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230)
흑백무제 1235화(1230/1255)
1235화. 탕마멸사(蕩魔滅邪) (10)
“우웨에엑!!”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려 피를 토해 내는 연호정의 얼굴은 지독하게 창백했다.
“형님! 괜찮으십니까?”
연지평의 목소리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연호정이 힘없이 말했다.
“이놈아, 괜찮겠냐? 저 개새끼들, 얼마나 많은지 죽여도 죽여도 끝이 없다.”
묵룡부의 소부주가 되고 흑제성을 건립해 그 스스로 흑도 무림의 수장이 되었다.
말투부터 태도까지 수장으로서 부족함이 없었건만, 오랜만에 만난 혈육 앞에 열여덟 혈기 넘칠 때의 말투가 절로 튀어나왔다.
“너무 무모하셨습니다! 진짜 죽을 뻔하셨어요!”
“너희가 왔잖아.”
절대적인 신뢰가 느껴지는 한마디였다.
난마처럼 얽히는 살기와 비명 속에서도 연지평은 웃음이 나오는 것을 느꼈다.
“예. 저희가 왔지요. 정말 다행입니다.”
그때였다.
퍼어엉!
폭발하는 경력이 무지막지한 양의 핏물을 흩뿌렸다.
하늘 높이 날아오른 핏덩이가 연지평과 연호정에게로 떨어졌다.
번쩍!
좌수검 철검대연이 군자팔검세(君子八劍勢)를 구현해 냈다.
반듯한 원 안에 몇 가닥 직선이 있다. 올올이 풀려 나온 검기가 넓게 퍼져 완벽한 방어막을 만들어 냈다.
검막(劍幕)이었다. 검도의 초고수만이 구현할 수 있다는 검막을 숨 쉬듯 자연스레 구사하고 있었다.
치이이익!
쏟아지는 핏물이 검막에 부딪혀 하얗게 증발했다.
연호정이 웃으며 말했다.
“뭐야, 미친 고수가 다 됐네. 앞으로 내가 할 일 좀 맡아서 해라.”
“마음 같아선 형님을 평생 쉬게 하고 싶습니다.”
진심을 장난으로 숨기는 연호정과 달리, 연지평의 목소리에는 꾸밈없는 진심만이 가득했다.
지난 세월, 삼교를 막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형님이다.
도움이 되어 주지는 못할망정 각종 수련에 고뇌까지 떨치지 못하여 허송세월한 것이 몇 년인가. 무인이라면 당연히 겪어야 할 세월이었지만, 그동안 홀로 고생한 형제를 생각하면 피눈물이 나올 것 같은 심정이었다.
연지평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고, 앞으로도 쉬지 않을 형님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칠 결심을 했다.
쩌어어엉! 쩌저저저저정!!
창칼이 얽히며 복잡한 소리를 냈다.
마귀들을 뒤로 물린 채, 거대한 중병을 들고 있던 마인들이 전진하며 의정군과 맞서고 있었다.
마군 측에서도 드디어 다른 대응책을 꺼내기 시작했다. 아무리 맹목적으로 전진하더라도 이런 식으로 가다가는 끝이 없음을 아는 것이다.
‘이 또한 영사(靈絲)인가.’
연호정의 두 눈이 번뜩이는 빛을 발했다.
내공 소모가 엄청난 와중에 내상까지 입었지만, 상단전의 신왕기는 그리 줄지 않았다.
‘아까 그놈이군. 이놈들 대다수가 그 고수의 명령을 받고 있었어. 말하자면 언령(言令)이라 할 수 있다.’
천화제.
상극의 무공을 지니지 않았다면 정말 반나절은 족히 싸웠을 만한 난적이었다. 이미 그의 무공은 검제 남궁승과 도제 종리백을 넘어서고 있었다.
그만한 마인이라면 대군 전체의 신기(神氣)를 감당할 만한 상단전을 지녔다 해도 이상하지 않다.
즉, 천화제가 죽었기에 이들도 다른 대처를 시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무작정 전진만을 고집했던 천화제와 달리, 이들은 이래 죽나 저래 죽나 똑같다면 일단 의정군부터 물리치자고 결단을 내린 것 같았다.
“이런!”
그나마 대처하기 쉬웠던 것은 적의 행동이 일관적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까지와 달리 일단 싸우고 보잔 식으로 나온다면, 의정군의 대응 역시 달라져야만 할 것이다.
팽만호가 외쳤다.
“빠진다! 적과의 교전은 최대한 피해라!”
파르르르륵!!
기수의 깃발이 미친 듯이 펄럭였다.
의정군의 당초 목적은 적의 섬멸이 아닌 최대한 적의 전진을 막는 것과 연호정의 구출이었다.
일차적으로 연호정을 구출했으니, 이제는 저들의 전진을 최대한 막는 임무가 남았다.
