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226)
흑백무제 1231화(1226/1255)
1231화. 탕마멸사(蕩魔滅邪) (6)
연호정은 확실하게 결정을 내렸다.
‘다 막을 수는 없어.’
막는 것은 고사하고 싸움을 지속하기도 어렵다.
신(神)의 경지에 이른 무공으로도 혼자서는 대군과 싸울 수 없다. 적군 한복판에서 날뛰고 있지만, 거기에도 한계가 있는 법이었다.
‘절반이라도 막고 싶었지만, 절반은커녕 삼 할도 버겁다.’
수만 군세의 삼 할이 넘는 전력이다. 그가 막고 있는 병력 수만 일만이 훌쩍 넘었다.
한 개인이 막기에는 지나치게 많은 병력이었다. 절대고수의 존재란 하나의 거대한 부대와도 같다지만, 몸이 하나뿐인 사람으로서 진정 순수 무력만으로 군대를 막을 수는 없었다.
다만, 진군을 훼방 놓는 것 정도라면 충분히 가능하다. 더하여 적의 수장, 장군급 인사를 제거하는 것만으로도 전력을 십분지 일로 줄일 수 있다. 그게 군대고 싸움이었다.
‘벌써 멀어졌다.’
중군에서도 후미에 가까운 쪽을 습격하여 발을 묶어 두었다. 즉, 허리가 절단이 난 것이다.
한데도 저들은 당황하지 않았다. 전군과 중군 대부분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무서운 속도로 남하하고 있었다.
아쉽지만, 이 정도로 만족해야 했다. 떠나 버린 전군과 중군 대다수는 소림과 무림맹에게 맡긴다.
‘전군 쪽에 무극수에 비견될 만한 놈이 둘 이상 있었다. 어쩌면 혈황단처럼 죽어 버린 전대 고수의 영을 불러올 놈들이 있을지도 모르지.’
그들을 막으려면 피해가 만만치 않을 것이다.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다.
콰아아앙!
와중에도 광룡부의 위력은 조금도 떨어지지 않았다.
더 강해지지도 않았지만, 속도부터 파괴력까지 처음 이곳에 나타났을 때와 여일(如一)했다.
적의 섬멸을 위한다면야 좌충우돌, 더 강한 무공을 구사할 수 있지만 지금 그에게 중요한 것은 남은 전력을 막는 것이었다.
체력, 내공, 호흡 모든 것을 최소화한다. 일순간 얻은 깨달음에, 춤사위에 가까운 무공으로 적의 발을 묶었지만 적은 여전히 많았다.
퍼어억! 퍼어어어억!
얼마나 많은 마귀들을 때려잡았을까.
연호정은 일순 저 멀리서 솟구치는 무지막지한 백광(白光)을 볼 수 있었다.
하늘을 찌를 듯한 기세다. 금속의 차가운 기운이 전신을 두들기고 있었다.
이전보다 한결 더 대담해지고 파격적으로 변한 무공이었다. 완전한 몸 상태로 구사하는 천무의 신공이 적들을 박살 내고 있었다.
‘형님!’
백병신군 막원이다.
반가웠지만 인사도 제대로 못 했다. 한데 자신이 뛰어드는 것을 보고, 곧장 따라붙어 대군의 행렬을 어지럽혔다.
섣불리 뛰어들지 않기를 바랐지만, 동시에 막원 정도의 고수가 참전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마음이 든든해졌다. 이 많은 병력을 몰살시킬 순 없어도 오랫동안 붙잡아 둘 순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러나.
콰콰쾅!!
전군에 길을 잡는 초고수들이 있던 것처럼, 후군에도 마귀들을 독려하는 초고수가 있었다.
‘사제장?!’
화아아악!
이 질릴 것 같은 마기의 행렬 속에서도 유독 부각되는 기운이었다. 뿜어져 나오는 기파가 무지막지했다. 마공과 상극인 황룡신왕공을 익히지 않았다면 가까이 다가가기도 싫었을 만큼 지독한 마기였다.
‘엄청난 고수다. 야율대극, 그 머저리 같은 놈보다 한 수 위야.’
야율대극은 술법도 제대로 익혔다. 무공만으로는 확실히 밀리겠지만, 술법까지 쏟아부으면 이 마기의 주인과 박빙의 승부를 이루리라.
즉, 막원은 전력을 다하는 야율대극과 싸우고 있는 셈이었다.
‘제길!’
퍼퍼퍼펑!!
금룡번천장을 연달아 쳐 내니, 괴성을 지르는 마귀들이 시커먼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쓰러진 동료들을 짓밟으면서도, 마귀들은 섣불리 달려들지 못했다.
