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239)
흑백무제 1244화(1239/1255)
1244화. 광마대혈전(狂魔大血戰) (8)
“…….”
남자의 눈이 깊어졌다.
“교주님?”
사음교의 일사왕(一邪王) 단공(丹貢)의 물음에도 남자는 입을 열지 않았다.
그저 한없이 깊은 눈으로 저 머나먼 남쪽 어딘가를 바라보았다. 사이함이 극에 이르러 도리어 평범해 보이는 그의 눈동자는 묘한 섬뜩함으로 가득했다.
단공은 말없이 시립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대단하군.”
남자의 입에서 진심 어린 감탄성이 튀어나왔다.
“긴가민가했었지. 당장 수개월 전까지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어. 그래도 자꾸만 마음을 찝찝하게 하는지라, 꽤 과감하게 움직여도 될 만한 일에도 굳이 나서지 않았지.”
단공은 내심 무척 놀랐다.
그는 하늘 같은 교주님께서 하신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무언가’가 교주님의 행동을 막았다는 것이다.
“단공.”
“예, 교주님.”
“여기에 대해서 좀 아느냐?”
남자가 검지로 자신의 머리를 툭툭 건드렸다.
화려하기 그지없는 반지들이 부딪치며 기묘한 소리를 냈다.
단공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깨쳐 안다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모호함만 짙어집니다.”
“그렇겠지.”
남자가 미소를 지었다.
“상단전은 신(神)이 깃든 장소야. 신의 힘을 깨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 영역에 도달해야만 하지. 그래서 너희가 대단한 것이다. ‘일부’에 불과하지만 신의 힘, 그 편린이나마 손에 넣어 스스로의 완성을 향해 나아가고 있으니까.”
단공이 말없이 고개를 더욱 깊이 숙였다.
너희가 대단하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인간으로서 대단하다는 뜻일 것이다.
당장 눈앞의 교주께서는 인간의 영역을 벗어나 신의 영역에 도달하신 분이었다. 교의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렇게 생각한다.
단 한 사람, 사우를 제외하고는 교주님의 신성(神性)을 의심하는 자가 없을 것이다.
“우리 셋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불사에 이르려 하였다. 그중 신화교는 가장 천박한 방식을 이용했다. 놈들은 뛰어난 공부를 보유했지만, 상단전을 제대로 건드리지 못했어. 육신이란 결국 허물어지고야 마는 것일진대 육신의 재생을 통해 신의 영역인 불사에 이르려 하였지.”
“…….”
“화정(火精)은 그 밀도가 높아질수록 오히려 상단전을 피폐하게 만들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결과다. 불사와는 거리가 멀지만, 육신을 재생(再生)시킨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야. 그와 같은 재생술은 대자연의 법도에 반(反)하는 일이니, 이 또한 역천이라면 역천이다. 순천이든 역천이든 극에 이르려면 상단전의 힘은 필수이며, 그렇기에 완성되지 못한 상단전은 혹사되어 이내 망가지고야 만다. 신화교의 한계도 거기에 있다.”
남자가 흐릿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먹구름 가득한 하늘 아래로는 황량한 대지만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광혈은 대단했지. 놈들은 마가(魔家) 시절부터 영육(靈肉)의 분리에 관심이 많았어. 사람이 죽으면 혼과 백이 분리된다. 혼은 승천하고 백은 땅에서 흩어지는 것, 이 또한 대자연의 섭리다. 광혈은 영(靈)이 승천하지 못하게 막는 비술을 개발했고, 뒤이어 타인의 육신에 덮어씌우는 술법을 이용하여 영원불멸의 대계를 이루려 하였다.”
남자가 키득 웃었다.
신이라 불리는 사람치고는 너무나도 인간적인 목소리요, 웃음이었다.
“하지만 육을 떠난 영은 결코 안정적이지 못하다. 더하여, 사람마다 혈관을 돌아다니는 피가 다르고 오장육부의 생김새부터 크기는 물론 몸의 기억도 달라. 영육이 분리된다는 것은 본디 하나였다는 것, 광혈은 몸에도 의지가 있다는 사실을 간과한 것이다.”
단공은 당황했다.
하늘 같은 교주님께서 이토록 긴 얘기를, 그것도 삼교가 추구했던 불사에 관한 얘기를 해 주시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래서 놀랐고, 동시에 감동했다. 아마도 사왕, 아니 저 사음제라 해도 듣지 못했을 얘기를 자신이 듣고 있는 것이다.
“의지라 하심은……?”