쓸데없이 피를 흘릴 이유는 없되, 적의 전진을 막기 위해서는 거침없이 싸워도 된다. 그러나 작정하고 전면전으로 돌입하는 것은 피해야만 했다. 기병이라고는 해도 숫자에서 지나치게 밀리기 때문이었다.
두두두두두!!
하나같이 뛰어난 명마였다.
더불어 군병 하나하나가 군마에 공력을 전달하는 기묘한 능력까지 지녔다. 속도를 두 배, 세 배로 증폭시키지는 못해도 엄청난 지구력과 체력을 선사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내공술은 어디서 배운 거냐? 당장 나만 해도 이런 식으로 기마에 공력을 전달하는 건 생각하지 못했다.”
평생을 전장에서 구른 그였다. 기마술 역시 중원 제일을 논할 만했다.
하지만 이렇듯, 자신의 내공을 기마에 전달해서 관절이 받는 부하를 줄이고 심폐 능력을 향상시키는 방법을 떠올리진 못했다.
당연히 떠올린다고 다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무당 장문인과 도제 어르신께서 함께 창안하신 기마전공(騎馬傳功)입니다.”
“승현진인과 도제 선배가?”
“예. 도제 어르신께서 예전부터 그런 쪽으로 관심이 많으셨다고 합니다. 거기에 자연 기공으로는 최고라는 무당파 비전의 심법 조각들을 이어 붙이니, 순식간에 이런 무공이 만들어졌습니다.”
“신기하군.”
“창안한 게 대단하지, 막상 배우면 운용 자체는 어렵지 않습니다. 무당파의 비전이 섞인 무공이라 군병들 개개인의 내공심법과도 지극히 조화롭게 움직여서, 숙달만 되면 의식하지 않아도 기마에 공력을 전달하는 게 가능합니다.”
훈련과 경험, 전우애 등 의정군을 강하게 만들어 준 요소는 많을 것이다.
하지만 이 기마전공이라는 기공(奇功)이 아니었다면 이토록 신들린 기마술을 펼치진 못했을 것이다. 의정군에게 있어서는 그야말로 한줄기 단비와 같은 무공이었다.
“그리고 맹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기마전공을 흑제성에도 전달하자고.”
연호정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흑제성에?”
“예. 흑제성에도 최강의 기병 군단이라는 용아철기단이 있지 않습니까.”
“물론 이 비전을 배운다면 더 강해지겠지만…… 어떻게 그런 결단을?”
연지평이 의아한 얼굴로 연호정을 돌아보았다.
“우리 모두 삼교를 상대로 싸우는 전우가 아닙니까? 비전이라고 숨겼다가 적에게 당한다면 그게 더 치명적인 일입니다.”
“허.”
“알게 모르게 불평을 쏟는 사람들이 있긴 했습니다. 저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을 따름입니다만, 당장 무당파와 도제 어르신께서도 그러자고 나서 주신 덕에 결국 그 안건이 통과되었지요.”
당연한 일이라고 말하는 듯한 연지평의 얼굴.
이제는 강호를 알지만, 그래도 무림 상식보다는 협과 대의가 먼저다. 그래서 저런 얼굴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많은 부담을 안으셨겠어.’
공공대사의 얼굴이 떠올랐다.
번뇌도 많고 걱정도 많다. 하지만 초대 맹주에, 아니 무림맹주에 누구보다도 잘 어울리는 신인(神人)이었다.
무당파의 심득과 도제 종리백의 심득을 섞어 만들었다지만, 그들이 무림맹 소속이니 기마전공도 무림맹의 것이어야만 한다. 그건 당연했다.
한데 그것을 흑제성에도 건네주겠다고 했단다. 무극에 이른 무공에 소림 방장이기까지도 한 그였지만, 알게 모르게 정치적인 부담을 많이 졌을 것이다.
그런데도 거침없이 밀어붙여 기어이 그 안건을 통과시켰다면 공공대사로서도 크게 무리를 한 셈이었다.
‘감사합니다.’
아마 연호정이 흑제성주가 아니었더라도 기마전공을 흑도 무림에 전해 주려 했을 것이다. 그것이 공공대사란 사람이었다.
먼 미래의 적이 될 수도 있는 족속들에게 좋은 일을 시켜 주는 게 아닌가, 하고 걱정하는 머저리들과는 차원이 다르다. 그들은 자신들이 멀리 본다고 착각하겠지만, 그건 멀리 보는 것이 아니라 지독한 탐심에서 비롯된 불평에 가깝다.
눈앞에 수천 줄기의 벼락불이 떨어지는 상황에선 공멸 아니면 공생이다. 한쪽만 죽고 한쪽만 살 수는 없는 법, 지금 강호의 상황이 그러했다.
공공대사에게는 대단한 지략도, 놀라운 전술안도 없지만 시대를 관통하는 혜안(慧眼)이 있었다.
