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223)
흑백무제 1228화(1223/1255)
1228화. 탕마멸사(蕩魔滅邪) (3)
‘무지막지하군.’
한 개인이 천하를 상대로 싸울 수는 없다.
그 말은 진리임과 동시에 상징적인 비유이기도 했다. 개인의 기량이 아무리 뛰어나도 다수를 상대하는 건 그만큼 어렵다는 뜻이다.
그나마 개인 기량의 정점을 맞이한 것이 바로 무극에 오른 고수들이다. 상중하, 정기신을 극에 이르도록 연마하여 인간의 탈을 벗고 반선(半仙)의 영역에 올랐으니, 인간사의 상식에서 벗어난 무력을 뽐낸다.
홀로 대문파와 맞설 수 있다는 무력은 곧 개인이 집단의 힘을 대신할 수 있다는 뜻이니, 어쩌면 그들은 존재만으로 역천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거대한 이무기처럼 남하하는 광혈교의 마군을 보며.
연호정은 생각했다. 충분히 높게 올라온 지금의 자신도 수만 대군을 홀로 격파하는 것은 절대 불가능한 일이라고.
차라리 천위룡이라면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있었을 것이다. 이룬 경지 이전에 그가 익히고 있는 마공의 특성 때문이었다.
폭우가 몰아치는 와중이거나 도강을 하는 등, 특정한 조건이 갖춰졌을 때 그 무지막지한 전격을 이용한다면 대군을 물리치는 것도 아주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이다.
같은 의미로, 저 모용군 역시 무극을 뚫고 날아오른다면 몰살은 불가능해도 대군의 전진 자체를 막아 낼 만한 무용을 뽐낼 수 있었을 터.
하지만 연호정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불과 번개를 다루는 것 역시 기(氣)의 조화라지만, 그것을 전설 속의 화신(火神)이나 뇌공(雷公)처럼 무한정 구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애초에 인간에게 허락된 힘이 아니었다.
그래서 연호정의 무공은 순수했다.
주작의 화기를 불사를 때도 있었고 현무의 수기로 화기를 제압할 때도 있었지만, 종래에 그가 승부를 보던 것은 언제나 인간의 역사가 쌓아 올린 무(武)의 형식 그 자체였다.
동시에, 그렇기 때문에 연호정은 인간의 영역을 벗어났다.
황룡신왕공에 입문하며 하루가 다르게 쌓아 올린 무(武)가, 하나의 속성을 고집하지 않고 대자연의 힘을 받아들여 결국 신(神)의 영역에 도달했기 때문에.
인간으로 태어나 비인의 수법을 배운 것이 아닌, 인간이 쌓아 올린 기술의 결정을 받아들여 궁극에 영역에 도달했기 때문에.
그 순수함으로 이룩한 절정의 무력으로 이 경지에 올랐기에 연호정은 누구보다도 강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으로서 발휘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초능(超能), 정신의 힘이 그의 도끼에 만근의 힘을 실어 내고 있었다.
광룡부가 붕산(崩山)의 힘을 담아 이무기의 허리, 마군의 중단에 내리꽂혔다.
콰아아앙!!
일찍이 보여 준 적 없던 파괴력이었다.
그 높은 곳에서 천근추까지 발휘해 내리찍은 일격, 산천초목이 떨고 천지가 신음하며 사신무장의 출현을 세상에 알렸다.
“크아아악!”
비명이 아니었다.
붕산세의 경력에 휘말린 마인 이십여 명이 그 자리에서 피떡이 되었다. 그 광경을 보며, 후미에서 달려오던 마인들이 짐승 같은 괴성을 질렀다.
짐승 같은 것이 아니라 그냥 짐승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중군을 이루는 자들의 외형은 실로 범상치가 않았다. 하나같이 목과 손목에 쇠사슬을 둘렀으며, 큼직한 양손엔 호랑이 같은 손톱이 달려 있었고 쩍 벌어진 입속에는 살벌하게 날이 선 송곳니가 도드라져 보였다.
피부는 시커멓고 걸친 옷은 하나같이 넝마가 되었다. 남녀를 가리지 않고 그런 차림이다. 심지어 맨발, 발톱도 짐승의 그것처럼 날카로웠다.
인간과 짐승 사이 어딘가에 걸쳐 있다. 뭐가 되었든 사람의 형상이 아니었다.
연호정의 기감에도 그들의 존재는 특별하게 느껴졌다.
‘위험한 놈들이다.’
이십 명, 혹은 마리를 쳐 죽였지만, 아직 오천에 가까운 짐승들이 존재한다.
중군에만 오천이며, 전군과 후군에도 대략 이천이 넘는 짐승들이 있다. 즉, 이 비인의 존재들만 일만에 가깝다는 것이다.