주춤하는 기색, 광기로 번들거리던 두 눈에 공포심이 깃들고 있었다. 무조건적인 전진만을 명령받던 그들의 마음속에서 짐승의 본능이 고개를 쳐들기 시작한 것이다.
이길 수 없다.
눈앞에 있는 것은 천적이었다. 작정하고 사냥하지는 않았다지만, 수백에 이르는 동료들을 죽이고도 긁힌 상처 하나 나지 않은 무신(武神)이었다.
이성을 상실했다고는 하나, 아니,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전진할 수 없었다. 하필이면 길목도 점점 좁아졌고, 좌우는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기에 타고 오르기도 난해했다.
결정적으로 그들은 ‘전진’만을 명령받았을 뿐, ‘산개’의 명령은 받지 못했다.
산개를 하지 못하니 뒤에서 따라오는 마인들도 좌우로 길을 열 생각을 하지 못한다. 군대란 그런 것이다. 똑똑한 사람을 다 모아 놓아도 이런 갑작스러운 상황에서 대처하는 것을 어려워한다.
하물며 초조함과 생존 욕구로 다른 생각이 불가능한 그들로선 더더욱 연호정의 존재에 두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콰앙!
초조한 것은 연호정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곳 전투는 잠시 소강상태로 접어들었지만, 저 먼 곳에서 벌어지는 전투는 점입가경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형님!”
저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외침이었다.
무극수라도 이렇게 시끄러운 전장에서 특정 소리를 듣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물며 목숨을 건 싸움을 벌이고 있는 와중이니 말할 것도 없다.
퍼어엉!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피와 살점이 난무했다.
‘어렵구나.’
대단한 무용이었다. 그 마기의 폭풍 속에서도 연호정은 막원의 기파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막원은 어떤 용장(勇將) 못지않게 날뛰고 있었다. 어떤 의미로는 본신의 실력을 한참이나 초월한 상태로 싸우고 있다고 봐야 했다.
하지만 그런 힘을 언제까지고 유지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연호정은 물론 천하 누구라도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다면.
‘판단을 내려야 한다.’
전방에서 계속 이 대군을 막을지, 아니면 막원을 도우러 갈지.
연호정의 두 눈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형님은 나를 도와 이 대군의 진군을 막으러 왔다. 지혜로운 분이야. 내 행동만으로 이 군대가 어떤 목적을 지녔는지까지 알아보는 혜안을 지녔다. 그렇다면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은 채 홀로 치고 빠질 것까지도 염두에 두셨을 것이다.’
관심이 있는 분야에는 정통하지만, 그 외의 것엔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막원은 그런 사람이었다. 그래서 무(武)의 구도자 소리를 들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막원이 멍청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오랜 시간 쌓아 올린 무공과 창조 능력은 그의 두뇌가 누구 못지않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즉, 막원은 이 싸움이 위험하다는 것도 알고 자칫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워질 수 있다는 것도 알았다.
그런데도 참전한 것이다.
연호정, 강호에서 유일하게 사귄 의형제와 함께하기 위하여.
“……빌어먹을!”
광룡부를 짧게 쥐고, 온몸에 황룡신왕기를 둘러쳤다.
우우우우웅!!
요동치는 기운, 연호정의 전신이 휘황찬란한 황금빛 광채로 가득해졌다.
그의 입에서 무시무시한 일갈이 터져 나왔다.
“비켜!!”
콰아앙!
황룡보법을 공격용으로 전환해 그대로 들이받았다. 마기에 상극이니, 황룡신왕기를 두른 채 들이받는 것만으로도 무지막지한 흉기가 된다.
콰직! 퍼퍼펑!
연호정의 무차별 몸통 박치기에 마귀들이 피를 토하며 날아갔다.
진기를 있는 대로 끌어올렸다. 광룡부를 휘둘렀을 때보다 훨씬 더 밀도 있고 막강한 충격파가 터져 나왔다.
길이 열리는 것은 순간이었다.
마귀들은 두려움에 휩싸여 어떻게든 좌우로 찢어지려 했다. ‘산개’ 명령을 받지 않았는데도 맨손으로 절벽을 긁으며 허우적댔다. 명령보다 천적이 주는 공포가 우선시된 것이다.
덕분에 연호정은 일만이 훌쩍 넘는 대군을 수직으로 돌파할 수 있었다.
콰콰콰쾅!! 찌이익!
연호정의 얼굴과 어깨, 팔뚝에 자잘한 상처들이 생겼다.
완전에 가까운 무무(武舞)로 적의 공격을 모조리 피해 냈던 그다.