‘이쪽도 이쪽이지만…… 그쪽은 잘되고 있으려나.’
엄청난 기마술로 적의 전진을 막고 있는 의정군을 뒤로한 채.
걱정 가득한 연호정의 시선이 저 멀리 남부를 향했다.
* * *
“사형.”
“그래.”
회색빛 승복에 가사를 두른 중년의 승려가 날카로운 눈으로 저 먼 곳을 바라보았다.
“느껴집니다. 엄청난 마기(魔氣)가.”
“나도 그렇구나.”
범오의 두 눈은 형형하되 차분했다.
깨달음으로 얻은 신공, 반야대능력(般若大能力)이 전신에 가득 찼다. 보이지 않는 것도 보이게 하고, 잘 보이던 것도 더더욱 명확히 보이게 하는 지혜의 신공이 범오의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혔다.
하지만 마음이 차분한 것과 별개로, 적의 기세에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실로 대단하구나.’
이토록 멀리 떨어졌는데도 적의 군기와 마기를 느낄 수 있는 것은 그들이 소림의 신공을 익혔기 때문이었다.
예로부터 항마(降魔)라 하여, 불심 깊은 깨달음은 마를 굴복시키고 보리수 밑의 깨달음을 불러온다고 하였다. 소림의 신공이 그와 같았다. 천하 어떤 마공도 소림의 무상한 신공 앞에선 힘을 쓰지 못했다.
그러나.
‘도고일척(道高一尺)이면 마고일장(魔高一丈)이라 하였다. 소림의 신공이 제아무리 위대하다 한들, 도리를 저버리고 익힌 마공이 부담스럽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도가신공과 불가의 항마신공은 마인의 천적이다.
그러나 압도적인 화력이 물을 증발시킬 수 있는 것처럼, 마공 성취가 지극히 뛰어난 이들에게는 도리어 도불(道佛)의 신공이 힘을 못 쓴다.
그들의 관계는 그처럼 단순하면서도 복잡했다. 대개 그들 앞에서 마(魔)는 힘을 쓰지 못했지만, 그 관계가 역전되는 경우도 없지는 않았다.
일나한(一羅漢) 범항이 한숨을 쉬었다.
“저와 같은 마구니들이 이처럼 세상을 좀 먹고 있었으니…… 극락정토의 길은 정말 멀고도 힘들군요.”
범오가 딱 잘라 말했다.
“저들의 존재는 극락과 아무런 연관이 없다.”
“예?”
“진짜 마구니는 수행자들의 번뇌 속에 있는 것이다. 저들은 마공이학을 익힌 사마외도의 무리일 뿐, 결국 다 같은 사람이야. 마귀라니, 당치도 않은 소리.”
범항은 당황했다. 범항뿐만이 아니라 열여덟 나한 모두가 당황했다.
범오는 그 누구보다도 단호하고 호승심 넘치던 사람이었다. 가끔은 그 호승심이 지나쳐 오만해 보이까지 했던, 그러나 사제들에게는 언제나 든든했던 사형이었다.
그러나 강호행을 하다가 무슨 깨달음을 얻었는지, 엄청난 무공 성장과 더불어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진 성품으로 사제들을 당황하게 했다.
지금만 봐도 그렇다. 저들이 마구니가 아니라니, 그럼 누가 마구니란 말인가?
“사람마다 처한 환경이 다르고 성장 배경이 다르다. 모두의 마음에는 부처가 있다고 했다. 그것은 곧 살인자의 마음에도 부처가 있다는 뜻이다.”
“…….”
“우리는 오늘 귀신과 야차를 때려잡고 중생을 구제하는 명왕(明王)이 되어 이 자리에 왔을 뿐, 저들 역시 사람임을 잊어서는 아니 된다.”
범오가 나한들을 돌아보았다.
“기억하거라. 우리는 삿된 공부를 익힌 사람들을 상대하러 가는 것이며, 시대의 강요로 불살계(不殺戒)를 어겨야 한다. 하나, 다른 순수한 이를 살인자로 만들 바에야 조금이라도 수행에 힘쓴 우리가 그 짐을 짊어지는 것이 옳다.”
“…….”
“오늘 우리는 명왕이다. 나한이라는 이름은 잠시 접어 두거라. 그리고 불쌍한 저이들을 상대하며, 너희 마음속에 깃든 마구니부터 불사르도록 하라.”
열여덟 나한이 고개를 숙였다.
“당주님의 말씀을 새겨듣겠습니다!”
“가자.”
한 자루 길쭉한 철곤을 든 채 걸어 나가는 범오.
그의 뒤로 열여덟 명의 초고수 나한이, 십팔나한(十八羅漢) 뒤로는 백여덟 명의 나한이.
그리고 백팔나한(百八羅漢) 뒤로는 소림 속가 문파 오천의 병력이 뒤따랐다.
소림 전설, 나한들의 출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