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231)
흑백무제 1236화(1231/1255)
1236화. 탕마멸사(蕩魔滅邪) (11)
“맹주님! 현재 오만에 달하는 마인들의 대병력이 섬서 남부를 가로질러 호북으로 향하는 중입니다! 섬서 남부에서 날아온 연락이니, 지금쯤 호북과 지척일 것입니다!”
공공대사는 당황하지 않았다.
놈들이 섬서로 진입했다는 보고를 불과 사흘 전에 받았다. 한데 지금은 호북과 지척이란다.
그야말로 엄청난 속도였다. 먹고 잘 시간까지 아껴 가면서 진군했다 해도 불가해한 일이었다.
소수의 고수라면 모른다. 하지만 저들은 거의 오만에 달하는 대군이었다. 그만한 집단이 휴식도 제대로 취하지 않고 사흘 만에 섬서 남부를 가로질렀다면, 이는 보통 일이 아니었다.
“당초 적들의 진군은 하남 무림맹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보았습니다만, 강을 뚫고 산을 넘어 직선으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무림맹지(武林盟地)를 돌아 호북으로 진격하려는 모양입니다.”
그간 무슨 일을 겪었는지, 제갈문호는 몹시 수척했다. 머리카락도 군데군데 하얗게 물들어서, 이제 완연한 오십 대로 보일 지경이었다.
하지만 깊게 가라앉은 두 눈에는 여전히 맑은 정광이 서려 있었다. 오히려 무림맹을 운용하며 어떠한 깨달음이라도 얻었는지, 쇠한 육신과 달리 깊고 부드러운 기도는 예전보다 훨씬 강건했다.
“그렇다면 역시…….”
“예. 일전에 말씀드렸던 그것 같습니다.”
공공대사의 눈이 반짝였다.
“자신들의 교주가 죽은 곳으로 가려는가.”
대다수가 모르는, 광혈교주 천위룡에 대한 극비 정보를 맹주인 그와 군사인 제갈문호는 알고 있었다.
정확히는 유추 정도에 불과했지만 이제는 기정사실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며, 그들이 그렇게 생각하게 된 배경에는 연호정의 서신이 있었다.
소림의 힘을 빌려 달라는 요청과 함께 광혈교주가 호북 무당산에서 패사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던 것이다.
와중에 연호정은 광혈교주가 누구에게 죽었는지 직접적으로 밝히지 않았다. 그랬기에 두 사람은 그를 죽인 자가 연호정이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다만 정보의 파급력으로 인해 지금까지 봉해 두고 있었을 뿐이었다. 실제로 확인해 본 바가 없기도 했으니, 휘하 봉공들에게도 알려 주지 않은 것은 당연했다.
“모산의 술사들에게 자문을 구한바, 좌도방문의 술법 중에서도 극치에 달한 술법은 백 단위를 넘어 천 단위의 섭혼(攝魂)도 불가능하진 않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정도 섭혼력을 감당할 만한 상단전을 지니려면 고금을 다투는 상단전 능력이 필요하며, 섭혼에 빠진 자들을 직접적으로 조종하지는 못하고 지극히 단순한 심령금제(心靈禁制) 정도만이 가능하다고 하였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일대 괴사라 할 만했다. 넘치는 영력으로 수만 명의 마음을 휘어잡는다? 시키는 대로 행동하지는 않는다지만, 수천 명의 꼭두각시를 부리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와중에 섭혼의 대상이 섭혼의 주인에게 마음으로 충성을 바치면, 그 섭혼력은 천 단위를 넘어 만 단위에도 이를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되면 섭혼의 대상들은 오롯이 주인의 권능 아래 묶이게 되며, 생과 사는 물론 영혼까지도 주인에게 바치는 진정한 괴뢰(傀儡)가 된다고 합니다.”
제갈문호의 눈이 번뜩였다.
“광혈교라면, 그중 정점인 광혈교주라면 휘화 교도들에게 그 정도 섭혼력을 발할 수도 있었을 겁니다.”
오랜 세월 축적된 정보와 상황들을 조합하여 기어이 술사들의 지식까지도 손에 넣은 그였다.
무공보다 더 대단하고 위대한 힘. 천하를 관조하는 지성(知性)이었다. 제갈문호의 기도는 이미 지니고 있던 지성을 키우며 더 발전된 것 같았다.
“부작용은 없소?”
“당연히 있습니다. 그와 같은 섭혼 관계가 오랜 세월 지속되면, 대상의 영력은 뿌리까지 주인에게 종속되어 종국에는 생명력까지 공유된다고 하였습니다.”
제갈문호가 문서 하나를 집어 들었다.
“바로 이것, 광혈교주의 호위 부대 일천이 무작정 사천 악산으로 돌진한 이유도 그와 비슷할 것입니다.”