“영(靈)은 의식이고 육(肉)은 무의식이다. 의식과 무의식의 완벽한 일체, 그것이 바로 사람이다. 무의식 없는 의식은 이 땅에 의지를 붙잡아 두지 못하고, 의식 없는 무의식은 이 땅에 존재해야 할 이유가 없어 스러지지.”
독특한 개념이었다. 적어도 단공은 단 한 번도 사람의 영육을 이런 식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귀가 절로 열렸다.
“진정한 불사란 영과 육이 어디로도 흘러가지 않은 채 한곳에 고정되어 있음을 뜻한다. 혼이 육신을 떠나지 않고, 육신도 스러지지 않는 것이야. 영과 육이 결코 변동치 아니하고 존재 스스로 억겁을 유지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불사가 아니고 무엇이겠느냐.”
어려운 말이다.
그런데도 단공은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교주님의 말씀이 무슨 의미인지 어느 정도 이해했기 때문이다.
세상은 변화한다.
사람도, 짐승도, 기술도, 화폐도, 조직도, 산과 바다는 물론 기온도 변한다.
유변(有變)의 극치에 이른 이 세상에서 홀로 변화하지 않고 영원불멸토록 존재한다는 것.
그것은 너무나도 짜릿한 일임과 동시에 두려운 일일 것이다. 천지에 오직 단 하나의 존재만이 무변(無變)하며 생을 지속한다는 게 얼마나 끔찍한 축복인가.
진정 그와 같은 존재가 있다면 신이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신은 영원불멸하는 존재이므로.
“하지만 이 세상은 무변의 존재를 용납하지 않지. 여러 신화를 보면 신의 모습은 하나로 고정되어 있지 않다. 수많은 지역에서 신의 모습은 비범하게 그려지나, 동시에 시대마다 다른 면모를 보여 준다.”
“…….”
“신도 결국 자연의 일부라면, 그와 같은 유동적인 변화는 어쩔 수 없는 것인지…….”
남자의 미소가 흐려졌다.
“광혈교주 천위룡은 죽을 뻔했다.”
“예?”
“어린 시절, 그 아비가 천위룡의 몸을 빼앗으려 하였다. 본인의 영을 아들의 몸에 덧씌우려 했던 것이지.”
“……!!”
“칭찬받아 마땅한 방법이다. 타인의 몸이라도 내 살과 피를 이어받았다면 혼의 정착이 훨씬 깊고 안정적일 수 있어. 같은 피를 공유하는 천륜의 집단…… 과거 혈교 시절부터 몇몇 교주들은 자식을 제물 삼아 혼을 이어 가려 하였다.”
단공은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짐승도 제 새끼 귀한 줄은 안다고 했다. 한데 사람이 제 자식을 이용해 영원불멸의 생을 이어 가려 하다니.
그것을 칭찬받아 마땅하다고 하는 이 남자는 대체 어떤 눈으로 세상을 보고 있는 것일까.
“누군가는 말했다. 불사가 역천의 극치라고는 하나, 진정한 역천은 천륜을 어기는 짓이라고. 하물며 자식의 몸을 빼앗아 불사를 이루려 했으니, 저 하늘이 천씨 일가의 핏줄을 나게 하지 않은 것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고 말했다.”
실로 그런 생각이 들 수밖에 없는 악행이었다. 단공은 진실로 그렇게 생각했다.
“웃기는 소리지. 저 하늘은 이 세상에 관심이 없어. 백 년 전에도, 이백 년 전에도 그리고…… 삼백 년 전에도 그러했지.”
‘삼백 년 전?’
왜인지는 모른다.
이토록 충격적인 언어들의 나열 속에서, 단공은 이상하게 ‘삼백 년 전’이라는 말에 위화감을 느꼈다.
교주님은 마치…… 누군가에게 그 시절의 얘기를 들은 것이 아니라, 직접 본 것처럼 말씀하고 계셨다.
“천위룡이 교도들의 영혼을 제 몸에 붙잡아 둔 것은 어린 시절, 본인이 죽었을 뻔한 경험에서 기인했다. 그러고도 제 애비를 존경한 것도 대단한 일이지. 하나, 애비와 같은 전철을 밟으려 하진 않았어.”
남자가 허공으로 손을 뻗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잡으려는 듯, 보석 박힌 반지로 가득한 손이 점점 오므려졌다.
“천씨 일가를 향한 광혈교도들의 신심(信心)은 무시무시하지. 내 몸이 죽어 혼이 방랑해도, 언제고 혈신(血神)께서 지상 낙원으로 이끌어 줄 거라는 확고부동한 믿음이 있다. 그래서 교도들 모두의 영력을 손에 거머쥐는 것이 가능한 게야.”