그러나 지금은 그게 불가능했다. 막강한 황룡신왕기 덕분에 마귀들을 무차별적으로 날려 보낼 수 있었지만, 아무렇게나 휘두른 손톱과 주먹질에 상처를 입고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괜찮다.
한번 판단을 내렸으면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일단은 막원부터 살려 놓고 다시 쫓아가면 된다. 오히려 막원이 죽으면, 둘이서 더 효율적으로 막을 수 있는 군대를 혼자 막아야 한다.
정(情) 때문에라도, 전략적으로도 막원을 살리는 게 나았다.
쾅! 퍼어엉!
막원의 격전지와 무섭게 가까워지는 연호정.
하지만 더 이상은 한계였다. 내공은 여전히 넘치도록 충분했지만, 이런 식으로 전진하면 상처를 너무 많이 입는다.
마기의 상극이라도 침투하는 마기를 다 증발시키며 싸우려면 그도 힘들어지는 것이다.
퍼어어어억!
양손으로 쥔 광룡부로 마인 삼십여 명을 피떡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 순간, 연호정의 눈이 번뜩였다.
‘형님!’
인해(人海)와 인해 사이.
비로소 막원의 뒷모습이 보인다.
위험천만한 순간이었다. 난생처음 보는 마인이 엄청난 기세로 주먹을 휘두르는데, 주변 공기가 온통 그 주먹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다.
연호정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어딜 감히!”
차앙!
집어넣었던 백룡부를 다시 끄집어내 벼락처럼 던져 냈다.
퍼버버버버버벅!!
마인들의 머리통을 박살 내며 직선으로 쏘아진 백룡부가 막원의 어깨를 스치고 나아가 천화제에게 날아갔다.
천화제의 눈이 부릅떠졌다.
콰아앙!
“크윽!”
담겨 있는 힘도 놀라웠지만, 그 안에 실린 마기 분해 능력이 더 엄청났다.
주먹으로 도끼 측면을 쳐서 날려 보냈는데도 주먹에 강한 통증이 일었다. 권법을 완성한 이후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는 고통이었다.
“이것들이 감히!!”
포효하는 천화제.
상극의 진기가 담겼다는 것도 무시한다. 지금은 교도들을 영사가 끊어진 곳으로 보내는 것이 우선이었다.
그곳에 가야, 마신(魔神)이 흩뿌린 마기와 영성을 접해야 끊어진 교도들의 목숨줄이 다시 붙는다. 그게 아니면 진짜로 전멸하는 것이다.
“여기는 내가 맡는다! 어서 전진해라!!”
우렁차다는 표현으로도 설명하기 어렵다. 코앞에서 천둥이 치는 것 같다. 천화제의 엄청난 목소리는 일만 대군을 뒤흔들었다.
“크아아아!”
마귀들이 괴성을 지르고, 마인들이 함성을 지르며 마구 전진했다.
그 사이를 뚫고 들어온 연호정이 막원을 불렀다.
“형님!”
“이 녀석아! 뭐 하러 여기까지 와?!”
“빌어먹을, 한 다리 낄 생각이면 위태롭지나 말아야지요!”
걱정이 가득 묻어 나오는 어조다. 막원이 껄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내가 위태로운 게 아니라 네 정 많은 마음이 더 위태롭다! 걱정하지 말고 다시 가서 놈들을 막아라!”
“저 개새끼부터 쳐 죽이고 난 뒤에요!”
호쾌함을 넘어 광포하기까지 한 외침이었다.
‘어쩔 수 없다.’
파아악!
쏘아 낸 백룡부를 어검으로 불러들인 그가 두 자루 도끼를 치켜들었다.
‘여기부터 박살 내고 돌아간다!’
그때였다.
두두두!
연호정은 순간 환청과도 같은 소리를 들었다.
어디서부터인가 달려오는 말발굽 소리.
그 수가 많지만, 또 결코 많다고 볼 수 없었다. 적어도 일만을 훌쩍 넘는 대군을 막기에는 지나치다 할 정도로 적었다.
한데 어찌 이리 마음이 든든해지는가.
이것은 정말 환청인가? 아니면 단순한 바람일까?
연호정의 소리 없는 독백 아래, 대지를 뒤흔드는 말발굽 소리 위로 펄럭이는 깃발이 우렁찬 굉음을 터트렸다.
다시금 전진하는 마귀들의 전방으로.
탕마와 멸사의 기치로 연마된 유군(遊軍) 하나가 질주해 왔다.
중원 천하를 제 집 삼아 악당들을 격파하던 무림맹 최강의 유군 부대.
바로 그들이, 마음 깊숙이 수장이자 스승으로 모셨던 한 남자를 만나기 위해 폭풍처럼 달려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