“음.”
“나아가 현재 광혈교의 거의 모든 병력이 중원 한 복판으로 오고 있는 것 역시, 섭혼의 부작용으로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본래대로 되돌리기 위함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 누구도 알지 못한, 심지어 연호정조차도 막연하게만 유추해 낸 진실.
그 명확한 진실에 오직 제갈문호만이 닿았다. 접한 정보의 양이 달랐다고는 해도, 이와 같은 결론을 도출해 내기 위해서는 뛰어난 혜안이 필요한 법이었다.
“의아한 바가 많았습니다. 현재 시국을 보면, 이모저모를 다 따져 봐도 광혈교의 전 병력이 중원을 타격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상식은 물론 각종 전략 전술을 더듬어 봐도 지나치게 갑작스럽습니다. 게다가 공격이 아닌 오직 진군만을 목표로 하는 이 행태…… 분명 광혈교주가 패사한 지역으로 오고 있는 것이 맞을 겁니다.”
“그러나, 제아무리 교전을 배제한 진군이라도 길을 막는 상대를 철저히 무시하지는 않을 것이오.”
“그럴 겁니다. 만약 그들이 하남 남부와 호북 북부를 아우르는 천라지망을 강타하게 되면…….”
“허리가 끊어지겠군.”
“정확하게 보셨습니다.”
몇 겹의 횡으로 천라지망을 펼친 대군의 허리가 끊어진다는 것은, 단순히 하나의 군대가 두 개로 나뉘게 된다는 뜻이 아니다.
십(十)의 숫자가 오(五) 두 개가 아닌 삼(三), 혹은 이(二) 두 개로 나뉘는 격이다.
처음부터 군대를 나누려 했다면 모를까, 그게 아니라면 어떤 군대라도 기민하게 반응할 수 없다. 그 반응 속도의 저하는 곧 군대의 전력을 약화시키는 결정적인 요인이 될 것이다.
“현재 천라지망 병력은 무당산 인근까지 도달했습니다. 그중 일부가 극비인명(極祕人名) 혈존(血尊)을 쫓아 사천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정말로 허리가 끊어질 수도 있겠군.”
“연 성주가 여기까지 보고 소림의 힘을 빌려 달라 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결과적으로 하남 무림이 저들의 호북 진입을 막아 준다면 허리가 끊어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애초에 천라지망의 모든 병력을 사천으로 투입할 수는 없다. 혈존이라는 자를 반드시 확보해야만 하는 상황이라 하나, 그렇다고 무림맹을 빈집으로 만들어 버릴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공공대사는 담담한 얼굴로 무시무시한 말을 토해 냈다.
“이왕지사 허탕을 쳐 버린 천라지망, 아예 우리 쪽에서 먼저 쪼개 버립시다.”
파격을 즐기든 정석을 즐기든, 군사란 족속들은 기본적으로 전략 전술에 관해서 남들보다 훨씬 방대한 지식을 지녔다.
어설픈 군략가가 아닌 혜안을 갖춘 군략가는 언제나 타인의 말에 귀 기울일 줄 아는 법.
제갈문호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인데도, 공공대사의 발언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파격적이어서가 아니었다. 공공대사는 무공과 불법 이외에 다양한 지식을 지녔지만, 전략 전술에 관해서는 부족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다.
한데 지금 공공대사의 발언은 다수로 이뤄진 군대의 맹점을 정확하게 간파해야만 나올 수 있는 발언이었다. 그것이 제갈문호를 놀라게 했다.
제갈문호가 성장했듯, 공공대사 역시 성장했다. 그 연배, 그 위치에도 끊임없이 더 배우고자 하는 열정이 지금의 그들을 있게 한 것이다.
“반이나 보낼 수는 없습니다. 그럴 필요도 없지요. 아직 당가가 건재하니, 그쪽에도 따로 연락을 취하겠습니다.”
“좋소.”
“남은 천라지망 병력을 추려 소림과 함께하는 하남 무림의 뒤를 받치겠습니다. 진군하는 광혈교 병력의 측후방을 공격하면 놈들도 큰 피해를 입을 겁니다.”
“그렇게 합시다.”
맑게 반짝였던 공공대사의 눈이 냉정하게 물들었다.
“잘하면 삼교 중 하나를 완전히 멸망시킬 수도 있는 상황이니만큼, 이번 작전에 무림맹의 사활을 걸도록 하시오.”
* * *
“옵니다!”
범항의 외침에 범오가 철곤을 들었다.
“이 문주는 앞으로 나서게.”
“예!”
소림 최고의 속가 문파이자, 연호정과 모용우가 등장하기 전엔 천하 후기지수 중 손에 꼽히는 유명세를 지녔던 자가 바로 이철경이었다.