‘생기와 마기가 기괴하게 뒤틀려 있어. 섞이지 않은 채로 혼재된 기운이다. 절정고수라도 가까이 다가가면 마기에 오염될 수준……!’
기가 막혔다.
혈교의 정통성을 가장 많이 이은 집단이 광혈교라고 했다. 도대체 혈교는 어떤 단체이기에 이런 말도 안 되는 마물들을 생산해 내고 있었던 것인가.
“진군하라!”
저 멀리서 울려 퍼지는 누군가의 외침.
강력한 위엄을 지닌 동시에 어딘지 멍한 느낌이었다. 광기에 가깝다고 할까? 무조건적인 전진만을 종용하고 있었다.
‘뭐가 되었든.’
콰아아앙!
중군 한가운데서 후군 쪽으로 전진하며 광룡부를 휘둘렀다.
무참, 붕산세, 승공세의 삼연타가 작렬했다. 그 폭풍 같은 발경에 오십여 마리의 짐승이 사지가 박살 난 채로 날아갔다.
‘막을 수 있을 때까지 막는다.’
이놈들의 눈을 보고 알았다.
놈들은 미쳤다.
광혈교주 천위룡의 죽음이 이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어느 하나 예외 없이 눈이 멍했다.
‘영력(靈力)도 이상해.’
신왕공의 힘으로 보니, 짐승들 사이사이 멀쩡한 마인들의 백회(百會)에 희미한 실 같은 무언가가 보였다.
문제는 그 실이 끊어진 것처럼 나풀대고 있다는 것이다. 아무리 봐도 정상적으로 보이질 않았다.
‘저것이 술가에서 말하는 영사(靈絲)라는 것인가.’
궁금했지만, 이내 연호정은 그에 관심을 끊었다.
지금 중요한 것은 이놈들의 진군 속도를 늦추는 것이었다. 완전히 증발시킨다면 최상이겠지만, 그건 제아무리 그라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차라리 잘됐어.’
그사이 몇십 명을 더 죽였을까.
아니, 백 단위는 되었을 것이다. 무한의 힘을 담고 휘둘러진 광룡부는 상대가 누구라도 용서가 없었다.
‘진을 짜서 공격하는 게 아니라 무작정 이동만 한다. 이놈들의 목적은 진군이지 싸움이 아니야. 본인들이 죽어 나가는 것도 개의치 않는다.’
마치 사천 악산으로 몰려왔던 천위룡의 호위 부대 혈황단처럼.
이놈들도 그와 같다. 두 눈에 어린 광기가 가히 판박이였다.
‘그렇다면 역시나.’
콰르르릉!!
황룡보법을 이용, 지극히 절제된 움직임만으로 사방에서 휘둘러지는 손톱과 쇠사슬을 피해 낸다.
‘내 힘이 닿는 데까지!’
콰아앙!
연호정의 무공은 놀라웠다.
경지가 상승해서, 혹은 무공의 파괴력이 대단해서가 아니었다.
우르르 몰려드는 마귀들의 공격을 최소화된 움직임으로 피하는데, 광룡부를 휘두르는 동작 역시 간결하고 깔끔했다.
나아가, 그 간결한 동작 속에 상상 초월의 위력이 깃들어 있었다. 바람의 신(神)이 강림하기라도 한 듯, 반투명한 황금빛 경풍(勁風)이 사위를 할퀴고 지나가면 여지없이 십 단위의 마귀들이 찢겨 날아갔다.
위력은 강하지만 온 힘을 다한다는 기색은 없다. 최소의 힘으로 최대의 효과를 내는 것에 가까운데, 발산하는 경풍의 밀도를 보면 최소 힘이라고 하기도 어려웠다.
쾅! 콰르릉!
놀라운 신위였다.
천위룡과 싸우며, 나아가 야율대극을 추적하며 지속적으로 성장한 무(武)다.
이제는 진정 무적(無敵)을 논하기 시작하는 무공이었다. 불과 벼락을 다루는 자처럼 마군을 몰살할 힘은 없어도, 그 불과 벼락을 다루는 자가 연호정을 이기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완성을 향해 다가가는 무공, 개화(開化)한 황룡신왕공이 인간사 무도의 정점이라 불리는 이유를 만천하에 증명하고 있었다.
치리리링!
감당키 어려움을 아는 건지, 돌진하는 와중에도 마귀들이 쇠사슬을 휘둘렀다.
연호정의 눈이 착 가라앉았다.
길쭉한 쇠사슬을 도끼처럼 휘두르는 놈, 쏘아 내는 놈, 마구 돌리는 놈 등등 다양하기도 하다.
그에 대한 연호정의 대응은 단순하면서도 효과적이었다.
콰지지지직! 퍼어어엉!