“영력을 거머쥔다는 것은…….”
단공의 얼굴이 신중해졌다.
“광혈교주 역시 그들을 이용해 불사에 이르려 했다는 것입니까?”
“불사에 이를 뻔했지. 거의.”
“예?!”
남자의 눈이 깊어졌다.
“수만 교도의 영사로 끊임없이 천기(天氣)를 무시하며 지옥공을 연마해 낸 놈이야. 만약 패사하지 않았다면, 언젠가 지옥공을 대성하고 교도들의 영력을 모두 녹여 버렸다면…… 어쩌면 가장 불사에 가까운 존재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
“지금 광혈교도들이 저리 날뛰는 것은 잃어버린 혼을 찾기 위한 무의식, 즉 육(肉)의 본능적인 행태라고 볼 수 있다. 누구라도 그러지 않겠는가.”
“죽음이 두려워서가 아닌, 몸이 원해서 그러는 거란 말씀이십니까?”
“이미 놈들은 목숨을 교주에게 주었다. 그때부터 놈들에게 죽음은 아무것도 아니야.”
“…….”
“하지만 정작 교주가 죽어 버렸지. 내세를 믿으니 죽어도 괜찮지만, 몸이 원하는 걸 통제하지 못하면 교단이 송두리째 박살 날 위기에 처할 것이다. 광혈의 수뇌들은 그것을 두고 볼 수가 없었던 게야.”
남자의 미소가 짙어졌다.
“그 덕분에 우리는, 또 한 번의 기회를 거머쥐게 된 셈이다.”
단공이 또 한 번 고개를 숙였다.
그는 교주님의 말씀을 전부 완벽히 이해하진 못했다. 그러나 이것 하나만큼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교주님께서는 다 볼 수 있다.
같은 삼교 사람들의 행동 양식에 정통했고, 나아가 중원 측에서 어떻게 나올지도 잘 알고 계신다.
“문제는.”
미소 가득하던 남자의 얼굴에 삼엄한 기색이 어렸다.
“저 멀리 대륙 동쪽에, 도무지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가 잡힌다.”
“……?!”
“이 정도로 상단전을 갈고 닦은 자는 흔치 않아. 아직 다소 미흡하기는 하나, 조금만 더 시간이 지나면 저 혈존대사보다도 왕성한 신기(神氣)를 보여 줄 것이다.”
“예?!”
“역시나…… 안 되겠어.”
화아아악!
남자의 몸에서 붉고 탁한, 뭐라 형용할 수 없는 빛깔의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광인의 배신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그때도 저곳에는 인재가 많았지. 마치 우리의 준동에 맞춰, 저 하늘이 대륙을 지키려는 것처럼 무서운 천재들을 세상에 내놓는단 말이야.”
“…….”
“더는 그 꼴을 두고 볼 수 없지 않겠느냐.”
남자가 단공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단공은 이미 자신이 오체투지의 자세로 엎드려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신의 눈빛, 신의 음성.
천하 모든 것을 눈 아래로 두는 유일무이한 절대자의 존재감은 일사왕의 힘으로도 거부할 수 없을 만큼 지고한 영역에 도달해 있었다.
“적흠을 부르도록 해라. 실로 오랜만에 나들이를 가야겠다.”
* * *
두두두두두!
의정군 기마의 말발굽 소리는 어느 때보다 급박했다.
“형님, 괜찮겠수?”
팽만호가 다소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암만 그래도 화산과 종남을 놓고 온 게 영 마음에 걸리오. 그 사람들, 어지간히 남하하고 싶었을 텐데.”
“안 돼.”
연호정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그자들은 살검에 취한 마음부터 다스려야 한다. 지금 당장 그들이 와도 전세를 바꾸지는 못해. 그렇다면 후일을 대비해서라도 스스로를 돌아보는 편이 나을 것이다.”
“그래도 형님, 한 사람이라도 아쉬운 때에…….”
“무림맹 병력만으로도 충분해. 거기에 무당산도 있다. 소림보다도 안온한 성격의 무당이지만, 오만에 달하는 마인 부대가 코앞까지 왔는데도 자리보전할 만큼 호락호락하진 않아.”
“음, 그렇긴 하겠지만.”
연호정이 저 멀리 남쪽을 바라보았다.
“광혈교는 어떻게든 처리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남은 두 교가 이 혼란스러운 상황을 그저 두고만 볼 리 없다. 그게 자꾸만 걸려.”