹은 큰 피해를 감수하더라도 끝끝내 이겨야 할 때나 벌어지는 것이라 했다.’
설마하니 저보다 더 많은 전력을 본단에 갖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저것이 광혈교의 모든 전력이 아니라면, 그건 더더욱 말이 안 된다. 그렇다면 진즉에 전력을 쏟아부어 중원 땅의 삼 할은 정복했을 테니까.
‘뭔가가 일어났다. 그게 아니고서는 설명할 수 없어. 광혈교가 전 병력에 가까운 수를 파견하지 않을 수 없는 일대 사건이 터진 것이다.’
대체 그 사건이 무엇일까?
파사삭.
멍하니 광혈교의 병력을 내려다보던 막원은 순간 저 멀리 고즈넉한 산등성이를 타고 내려오는 일단의 무리를 발견할 수 있었다.
‘종남!!’
종남산 아래로 마인 병력이 남하하고 있는 상황이다.
아무리 피폐해졌다고는 하지만, 저만한 병력이 앞마당을 지나고 있는 걸 모를 리가 없다. 종남파에서 검사들을 파견하는 것은 당연했다.
‘제길! 저들과 붙으면 안 돼!’
기존 전력의 절반 이상을 잃은 종남파는 저들을 절대 감당할 수 없다. 아니, 단일 문파로는 누구도 감당할 수 없는 병력이다.
문제는 종남도 깊은 패배감과 분노를 안고 있다는 것이었다.
장문인의 역량이 워낙 좋아서 섣부른 명령을 내리진 않겠지만, 현장에서 마인들을 보면 눈이 뒤집힐지도 모른다.
파아아아앙!
재빨리 백강비를 펼치며 쏘아져 나간 막원.
순식간에 허공을 질러 날아가던 와중이었다.
‘……!!’
우우우우우웅!!
공기가 요동을 쳤다.
자신의 질주 때문이 아니었다. 저 멀리, 북쪽인지 동쪽인지 모를 어디에선가부터 무시무시한 뭔가가 달려들고 있었다.
막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번쩍!
산등성이를 넘어 날아오는 한 줄기 광채가 보였다.
‘도끼!’
거대한 도끼 위에 올라타 질풍처럼 날아드는 누군가가 있었다.
어검술을 이용한 비행이다. 믿을 수 없는 신기(神技), 마르지 않는 공력이라도 있는 듯 속도와 기세가 실로 무지막지했다.
그리고 이내 막원의 눈에, 도끼와 그 위에 탄 사람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
보이는 건 환상처럼 꿈틀대는 용이다. 상단전을 자극하는 황룡의 잔상, 우뚝 솟은 두 개의 뿔 사이로 천둥 벼락이 치고 있었다.
“호정?!”
파아아아앙!!
안 그래도 빨라진 속도가 더 빨라지고 있었다.
대화를 나눌 거리가 아니지만, 막원은 느낄 수 있었다.
연호정이 자신을 한 번 보았다는 것을.
반가움을 느끼기에는 너무나 먼 거리였지만, 미세하게 출렁거리는 기파만으로도 연호정이 반가움을 표현했음을 알 수 있었다.
막원의 얼굴에도 기쁨이 어렸다. 이 얼마 만에 보는 인연인가.
하지만 그도 잠시.
“호정! 안 돼!”
허공을 돌파하며 날아가는 곳에는 저 미친 마인들의 행렬이 있었다. 제아무리 대단한 무인이라도 절대 막을 수 없는 병력이었다.
하지만 연호정이라면, 삼교 출신이라면 눈이 뒤집히는 그 광기 어린 분노의 소유자라면 수적 우위에 상관없이 일단은 부딪치고 볼 가능성이 있다. 연호정은 그런 사람이었다.
“제기랄!”
파아아아아앙!
어떻게든 말리기 위해 백강비를 펼쳤지만, 이미 연호정은 종남 검사들 위를 지나 광혈교 병력 후방에 도달해 있었다.
그리고, 막원은 볼 수 있었다.
가볍게 뛰어오른 연호정의 손에 광룡부가 잡히는 것을.
그 높은 하늘에서, 양손으로 쥔 도끼를 한껏 젖힌 채 무시무시한 속도로 하강한다.
“호정!!”
콰아아앙!!
광룡부가 폭음을 일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