금강권문의 젊은 문주인 그는 이제 삼십 대 중반이 넘어 완숙한 경지를 드러내고 있었다. 속가 출신임에도 유례없이 소림 본산 절예를 전수한 그의 기도는 무종을 넘어 막강하기만 했다.
이철경이 외쳤다.
“전방에서 막지 아니하고 좌우 측방에서 짓눌러 머리를 떼어 낸다! 단두쌍진(斷頭雙陣)으로!”
우우우우우웅!!
엄청난 목소리가 사위를 휩쓸었다.
소림 비전 범천(梵天)의 신공이 한가득 실린 목소리엔 불문 최고의 음공이라는 사자후(獅子吼)의 힘이 담겨 있었다.
화아아악!
이백 장 밖에서 진군 중인 마군의 기세가 마구 헝클어졌다.
아군의 사기를 고취시키고 적의 기세를 꺾어 버리는 막강한 음파 공격이었다. 그처럼 놀라운 내공술을 발산하면서도 이철경의 얼굴에는 여유가 가득했다.
소림 속가 최고의 무재라는 평가가 무색할 지경이었다. 이십 년, 아니 천운이 닿는다면 십 년 내로 무극에 도달할 거라는 찬사를 받는 천재의 무공이었다.
쿠르르릉!!
하남에는 수많은 문파가 있지만, 이곳에 온 오천 병력은 거의 대다수가 소림과 연이 있다. 애초에 하남 무림 자체가 소림의 권역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이들이 한마음으로 진을 두 개로 나누자, 실로 무시무시한 기세가 피어올랐다.
감숙과 섬서에서 적을 맞아 싸웠던 문파들과는 격이 다르다. 천하공부출소림이라는 영광된 일곱 글자 아래, 전설의 일부를 물려받은 그들의 무공과 진법은 중원 전체에서도 일 순위를 다툰다.
이철경이 금강권문 백여덟 권사를 이끌고 앞에 섰다.
“온다! 준비하라!”
치리리리링!!
도검을 뽑는 무사들.
권문의 권사들은 맨손이지만, 그 밑에 문파들은 도검창극 등 다채로운 병기를 들었다. 그러고도 소림의 신공절학과 조화를 이뤘다.
그렇게 적들이 거리를 좁혀 왔다.
백오십 장, 백삼십 장, 백 장.
그리고 마침내, 적의 군세가 팔십 장 안쪽으로 들어왔을 무렵.
이철경이 또 한 번 사자후를 토해 냈다.
“개진(開陣)!”
콰콰쾅!!
좌군과 우군이 엄청난 속도로 마군의 측방을 향해 돌진했다.
날래기 그지없는 신법을 펼치는데도 천지가 진동하는 듯했다. 오만에 달하는 마군의 돌진 때문이 아닌, 오천 병력의 돌진 때문에 그러했다.
땅을 박차는 동작 하나하나에 강력한 발경을 실어 내는 구결이 녹아 있기 때문이었다. 그 유명한 소림진각(少林震脚)이 그들의 전투력을 배가했다.
“우아아아아!!”
“크아아아아!!”
명왕(明王)의 부하들과 마왕(魔王)의 수족들이 서로를 향해 엄청난 기세로 돌격했다.
바로 그때였다.
“십팔나한은 좌측, 백팔나한은 우측이다.”
차분하기 그지없는 범오의 외침은 이철경의 그것보다 훨씬 깊은 공력을 드러내고 있었다.
파바바바박!
범자 배의 천재 무승 하나가 백팔나한진을 이끌고 정면 우측으로 돌격했다. 범오는 십팔나한을 이끌고 좌측으로 돌격했다.
발경을 살리는 구결은 그들의 신법에도 고스란히 녹아 있었지만, 오천 병력과 달리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물극필반(物極必反), 경지가 극에 이르자 도리어 천하를 위진하는 진각 소리도 나지 않는 것이다.
“소림!!”
좌측, 일천 마인 뒤에서 이를 가는 마왕 하나가 있었다.
광혈교의 모든 병력이 다 왔다더니, 남은 무극수도 온 모양이었다. 무려 둘이나 됐다.
“우리를 막지 마라!!”
파아아아앙!
좌측에서 날듯이 달려온 한 명의 도객이 무시무시한 마기를 드리웠다.
범오가 외쳤다.
“십팔나한진으로!”
무림의 전설, 십팔나한진이 실로 오랜만에 고개를 쳐드는 순간.
나한들이 뿜어내는 항마법력(降魔法力)의 기세를 받은 범오의 철곤이 칼을 든 마왕을 향해 휘둘러졌다.
광마대혈전(狂魔大血戰)의 시작은 소림의 대표, 범오의 철곤이 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