길고 무거운 광룡부가 종횡으로 움직이며 쏟아지는 쇠사슬들을 몽땅 박살 냈다.
압도적인 힘의 차이, 거기에 세상 모든 투로(套路)를 꿰뚫어 보는 무신의 능력이 더해진다. 광룡공까지 꺼낼 필요도 없이, 단순하게 휘둘러진 광룡부로 인해 마귀들의 쇠사슬이 수수깡처럼 부서졌다.
퍼억! 퍼억! 퍼억!
광룡부 다음은 백룡부다.
언제 꺼내 들었는지, 왼손에 들린 새하얀 송곳니가 마귀들의 정수리를 하나하나 찍어 냈다.
끔찍하기 그지없는 광경이지만, 이상하게 혐오감은 들지 않는다.
역동적이지만 부드럽다. 사납지만 자연스럽다.
장병(長兵)이자 중병(重兵)인 광룡부와 단병(丹兵)이자 경병(輕兵)인 백룡부가 무당파 태극의 무공처럼 조화롭게도 얽힌다. 두 도끼 모두 적들에게 위험한 건 매한가지였지만, 한 자루가 하지 못하는 일을 다른 한 자루가 손쉽게 해내며 적들을 더욱 압박하고 있었다.
승현진인이 건네준 깨달음과 실전 투로의 완성형이라는 사신무(四神武)의 깨달음이 함께한다. 언제나 격정적이었던 연호정의 몸짓은 지금에 이르러 천하 무공의 진리를 담기 시작했다.
콰르릉! 쾅! 콰아앙!
폭음이 난무했다.
단순하고도 자연스럽던 연호정의 몸짓이 시간이 지날수록 신명 나게 바뀌었다.
길고 짧은 두 자루 도끼를 쥐고 칼춤이라도 추는 듯한 모양새다. 회전하는 몸에 따라 두 자루 도끼가 날개처럼 돋아나고, 한 발이 회전을 시작하면 다른 한 발은 중심을 잡으며 올라온다. 한 마리 고고한 학을 연상케 하는 모습이었다.
혹은 용의 춤사위 같기도 하다. 적을 상대한다는 느낌조차 없었다. 마군이 무조건적인 돌격을 원한다면, 그 안에서 춤을 추는 연호정은 스스로 불러온 깨달음에 취해 무무(武舞)를 발산했다.
‘이럴 수가.’
멀리서 다급하게 다가온 막원.
당장이라도 전권에 난입하려던 순간, 그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목격하고야 말았다.
‘지금 내가 뭘 보고 있는 거지?!’
연호정의 춤사위는 곧 인간이 쌓아 올린 무도(武道) 그 자체였다.
깨달음의 결정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멀찍이 떨어진 막원조차도 신비로움과 황홀함에 젖어 멍하니 연호정을 주시할 뿐이었다.
‘저기서…… 저렇게?’
동작 하나하나에 신묘한 이치가 가득하다. 단순한 동작이라고 하여 따라 해 봤자 저 힘의 흐름까지 불러올 수는 없다.
흐름에 몸을 맡긴 채, 수직으로 상승하기 시작하는 황룡신왕공의 경지를 시시각각 보여 준다.
퍼어어어엉!!
폭발하듯 터지는 마귀들의 몸뚱이도 연호정의 모습을 가리지 못했다. 오히려 연호정이 일으킨 황금빛 바람에 휩쓸려 사방으로 흩어지고 있었다.
붉게 흩날리는 피와 살점, 죽음을 다스리는 용무(龍舞) 속에서.
비로소 마군 측에서도 광기에 물들지 않은 초고수가 등장했다.
“전군 정지! 더는 놈에게 다가가지 마라!”
뚝 떨어진 전군과 중군 일부는 지금도 전진하고 있었다.
하지만 연호정이 선 곳, 그 일대에서 뚝 끊긴 중군과 후군은 진격을 봉쇄당했다.
그야말로 믿을 수 없는 일이다. 수만 군세 중 삼분지 일이 넘는 병력이 단 한 명의 고수로 인해 진격을 저지당한 것이다.
그 신화(神話)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는 새하얀 명화 속으로, 진한 먹물을 머금은 붓이 날아왔다.
파바바바박!
단숨에 마귀들의 어깨를 밟으며 날아오는 한 명의 마인.
광혈교 전 병력이 출동했음을 방증하는 듯, 돌진하는 고수의 기파는 과거 지마후(地魔后)의 그것을 상회하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는 지마후를 직접 가르친 스승이자 광혈교 서열 사 위인 천화제(天禍帝)였다.
“어떤 놈이 감히!”
그때, 막원이 천화제를 향해 백뢰창을 쏘아 냈다.
중원의 운명을 뒤바꾸는 싸움에 백병신군까지 휘말려 버린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